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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에서 시 부문 유춘상(경북 경주시)씨의 ‘힌남노’와 단편소설 부문 이미정(울산시 남구)씨의 ‘모래의 시간’이 공동대상을 차지했다.

 

경북일보 문학대전운영위원회는 최근 국내외에서 응모된 총 2616편의 작품을 심사한 결과, 대상 2명을 비롯해 금·은·동·장려상에 단편소설 부문 12명, 수필 부문 18명, 시 부문 18명과 청송군 문인들을 위한 청송문인상 5명 등 모두 55명의 당선작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문학대전은 경북일보가 국내외에 활동하는 문인 및 문학 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문학상 공모전 및 학술포럼을 개최해 창작의욕을 끌어올리는 한편, 청송의 뛰어난 절경과 관광명소를 대내외에 알리는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장을 열기 위해 마련됐다.

 

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응모기간은 지난 8월 4일부터 10월 3일까지 2개월간 진행됐으며, 분야별로 단편소설 190편, 수필 693편, 시 1733편이 응모돼 총 2616편이 접수됐다.

 

또 지역별로는 경북(386편)·대구(523편)을 비롯해 서울(395편)·경기(457편)·부산(147편)·경남(145편)·충북(108편) 등 전국 각지를 비롯해 미국·캐나다·호주, 아랍에미리트 등 해외(33편)에서도 작품이 접수됐다.

 

청송객주문학 학술포럼 및 시상식은 오는 11월 4~5일에 청송사과축제장 용전천 현비암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편 청송군 문인들을 위해 제정된 특별상에는 공로 부문으로 임경성(전 청송문인협회 회장)·심양섭(출향인)씨가, 청송문인상에는 시 부문 △‘개울물’ 김종순 △‘아버지의 계절’ 김순화 △‘가을의 잔상’ 양성근, 수필 부문 △‘매끈하고 거칠한’ 서승희, 소설 부문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위로’ 김시연씨가 각각 선정됐다.

 

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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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힌남노 / 유춘상

 

[금상]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 / 김은숙

 

[은상] 장미 옷 수선집 / 김미향

[은상] 편지 / 김인수

 

[동상] 네일아트의 세계 / 김건화

[동상] 나에게 사랑이 있다면 / 김주수

[동상] 금소리에는 베를 짜는 여자가 산다 / 이인숙

 

[장려상] 새의 죽음 / 손기웅

[장려상] 몽당연필 / 박선미

[장려상] 길의 단추 / 서원일

[장려상] 벼꽃 / 이한명

[장려상] 이 가을에 두보의 곡강을 더듬다 / 박재홍

[장려상] 비설거지 / 최영희

[장려상] 소멸하는 계절 / 전예진

[장려상] 들릴 듯 말 듯 / 권미련

[장려상] 늦은 배웅-고흐를 놓치다 / 김경미

[장려상] 연단 / 유정자

[장려상] 흔들그네 / 김은혜

[장려상] 점 / 노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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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서문시장 수제빗집 / 백명순

 

빗물 질펀한 시장을 가로질러 노점에 닿는다 양은솥 가득 수제비가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연신 코를 벌렁거리며 게딱지 손으로 쉼 없이 수제비를 뜯어내는 그녀의 저 재빠른 손놀림, 겨울비 내렸고 생의 절반이 도망치듯 세상 밖으로 뚝 떨어져 나간 남편과 어린 자식 삼 남매와 빚덩이만 밀가루 반죽처럼 게딱지 손끝에 매달려 있다

 

팔자라 말하기엔 아직도 잘라버리지 못한 것들 손끝에서 댕강댕강 양은솥 안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어야 살아가는 삶, 밀가루 반죽은 뚝 뚝그녀를 잘라 먹는다 숨을 쉬는 동안 끝나지 않을 눈물을 밀랍 하는 일 찜통에 담아 두었던 밀가루 반죽 한 덩이를 들고서 밀려 나온 생의 한 가운데 모든 신경을 손끝에 모아 쪼가리 쪼가리 양은솥 안으로 던져 넣는 수천 개의 게딱지

 

 

 

 

 

 

[금상] 틈 / 전종대

 

가까운 사이일수록 틈이 필요하다는 걸 안 것은
집 안에 가구들이 많아지고 부터이다
가구들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곁의 가구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오래되고 낡을수록 안으로부터 조금씩 부풀어 오른 배들
 
벽과 벽 사이에도 틈이 숨 쉬고 있었다
이어진 레일 사이에도 틈을 두었다
단단할수록 간극이 필요하다
 
때로 틈이 사막 같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틈은 너를 너답게 하는 방식이다
건물을 견디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내와 다투고 돌아서 바라보는 무연한 달빛
달빛과 달빛 사이에도 틈이 있을 것이다
 
아스팔트 검은 입술 터진 틈으로 가느다랗게
풀들이 외치며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너무 꽉 다문 입술들은 갈라진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틈을 비집고 팔을 뻗는다


 

 

 

[은상] 면경 / 이종호

 

핸드백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 다닙니다
여자의 하루가 거울 속에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사라질까 봐 거울을 자주 봅니다

궁금한 얼굴을 해석해 주는 면경을 유심히 보다가
왼쪽과 오른쪽 표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울 속에는 충혈된 눈과 마스카라의 눈물도 있습니다

우울한 손이 거울을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깨지는 소리가 사람들에게 박힌듯합니다

여자 마음도 균열이 갔습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잃었습니다

천의 눈을 갖은 거울은
천 개의 세상을 보고 싶어 쨍그랑, 깨졌을까

파편 속에서 반짝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은상] 을숙도 현대 미술관 / 안행덕

 

가상 사운드 뮤직실, 천장에서 내려온 줄과 바닥의 종이 상자, 연결된 암호들이 음표를 만들며 내통하고 있다. 가느다란 줄이 얇게 바르르 떨면 상자의 입술이 음표를 만들어 낸다. 빗소리라는 문자를 눈에 담고 천천히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강바람 불어오고 콩나물 꼬리 같은 사분음표로 내 귀를 간질이다가 음향은 점점 커지는데 처음에는 빗소리 바람 소리 그사이에 시든 꽃이 떨어지고 수십만 개의 소고 소리 점점 크게 울리는데 큰북을 치며 빗속에 젖어 든다. 내가 운다. 빗속에 젖어 울고 있는 나, 회오리바람을 가르며 하늘로 오르는 소복의 어머니, 손을 내밀자 천둥 치고 번갯불 번쩍하는 섬광에 눈을 뜬다. 큰북과 작은 북은 간 곳 없고 가느다란 줄이 종이상자를 두드리고 있다.


 

 

 

 

[동상] 지하도 암자 / 이생문

 

햇볕도 추위를 피해 걸어 내려오는 지하도 계단
한줌 한 줌 쌓아올린 탑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
벽도 기둥도 없이
쓰러질 듯 폐박스 구들에 웅크린 암자 한 채
깨달음 얻기 위한 출가인가
다 비운 생의 자세로 엎드린 고행
비린 세월도 선나禪那*에 들고
따로 품어야할 화두도 없다
탁발托鉢에 나선 소쿠리 한 권 불경처럼 모셔도
아무도 읽고 지나는 이 없고
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 간절한 번뇌
칼바람에 시리다
죽비의 눈초리보다 따가운 사람의 시선에도
열반에 든 듯 눈 길 한 번 흩어짐 없이
수심愁心 깊은 고해에 몸 담근 행려가 된 묵언정진
세상을 깨우는 울림 우렁차다
무릇 고행이란
때를 기다리며 갈기갈기 제 가슴 찢는 일,
오랜 방황의 끝 침침한 삶
한순간 환해지는 일
숨소리조차 속세를 피한 듯 미동 없이
동안거에 든 저 사람 부랑자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 앉아 있은 생불이다.

*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고요히 생각하는 일


 

 

 

 

[동상] 반올림 / 이문자

 

그녀는 반지하에 살고 있다
장마철이면 상형문자의 곰팡이가
우울의 문장을 쓴다
냄새가 몸에 끈적끈적 들러붙어도
무더위에는 반지하가 최고라고 위로한다

창살 사이로 햇살은 벽의 반을
데우다가 힘없이 사라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상에 온전히 닿지 않고
계단은 반만 밝은 사각지대다
지상을 향한 계단은 위에 있는 자들의
몫이라고 체념하다가도 눈과 귀는
창을 두드리며 대화를 시도한다

그녀가 사는 공간은 어둡고 퀴퀴한
냄새로 얼룩져 있다
지금도 그녀는 반지하 계단을 오르고 있다
조금만 더 오르면 일 층이라고
온전한 봄 햇살을 받을 수 있다고
누구에게는 평범한 시작이
생의 끝날까지 닿아야 할 목적지라고


 

 

 

 

 

[동상] 늙은 해녀 / 배철호

 

푸른 도마뱀이 날마다 허물을 벗는
제주 바다에 저녁노을 몇 점이 앉아있다.
평생 바다의 뿌리를 캐고 껍질을 벗기며
더러는 물안경에 서린 세월을 꺼내 닦는다.
햇살처럼 손끝에 머문 자식을 어루만질 때,
익숙한 손놀림에도 팅 하고 튕겨 나가는 햇살 한 움큼
이제 기다림과 그리움마저도 더는 자라지 않는다.
자고 나면 몇 겹의 물굽이가 수만 개의 푸른 날을 세우고
파도의 거센 힘줄로 옭아 매인 할망* 해녀의 삶은 고단하다.
구멍새 숭숭한 삶, 살갗마저 현무암 닮아가는 거칠어진 노년은
나날이 썰물 지고 굽어져 가는 허리만 맥없이 두드려본다.
오래된 습관처럼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는 물질이지만
그나마 소라 전복에 남아있던 작은 온기마저 식어가고
지중해 날씨처럼 온화했던 이웃들도 태풍에 하나둘 떠났다.
빈집 태왁 박새기* 마냥 덩그러니 버려진 듯 남았다.
나날이 지워지는 지문과 노랫가락으로 안간힘 써보지만
온몸 등허리까지 저녁노을이 붉게 붉게 물들었다.
화석처럼 굳어진 허리 잠시 펴고 고개 들 때면
뭍에서 불어온 바람이 바닷새 울음에 찍 묻어난다.
평생 마르지 않는 젖은 가슴을 털어내는 저녁노을
그 밝던 눈도 바닷속과 함께 침침해져 가고 있다.

*할망:‘할머니’를 말하는 제주 방언.
*테왁 박새기: 해녀가 물질을 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이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로 제주 방언.


 

 

 

 

 

 

[가작] 활어회 / 권수진

 

바다로부터 추방된 물고기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구속 중인 수족관

 

불특정 순서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마에서 참수형이 집행되는 곳

 

뜰채에 포획된 감성돔 한 마리가

휘둥그레 눈을 뜬 채

허공 속을 파닥인다

 

쓱쓱 횟집 주인이 칼 가는 소리에

억울한 누명을 호소하듯

입을 뻐끔거리는 항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이 채 끝나기 전에

칼등으로 내리꽂힌 정수리에서

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횟감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비늘로 무장한 가죽을 벗길 때마다

소스라치게 전율하는

저 몸짓!

 

시퍼런 칼날이 회백색 배를 갈라 내장을 몸 밖으로 끄집어내니

자신은 무고인 양

좌우로 꼬리치는 지느러미

아직도 못다 한 증언이 남았는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유영하던

옛 시절을 기억하는지

파닥파닥 연신 자맥질이다

 

흰 접시 위에 현란한 모양새로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살점들이

차곡차곡 단층을 쌓고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상여의 행렬

 

피로 얼룩진 형장을 향해

한 바가지 물을 붇자

들숨 날숨 힘겹게 숨 쉬던 아가미 항변은 멈추었다

 

가게 한구석에 내팽개친

잘려 나간 생선 대가리의 주둥이가

계속해서 입을 벌름거린다

 

피고인은 아직도 살아있다

 

 

 



□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상자 명단

 

<시 부문>


◇공동대상 =△‘서문시장 수제빗집’ 백명순(대구 남구)
◇금상 = △‘틈’ 전원목(경북 경산)
◇은상 = △‘면경’ 이종호(경기 성남) △‘을숙도 현대 미술관’ 안행덕(부산 금정구)
◇동상 = △‘지하도 암자’ 이생문(경기 화성) △‘반올림’ 이문자(인천 부평구) △‘늙은 해녀’ 배철호(경기 하남)
◇가작 = △‘활어회’ 권수진(경남 창원) △‘부곡이발소’ 박찬희(인천 미추홀구) △‘완(碗)’ 박민례(대전 중구) △‘연식지난 세탁기’ 이태학(경기 양평) △‘그러니까’ 김재호(경북 포항) △‘입춘의 아침’ 정재식(부산 금정구) △‘낙엽의 지움 앞에서’ 김태희(경기 안양) △‘감꽃이 필 때’ 신영순(전북 전주) △‘오월’ 이영숙(경북 영덕) △‘시계’ 황수웅(부산 해운대구) △‘뿌리 깊은 집’ 최우서(대구 북구) △‘빗나간 오후’ 김용주(대구 북구)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지향하는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에서 국내·외 총 3191편 작품이 응모된 가운데 시 부문 백명순(대구 남구)씨 ‘서문시장 수제빗집’과 소설 부문 이은정(경북 경주)씨 ‘선샤인타운’이 각각 공동대상을 차지했다.

경북일보문학대전운영위원회는‘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심사결과 공동대상과 금상, 은상, 동상, 가작에 시 부문 19명, 소설 부문 13명, 수필 부문 19명 등 모두 51명의 당선작을 발표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공모전은 산소카페 청송을 문학의 고장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고 청송의 뛰어난 절경과 관광명소를 대내외에 알리는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장을 열고 참신한 신인 작가 배출과 기성 작가의 창작활동을 독려하고자 마련됐다.

부문별 접수현황을 보면 시 부문에 509명 2130편, 수필 부문에 255명 765편, 소설 부문에 222명 296편이 응모돼 총 응모 인원 986명에 3191편이 접수됐다.

지역별 현황을 보면 경북(434편)·대구(422편) 등을 비롯해 경기(630편), 서울(517편), 부산(229편), 해외(51편) 등 국내외 곳곳에서 출품됐다.

한편, 시상식은 오는 30일 경북일보 포항본사 대강당에서 치러지며 공동대상 500만원(2명), 금상 200만원(3명), 은상 70만원(6명), 동상 50만 원(9명), 가작 40만 원(단편소설 6명)·20만 원(시·수필 24명), 특별상 100만 원(청송군민에 한함) 등 총 3290만원의 상금이 51명의 수상자에게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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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물의 기억 속으로 / 최재욱 



기억 속에 돌들을 키우고 있다
대야산 용추계곡을 지나 선유동을 거쳐
영강에 다다르면
깎인 돌들의 표정이 물위에 뜬다
못나고 못난 돌들만 뽑혀가는 영강에
못난 나도 조용히 서 볼만하다
돌이 돌을 품고 그 위로 잔잔히 울던 물살
거품으로 살을 내어주는 산란의 소리가 정겹다
살 껍질들이 만든 한세상
갈대숲과 모래 둔덕의 문명은
수면아래 돌들 표정 속 세상이다
얇은 입술에 달이 뜨고
조용한 숨결 마시며 내가 걷기 시작했지
온유의 젖꼭지를 입에 문 바다는 푸르게 출렁 인다
내 몸을 더듬고 나온 너의 기억
일부는 소실된 다리로 빠르게 둥근 전두엽에 강들을 정리하고
태양마저 기어오르지 못할 망가진 내일이 있다 해도
빈 몸으로 영강에 서보자
벗은 만큼 위로 해주는 물의 기억 속에서
내 눈 가려놓은 한세월과
새벽처럼 일어섰던 욕망의 덫에 걸린 발목들과
홀로 일어서지 못한 지게 같은 은둔의 삶 몇 개 씻고 나면
그제 서야 말 할 수 있다
빈손으로 왔길 망정이지 버리는데 급급할 뻔 했구나
언제부턴가 이곳 영강에서는
유연한 몸짓들이 물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금상] 파밭 경전 / 권용례

파밭에 호미 날로 쓴 노모의 경전을 읽는다
흙 속에 스며든 문장들이 뿌리를 박았다.
빗물을 받아먹고
지각의 영양분으로 살아가는 글들은
파릇파릇 파잎처럼 반듯하고 꼿꼿하다
바람에 펼쳐지는 책의 귀퉁이부터
순식간에 점령하는 잡풀들을 뽑아내는 호미
무엇을 증언하고 싶은 걸까
실뿌리에서 뽑아 올린 한 구절을
닳고 닳은 몽당 쇠판에 또박또박 새긴다
행간 사이에 한숨을 장단으로 넣으며
호미질에 불꽃이 튀는 경전 쉼 없다
정직한 마음을 가르치는 말씀보다
이윤이 왕이 된 세상에서 내내 괴로웠으리라
노모는 가끔 발등이 찍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멈출 수가 없는 일필서
이 일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건강해지는 일이었다
태풍이 몰아쳐도
어깨동무하는 가족들을 살려야 했기에
파밭에 빼곡히 적는 한 마디 한 마디는
골수에 사무쳤다.
희망이 나부끼는 파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는 밭고랑
햇볕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이 밭고랑이
노모가 살아가는 길이었던 것
땅을 파헤치는 호미 날에 글자들이 운다





[은상] 허밍테이블 / 황명희

 

무학산 오솔길 입구에 허밍테이블이 있다 간판에 허밍 하는 발랄한 여자의 모습을 하얀 바탕에 초록색 선으로 그려놓아 눈길이 간다 무엇을 파는 곳인지 가끔 주인 여자만이 테이블에 앉아 먼지가 일지 않는 무학산 오솔길을 바라보거나 허밍을 하며 무언가를 만지고 있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그 후 그 가게 앞에 가면 이상하게도 간판의 균열된 곳에서 초록 허밍이 들려와 귀 기울이게 되고 초록 허밍은 바람의 마디마디마다 허밍으로 돋아나서 잎이 되고 넝쿨이 되어 오솔길을 덮고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빈집에 쌓인 수북한 허밍에 또 허밍을 하는 일 허밍이 허밍을 부르고 또 허밍이 허밍을 부르면 오솔길이 생기고 오솔길 한켠 수북하게 먼지 쌓인 빈집이 보이면 먼지가 불현듯 빈 테이블 위에 오래된 서까래 같은 기다림의 두께를 만든다 목멘 그리움도 아닌데 기다림으로 목이 메고 목멘 기다림도 아닌데 그리움으로 목이 메고 조그만 소리로 불러보는 허밍에는 허밍만이 허밍으로 쌓여가고 여태껏 한 번도 무엇을 파는 것인지 본 적이 없는 허밍테이블 다 저녁 골목길 가로등에는 순서대로 불이 켜져만 가고.

 

가로등 멀리 걸어오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얼핏 보인다.

 

따스한 햇빛이 가게 안을 기웃거리거나 허밍이 오솔길을 데려오는 날 그땐 모르는 누군가가 모르는 누군가를 데리고 허밍을 하며 허밍 테이블에 한 발을 들여놓겠지 주인여자가 허밍을 하며 무언가를 만지고 있고 나는 허밍을 하며 오늘도 허밍테이블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은상] 아버지의 가을 / 박광수

 

성묫길 산을 내려서다가

벼 이삭 서걱 거리는 논두렁을 밟고

해마다 이맘때에 아버지처럼

세상을 한번 둘러보았다

 

해질 녘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우물물을 길어 올려 목을 축이고

고무신을 신은 발등에 물을 부어준 다음

찬찬히 얼굴을 씻었다

 

그가 아들에게 가르쳐 준 말은

겁내거나 서둘지 말고

세상을 한번 쓱 둘러보라는 것 이었다

 

땀에 젖은 삼베수건을 목에 걸고

고단했던 당신의 논둑에서 둘러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쉬운 쓸쓸함이 있었을까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말과 같았고

모자라기 때문에 고마움이 있었다.

아버지의 논은 늘 그만큼 뿐이었고

들에서 돌아와 얼굴을 씻는 그는

언제나 경건한 모습이었다.

 

가난한 어머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고사떡을 다 돌리고 나서

시루에 남아있던 팥고물로 밥을 지었다

팥고물이 섞인 밥에서는 고사떡 냄새가 났다

 

내가 떠도는 이 도시에 주차장에도

해마다 아버지의 그 가을은 내려오고

쓸쓸한 부족함과 고마움이 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서둘지 말고

가꾸어 놓은 논둑을 한번 둘러보듯이

천천히 차에서 내려

오늘의 이 얼굴을 씻어야 한다.

 

겁낼 것도 없다

가을은 누구나 고향으로 가는 때이니

세상을 한번 쓱 둘러보고 가면 그만이다

아끼며 살던 모든 것

 

돌아서서 보면 고마운 것 들이다






[동상] 자전거의 시간 / 문순희


담벼락에 자전거 한 대 기대 서 있다
녹슨 핸들 위에 잡초가 자라고
뒷바퀴의 반은 둥근 뼈대를 꽉 잡고 있다
구불구불 바퀴에 매달려 온 길들
오도 가도 못하고 비에 젖은 채 묶여져 있다
감기다 끊어진 길의 부스러기들
낡은 필름처럼 돌돌 말려 있다
한 때는 탱탱한 바퀴로
아침을 굴리고 점심을 굴리고 밤을 굴리다
꽃을 감고 나무를 감고 땅을 감고 하늘을 감았을 것이다
돌부리에 걸리면
속도를 이기지 못해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헛바퀴를 돌리기도 했던 자전거
먼지를 굴리며 지나온 길을 밀어 내기도 했던,
굴러왔던 생이 균형을 잃고 비를 맞고 있다
버리는 것과 버려진 틈에서
바퀴살에 엉겨 붙은 녹 슨 시간이 저렇게 굴러가고 있다
녹슨 바퀴 사이로 흘러내린 길이 감기는지
바퀴가 잠시 전율한다
비는 추적추적 자전거를 적시고
자전거는 굴려왔던 시간을 적시는 동안
저녁은 그냥 굴러갔다





[동상] 아내의 일기4 / 이국희

 

아내가

속이 곪아 터질 것 같은 사랑을

방금 세탁기에 넣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지난겨울 혹독했던 가난도 다 털어 뒤집어

몇 스푼의 세제로 열두살 딸년의 반항과

지 남편의 주벽이나 무능함을

돌리려고 시작 버튼을 꾹 눌러

이것만 돌리면 다시 시작한단다

자동으로 헹굼 세탁

 

세탁을 마치고 나온 빨래들이

누구랄 것 없이 기진맥진하며

호흡을 몰아쉬고 있다

 

흔적없이 탈수기로 또 한 번

돌렸건만

삶의 무게에 눈물들만 뚝뚝 흘리며

건조대로 끌려가고 있다

 

빈둥대던 베란다에 햇살이 들어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

아내의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동상] 건너기가 두렵다 / 박인자

 

네 생각에

민들레꽃과 질경이 꽃을 놓기로 했어,

 

구름다리 출렁이며

초록구름은 회색 기타 소리 감아 오고

다리 아래 소식 묻기 조심스럽더라고

 

시간이 맨발로 건느는 나무다리에 멈춘

시인은 너무 많이 익었더라고

자신의 붉은 색을 고집한다고 반성했어.

 

곧 떨어질 토마토이면서

고추처럼 농부의 푸른 땀을 기다리기도 한 거야

 

금방 건너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다리

겨울과 계단처럼 멀리 보였어

 

이승과 저승 오락가락 하면서

다리를 못 건너가시는 엄마

 

다리만 건너면 저승인데

저편에서 아버지가 아무리 불러도 안 가시려고

 

가을 다리 난간을 꼭 붙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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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치마끈 / 전승룡


니 엄마 도망간다
니 엄마 도망간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맏상제가 된 나에게
동네 사람들 수군거리고 있었지


새벽 별빛 스러지기 전
엄마 손 잡아보곤 참았던 숨을 내쉬고


행여 잠결에 울 엄마 사라질까봐
치마끈에 내 손목 설핏 묶고 잠들곤 하였지


밤새 뒤척이다
그믐달 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엄마


이슬이 마르기 전 치마끈 살며시 풀어놓고
어디론가 가버렸지


아직도 난, 딸아이가 시집 갈 지금에도
구름사이 이지러진 달이 울면


옆자리에 냉기가 깔리던 그 새벽녘처럼
긴 숨을 몰아쉬며 뒤척거리곤 한다





[은상] 빈 수레 / 정재옥


뒷집 팔순 할매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 듣고


양지 바른 새들 밭 쇠비름


손수레 가득 뜯어 싣고 오다가


길가에 냅다 쏟아 버렸다


에이 오래 살면 안 되지


큰일 나지


빈 수레 끌고 집으로 왔다





[은상] 달 / 황주연


가파른 골목에 깨진 달의 부스러기를 줍는

아버지의 내력이 무럭무럭 여물어가는 계절

아버지는 반쯤 사라진 달의 행방을 찾는다

아버지의 일방통행을 따라 옮겨 붙는 시선들

난지도에서 쓰레기를 쓸어 담는 빈약한 등줄기에

사라지지 않는 악취가 배여 하얀 가루가 될 것 같다

아무리 씻어도 막차 수산시장 버스의 히터바람에 실려 오는

심한 생의 비린내, 창백한 뒤꿈치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곁눈질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응달져 있다

나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하얗게 센 달을 보며

가장으로서의 삶이 환히 뜬 달빛을 손으로 매만진다

이런 게 가능해서 새벽에 희뿌연 달빛이 뜨는 것인지도 모른다

꼬리 없는 소행성으로 점령당한 길가를 나란히 걷는다

아버지는 여전히 쓰레기봉투를 바스락 바스락

못 쓸 마음을 버리고 있다 어둠이 엉겨 붙은 거리

창백하게 둥글어지는 아버지가 돌아오면

아버지에게 술 냄새만큼 알싸한 밤의 향기가 난다

떨어져 나간 모서리만큼 귀퉁이를 붙여주는 어머니

파리한 얼굴을 보듬는 가족의 손으로

아버지는 달동네에서 가장 커다란 보름달, 안이 밝은 천구가 된다







[동상] 무량수전의 미소 / 이상원

[동상] 부석사 하는 말씀 / 권소영

[동상] 노인의 악보 / 최형만



◇가작= △‘너희는 건너지 못하리라’ 문종하(대구 달서) △‘포구에서 맴돌다’ 정예령(대구 북구) △‘수묵화를 그리다’ 고명숙(경기 군포) △‘첨벙거리는 아가미’ 최선옥(서울 성북) △‘지렁이의 삶’ 정이윤(서울 구로) △‘이슬꽃’ 전 목(경북 경산) △‘가을에게’ 이생문(경기 화성) △‘천오백년 노목을 보다가’ 김미경(대구 수성) △‘월요일의 대본’ 김향미(서울 강남) △‘슬픈자리’ 김미화(경북 경산) △‘지독한 사랑’ 손정숙(경북 포항) △‘금추’ 이예진(대구 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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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소금이 온다 / 김은순

 

장독대 그늘을 짓는 봉숭아 터질 무렵

소금이 온다

신한 비금도에서 소금 가마니를 등진 노새가 온다

수평선에 뜬 해와 달도 지고 온다

비금도와 도초도 사이를 유영하는

숭어와 농어 냄새가 함께 온다

 

밑창 구멍 뚫린 빈 항아리에

소금을 가득 채워 놓으면

종일 출렁이던 비금도 바다가 빠져 나온다

 

어머니는 빠져나온 비금도를 돌배나무꽃이라 불렀다

소금이 와서 바다 향으로 가득 채우던 날

항아리가 깨졌다

소금은 날짐승 길짐승도 찾는다지

발굽과 손톱이 빠지지 않기 위한 까닭이라지

 

이따금 돌배나무에서 배꽃이 피었는데

바다 냄새가 났다, 그런 날엔

부리 다친 새들이 소금꽃을 찾아 날아왔다

 

 

 

 

[금상] 연 / 최규목

 

외줄 위 한 잎, 영토가 광활하다

펄에 뿌리박고 뭍으로 줄기 밀어 올려

우레에 아픈 잎새 청약잎이 벌판이다

 

삼족오 깃발 세우고,

산맥너머 초원으로 군마 달리던 땅이다

새벽마다 펄펄 펴는 향기 진한 홍련백련

어느 왕조가 건져 올린 우리 얼인가

 

줄기 위의 잎사귀에 그늘이 진다

 

넓고 큰 잎에 요동이 진다

백가쟁명 해법들에 분단이 울고 진

 

* 요동 : 요하의 동쪽, 고구려의 옛 땅

 

 





[은상] 양각 / 최류빈

 

양각은 이기적, 배경을 뒤로 보내면서야 탄신한다. 섬처럼 돋아 홀로 잊혀지지 않으려 모든 양각은 듬성듬성 돋아나 정수리를 밝게 빛낸다고 믿었다. 낮게 깔린 저 먼 것들을 뒤로한 채 우뚝 솟은 솟대가 되어 혈관 같은 몸체로 교신하는. 양각의 묘선描線은 때론 날카로운 고함 힘껏 도드라져 볼록한 마루를 타고 내려오는 곡면마다 사연을 주워 담는다. 양각은 그렇게 거칠게 성난 바다의 높은 파고처럼 가라앉을 일 없을 줄, 하나의 장단이자 음각의 대변인 되어 주저앉을 일 없을 줄 알았다

 

불쌍한 양각은 홀로 등대가 되어 스스로 정수리가 되길 자처한다. 빛을 발하는 양각은 하나의 광-원이지만 밝게 빛나는 전력은 소진될 날 기다리는 죄수의 애달픔, 양각은 마모되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의 모질게 용맹한 실선과 함께 막 태어난 새처럼 말랑거리는 주둥이 오물거리는 저 먼 뒤편의 음각들, 케케묵은 둥지에 겹겹으로 쌓아놓고 양각은 몸을 치장하고 밤바다로 나선다. 이기적인 양각은 호흡기관의 말단 책이 들이키는 공기로 먼저 목축이고, 도장의 마찰력으로 선두에 서 용맹하게 지휘한다. 이기적인 양각은, 이기적인 양각은 한 보 앞장선 만큼 고꾸라질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슬하에 헤일 수 없는 것들을 쓸어담고 홀로 이기적인 ………






 

[은상] 이를 뽑다 / 유영희

 

좀 전까지도 아무렇지 않던 이가

들이댄 거짓말 탐지기에 쏙 뽑혀 나왔다

변명할 틈 없던 입이 벙어리장갑처럼 불룩해졌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랑 한번 하지 못한 죄

결백을 주장하기엔 너무 늦었다

 

내 몸에 싱크홀 하나 생겼다

뿌리 뽑힌 나무의 구덩이

이장을 한 구멍 같기도 하고

숭숭 뚫린 골다공 같기도 하다

 

실뿌리 끝에서 뽑아 올린 수액이 말라가는 동안

함박눈 내리던 정월 초닷새

훌쩍 떠난 아버지가 욱신거린다

 

부식된 뿌리를 감추고 살았을 아버지

탐지기를 들이대기도 전 쓰러져버린 고사목은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깎여나갔다

마취 풀리자 통증으로 피어나는 구멍

무너진 한쪽 언저리를 끝내 실토할 수 없다





 

[동상] 공기방울, 당신은 올라가고 / 박준영

 

인터넷은 커피를 마실 것이고 하루는 뜨거울 것이다 그래 날이 밝았어 가볍게, 가볍게 오늘은 가볍게 떠오르고 싶어

 

스위치를 켜고, 덜 깬 물들이 아침을 끓인다 유리 포트기 너머 조용한,

 

한판 승부, 물기둥과 공기방울의 튀기는, 커피향이 짙게 퍼진다 모닝커피 한잔에 숨을 쉬는 유니폼들, 소리는 커지고 빌딩은 높아간다

 

오후의 사무실은 강철발굽 닮은 포트기 안의 발광

 

, 뜨거!

 

비명은 방울과 충돌한다 물, 불이 어울러 기포는 기포로 들끓고, 거품 구겨지는 소리는 점점 가늘어진다

 

죽다 남은 달이 부글거리며 서쪽으로 하얘간다 뱃속에서 부레를 넣고 두둥 비행을 꿈꾸던 유니폼들이 추락한다 보름달이 뜨는 그믐

 

당신은 올라가고 나는 추락하고

 




 

[동상] 나흐트 무지크 / 김진열

 

하늘과 땅을 잇는 비가 내리는 날

골목에 파르르 줄 끊어진 기타

추락의 몸짓에도 꿈이 있었을까

떨어지는 빗방울은 울림통 위에 톡톡

밤이 깊어지면 누웠던 몸 일으켜

물의 율동이 어우러진 마이너 합주

통각을 잊기 위한 몸놀림이다

흠뻑 젖은 몸으로 불협화음을 이루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갈래 갈래의 춤

빗줄기 강해지면 감정은 골이 지고

잦아들면 그리운 음색으로

목울음 짙게 토해내는 세레나데

과격한 선율들이 천천히 힘을 거두고

풀어놓은 밤바람을 듣던 굽은 골목

저만치 무료했던 안마소 간판이 깜빡 인다

아픈 만큼 상처를 노래했고

깊어진 흉터는 공명통이 되었다

 

*나흐트 무지크 : 모차르트 세레나데 13.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에서 인용.

 

 


 


 

[동상] 나는 내일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 손지형

 

기억되고 싶어요

어제 나를 본 이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 홀로 낮잠이나 자야 한다 해도

나는 내일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 신념으로 나는 어제도 살아내었고 오늘도 살아왔어요

내 요동치는 심장과 저 가느다란 시계 침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거겠죠.

나는 그저 이 시계 침과 박자를 맞추던 내 심장을 기억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박동을 기록하고 싶어요.

 

이 다음에 누군가는 시계 소리가 아닌

누군가의 심장 박동에 맞춰 살아갈 수 있기를.

나는 오늘 밤도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쓸모없는 낱말들로

내 오랜 천장을 채웁니다.





 


[가작] 마른 빨래 / 이남훈

 

고향집 뒤뜰

널어놓은 노모의 흰 저고리가

줄을 탄다

봄볕에 잘 마른 몸

소맷자락 흔들며 어깨춤을 푼다

 

좁은 어께가 줄 위에서 펄럭인다

검정 치맛자락에 얹힌 바람이

공중제비를 돈다

묵은 춤사위가 펼쳐질 때마다

신명난 이팝나무 꽃잎이

중모리로 강물 위에 뿌려진다

 

늘 젖은 옷으로 걸어왔던

어미에게도

저리 가벼운 어깨가 있었던가

옷고름도 여미지 못한

흥이 있었던가

 

바지랑대가 허리를 굽혀

눈물 마른 옷을 내린다

물기 가신 외줄에서

어미의 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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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

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실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

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

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

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한 마리 부처 어깨 위에 앉아 우는데

어디서 들리는 걸까

 

佛紀의 긴 시간 속에서 누군가 읊는 독경소리

 

古物寺 앞을 지나가는 노승의 신발 무게가 독경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금상]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 사윤수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해일처럼 허공에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검은 바람처럼 휘도는 새 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움큼씩을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 덩이 같았다. 그러나 저 덩이는 식물성이라기보다 유리질로 비쳤다. 응집할 때마다 와장창창 부딪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주검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렬 편대로 비행할 때는 수 백 마리 날갯짓이 허공의 살과 뼈 사이를 빠져나갔다.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허공을 저몄다. 그럴 때면 까마귀 떼가 까무룩 보이지 않았다. 허공의 비늘만 일제히 일어섰다가 차례로 쓰러졌다.

 

허공에도 숨을 곳이 있을까? 아니면 까마귀들은 구름 속에 들었거나 산을 넘었을까? 그 순간, 외각을 찢으며 까마귀 떼가 다시 나타났다. 물줄기를 뿜어 올리듯 높이 솟구치더니 이번엔 초서 갈필의 붓끝으로 내리 꽂는다. ! 저게 다 문장이라면 똑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 검은 색만으로도 변려체를 구사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사이에 새 떼는 붓을 버리고 이제 거대한 지느러미를 이루며 헤엄친다. 유유했다. 어두워 오는 허공을 맺고 풀며,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까마귀 떼 군무는 지칠 줄을 몰랐다.

 

허공의 새 떼는 바닷속 물고기 떼처럼 날고 바닷속 물고기 떼는 허공의 새 떼처럼 헤엄친다. 사람이 바다를 바다라 이름 붙이고 허공을 허공이라 이름 붙였는데 허공과 바다가 같고 새와 물고기가 다르지 않았다. 저 보름까매기들이 날아오민 보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 팔순 노파가 구시렁거리며 어벙저벙 방으로 들어갔다.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를 때는 허공이 비단이며 까마귀 떼가 가위이고 까마귀 떼가 종횡으로 나풋나풋할 때는 추월적막 흑공단 같으니, 이 비단타령은 어느 게 비단이고 어느 게 가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어둑시근 다 저물어서 까마귀 떼는 이제 소지(燒紙)한 재를 흩뿌린 듯 가물가물했으므로, 시나브로 또 어느 게 까마귀고 어느 게 어둠인지 나는 망막했다.

 

별들이 톳여()**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 서부렁섭적 세발낭릉 흑랑릉(細髮浪綾 黑浪綾) -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발이 아주 가늘고 얇은 비단, 검은 비단을 말함. 추월적막 흑공단도 비단이며 판소리 <비단타령>에서 차용함.

 

** 톳여() - 바다 수면 위에 드러난 바위의 윗부분.


 

 




[은상] 흔들리는 방 / 송향란

 

틈새가 깊은 비와 비 사이, 주민 게시판이 흔들리고 있다

해독할 수 없는 후줄근한 생이 차가운 벽에 무수히 꽂혀 비린내를 풍긴다

허공을 딛고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

더듬이를 세운 방들이 낯선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간다

날마다 끈질기게 늘어나는 저 뜨내기 가족들,

전세와 월세는 오래된 약속처럼 부풀어 오른다

속을 다 드러낸 방들이 길바닥 곳곳에 쓰러져 있다

떠도는 발자국들이 아득한 얼음의 시간을 지나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시간을 털어내듯 무너져 내리는 빗방울들,

흘러가는 풍경 속 풍경이 된다

먼 길 돌아온 가시 달린 숫자들이 빈 꽃을 더듬고 있다

 

 

 

 

[은상] 낡은 생계 / 박복영

 

동네 이발소에 새 소파를 들이는데 밖에 내놓은 낡은

소파의 헤진 가죽이 밥사발을 빼앗긴 家長의 표정이다

 

어쩔거나, 오래도록 수저가 긁었을 가족의 내력이 팽개쳐졌으니

 

다시는 뼈 빠지게 밥을 구하지 않겠다는 듯 뱃고래가 푹, 꺼져 있다

 

낡은 소파에서 쓸모없어진 치열했던 시간들을 뽑으니

주저앉은 스프링이 틀니 뺀 잇몸 같다

 

낡았다는 말이 착각과 배신사이 바닥에 그림자를 내동댕이 친다

눈물 나는 이별 행사다

 

가 유행 지난 빛깔이라며 툭,, 낡은 소파의 감정을 쌓아 올린다

 

소화제 알약처럼 후두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어떤 설마가 재촉하듯 허물어진다






[동상] 압화 / 박종일

 

당신에게도 봄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슬펐다

나 또한 당신의 봄을 보지 못했다

 

곰팡내 나는 사진첩에

당신은 건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펼쳐보지 않아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다

시들어버린 조팝꽃 같은

당신을

그 봄을

빛바랠 사진으로라도 남겨놓고자 한다

 

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꾹 눌러줘야 한다

 




 

[동상] 보랏빛, 그 꽃잎 사이 / 김우진

 

1

고향에서 감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감자 꽃에 앉았던 땡볕도 테이프에 끈적끈적 묻어있다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던 바람도 따라왔다

 

끼니마다 밥상에 고향의 안부가 올라왔다

 

어느 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몇 개 남은 감자들이

허공을 향해 하얀 발을 뻗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고 발들이 서로 엉켰다

흙이 그리운 감자들을 고이 화분에 묻어주었다

 

2

보랏빛, 그 꽃잎 사이로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어머니가 보인다

밭고랑에 엎디어 감자밭을 매다가

어린 내 발소리에 허리를 펴던,

찢어진 검정고무신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흙 묻은 발가락,

오늘 그 어머니를 만났다

 

뻐꾸기시계가 감자 꽃을 물고 온 날이었다






 

[동상] 젓가락 / 전진욱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

숟가락보다 가벼워서 더욱 좋다

둘이 모여 한 쌍을 맺고

허다히 헛발질하며 사는

먹고 사는 일이 다 젓가락질이다

 

11자 가지런한 젓가락 속에

X자를 그으며 할복하고 싶은 젓가락도 있다

복권 같은 먹이를 만나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놓치지 않고 꼭 집어보려고

나름의 형태로 내미는 더듬이 두 짝

 

숟가락의 무게를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날은

젓가락을 든다

더듬더듬 그렇게 눈뜬 봉사처럼

헐벗은 집게로 쪼잔하게 집은

겨우 한 점

 

무수한 헛발질에서 건져 올린

생을 꼭 붙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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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윤옥란

 

매미 허물이 상수리나무 허리를 움켜잡고 있다
속이 텅 빈 껍질은 한때 어둠에서 지냈던 몸이다

땅속에서 꿈틀거리며 말랑거리던 투명한 빈 몸,
수직 금 긋고 등가죽 찢고 나왔다

말랑거리던 몸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적들의 신호를 알려주는 은빛 날개의 보호막은 점점 두꺼워진다
 
비바람 몰아쳐도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천상의 소리 듣는다
상수리나무 빈집에서,
 
지금 나는 바람도 햇빛도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골방에서
가시 같은 눈초리와 습한 외로움을 등에 업고 있다
 
낮에 두고 온 무거운 짐들은 잠시 무게를 떠났다가
귀가 열리는 순간 다시 생의 관절을 앓는다
 
소리를 떠난 적 없는 귀는 듣는다
영영 아물지 않는 산고의 가로줄무늬 빈집을 내려다보며
종일 여름을 등에 업고 반짝이는 소리를,
 
환상이 숨 쉬던 집
제 살의 온기를 묻고 나오던 집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내 온몸의 뼈가 뜨끔하다
 
어둠을 털고 나온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매미의 미라는 시의 표본,
내 삶의 도감이다

 

 

 

 

[금상] 어화 / 이항로

 

포구 옆 미래호에 올라타는 선원들의 얼굴

오늘의 기지가 안개처럼 피어난다

물살 가르며 나아가는 선박 위

뿌연 달무리 머리를 걸친다

 

집어등 제 몸 밝히는 순간 피어나는 어화 한 송이

어두운 바다 위 배 한 척 꽃이 되는 순간이다

지나온 시간들 불거진 심줄로 솟아난다

 

동해의 아침해 몸을 드러내는 시간

머리 묶고 나오는 어시장 여인들

만선이라는 이름의 미래호

해안선 저 끝에서 어화둥둥 다가온다

 

 

 

 

[은상] 천국 가는 버스 / 고정옥

 

호계 오일장에 늦가을 그림자가 길다

겨우살이 찬거리를 사들고

버스정류장에 섰는데, 푸성귀 너덜거리는

보퉁이 안은 할머니가 슬몃슬몃 와서

(예서 뻐스타면 천국 가능교?)

 

질그릇 같은 낯빛에 목이 축 늘어진 윗도리

마른 나무껍질 같은 맨발이 헐렁하게 든 고무신

방향 없이 날리는 백발은 이미 이승사람이 아니다

(우짜꼬, 뻐스타야 하는데 차비가 모지런다.

백 원만 꿔줄 수 있능교?)

 

동전을 꼭 쥔 뭉텅한 손, 까만 손톱 때를 보며

천원을 내밀자, 아니라며 백 원만 있으면 된다며

한사코 돌려준다

버스비가 천원 넘는데 백 원으로 천국까지

어찌 가냐고, 천국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갖고 가라며 천원을 던지듯 주고

때마침 온 버스를 탔다

 

영악한 세상 마냥 천국도 할머니에게

내어줄 빈자리 하나 없으면 어쩌나

동정심 그득한 눈길로 멀어지는

호계장을 바라보는데…

 

할머니가, 버스에 오른다

천국이 아니라,

천곡 가는 버스에 오른다

 

다구진 꾸짖음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탁 친다

(젊은 년이 늙었다고 산송장을 맨들라 하네. 귓구녕도 막힌 년이…)

 

 


 

[은상] 물의 혀 / 김재근

 

나의 혀는 길다

 

긴 혀가 강바닥에 가라앉아 자갈을 핥는다

 

밤이 스스로 어두워지듯

물이 물에 젖어 물집이 생기듯

물은 자갈을 안고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나는 강가로 간다

물결이 어두워지는 소리 들으려

물가에 핀 꽃들이 어두워지는 소리 들으려

 

물이 혀를 깨물자 물결이 인다

 

꽃의 색을 이해하기 위해 물의 음악을 들어야 할 시간

 

허공에 누운 별이 바람에 몸을 씻고

물속을 비출 때

꽃의 그림자는 찰랑찰랑 물장구치며 나를 바라본다

 

꽃의 나신을 본 건 처음이었으나

나는 물방울이 꽃을 야금야금 가려주길 기다린다

 

별빛이 이울어

이제 물의 사랑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꽃에게 묻는다, 우리에게 아직 향기가 남아 있냐고

 

그때 꽃은 젖은 그림자를 물가에 두고 두 눈을 씻으며 걸어 나온다

 

뽀얀 안개가 젖처럼 물 위에 흐를 때 꽃의 입술은 붉어지고





 

 

[동상] 버티기 / 서복돌(서영림)

 

도심의 공간을 차지하던 저녁 노을이

상가들의 불빛에

서서히 밀려나는 시간,

 

아버지와 아들이 껄끄럽게 마주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 아버지, 언제까지 알하실 껀데요?

- 암튼 정년까지 버티고 촉탁직이 돼도 계속 버텨야지!

야, 애비 애기하지 말고, 넌 어쩔거니?도대체 몇 년째야!

- 암튼, 저도 아버지 그만 두실 때까지 버텨야지요.

- … .

이 아버지와 아들, 서로 버틸 때까지 껄끄럽게 밥상을 마주할 것 같다.

 

어스름이 쌓여

점점 밤으로 가는데

하늘은 고요하다.

 

 

 

 

 

 

[동상] 모래의 달 / 이희섭

[동상] 무를캐다 / 임미형

[가작] 슬픈 그림 / 황애라

[가작] 타인 / 최성연

[가작] 초식동물의 눈동자는 생각한다 / 조주안

[가작] 짐승들은 무사히 동면에 들었을까 / 차진화

 

[가작] 폭식주의자 / 박춘남

 

삭혀지지 않은 울분이 끼어

복사기는 작동을 멈추었다

간밤을 뭉텅 잘라먹고

그렁그렁 아파오는 목

먼저 삼킨 코끼리 무리들 납작해져서

보아 뱀처럼 다음 역으로 가야 할 텐데

부드럽게 뱉어지지 않는다

꾸역꾸역 먹혀지길 원하는 코끼리 앞에서

전철 같은 내 목은 부식되고 있었다

흘러들길 바라는 건 무국 한 사발

후루룩 뜨거워서 더 시원해라고 말해주는

솜씨 좋은 당신을 난 기다려야 하지

어떤 고장이란 표식도 없이

이미 동전을 삼켜버린 커피자판기 마냥

툴툴 걷어차는 발길질에 막혀버린 나의 퇴로(退路)

AS 수리공을 불러 두었으니

머잖아 초인종은 울리겠지만

막힌 속을 난 자꾸만 들어다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던 식습관이

끄르륵 끄르륵 소화되지 못한 채

코끼리의 비명으로 남았다

 

 

 

[가작] 도면 위의 집 / 정병율

[가작] 허투루 / 김순철

[가작] 참회 / 강윤순

[가작] 움파 / 홍성남

[가작] 까만옥돌의 노숙자 / 김윤희

[가작] 장미와 장마 / 황서하(황명희)

[가작] 길 / 오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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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부문 당선작] 최정연

 

금상

정열식물원(최정연 경북 영덕)

 

 

이곳에 와 본 것 같아

 

 

 

저 프리지어 그늘 아래 나 노랗게 꽂혀있네

 

공터의 노랑나비 몇 겹의 쪽문 열고

 

정열식물원으로 들어가네

 

잎 숨결 따라 하늘하늘 패인 길을 헤매네

 

쪽문마다 노란 등이 켜지네

 

  

 

문이 열리네

 

쇼윈도우 저 편, 알몸으로 진열된 내가

 

또 몇 개의 나로 분재되고 있네

 

 

거울 속 수 만개의 꽃눈들이 화르르 타오르다

 

한 방울의 눈물로 출렁, 허공에 내가

 

매달려 있네 키득키득 웃고 있네

 

온몸으로 엉키고 있네

 

 

 

뿌연 앞산의 소문처럼 꽃 지네

 

마음 한 줄기 물관을 지나

 

너를 버리러 간 사월 한 때, 정열식물원 앞에서

 

나 문득 푸르고 정다웠던 나를 보았네

 

꽃들의 머리 위로 노란 눈물 뚝뚝 흘러내리는

 

나비야, 나비야

 

 

 

나 싱싱한 맨몸으로 오래오래 꽂혀 있었네

 

 

 

 

 

 

 

 

최정연씨 "축제의 자리 초대받는 행운 주셔서 감사"

 

사람들이 사라진 철지난 바다는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는 듯하다. 부서지고 다시 뛰어오르고 또 하얗게 녹아내리는 그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마치 새로운 생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오래 전 모교의 스승은 늙지 않는 시를 쓰라고 제자들에게 조용히 가르쳤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지 않고 밤톨 같은 아이들 가갸거겨 장단 맞추며 나는 멜랑꼬리 신부로 늙어가는 중이었다.

 

손잡이가 떨어져버린 질그릇 속의 선인장을 쓰윽 뽑아 흙을 털어주고 원예 치유 프로그램 메뉴얼대로 가시꽃을 옮겨 심는다. 돌보지 않은 가시선인장이 움찔 놀라며 묻는다. 누구세요? 난 동굴에서 지금 막 나왔어. 눈이 부셔. 그렇게 날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축 북방운에 큰 연고는 없으나 모든 일에 재수가 돌아오리라, 몽땅 털리고도 또 속아주며 오늘의 운세를 점쳐본다. 당신의 이름 풀이까지 훑어보며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원한다고 예쁜 내 이름으로 주문을 건다. 유배지 같은 이곳에서 들판에 깨를 심으니 들깨가 되고, 고구마를 심으니 산노루가 뛰논다. 산 들 바다가 모두 기름지다. 그야말로 내 삶의 체험현장이다.

 

축제의 자리에 초대받는 행운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내 유년의 모든 스승인 해달별 너희도 오늘 안녕? 고운 목소리로 허밍하며 밖으로 나를 끌어내 주신 '화림/글함문학' 동인들 고맙습니다. 나의 영원한 아군인 남편 혁전씨 날마다 안쓰럽지만 어디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또 고맙네요. 그리고 내 미래의 든든한 후원자들 한결, 한성, 엄마를 진짜진짜 부탁해. 사랑해.

 

 

 

심사평 "신선한 시각과 뛰어난 언어구사 능력 돋보여"

 

우리 시는 많은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시인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 시가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 마는 시들이 많다. 시가 의미 있는 것이 되자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좋은 예로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면,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를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지붕에 비유한 첫 행의 이미지는 얼마나 눈부실 만큼 정밀하고 치밀합니까. 이와 같이 시가 난해해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에라도 닿아있어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기존의 우리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주는 구실을 하게 된다.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정열식물원', '기억 분실', '유전 혹은 유혹', '뿔의 기억'이상 네 편이었다. 이 가운데 '유전 혹은 유혹''뿔의 기억'은 시법(詩法)이 독특하고 개성적인데 반해,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은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기억 분실'은 다소 거칠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매끄럽거나 산뜻하게 정리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대상을 투시하는 눈이 날카롭다. 상상력도 풍부하다.

 

'정열식물원'은 시각이 미세하고 미명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뛰어난 언어구사는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확인시켜 준다. 다만 이 작품의 시적 성취도를 다소 방해하는 난해시적 요소예컨대, '쇼윈도우 저 편, 알몸으로 진열된 내가 / 또 몇 개의 나로 분재되고 있네'와 같은 구절을 걷어낸다면, 이 시의 완벽성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좋은 시인의 출현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랄 뿐이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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