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푸른 단비가 되어 / 곽민관
비가 내리는 유월이 오면
그대들의 신음이 들립니다
비좁은 어깨로 책임을 짊어지고
사그락대는 풀소리에도
잠 한번 들지 못했던 그대들의
비명이 들립니다
때로는 비관하고
때로는 저주했을 그 운명
민들레 씨앗처럼 사라지고
하루살이처럼 고통스러웠을 그 운명
비가 내리는 유월이 오면
그대들의 신음이 들립니다
사그락대는 바람소리에도
잠 한번 들지 못했던 그대들의
눈물이 보입니다
하루하루 전우의 얼굴이 뒤바뀌고
매시간 포탄구덩이를 메우는 주검과
눈 깜빡이면 날아드는 포화 속에
그대들은 천 갈래 만 갈래 찢ㄱ나가
유월의 비가 되었습니다
그대들을 보낸 어머니는
뒷마당에 또독이는 빗방울에
황급히 문을 열어보고
모진 주름만 늘어가셨습니다
밤이면 뒤척이다
허전한 옆자리에 눈을 뜬
그대의 아내는
모진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 미소만 지었지요
그대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직도 가파른 산등성이에 매달려
지천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이 들립니다
헐벗은 민둥산의 구덩이 속에서
그대들의 설움이 들립니다
울지 마소서 호국영웅들이여
빗방울이 된 그대들은
메마른 강토를 적시고
푸른 생명을 피워냈습니다
초근목피에 헐벗은 가족을 감싸안고
그들을 배불렸습니다
포탄에 벗겨진민둥산을
부드러이 꽃 피우고
수많은 아들, 딸에게
꿈의 그릇을 물려주었습니다
부디, 울지 마소서 호국영웅들이여
그대들이 잠든 대지에서
그대들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그대들에게 한없는 축복을 드리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토담에 기대어 / 김영신
봉인된 편지가 도착했다
나팔꽃 넝쿨이 서로 껴안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한다
문서 하나 열리고 하늘이 까맣게 무너진다
죽음도, 부상도 아닌 실종
유월의 전쟁에서 사라진 남편을 기달는 동안
여자는 담장에 기대어 나팔꽃이 되엇다
전선에서 돌아온 남자의 편지와
일기장이 꽃잎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여자는 아침마다
토담에 기어올라 태양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마법에 걸린 여자는
시대를 되돌리는 주문을 외우며
양은밥상의 다리 네 개를 폈다
접이식 다리에서 기울지 않는 평평함을
행복이라 생각했던 여자
평행을 벗어나 수직을 만나고 싶었다
여자는 나무보다 더 높이 귀를 열고
우체부의 자전거 굴리는 소리를 기다린다
양푼이 가득
풋나물과 밥이 서로 부대끼며
여자를 여자답게 살라 하지 않는다
그저 비빔밥처럼 섞여 감정도 열망도 없이
두리뭉실 청춘을 비비며 살라 한다
아리랑 고개에서 애간장 태우며
저고리 섶에 꼬깃고깃 시간을 숨겼다
하늘을 잃은 자와 하늘을 가진 자 틈새에서
설익은 밥알 씹듯 살아야 했던,
가난한 담장 아래 그해 여름의 비명
여름꽃이 되어 소복하게 피었다
전사자 명단에도 없는 안개 같은 실체를
기다리며 나팔꽃이 된 여자
몇 번의 공화국이 바뀌어도 깜깜한 무소식
세상 풍조에 눈 감은 여자
밤이면 남자의 편지를 외운다
비석 하나 세울 수 없는 답답한 육십여 년
행여 생명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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