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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이야기 / 김정은


그대들의 이야기는 이제 먼 이야기

종이에 슬쩍 베인 손가락에
새 구두 맞지 않아 까진 발뒤꿈치에
다른 이의 상처는 얼른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교과서 어느 부분 몇 페이지로
학교시험 몇 문제 시험점수 얼마로
추모의 것이 아닌 그대들을 암기하는 우리에게

그대들의 이야기는 실은 가까운 이야기

광화문 광장 붉은 물결에 어우린 채
남녀 노소 노사 지역 뭐하나 재지 않은 채
그저 대한민국 한 목소리로 응원하는 우리에게

해외에 가면 “I’m from Korea.”라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라고
목소리 드높여 Korea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그대들이 없었다면 못 썼을 이 한마디,
우.리.나.라.
너무도 당연히 쓰고 말할 수 있는 우리에게

숭고한 피와 숨이 얽혀 죽지 않는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

그대들의 이야기

 

 

 

 

 

걷다. 그리고 걷겠다. / 이승리

 

그대들이 생(生)과 바꿔주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서권(書卷)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책장에 우리의 고개는 한없이 아래를 향합니다.
눈물로 적셔진 그 곡절을 알기에 쉬이 넘겨버리지 않겠습니다.
꾸깃꾸깃 접히고 접혀 희미해진 “조국”이라는 글자 행여 지워질세라
덧새기고 덧새겨서 지워지지 않는 활자로 남기셨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펄렁펄렁 날뛰는 날붙이 위에서 살이 쪼개지는 고통으로 지켜낸 백의 적삼은 한지가 되고,
타버리고 흩어져 재가 된 혼(魂)의 넋두리는 붓의 춤사위를 따랐습니다.
흘렸던 핏빛 노심(勞心)은 위편(韋編)되어 단단히 매어졌고,
그렇게 우리네의 손에서 역사의 초석으로 태어났습니다.
행하셨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갈피표가 되어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잊지 말라 허나 잊지 않는 것만 하지는 말라 하셨던 당부를
행여 거친 소소리 바람에 놓쳐버릴까
아린 가슴에 옭매어 두었습니다.
놓지 말라 하셨던,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 그 깨달음을 알기에 멈춰있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채울 그곳에는 더 이상 영루(零淚)를 채우지 않겠습니다.
광명(光明)이라는 새싹이 움틀 수 있음은
문드러져 사라지는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 거름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그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립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워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리움보다 더 큰 간절함으로 존경하겠습니다.
보듬어 주시는 바람결을 느낄 수 있기에
숨 쉬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겠습니다.
쌓이는 한 걸음 한 걸음 헛되지 않도록
귀한 족적(足跡)으로 함께하겠습니다.

 

 

 

 

 

뜨거운 어느 날에 / 이초롱

 

신림동 쪽방,
자그마한 창문 틈으로
넘치는 햇살이 나뒹구는 오후면

지릿한 오줌냄새를 덮을 듯
천정에 피어난 곰팡이꽃을 덮을 듯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평온한 시간인지라
김영복 할아버지는 눈물이 난다했다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덩어리처럼
벌어지는 마음의 상처를 다시금 깁는 시간,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는
포탄소리와 비명소리에
오줌지린 할아버지를 꼬옥 안아주지만

죄 없이 잘려나간 팔이 서러워
전우들의 식어가는 시체가 서러워
삭히고 삭혔던 고름같은 기억이
오늘같이 불쑥 찾아오는 날이면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죄스럽게 울먹이던 당신이었다

유월 이십오일,
보따리 이고 가는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뒤엉키는 포탄과 함께 시작된
피바다의 전쟁

서로를 밟아야하고
서로를 베어야하는 시간
달궈진 총뿌리에서 흩어지는
혈흔의 멍울은
내달리는 두려움마저도 잘라버리고

불은 콩 주워 먹으며
곯은 배를 다독여 봐도
헛헛한 마음속을 달랠 길 없어

서럽게
너무나도 서럽게 울던 기억들
죽어도 죽지 않는 지독한 기억들

울음에 지쳐 잠이 든
당신을 바라보다가
아물듯 아물지 않는 상처를 보듬어본다

괜찮다...
괜찮다...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뜨거운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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