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고물사 / 이봉주
부처가 고물상 마당에 앉아 있다
금으로 된 형상을 버리고 스티로폼 몸이 된 부처
왕궁을 버리고 길가에 앉은 싯다르타의 맨발이다
바라춤을 추듯 불어온 바람의 날갯짓에 고물상 간판 이응받침이 툭 떨어진다
반야의 실은 낮은 곳으로 가는 길일까
속세에서 가장 낮은 도량, 古物寺
주름진깡통다리부러진의자코째진고무신기억잃은컴퓨터몸무게잃은저울목에구멍난스피커
전생과 현생의 고뇌가 온몸에 기록된 낡은 경전 같은 몸들이 후생의 탑을 쌓는다
금이 간 거울을 움켜쥐고 있던 구름이 후두둑 비를 뿌린다
뼈마디들의 공음空音, 목어 우는 소리가 빈 병 속으로 낮게 흐른다
오직 버려진 몸들만 모이는 古物寺
스티로폼 부처는 이빨 빠진 다기茶器 하나 무릎 아래 내려놓고 열반에 든다
먼 산사에서 날아온 산새 한 마리 부처 어깨 위에 앉아 우는데
어디서 들리는 걸까
佛紀의 긴 시간 속에서 누군가 읊는 독경소리
古物寺 앞을 지나가는 노승의 신발 무게가 독경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금상] 그 겨울 저녁 무렵 허공에 까마귀 떼가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날아들어 / 사윤수
수평선에 눈썹을 걸고 있던 그 겨울 저녁 무렵, 까마귀 떼가 해일처럼 허공에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모였다가 나부룩 흩어지고, 싸목싸목 모였다가 검은 바람처럼 휘도는 새 떼. 흩어질 때는 누가 해바라기 씨 한 움큼씩을 허공에 뿌리는 거 같고 모일 때는 커다란 마른 고사리 덩이 같았다. 그러나 저 덩이는 식물성이라기보다 유리질로 비쳤다. 응집할 때마다 와장창창 부딪쳤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주검들이 허공에서 후두두둑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일렬 편대로 비행할 때는 수 백 마리 날갯짓이 허공의 살과 뼈 사이를 빠져나갔다.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허공을 저몄다. 그럴 때면 까마귀 떼가 까무룩 보이지 않았다. 허공의 비늘만 일제히 일어섰다가 차례로 쓰러졌다.
허공에도 숨을 곳이 있을까? 아니면 까마귀들은 구름 속에 들었거나 산을 넘었을까? 그 순간, 외각을 찢으며 까마귀 떼가 다시 나타났다. 물줄기를 뿜어 올리듯 높이 솟구치더니 이번엔 초서 갈필의 붓끝으로 내리 꽂는다. 오! 저게 다 문장이라면 똑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어 검은 색만으로도 변려체를 구사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사이에 새 떼는 붓을 버리고 이제 거대한 지느러미를 이루며 헤엄친다. 유유했다. 어두워 오는 허공을 맺고 풀며, 서부렁섭적 세발랑릉 흑랑릉 까마귀 떼 군무는 지칠 줄을 몰랐다.
허공의 새 떼는 바닷속 물고기 떼처럼 날고 바닷속 물고기 떼는 허공의 새 떼처럼 헤엄친다. 사람이 바다를 바다라 이름 붙이고 허공을 허공이라 이름 붙였는데 허공과 바다가 같고 새와 물고기가 다르지 않았다. 저 보름까매기들이 날아오민 보름이 불거나 비가 올 징조인디 저거영 마농이영 보리영 뜯어먹음쪄. 팔순 노파가 구시렁거리며 어벙저벙 방으로 들어갔다.
까마귀 떼가 허공을 가를 때는 허공이 비단이며 까마귀 떼가 가위이고 까마귀 떼가 종횡으로 나풋나풋할 때는 추월적막 흑공단 같으니, 이 비단타령은 어느 게 비단이고 어느 게 가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날까지 어둑시근 다 저물어서 까마귀 떼는 이제 소지(燒紙)한 재를 흩뿌린 듯 가물가물했으므로, 시나브로 또 어느 게 까마귀고 어느 게 어둠인지 나는 망막했다.
별들이 톳여(礖)**처럼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 서부렁섭적 세발낭릉 흑랑릉(細髮浪綾 黑浪綾) -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발이 아주 가늘고 얇은 비단, 검은 비단을 말함. 추월적막 흑공단도 비단이며 판소리 <비단타령>에서 차용함.
** 톳여(礖) - 바다 수면 위에 드러난 바위의 윗부분.
[은상] 흔들리는 방 / 송향란
틈새가 깊은 비와 비 사이, 주민 게시판이 흔들리고 있다
해독할 수 없는 후줄근한 생이 차가운 벽에 무수히 꽂혀 비린내를 풍긴다
허공을 딛고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
더듬이를 세운 방들이 낯선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간다
날마다 끈질기게 늘어나는 저 뜨내기 가족들,
전세와 월세는 오래된 약속처럼 부풀어 오른다
속을 다 드러낸 방들이 길바닥 곳곳에 쓰러져 있다
떠도는 발자국들이 아득한 얼음의 시간을 지나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시간을 털어내듯 무너져 내리는 빗방울들,
흘러가는 풍경 속 풍경이 된다
먼 길 돌아온 가시 달린 숫자들이 빈 꽃을 더듬고 있다
[은상] 낡은 생계 / 박복영
동네 이발소에 새 소파를 들이는데 밖에 내놓은 낡은
소파의 헤진 가죽이 밥사발을 빼앗긴 家長의 표정이다
어쩔거나, 오래도록 수저가 긁었을 가족의 내력이 팽개쳐졌으니
다시는 뼈 빠지게 밥을 구하지 않겠다는 듯 뱃고래가 푹, 꺼져 있다
낡은 소파에서 쓸모없어진 치열했던 시간들을 뽑으니
주저앉은 스프링이 틀니 뺀 잇몸 같다
낡았다는 말이 착각과 배신사이 바닥에 그림자를 내동댕이 친다
눈물 나는 이별 행사다
황氏가 유행 지난 빛깔이라며 툭,툭, 낡은 소파의 감정을 쌓아 올린다
소화제 알약처럼 후두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어떤 설마가 재촉하듯 허물어진다
[동상] 압화 / 박종일
당신에게도 봄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슬펐다
나 또한 당신의 봄을 보지 못했다
곰팡내 나는 사진첩에
당신은 건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펼쳐보지 않아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다
시들어버린 조팝꽃 같은
당신을
그 봄을
빛바랠 사진으로라도 남겨놓고자 한다
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꾹 눌러줘야 한다
[동상] 보랏빛, 그 꽃잎 사이 / 김우진
1
고향에서 감자 한 상자를 보내왔다
감자 꽃에 앉았던 땡볕도 테이프에 끈적끈적 묻어있다
호미에 딸려 나온 하지의 낮달과
밭고랑을 지나던 바람도 따라왔다
끼니마다 밥상에 고향의 안부가 올라왔다
어느 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몇 개 남은 감자들이
허공을 향해 하얀 발을 뻗고 있었다
먼저 나가려고 발들이 서로 엉켰다
흙이 그리운 감자들을 고이 화분에 묻어주었다
2
보랏빛, 그 꽃잎 사이로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른 어머니가 보인다
밭고랑에 엎디어 감자밭을 매다가
어린 내 발소리에 허리를 펴던,
찢어진 검정고무신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흙 묻은 발가락,
오늘 그 어머니를 만났다
뻐꾸기시계가 감자 꽃을 물고 온 날이었다
[동상] 젓가락 / 전진욱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
숟가락보다 가벼워서 더욱 좋다
둘이 모여 한 쌍을 맺고
허다히 헛발질하며 사는
먹고 사는 일이 다 젓가락질이다
11자 가지런한 젓가락 속에
X자를 그으며 할복하고 싶은 젓가락도 있다
복권 같은 먹이를 만나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놓치지 않고 꼭 집어보려고
나름의 형태로 내미는 더듬이 두 짝
숟가락의 무게를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날은
젓가락을 든다
더듬더듬 그렇게 눈뜬 봉사처럼
헐벗은 집게로 쪼잔하게 집은
겨우 한 점
무수한 헛발질에서 건져 올린
생을 꼭 붙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