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제39회 김수영 문학상에 이기리(26) 작가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등단하지 않은 신인 작가가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음사는 16일 "올해에는 191만명이 약 1만편의 시를 응모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여섯 작품 중 내밀한 경험에서 출발한 시편들이 인상적이었던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이기리 시인 작품에 대해 "과거의 상처를 망설임 없이 드러내고 마주하는 용기가 돋보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내공과 고유한 정서적 결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줬다" 등의 평을 받았다.
수상자 이기리 작가는 "나의 세계가 언어로서 이 세계를 조금이나마 넓힌 기분이다"라며 "언어가 가진 불온한 속성을 나는 꽤 오래 사랑해야만 할 것 같다. 믿음의 외연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면서 대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추상적인 실체를 상상하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는 참 못나기만 했고 창가의 오후에 기대 쓴 시들엔 나약하고 초조한 화자들이 줄곧 등장했다. 일기장은 나를 미워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비가 소록소록 내리던 어느 여름밤, 라디오를 들으며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입이 닳도록 발음했던 날을 기억한다. 시는 내 삶에 물방울들이 천천히 창 아래로 모이듯 다가왔다. 이후 모든 형태의 글쓰기가 내 속의 아픔들을 조금씩 소분하고 있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기를, 또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한 여정이 길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기리 작가는 199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수상자에는 상금 1000만원이 수여된다. 또 연내 수상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김수영문학상은 1960년대 자유와 저항정신의 대표적인 참여시인 김수영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후진 양성을 위해 1981년 제정된 시문학상이다.
민음사는 김수영문학상 주관사로, 매년 한 명의 시인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등단하지 않은 예비 시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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