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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잠녀 / 김희숙

 

 

[우수상] 피랑 / 송용탁

저마다의 바다

 

너무 많은 집들이 바다를 향해 걷고 있었다

 

툴툴 내리막을, 

 

굴러떨어지는 말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 크게 숨을 참고 한숨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살다보면 숨쉴 수 없는 곳에서도 숨쉴 수 있게 된 말들이 있다. 수몰된 자리에서 이토록 따듯한 지붕들을 이해하기 위해 쉬운 감탄사보다 욱신거리는 종아리가 좋았다.

 

타지인을 안내하는

저마다의 골목이 생기고,

 

얼룩진 물안경도 없이 그저 물길따라 걸으면 저 바다도 늦잠을 잔다. 아이들이 뛰는 소리가 벽에 부딪쳤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 모두들 벽 속에 숨는다. 푸드득, 

 

계절이 바뀌면 나무도 새도 꽃도 

홑겹의 붓질로 새로 피겠지

 

천사가 버리고 간 젖은 날개를 입기 위해 줄 선 사람들

 

벽에 갇힌 날개는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 걸까. 두 손 가득 시를 쥐고 웃어보면 날개가 자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헤엄을 쳤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태우고 물질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파된 사람들

 

달려오는 파도를 보면 

모래사장에 그립다라는 말을 써 볼 

조그만 담력도 사라지게 된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골목을 돌아 자꾸 벽에 부딪친다

 

수몰이 끝나면

수많은 골목도 유적이 될거야

그저 섬이 된 지붕뿐의 연속이었다고,

 

저마다의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다시 밀물이다. 하나의 표정만 허락된 석상처럼 우두커니,

 

골목의 연대를 선사했다

 

저 바다가 멈추지 않았다

저마다의 피랑을 안고 돌아가는 붉은 공중이 있었다

 

 

[우수상] 바다의 알고리즘 / 고훈실

바다가 생의 척추가 된 순간부터

저 둥근 해원을 빠져나갈 수 없다

아버지의 파도는 0과 1의 미로

이물에서 고물로 이어지는 포물선이

출항을 허하면 난바다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투망은 기호열이 복잡했다

물오른 바닷장어 뽈락 쏨펭

한 그물씩 올리면

어긋난 타이밍처럼 빈 햇살만 가득했다

바다는 갈수록 가난해져

열일곱 처음 배에 올랐던 기억과

수심을 읽은 아버지 등마저 홀쭉하다

촘촘한 그물로 아버지를 에워싼

생의 비린내가 무한 생성되고

못 박힌 손바닥에 성근 손금이 남은 건

짠내 나는 명령어가 한 생을 깎았다는 증거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천이고 만이라서

당신이 명명한 바다는 무한 복제된다

과부하로 충혈된 파도

컵라면 뚜껑에 노을이 미끄러지면

흰 포말의 데이터가 바다를 귀납하고

다시 출력하는 저녁이다

어창엔 펄떡이는 몇 마리의 기호들뿐

우주를 향해 팽창하다

섬의 뿌리로 되돌아간

오늘의 허선은 순서도로 풀 수 없다

흉어 메트릭스 몇 토막 잘라 내

알짜 프로그램으로 만선을 꿈꾸는

내일,

출항은 영원히 미지수다

아버지의 해문만이 닫힐 줄 모른다

[우수상] 등대 공작 시간 / 김맹선

제10회 등대문학상 시상식… 안경희 작가 대상

대상 1편·최우수상 3편·우수상 9편 등 총 13편 시상

 

해양수산부가 주최하고 울산지방해양수산청과 울산항만공사, 한국항로표지기술원이 공동주관한 ‘제10회 등대문학상 공모전’의 시상식이 8일 롯데호텔 울산에서 열렸다.

 

이날 시상식에는 수상자 및 가족, 울산해수청장, 울산항만공사 사장, 한국항로표지기술원장, 울산문인협회장 등 약 50명이 참석했다.

 

제10회 등대문학상 공모전에는 총 800편의 작품이 접수돼 대상과 함께 최우수상이 각 분야별(소설, 시/시조, 수필)로 1편씩 총 3편, 우수상은 3편씩 총 9편이 선정돼 상장과 함께 총 상금 2천750만원이 수여됐다.

 

‘고래의 노래’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안경희 작가는 시상식에서 “쉽고 다양한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책이 지닌 유용성과 이로움의 가치 추구를 통해 어려운 시대 많은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소설을 쓰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양진문 울산해수청장은 “등대문학상이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 내길 기대하며, 앞으로도 국내 최고의 해양문학상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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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순간 우린 둘 다 절망이었을 텐데

너는 그 많은 욕과 저주를 어떻게 견뎠을까

 

 

제22회 고산문학대상에 현대시 부문 김명기 시인, 시조 부문에서 선안영 시인이 각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품집은 각각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와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이며 상금은 각 2000만원.

 

고산문학대상 운영위는 지난 1년 간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현대시와 시조 부문에서 각 100여 명의 시인, 평론가들의 추천을 받아 심사에 들어갔다.

 

현대시 심사를 맡은 김명인·이문재 시인, 문혜원 평론가는 “거듭 읽어낼수록 삶의 파장들이 깊은 감동까지 거느리며 가슴속으로 번져나가 그 파문에 흠뻑 젖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으며 “삶의 우여곡절과 신산고초를 통과해온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진정성의 언어’로 절묘한 표현이나 세련된 구성이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김명기 시인은 경북 울진 출신으로 2005년 시 전문지 ‘시평’ 겨울호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을 펴냈으며 2017년 대구경북작가회의가 주관하는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조 심사는 박기섭·박현덕 시인·황치복 평론가가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현실언어를 끊임없이 초월언어로 바꾸어놓고, 적확한 표현으로 말미암은 수사의 적중률이 높은 데다, 그 형식의 운용은 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닿아 있다”고 평했다.

 

보성 출신의 선안영 시인은 조선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초록 몽유’, ‘목이 긴 꽃병’ 등이 있으며 중앙일보 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올해의 시조집상 등을 수상했다.

 

아울러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에는 현대시 부문 윤계순 시인의 ‘실비집’이, 시조 부문에는 강영임의 ‘벚꽃, 천라지망’이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상금 각 300만원.

 

올해 6회째를 맞은 고산신인문학상은 미등단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제다. 올해는 신인상 응모에 시부문 700여 편, 시조 부문 500여 편이 접수됐다.

 

한편 시상식은 제22회 고산문학축전과 함께 오는 10월 14일 고산의 고택이 있는 해남읍 연동리 고산유적지 땅끝순례문학관 문학의 집 ‘백련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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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를 잃어버린 아이 / 이설야 

 

아이야.

너에게서 새를 꺼내줄게

너의 입에 갇힌 새를 꺼내줄게

 

마카우 앵무새를 기르는 집이었지

조흐라 샤는 가사도우미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을 했지

 

새장 속 값 비싼 네 마리의 앵무새

그중에 한 마리가 날아간 건 실수였지

잠시 새장을 열고 먹이를 주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사라진 새

사라진 세계

 

파키스탄 소녀 조흐라 샤는 겨우 여덟 살

조그만 손으로 아기 기저귀를 갈고 마당을 빗질했지

몇 푼짜리 동전으로는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마카우 앵무새를 놓쳤다네

구름처럼 흩어진 새의 발자국

어디로 날아갔을까

 

주인에게 맞다가 뼈가 으깨어졌지

소녀는 새를 삼킨 하늘로 날아갔다네

날개를 펴서 구름다리 위로

커다란 새장 밖으로 날아갔다네

소녀가 살던 작은 마을에는

흰 깃털이 눈발처럼 흩날리고 있었지

 

새는 천사의 호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나

새를 찾아 천국으로 간 아이

 

하지만 천국엔 새가 없지

죽은 새만 있지

신을 찾다가 눈이 먼 죽은 새들

오직 죽어서 가는 새들만 있지

 

아이야.

새에게서 너를 꺼내줄게

새의 입에 갇힌 너를 꺼내줄게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회장 서홍관)가 제8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자로 이설야 시인을 선정했다. 시상식은 2022년 5월 14일 오후 4시 인천 신트리 공원 박영근시비 앞에서 열릴 예정이다.

 

박영근작품상은 박영근 시인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올곧은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정됐다. 박영근 시인의 시 정신을 잇는 작품에게 상을 수여하며,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만 원이 수여된다.

 

박영근 시인은 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81년 《반시 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노동자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가수 안치환 작곡의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제8회 박영근작품상 수상작으로는 이설야 시인의 <앵무새를 잃어버린 아이>가 선정되었다. 본심위원 박일환(시인), 박수연(문학평론가), 오창은(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수상작에 대해 “고통스러운 노동의 굴레가 성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는 지구촌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며, “최근의 젊은 시 문법과 현실의식을 고르게 펼쳐 보인 수작”이라며 선정 경위를 밝혔다.

 

이설야 시인은 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집을 준비하며 일제 식민시기 부평 조병창 등 국내의 노동 이슈에서 세계의 어린이 노동, 난민 문제로 시선이 확장되었다”며, “특히 파키스탄의 8살 소녀 가사도우미 조흐라 샤의 이야기를 접하고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창작 배경에 대해 밝혔다. 이어 “뜻밖에 상까지 받게 되어 영광이다”라며, “조흐라 샤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년, 소녀들에게 진 시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게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본심위원 오창은 문학평론가는 수상 작품에 대해 “사건의 묘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시적 표현에 있어 문학적 성취가 있었다”고 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번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한 이설야 시인은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데뷔했다.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을 썼으며,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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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뿔소똥구리 / 박봉철

- 예천곤충연구소에서 

온 천지가 뿔이었다가 똥입니다

앞발을 짚고 뒷발이 땀이 나도록 굴러야

빚어진 경단, 태양의 신 케프리의 화신인가

켜켜이 배설을 모아모아 치켜든 허공

덧대는 기울기마다

쇠뿔처럼 우직하게 밀어가는

경단 같은 멍울이 반질반질해집니다

벼랑을 기울이며 소 비린내를 당기자 낮은 것을 위해 지레 곤두세워 튼실해진 경단, 지레 공중을 흔들거리다 무너진다, 뿔소똥구리는 아무렴 괜찮다는 듯 연거푸 경단에 휘말려 들어가도 똥 한 움큼, 쟁여가듯 순한 출렁임으로 용케도 섞어 달구어지며 되새김질할 즈음

세 배나 되는 몸집

궤적을 내려놓은 자리에

삶이란 굴레처럼

굴리고 굴려야, 바닥을 추스르는 것

긴 장벽을 무너뜨리며

뿔을 내려놓고 그늘의 실타래를 감았을까

이리저리 출렁이는 삽날 사이

무작정 오체투지 하는 자가

사위를 들썩거립니다

태양과 달의 걸음걸이로

멱살의 향방을 가르고

어디쯤 궁굴려야 천 길을 낼 수 있을까,

둘레 두루두루 되감으며 키워가는, 부푸는 공감

지레 앞발을 견주는,

몇 바퀴의 뒷발

저기 먼 산을 굴려 한 클릭, 두 클릭

둘둘 말린 빛을 캐어갑니다

[최우수] 회룡포 명상 / 최동문

 

 

 

 

 

[우수상] 안녕, 러브레터 / 전정화 

 

 

[가작] 광음여전(光陰如箭) / 권수진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과녁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끝이 뾰족하였으므로

무엇이든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세상의 중심을 향해

표적을 겨냥한 화살촉

천천히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맴돌았다

우리네 인생은 화살 같아서

아무리 붙잡아도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다만 허공을 나는 화살이

과녁을 관통할 때마다

얼마만의 점수로 평가되고 있었다

때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비껴가는

빗나간 화살처럼 자연을 벗 삼아

세상을 등지고 살기도 했다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은 여긴데

정해진 방향은 운명처럼 

저 멀리 동심원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치닫는 세월 앞에서

내 인생은 과연 몇 점인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살아온 날들에 점수를 매기며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가작] 태평추를 먹다 / 허정진 

낯선 먼 길을 걷거나

거친 눈보라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날은

고향이나 집밥 같은 거, 문득 생각나기도 하지

무거운 짐 홀로 짊어진 생이 외롭고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루가 또 힘들기만 해도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고달픈 영혼을 위로받는 날도 있지

날창날창한 메밀묵 한 지름 

돼지고기 한 토막을 묵은지에 올려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뜨거운 국물

설움도 울컥, 성엣장처럼 둥둥 떠내려가고

곁에 내 편이 생긴 것처럼

마음 든든해지는 일이어서

태평하지 못한 시름도 잊어버리곤 했지

칼칼하고 개운한 그 맛이 그리운 날은

가난하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던 그 시절

어렴풋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누군가의 어깨가 된다는 것에 대해

또 한 번쯤 생각하게 되지.

[가작] 주모들의 시간, 삼강주막 / 김민지 

[가작] 예천유정 / 권오철

[가작] 둥근마을 / 조영진 

[가작] 삼강주막 / 권오용 

[가작] 눈 내리는 회룡포 / 이용호 

[가작] 금당실 마을을 읽다 / 황영애 

[가작] 내성천을 짚고 일어선 나무 / 오지은 

[가작] 봉덕산 주인 / 안해경 

[가작] 초간정의 다른 시간 / 김은정 

[가작] 내성천 물안개 / 김현 

[가작] 태극나방의 날개에는 윤장대가 있어 / 김영욱 

[가작] 용문사 큰 보살 / 이인숙 

[가작] 삼강주막 / 박진옥 

[가작] 삼강체로 쓴 외상장부 / 홍영수 

[가작] 감천에 미소 날리다 / 강차남 

[가작] 예천아리랑 / 김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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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외 4편 / 오정국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 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 

 

무한에서 무한으로 연결된 밤의 터널

무궁한 밤의 아이로 나는 태어났어요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모두 다섯 개

 

불타는 산막의 거적때기 너머에

백발의 무사가 앉아 있어요

칼날 스친 얼굴에 불빛 어룽지면

나도 모르게 광대뼈를 쓰다듬죠

 

내가 만진 죽음 헤아릴 수 없고

나는 전생과 후생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죽음의 불사신이

저의 괴로움을 나에게 덧씌워

기담과 괴담, 로맨스가 끝이 없네요

 

죽은 자의 말소리와 그림자에 둘러싸여

밤의 피륙을 얽어 짜는데

 

어떤 유령은

요양병원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는 소식

침상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그 숨을 받아먹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단팥죽 몇 숟가락 얻어먹는다지요

 

결국 테두리만 남게 되는 이야기지만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수레바퀴가 멈춰지질 않네요

 

 

 

먼눈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 외지(外地)1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보면

번갯불의 거울 조각과

뽕나무 등결의 검붉은 나이테,

표지가 뜯겨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구나

 

먼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가는 담장의 꽃들

철 따라 익어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

** 미국 흑인 영가<Broken Promises>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전생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얼굴에 분칠하고 고개 드는 꽃들에게 

- 외지(外地)2

 

지나치는 것들마다 실성한 입이었다 미안하다 들꽃들아, 용서해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들을 껴안아 눈물 흘리게 하였다 간밤의 비바람을 어찌 견딘 것이냐 백지처럼 말갛게 고개 드는 꽃들아, 둑길도 저렇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얼굴에 분칠하고 하늘대는 꽃들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치 말아다오 내 얼굴을 뭉개 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의 입술을 핥고 깨물고 짓이겨놓았다

시전문지 현대시학은 제7회 '전봉건문학상'에 오정국 시인의 시집 '재의 얼굴을 지나가다'를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전봉건문학상'은 현대시학을 창립한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이번 수상자인 오정국 시인은 1956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등의 시집이 있다. 서라벌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아울러 올해 현대시학신인상에 유정, 박서영 시인을 당선자로 선정했다.

 

서강대 문학을 전공한 유정 시인은 시 '코프만 씨 아아아! 1' 외 4편,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박서영 시인은 시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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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처럼 앉아 / 김석영

 

호박빛의 실내에서

나와 너는 가만히 앉아 휘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온도의 빛과 빛의 온도를

발음해보면서 궁글어지는 맛

호박 몇 조각을 뒤집어보면서

 

“눈은 방향이 없구나”

한낮의 호박과 호박빛의 환한 속내를

어둡게 들여다볼 것인지 궁금해진다

 

둥근 유리 주전자 속에서

오래도록 우러나는 호박

물속에서 세 배쯤 커 보인다

색깔을 밀어내면서

향은 풀어지고 뒤섞인다

옅어진 물빛에 호박이 스며 있다

 

기억이 났다 실처럼 오래 풀리느라

컴컴해진 실내에서

 

차를 마시고

서로 같아진 우리의 색

 

누군가는 밖으로 나갔다

너는 이곳에 없어도

누군가는 만족스럽다

 

“내가 정물처럼 앉아 있으면

당신이 나를 그려주기를,

 

사람으로”

 

눈이 그쳤고

실내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던 색을 우리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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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영(41) 시인이 올해 ‘김수영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출판사 민음사는 제41회 김수영문학상에 김석영 시인의 ‘정물처럼 앉아’ 외 50편을 선정했다고 16일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모든 시편이 고른 완성도를 유지하며 자아내는 긴장감이 눈에 띄었다”며 “시인의 치밀함과 인내심이 느껴졌다. 한 편의 시마다 스스로 던진 화두를 스스로 해결해 내는 매력적인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심사를 맡은 허연 시인은 심사평에서 “잘 조율된 한 악장의 음악 같다”고 했고,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어떤 단절과 함께 상황 속으로 이끄는 문장은 독자들을 시적 실재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고 평했다.

 

김 시인은 수상소감을 통해 “삶은 되감기 할 수 없지만 시는 여러 번 되감기 할 수 있는 허구이며 편집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유일한 즐거움”이라며 고다르가 말한 ‘두 번째 첫 번째’라는 표현을 인용, “앞으로도 계속 ‘n 번째 첫 번째 시집’을 내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시와 반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밤의 영향권’이 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수상 시집은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 12월초 발행하는 문학잡지 ‘릿터’에서 수상작의 대표 시 4편을 우선 공개하며, 시인의 수상 소감과 심사위원의 심사평 전문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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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 최재원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끝이 여엉 하고 뭉개진다. 눈에도 웃음. 입에도, 말에도 묻어나는 웃음. 연습한 걸까? 그와 자고 싶은 건 아니다. 자라면 못 잘 것은 없겠지만 어떻게 생겼든 웬만하면 그의 자지를 굳이, 딱히, 보고 싶지는 않다. 다 벗더라도 거기만은 가리라고 하고 싶다. 아니, 천을 휘감긴다든가, 맥퀸이 만들던 맥퀸이나 베르사체가 만들던 베르사체 같은 것을 입히고, 아니, 아니야, 그냥 티셔츠, 보풀이라든가, 올이 보이지 않는, 그런 티셔츠를 입히고, 아니야, 옷이야 상관없겠지.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구겨진 옷이라도, 흉한 밴드 처리가 되어 있는 운동복이라도, 드러난 손목, 발목, 거기에 감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완벽함을 얻게 될 것이다. 구불구불 대는 밴드와 거기에 박음질된 실, 살에 눌어붙는 밴드의 압박, 이런 것들을 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붙어 있는 먼지나 솜털 같은 것들도 마치 그려 넣은 것처럼 의도를 얻게 될 것이다. 너의 눈썹은 빛으로 그려져 있다. 너의 눈은 아직 결정하기 전의 유리, 입술과 입술이 아닌 것의 그 연한 경계, 가장 확신 가득하며 초조한 피어나는 튤립 같은 입술. 그러나 너는 너무 가깝다. 내가 니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인지, 니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인지, 그의 입술이 열리고 거기서 나온 소리의 진동이 내 귀의 고막을 울리는 것부터,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이미 너는 너무 가깝다. 귀에 닿는 너의 숨소리가 불결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나 알아요?

 

그럼요. 알죠.

 

아 씨발. 밖으로 생각했나 보다. 안다고? 뭘? 니가 뭘 아는데?

 

누나, 왜 욕을 하고 그래……. 밥 먹었어요?

 

너와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다. 나는 너를 박제하고 싶다. 약품 처리된, 내장이 없는, 까맣게 구슬이 되어 버린 눈동자, 그런 박제 말고 너의 가장, 가장, 표면에 있는 것들이 너의 가장 아득한 곳을 담을 수 있도록, 가장 표면에 있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숨도, 생명도, 심지어 내장이라 할지라도. 너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구해 주고 싶다. 그것은 박제와 가깝지만 박제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흔들림의 보장, 니가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 있을 자유, 니가 끝없이 스스로에게 빠져들 자유, 끝없이 자신을 소모할 수 있을 힘.

 

그가 손을 뻗는다. 나는 움츠린다.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한다. 그건 음악 같은 소리다. 오직 그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의 진동, 진동과 진동의 사이, 그 템포, 높낮이, 쉼표만이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그는 의미를 밟고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걷는 곳마다 의미가 피어나는 사람인 것이다. 아. 어떻게 그를 가지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엔가 있다. 사정은 끝까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빌드업만 하다가는 아마 뒈져 버리겠지. 잠을 재우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조, 조금만 뒤로 가 줄래?

 

나는 아득해질 대로 아득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싶어진다.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보고 싶은 마음과 구석구석 핥고 싶은 마음이, 그가 너무 입체적이라는 사실이. 그는 바람이 빠진 것처럼, 조명이 꺼진 것처럼. 나는 자꾸 역겨워진다. 역겨워하는 내가 역겹고 자꾸 구토할 것 같다.

 

나랑 잘래?

 

누가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말했다면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면 그것은 덕지덕지 더러운 말이 되어 부스러기를 잔뜩 남긴 채 바닥에 부서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내려다보기가 두려웠다. 내가 사정하지 못할 것은 뻔했고, 나는 그가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아. 나는 그의 손을 뒤로 묶고 그저 그가 찍어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의 목이 앞으로 떨어졌다 귀찮다는 듯 뒤로 젖혀지는 것을, 그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그의 이마에 삼각형으로 떨어지던 해가 점점 늘어지며 긴 삼각형이 코에 음영을 만들고, 얼굴을 붉게 타오르게 만드는 것을, 그가 뱉어 내는 소리의 간격과 빠르기를, 그의 예정된 종류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이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운명처럼 견고한 것, 닿는 모든 것이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이미 예정된 것.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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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진행된 ‘제4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최재원 시인이 선정됐다. 올해 김수영 문학상에는 총 220명의 시가 투고됐고, 이수명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 허영 시인이 심사를 맡았다.

 

민음사에 따르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후보자는 6명이었으나, 심사가 시작되자마자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최재원의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외 59편으로 모아졌다.

 

심사위원은 구성과 문장이 빼어난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최재원 시인이 보여 준 거침없고 자유로운 내용과 형식은 김수영 시의 정신을 계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다.

 

과감하면서도 활달한 상상력으로 독창적인 리듬과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일상과 세속에 과감히 육박해 들어가며 자신만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압도적이라는 평을 냈다.

 

최재원 시인은 1988년생으로 거제도, 창원, 횡성,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자랐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시각 예술을, 럿거스대학교 메이슨 그로스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2018년에는 Hyperallergic을 통해 미술 비평을, 2019년 ‘사이펀’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한편, 최재원 시인은 이번 수상으로 상금 1000만 원을 받게되며, 연내 수상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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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보 외 4편 / 신정민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 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그림자인가 혹,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슬픔과 엇비슷한 감정에서 어떤 속도로 복원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 속도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의 속도쯤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듯 말 듯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가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던 것일지도 몰라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속도로 발자국은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에 죽은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 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어 발자국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그날의 적적함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의자를 두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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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반조(回光返照)

 

저 큰 나무를 선택한 건 벼락이 아니다

 

쓰러진 줄도 모르고

 

지난여름 그 산벚나무 꽃을 피웠다

 

숨 거두시기 전 내 이름 또렷하게 불러주셨던 아버지

 

벌목공도 마다하는 숲에

 

해지기 전 잠시 환한 저녁이 찾아와

 

사력 다해 핀 꽃들에게 귀를 빌려주고 있다

 

몸이 익힌 건 잊히질 않아

 

넘어지며 들었을 첫 우렛소리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오픈 북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아

 

다림질의 세 가지 조건은 수분 압력 온도였다

 

알고 있는 단어를 다 써버린 것처럼

골목 입구 동네 세탁소만 떠올랐다

 

더 잘 구르기 위해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다니는 동그라미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음식물에 초파리가 생길 때 필요한 조건들만 생각났다

 

어느 봄날 주민센터 찾아갈 때

길 가던 세 사람 모두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던 것처럼

 

사람에게 답이 있다던 힌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아도 괜찮은 일

 

어떤 자료든 참고할 수 있는 생이었는데

달달 외운 조건들, 성적불량자에겐 너무 많았다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었다

 

 

 

백엽상

 

 

해와 달도 맞벌이를 하지요

 

저녁 운동장 도는 사람들 별자리 돌리고요

 

어두워서 흰 나무상자 눈에 더 밟혀요

 

어릴 때 이미 다 배웠지요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빠져나가고

 

나는 개가 물어간 아이들을 눈금으로 남겨요

 

둘, 넷, 여섯…

애들이 또 줄었구나

 

어떤 온도로 놀아줄까

아쉽지만 북쪽 창문도 너희와 놀아줄 수 없구나

 

달리는 것도 싫고

친구 사귀는 것도 싫고

 

혼자 있는 아이들 기록으로 남겨요

 

일곱 바퀴, 여덟 바퀴…

 

운동장이 얼마나 작은지 어른 되면 알려줄게요

 

 

젠가

 

 

달팽이를 바위에 내려쳐 속살을 빼먹는 것이

발톱인지 부리인지 생각하면서

 

하루가 몇 개의 단어로 쪼개어져 있는지 생각하면서

블록 더미를 무너뜨리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린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창문 하나 손끝으로 밀어내어 맨 위에 쌓는다

 

차례를 치른다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경우의 수들이 동원되지만

끝나지 않는 테이블 게임 위에 엇갈려 쌓이는 직각들

한 손만 사용해야 하는 스릴이 있다

 

누군가의 창문을 오래 바라보는 버릇 그러니까

불안은 건물 한 채를 무너뜨리곤 한다

 

어두운 불빛들의 곡예

 

밤 한가운데를 거니는 달갑지 않은 순서

위기를 떠넘겨야 하는 차례는 자주 돌아온다

 

아주 긴 이야기를 질질 끌며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으로 쌓이는 관계들

 

우리가 쌓고 있는 것이 무너질 때까지

기껏 세워놓은 것을 쓰러뜨리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아이리스 플래티넘 캐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수상소감]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고향에 갈 때마다 바라보았던 지리산의 이름으로 큰 상을 받게 되어 더욱 영광스러웠습니다.

 

’내게도 이런 영광이 올 수 있을까‘ 품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이 뜻깊은 상이 뜻밖의 결과라고 하면 조금은 거짓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나, 하고 바랬던 꿈같은 일, 분에 넘치는 이 상이 제게 주어져서 감사하고, 기쁘고, 살짝 두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먼저 이 영예로운 상을 제게 안겨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지리산문학회에 감사드립니다.

 

‘마당 쓸 때 빗자루를 눕혀 쓸어야 먼지가 덜 인다, 고 하셨던 노모가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부족한 저를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마음 전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시인으로서 깜냥을 다하려고 애썼지만, 늘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그러나 시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거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라는 파스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시가 존재라는 말,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말, 다만 나름대로 매듭을 짓는다는 말, 그것이 스스로가 하나의 시라는 말을 생각해왔습니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쓴다는 말도 새롭게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언어 너머의 세계를 위해 조금 더 애써보겠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며, 대립적인 것들 사이의 화해를 추구해보겠습니다. 저의 우둔한 시작이 결국은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확인하는 것일지라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답답한 거기가 제 자리라는 것, 어눌한 문장들이 곧 저라는 것. 그런데도 제가 저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라는 것도 새겨보겠습니다.

 

이 상은 그래도 괜찮다고, 그렇게 한 걸음씩 더 나아가라고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시 앞에선 언제나 쩔쩔매지만 시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이니 세상을 향해 무엇을 외칠 것인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그랬듯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번 저의 수상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줄 문우들, 끌 동인들과도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대상을 묵묵히 견인해내는 인내력

 

제17회 지리산문학상에는 130편의 원고가 응모되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집은 7편이었고, 무기명 번호만 매겨진 원고는 온라인을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전해졌다. 예심 통과작 7편을 전해 받은 심사위원들은 각자 2, 3편의 후보작을 추천하기로 하였고, 그 결과 1번의 『불 켜진 창문 하나가 백짓장 같아서』, 2번의 『서성이던 후면에 관한 크로키』, 4번의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가 각각 2표를 받아 최종심에 올라가게 되었다. 다소 파격적이고 어리둥절 정신이 혼미한 시도 있었지만 대부분 안정적인 보폭으로 감각과 상상, 확장을 꾀한 시편들이었다.

 

4번 작품들은 인식의 깊이가 조금 얕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원고 뒷부분에 배치된 시편들에서 받은 느낌은 “갑자기, 왜 이렇게, 힘이 빠졌지?” 하는 것이었다. 인식도 인식이지만 언어와 언어가 만나 만들어내는 긴장, 미묘함의 부족이 그 이유인 듯 했다. 좋은 시를 통해 느끼는 야릇한 설렘이 잘 느껴지질 않았고,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점 때문에 아쉬웠다.

 

2번 작품들은 고백하자면 감당이 안 되는, 불안과 분절의 것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고, 지지를 보내고 좋은 점수를 주자, 용기를 내 보았지만 감당하기가 벅찼다. 이 ‘서성이던 후면에 관한 크로키’의 충동과 혼동을 통해 2번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려는 것인지, 감지가 잘 안 됐다. 다시 숨을 고르고, 눈을 비비고, 읽기와 느끼기에 도전했지만 응모자의 고도(孤島)가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외람되게도 2번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었다. 눈 밝은 누군가에 의해 발굴되기 전까지는……. 심사자 중 한 사람인 나는 무식한 자신을 탓하며 2번의 작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견 없이, 싱겁게, 1번에게로 합의가 모아졌다. 1번의 장점은 고른 수준, 안정감이었다. 1번의 ‘대상을 묵묵히 견인해내는 인내력’은 모범의 것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1번의 시들은 한 편 한 편 진심을 다 해 썼다는 미덕이 있었다. 일테면 1번의 실존은 “몸으로 익힌 건 잊히질 않”는 것이었고, 시는 결국 삶으로부터 발생하고 삶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틀렸던 문제는 잊히질 않”는 법. 두 말 할 것도 없이 ‘삶’이라는 “질문의 책”을 앞에 두고 시인은 고민하는 자이다. 그래서 시인의 집엔 오래 “불 켜진 창문 하나가 백짓장 같”을 수밖에 없고, 고민해봤자 소용없지 뭐, 좌절과 체념의 밤을 지새운 뒤 긴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그 번민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깨닫게 되는 건 “커닝 없는 시험은 재미가 없”다는 것.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시인의 실존이란 그렇다. 대단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예외 없이 장삼이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와 시인의 숙명이다.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삶이란 기껏 “단순한 규칙은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젠가”, “쌓고 또 쌓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식”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병상치(下炳上治)의 치료법이 그렇다.

 

낙관적인 것은 회광반조(回光返照), “한 번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하는 시인의 희망. 자연의 아침 숲에서 시인은 ‘간섭무늬’를 읽고 ‘고라니 발자국’으로 대체되는 원시의 발자국 ‘홀로그램’을 본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 저만치 우리들의 집 밖에 ‘백엽상’ 하나를 짓고 “세상의 온도와 습도를 재 보려”고 한다, 어른이 되어 바라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운동장이 얼마나 작은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당선이 결정되고 확인해본 시인의 이름은 신정민이었다. 묵묵히 시와 삶을 견인해내는 시인의 인내력에 응원을 보낸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 유홍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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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에서 시 부문 유춘상(경북 경주시)씨의 ‘힌남노’와 단편소설 부문 이미정(울산시 남구)씨의 ‘모래의 시간’이 공동대상을 차지했다.

 

경북일보 문학대전운영위원회는 최근 국내외에서 응모된 총 2616편의 작품을 심사한 결과, 대상 2명을 비롯해 금·은·동·장려상에 단편소설 부문 12명, 수필 부문 18명, 시 부문 18명과 청송군 문인들을 위한 청송문인상 5명 등 모두 55명의 당선작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학대전은 경북일보가 국내외에 활동하는 문인 및 문학 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문학상 공모전 및 학술포럼을 개최해 창작의욕을 끌어올리는 한편, 청송의 뛰어난 절경과 관광명소를 대내외에 알리는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장을 열기 위해 마련됐다.

 

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응모기간은 지난 8월 4일부터 10월 3일까지 2개월간 진행됐으며, 분야별로 단편소설 190편, 수필 693편, 시 1733편이 응모돼 총 2616편이 접수됐다.

 

또 지역별로는 경북(386편)·대구(523편)을 비롯해 서울(395편)·경기(457편)·부산(147편)·경남(145편)·충북(108편) 등 전국 각지를 비롯해 미국·캐나다·호주, 아랍에미리트 등 해외(33편)에서도 작품이 접수됐다.

 

청송객주문학 학술포럼 및 시상식은 오는 11월 4~5일에 청송사과축제장 용전천 현비암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편 청송군 문인들을 위해 제정된 특별상에는 공로 부문으로 임경성(전 청송문인협회 회장)·심양섭(출향인)씨가, 청송문인상에는 시 부문 △‘개울물’ 김종순 △‘아버지의 계절’ 김순화 △‘가을의 잔상’ 양성근, 수필 부문 △‘매끈하고 거칠한’ 서승희, 소설 부문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위로’ 김시연씨가 각각 선정됐다.

 

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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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힌남노 / 유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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