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윤옥란
매미 허물이 상수리나무 허리를 움켜잡고 있다
속이 텅 빈 껍질은 한때 어둠에서 지냈던 몸이다
땅속에서 꿈틀거리며 말랑거리던 투명한 빈 몸,
수직 금 긋고 등가죽 찢고 나왔다
말랑거리던 몸이 햇빛에 닿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
적들의 신호를 알려주는 은빛 날개의 보호막은 점점 두꺼워진다
비바람 몰아쳐도 떨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천상의 소리 듣는다
상수리나무 빈집에서,
지금 나는 바람도 햇빛도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골방에서
가시 같은 눈초리와 습한 외로움을 등에 업고 있다
낮에 두고 온 무거운 짐들은 잠시 무게를 떠났다가
귀가 열리는 순간 다시 생의 관절을 앓는다
소리를 떠난 적 없는 귀는 듣는다
영영 아물지 않는 산고의 가로줄무늬 빈집을 내려다보며
종일 여름을 등에 업고 반짝이는 소리를,
환상이 숨 쉬던 집
제 살의 온기를 묻고 나오던 집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내 온몸의 뼈가 뜨끔하다
어둠을 털고 나온 날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매미의 미라는 시의 표본,
내 삶의 도감이다
[금상] 어화 / 이항로
포구 옆 미래호에 올라타는 선원들의 얼굴
오늘의 기지가 안개처럼 피어난다
물살 가르며 나아가는 선박 위
뿌연 달무리 머리를 걸친다
집어등 제 몸 밝히는 순간 피어나는 어화 한 송이
어두운 바다 위 배 한 척 꽃이 되는 순간이다
지나온 시간들 불거진 심줄로 솟아난다
동해의 아침해 몸을 드러내는 시간
머리 묶고 나오는 어시장 여인들
만선이라는 이름의 미래호
해안선 저 끝에서 어화둥둥 다가온다
[은상] 천국 가는 버스 / 고정옥
호계 오일장에 늦가을 그림자가 길다
겨우살이 찬거리를 사들고
버스정류장에 섰는데, 푸성귀 너덜거리는
보퉁이 안은 할머니가 슬몃슬몃 와서
(예서 뻐스타면 천국 가능교?)
질그릇 같은 낯빛에 목이 축 늘어진 윗도리
마른 나무껍질 같은 맨발이 헐렁하게 든 고무신
방향 없이 날리는 백발은 이미 이승사람이 아니다
(우짜꼬, 뻐스타야 하는데 차비가 모지런다.
백 원만 꿔줄 수 있능교?)
동전을 꼭 쥔 뭉텅한 손, 까만 손톱 때를 보며
천원을 내밀자, 아니라며 백 원만 있으면 된다며
한사코 돌려준다
버스비가 천원 넘는데 백 원으로 천국까지
어찌 가냐고, 천국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갖고 가라며 천원을 던지듯 주고
때마침 온 버스를 탔다
영악한 세상 마냥 천국도 할머니에게
내어줄 빈자리 하나 없으면 어쩌나
동정심 그득한 눈길로 멀어지는
호계장을 바라보는데…
할머니가, 버스에 오른다
천국이 아니라,
천곡 가는 버스에 오른다
다구진 꾸짖음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탁 친다
(젊은 년이 늙었다고 산송장을 맨들라 하네. 귓구녕도 막힌 년이…)
[은상] 물의 혀 / 김재근
나의 혀는 길다
긴 혀가 강바닥에 가라앉아 자갈을 핥는다
밤이 스스로 어두워지듯
물이 물에 젖어 물집이 생기듯
물은 자갈을 안고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
나는 강가로 간다
물결이 어두워지는 소리 들으려
물가에 핀 꽃들이 어두워지는 소리 들으려
물이 혀를 깨물자 물결이 인다
꽃의 색을 이해하기 위해 물의 음악을 들어야 할 시간
허공에 누운 별이 바람에 몸을 씻고
물속을 비출 때
꽃의 그림자는 찰랑찰랑 물장구치며 나를 바라본다
꽃의 나신을 본 건 처음이었으나
나는 물방울이 꽃을 야금야금 가려주길 기다린다
별빛이 이울어
이제 물의 사랑도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꽃에게 묻는다, 우리에게 아직 향기가 남아 있냐고
그때 꽃은 젖은 그림자를 물가에 두고 두 눈을 씻으며 걸어 나온다
뽀얀 안개가 젖처럼 물 위에 흐를 때 꽃의 입술은 붉어지고
[동상] 버티기 / 서복돌(서영림)
도심의 공간을 차지하던 저녁 노을이
상가들의 불빛에
서서히 밀려나는 시간,
아버지와 아들이 껄끄럽게 마주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 아버지, 언제까지 알하실 껀데요?
- 암튼 정년까지 버티고 촉탁직이 돼도 계속 버텨야지!
야, 애비 애기하지 말고, 넌 어쩔거니?도대체 몇 년째야!
- 암튼, 저도 아버지 그만 두실 때까지 버텨야지요.
- …… .
이 아버지와 아들, 서로 버틸 때까지 껄끄럽게 밥상을 마주할 것 같다.
어스름이 쌓여
점점 밤으로 가는데
하늘은 고요하다.
[동상] 모래의 달 / 이희섭
[동상] 무를캐다 / 임미형
[가작] 슬픈 그림 / 황애라
[가작] 타인 / 최성연
[가작] 초식동물의 눈동자는 생각한다 / 조주안
[가작] 짐승들은 무사히 동면에 들었을까 / 차진화
[가작] 폭식주의자 / 박춘남
삭혀지지 않은 울분이 끼어
복사기는 작동을 멈추었다
간밤을 뭉텅 잘라먹고
그렁그렁 아파오는 목
먼저 삼킨 코끼리 무리들 납작해져서
보아 뱀처럼 다음 역으로 가야 할 텐데
부드럽게 뱉어지지 않는다
꾸역꾸역 먹혀지길 원하는 코끼리 앞에서
전철 같은 내 목은 부식되고 있었다
흘러들길 바라는 건 무국 한 사발
후루룩 뜨거워서 더 시원해라고 말해주는
솜씨 좋은 당신을 난 기다려야 하지
어떤 고장이란 표식도 없이
이미 동전을 삼켜버린 커피자판기 마냥
툴툴 걷어차는 발길질에 막혀버린 나의 퇴로(退路)
AS 수리공을 불러 두었으니
머잖아 초인종은 울리겠지만
막힌 속을 난 자꾸만 들어다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던 식습관이
끄르륵 끄르륵 소화되지 못한 채
코끼리의 비명으로 남았다
[가작] 도면 위의 집 / 정병율
[가작] 허투루 / 김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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