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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활짝 핀 꽃 외 4편 / 김이응

 

엄마는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말했다

 

초경을 하지 않은 계집애들과 몽정 없는 사내애들이

숨바꼭질하던 무싯날,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껌 씹는 언니들이 육낭거지 팔 때,

술래의 딸꾹질이 때맞춰 날 때,

 

고드래뽕이라며 한 마장쯤 내달리다

도깨비고비에서 넉장거리로 무너지던 저물녘

아카시아 단내가 이마를 스쳐올 때,

 

물음표를 떼어내며 첫사랑에 눈뜨던 초여름은

웅덩이마다 도롱뇽이 슬어놓은 알알이 몽글몽글해

무덤 많은 논틀밭틀로 질러가던 내 발소리에 놀라

오줌 지리고 돌아온 밤

 

담 없는 그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잉큼잉큼 뛰는 아랫배도 숨길 수 없어

너른 변두리로 쏘다닐 즈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아까징끼로 가슴팍을 문대던 엄마

 

아가씨야 가시에 찔렸다며 말 더듬던 내 동생

딸꾹질이 뚝 멈췄을 때,

 

질겅질겅 씹던 껌을 삼켜버린 무싯날은

내 몸에서도 아가씨 꽃 지린내 나던 날이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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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게르한스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파 말기입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X번째 투시 그림입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산호초 같기도 하고

썩은 과일의 씨앗 같기도 한

폴립들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여기

이 섬이 랑게르한스죠

 

달력에서 달아난 어느 일요일 오후

 

그림자에

쫓기던 화가는

내분비선에 실린

옛 애인의 검은 양산에 놀라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흥건해진 손바닥으로 피하지방층을 가리려 했다지만

 

자율신경계의 교란이란

단맛에 길들여진 원숭이의 눈썰미엔

어쨌거나 달달한 포도당의 장난인데

 

창녀의 웨딩드레스처럼 부푼

유령해파리

 

촉수처럼 뾰족한

바늘로

찔러댄

셀 수 없는 우점종들

 

보호색으로 가릴수록

빛에 빛을 더할수록

도드라지는 그늘에서

 

화가의 엉덩이가

바나나처럼 짓무르고 있습니다

 

피사체의 해부학 시간,

 

마취된 카메라

동공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십이지장에서 비장까지

리아스해안선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복제하셨습니까?

그럼, 캔버스에 사인해주시지요

 

 

사라진 옥상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언니들은 섬, 구름, 섬, 구름을 부르며 구름을 더 좋아했다

나는 발, 구름, 발, 구름을 굴리는 언니들이 더 좋아졌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날에도 언니들이 웃는다

바다 끝까지 간 사내는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믿으며

섬, 구름, 섬, 구름처럼 들뜬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구름다리를 건너다닌 옛날을 떠올리며 빨래를 밟으며

나도 옛날에 어린애였단 건 믿을 수 없지만 믿음직한 언니들은 껌을 씹는다

어느 호주머니에서 한숨이 빠져나올지 모르는 아주머니처럼

풍선껌을 부풀리다 손톱으로 터뜨린다

 

해바라기보다 키 큰 바지랑대 사이로 몰려다니는 먼지들

그 사이로 마르는 빨래들, 언니들은 마르지 않고

네 시가 되면 어째서 이 빠진 접시 같은 기분에 젖는지

접시꽃과 헷갈리는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수록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빨래가 젖는다 비옷이 없는데도 언니들은 더 이상 젖지를 않고

비 맞은 비웃음은 쓰지만 쓴웃음은 소리가 없는데

실소로 번지면 황혼이 올까? 황혼은 종기보다 더 잘 터질까?

그녀들이 웃는다 요실금 터진 할머니처럼 찔끔찔끔 웃는다

 

어느 그림자가 먼저 추락할지 모르는 초저녁

헤프게 웃던 언니들은 나팔꽃처럼 축 처진 외줄을 타고,

 

구름, 빵, 구름, 빵, 노래하다 사라진 그녀들은 언제나 빵이 더 필요했다

 

 

추파춥스

 

 

입술이 달려간다,

 

사랑을 받으러

혀를 밀고 들어간다,

 

맛의 자기장으로

추파!

 

불알을 꼭 쥐고

두드리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한 옥타브

실로폰의 행성들

 

살살 녹는 이것은 사탕이 아닌 사랑

색깔로 흥행을 점치는 이것은 사탄이 아닌 사랑

 

발상의 궤도부터 다른

삐딱한 달리*처럼

입자가속기에 태양계를 넣고

돌린다

 

혓바닥의 미뢰로 떨어진

별똥별은

쪽, 쪽, 터져

운석들의 달달한 스캔들은

은하수로

쫙쫙~

퍼져

 

두 볼이 부푼다,

 

젖꼭지를 빠는 힘으로

알을 삼킨

아이들의 꿈이 팽창한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여름 들판의 사탕수수처럼

사르르 녹는 사카린의 핵융합으로

붉은 데이지의 꽃술과 고양이 성운의 푸른 눈에

침을 바른 거짓말로 완벽하게 포장되는

 

삼킬 수 없는 추문!

살릴 수 없는 추락!

 

명왕성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이빨 빠진 아이들이 문상 온 날,

 

이것은 끈끈한 설탕의 죽음

이것은 뼈대만 남은 태양의 주검

 

실눈 뜬 아이들 머리 위로

개미 떼가 몰려든다

 

* 막대사탕 ‘추파춥스’의 포장지 로고를 데이지 꽃으로 디자인한 살바도르 달리 

 

 

 

물집의 성분

 

기분 따라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꽃밭,

그곳은 무섭게 고요했다

 

고요는 물끄러미의 동사,

곧 축축해지는 건조체였다

 

엄마는 활짝 핀 꽃을 옮겨

현실을 허구로 바꾸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날마다 내 귀에 꽂은 것은

바람,

 

곧 시들해지는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화였다

 

그래도 그곳은 꽃의 무덤,

눈물을 부어주면

신기루처럼 젖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는

부끄럼이 많고

부끄러움은 구멍 난 빤스 같았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어보는 엄마도

가랑이 사이에 낀 빤스 같아

구멍 많은 오아시스에

엄마를 꽂았다

 

너, 그렇게 살면 세상이 좁아져,

꽃들이 농담을 했다

 

피부가 차갑고 투명한 농담,

썰렁한 사후경직이 일어났다

 

진짜 같은 조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엄마는 죽어서도 엄마 같았다

 

다래끼를 터뜨렸을 뿐인데

구멍마다 엄마가 새어 나왔다

 

몽정처럼 부드럽게

 

 

[수상소감]

 

오래된 핸드폰은 자주 꺼진다. 핸드폰에 배터리를 연결해놓아도 금세 충전이 되지 않는다. 다급한 전화가 올 일 없는지라, 뭔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핸드폰이 꺼져 있어도 무심할 때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낯선 번호가 떠 있은 걸 발견했을 때는 핸드폰보다 더 오래된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충전을 해두었기에 그나마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통화음 다음으로 낯선 남성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여성분이시네요. 저는 이름 때문에 남자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네. 제 본명이 좀 그렇죠. 하지만 제 시는.......” “아뇨. 시도 중성적인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원고를 보내면서 즉흥적으로 만든 필명이 떠올렸다. ‘김이응’ 34대 종손 집 맏딸로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성은 버릴 수 없었고,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성은 꼭 넣고 싶었다. 하지만 두 개의 성 다음엔 뭘 넣지?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따라가니 답은 쉽게 구해졌다. 그리고 <시산맥>신인문학상에 응모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름을 썼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시를 발표할 때마다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될 줄은 전혀 예상은 못한 채 말이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 문학 공부를 시작할 즈음부터 내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이름으로 불려본 적 없는 괴물이 되면 사람들의 세상이 낯설게 보일 듯싶었다. 하지만 ‘괴물-되기’는 슬프고 외롭고 심지어 억울했다. 입이 있지만 정작 입을 열어야 할 때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에둘러 처음 문학에 입문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곳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연애 시편들과 함께 하는 봄날이었지만, 내 시를 읽어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봄날마저 떠났다. 그래도 여름날은 용케도 찾아와 비교적 젊은 내게 아동문학이란 밝은 옷을 건네주었지만, 나로서는 제아무리 잘 골라 입어도 어쩐지 빌려 입은 남의 옷만 같았다. 결국 나는 훌훌 벌거벗고 조용히 숲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한편 두려웠던 가을 숲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알아챌 수 없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시는 나다워졌을까? 쓰면 쓸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핸드폰을 바꾸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바꿀 생각이 없다. 이상한 고집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실은 시라고 끄적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벗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돌고 돌아 어렵게 되돌아온 원점인 시(詩) 마을에서 언젠가 찾아올 겨울을 맞이할 생각이다. 홀로 걷고 있던 내게 이름을 묻고 도반이 되어준 <시산맥>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뒤처져 걷고 있던 내게 관심을 가져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당선 소식에 그 누구보다 기뻐해 준 엄마가 잘 걷지 못하신다. 한 가지 놀라운 건 내가 시 쓰는 걸 그 누구보다 반대했던 아버지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내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그 두 분께 ‘김이응’을 소개한다. ‘응이라고?’ 되묻는 막냇동생 내외의 목소리는 환청일까? 바라건데, ‘고모가 김이응이야?’ 라고 확인할 조카들에게 내 시 역시 수수께끼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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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 외 4편 /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 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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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칼을 쥔 바람의 이름

 

무엇을 떠올리든 자유다 부신 금발의 북유럽 여인이나 열도 소녀의 애살맞은 이름 같은, 떠오른 생각에 돌을 매달아도 자유다 들고양이가 세 발로 오후 세 시를 유유히 건너가고 있었다 외진 마음 몇 자락 슥슥슥 베고 가는,

 

여리박빙의 나날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휩싸인 계절의 막후는 뼈저리게 앙상하였다 나무가 털리고 가계엔 금이 가고 간유리가 박살나서, 나는 강으로 달려가 살얼음이 되었다 등뼈에 성에꽃 새겨 넣던 그믐이었나, 어디선가 쩍 손목을 긋는 얼음장 조각조각 찢어진 손바닥 돌멩이처럼 굳어가는 혀

 

어른과 어린, 같은 말을 꺼내서

착한 피라미와 버들치의 아가미에 던져주면서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슬픔을 오래 되씹는 습관

 

딱딱해진 과거를 깨물면 이유 없이 혀끝에서 피가 났지

월동이란 한철, 어딘가 심장을 대신 보관할 곳 없을까

 

누군가 번호판 없는 오토바이를 갈대 수풀에 버렸다

 

반지하 자취방 쪽창에 들이치던 소나기처럼

잊을 만하면 나를 두드리는 당신,

날아가는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에이다,

 

 

햇살 요양사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시큰시큰 쇳내 나는 이름. 종신보험같이 오래된 그림자만 몇 차례 뙤똥뙤똥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늙은 나무라고 늙은 꽃을 피우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해요. 저녁이면 손끝에 경련이 일어요. 쇠줄 묶인 백구가 등 휘도록 텅텅 적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벚꽃뱅어

 

황사는 웃었고 마스크는 울었다 꽃가루가 입술을 틀어막자 쿨럭, 창(窓)은 비염을 앓았다 구름의 등뼈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직진해야 하는데 좌회전 차선에 들었다 칼날 뒤집으면 칼등에도 꽃은 핀다고 밀어서도 당겨서도 문은 열릴 수 있다고, 라디오 주파수에 쑥물빛 짱짱 꽂혔다 때아닌 우박이 네이버 속보에 쏟아졌고 둥글둥글 파문에 우산처럼 접혔다 펴지는 마음, 무르팍 당겨 앉은 바람이 슬쩍 악수를 청하면 수당 받으러 온 실직자처럼 쭈뼛 보리이삭 패는 사월,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하노, 그 덕에 미싱을 빨리 돌렸고 내력만큼 답답한 산소마스크 낀 누이는 마침내 식물이 되었다 녹색 심장을 가진 봄은 빚쟁이처럼 몇 번 더 찾아왔고 까무룩, 노모는 웃음이 무거워 자주 발등을 찧었다 절정의 계절에 강으로 돌아와 알 낳고 죽는 벚꽃뱅어처럼 세상이 다 웃는 봄 같아도 누구나 울음 한 바가지 늑골 깊이 쟁여두고 사는 것을, 목단 이불에 찬밥 쑤셔 넣던 기억의 아랫목에 보내지도 잡지도 못할, 누이여!

 

 

 

피싱*

 

1

낚싯줄 묶인 독수리 모형이 포도밭에 떠 있다. 바람이 얼레를 풀자 낚싯대 끝이 팽팽하게 휜다. 솟구치는 독수리. 펄럭이는 독수리. 파르르 공중의 낱장이 찢긴다.

 

―낚고 있습니까, 날고 있습니까?

 

바람이 빠지자 몸을 접는 풍선 인형처럼 연출이 끝난다.

 

2

수화기 속 검은 목소리 사람을 낚는다.

 

우체국입니다 검찰청입니다 말씨가 좀 어눌합니까 믿으세요 믿으라니까 당신의 자식이 납치되었습니다

 

미끼를 최첨단으로 갈아 끼우고 카톡을, 메시지를, 대화를 가로채겠습니다. 엄마가, 언니가, 애인이, 절친이 되겠습니다.

 

돈 을 부 치 세 요 제 발 돈 을 부 치 세 요

 

그놈 목소리가 독수리 타법을 쓰고 있다.

 

3

독수리 허수아비가 못 미더운지

농부가 그물망을 치려고 밭두렁에 말뚝을 박고 있다.

 

* 피싱(phishing) : 전자 금융 사기 

 

 

[수상소감]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시가 오고 있어요

 

나의 동선이 형편없어졌어요. 어제는 현관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걸요. 여기와 저기, 경계를 지워버린 눈이 녹고 있어요. 녹아내리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아픔. 시골버스가 길가에 멈춰 노파를 태워요. 승강장이 아니어도 버스가 설 것이란 짐작.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어느 모퉁이를 돌아 시가 오고 있다는 생각. 결국에는 내게 당도할 것이란 믿음. 그렇게,

 

별안간 당선 전화가 날아들었어요. 멈춰버린 듯 아닌 듯. 일순의 떨림. 콩켸팥켸 가슴팍에 붐비는 기억들. 벽지를 더듬고 간 웃풍이었나, 떠난 아버지의 마른기침이었나. 가난한 유년의 풍경이여. 설움 훔치던 어머니의 차가운 아궁이여. 함부로 내질렀던 청춘의 시퍼런 주먹이여. 생의 살점을 물어뜯던 병마여. 고마웠어요. 남천 생울타리 눈시울이 붉어요. 덜렁수캐같이 밖을 서성거렸던 나의 부재여. 남편이여, 아빠여, 둘러보면 없던 이름이여, 시간이여. 미안해요. 내 사람의 둘레가 조금 환해졌으면 해요.

 

장하빈 시인님. 별사탕 한 개로 詩作한 일이 이렇게 커졌어요. 오래 걸려 멀리 에둘러 왔네요. 불필요한 게 때론 필요했나 봐요. 덕분에 모서리가 많이 닳았어요. 다락헌(多樂軒) 마당귀 꽃무릇은 땅속에서 한겨울을 애태우고 있었겠지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도록 등을 미는 바람처럼, 나에게 시의 배후가 있다면 당신입니다. 현대시의 낯선 언어를 접하게 해주신 변희수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수요일마다 함께 시를 매만지며 꿈을 키웠던 다락헌시인학교 문우님들. 여기까지 절반의 걸음은 그대들 몫이에요. 부족한 시를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산맥에게 지금부터가 시작, 이란 다짐으로 감사의 말을 대신할게요. 언제나 시의 발치에 있겠습니다. 오늘은 자작나무 서늘한 눈매를 보러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럼.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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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4편 / 한상신

 

아스피린 한 알을 물과 삼켰는데 물만 넘어갔을 때

내가 다시 유리컵에 물을 따라 들고 있을 때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

 

나의 하루는 자주 500mg짜리 흰 두통이다

 

염전의 외딴 소금창고를 닮은 밤에 대해

항상 증거가 불충분한 나의 생활에 대해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 불면 그 미제사건에 대해

어차피 기록을 남길 수 없으므로

 

아스피린이 비명도 없이 동그랗고 조그맣게 추락한 후

 

내가 소금기 마르듯이 잠이 든다면

신기루를 스쳐 아스피린 몸피들이

잠속인지 잠 바깥인지 알아차릴 때까지

내가 빈 책장처럼 딱딱하고 허전하게 잠이 든다면

 

내일 아침에 어쩌면 어제 아침에 내가 아닌 것처럼 깨어나

여기가 어디죠?

마리앙투아네트 증후군처럼 하얗게 증발하며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처럼

내가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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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불을 켜니까 발목이 번진다

나는 어깻죽지 툭툭 털며 빗소리를 벗는다

늘 먼 곳에서 검은 마스크를 쓰고 오는 빗소리

신발장을 열고 빗소리 닫고

 

비에 젖은 운동화 뒤축이 어둡다

운동화 끈을 잃고 끈 구멍이 사라지고

빗소리 몇 모숨이 실종되고 있다

미리 젖고 있는 어둠

푸른곰팡이 포자같이 번지는 어둠

 

발뒤꿈치를 조금 들어 올리는 빗소리

빗소리는 좀처럼 개체수가 줄지 않는다

 

재봉틀 같기도 하고 탁상시계 같기도 하고

연통 같기도 하고 무슨

가재도구 같기도 한 푸른곰팡이들로

빽빽한 오후 여덟 시

 

신발장 안에서 빗소리들이

켤레켤레 깊어지고 있다

신발장 앞에선 외딴 신발 한 짝의

어둠이 또 고요히 번식하겠다

 

 

첫사랑

 

 

물방울은 어차피 누드다

물방울들이 물방울들끼리 맨살을 마저 벗는다

 

물방울의 둘레와 둘레를 뺀 나머지

목선을 따라 환한 물방울은

 

물방울이 물방울에 물방울을 끼치다가

물방울 안으로 이내 사라지고 만다

 

물방울 옆에 물방울이 또 도진 후

물방울에 매달린 작은 욕조들

욕조를 욕조 밖으로 떨군다면

물방울 바닥이 더 깊어진다면

 

물방울 우듬지가

물방울 메아리가

물방울 아침이

벽의 줄눈을 타고 붐빈다

 

하마 동그랗게 아물지 않는다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

 

 

어떤 다홍

 

 

1

계단 모서리마다 이 세상을 뜨고 싶은 다홍들 가랑가랑 가랑가랑 어떤 가랑잎은

어떤 가랑잎보다 전신이 가벼워 먼저 떴다 가라앉았다 흔들 삐딱해가며 이디야 종이컵이 바람을 담았다 매번 쏟았다 계단은 계단을 혼자 떠나는 연습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2

계단 머리에 모과나무며 단풍나무는 제 이름들을 내려놓는다 바람이 불자 화단과 화단 사이로 다홍빛이 돌았다 삼색이 너 거기서 염을 하겠구나 다홍을 신고 다홍빛 해그림자를 덮겠구나

며칠 전 으슥하게 젖을 물리고 있던 삼색이가 오늘은 경계석 옆에서 벋정다리로 누워 있다 장의사가 관절을 다홍으로 덮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이제 편하게 가세요 몸에 힘을 조금만 빼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 입관이 끝나면 장의사가 빈소에서 육개장을 한술 뜨며 다홍빛으로 말할 것이다 몸을 주욱 펴주셔서 잘 모셨어요

 

그 발치께 있던 새끼들이 뿔뿔이 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기저기 다홍이 자꾸 샜다 계단이 묵묵하다 다홍의 무게중심이 허공에 잠깐 머물렀다 가랑잎 몇 개가 계단바닥에 떨어졌다

삼색이가 화단 안쪽 잡풀밭에 데려왔었다 발톱이 오이 속살 같은 새끼들을

 

 

메밀묵의 본론

 

 

도마 위의 메밀묵이 먹먹하다

한 모쯤 말하려 했다

메밀묵을 넘겨짚는다

메밀묵은 항상 아래쪽이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두 손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안 들려 안 들려

메밀묵을 농담같이 장미칼로 썰었다

도마 위의 메밀묵은 후미진 골목 만화방 전등 밑 같다

옆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순정만화책 곁의 순정만화책

무심히 우묵하게 엎드린 메밀묵

숭덩숭덩 썬 메밀묵의 어깨들이 끼리끼리 붐볐다

메밀묵은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내내 무소식인 사람이 한 차례 더

메밀묵 곁을 지나갔다

메밀묵의 가로가 메밀묵의 세로를 용케 견디고 있다

 

 

[수상소감]

 

어렸을 적 커다란 바퀴가 두 개인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하늘로 구름처럼 날아오를 듯한 기분일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 졸랐더니 열 살이 되면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이 되어도 자전거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날부터 열병 같은 무엇인가를 저는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글쓰기는 그 자전거를 기억하는 한 방식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는 것도 없고 부족하기만 한 제가 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격려를 주셨던 여러 선생님들 덕택입니다, 늘 모자란 글을 읽어 주신 시 세미나 선생님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34년생 사랑하는 울 엄마, 관객이 많은 무대가 떨린다면서도 노래를 스스럼없이 열창하던 엄마처럼, 엄마의 딸도 용기를 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겠다며 머리 싸매고 돌아앉은 나를 애정과 근심으로 지켜 준 남편에게도, 자랑스럽게 잘 커 준 두 딸 지윤과 민지에게도 지면으로나마 고맙다는 뜻 전합니다.

 

제게는 개벽과 같은 당선의 전갈이 지니는 엄중한 무게를 온몸으로 기억하며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2020년 해를 맞아 일 년에 한 번 있는 계간 󰡔시산맥󰡕 신인상 심사를 온라인 무기명 원고로 하였다. 100여 명의 응모작품 중 예심을 거쳐 5명의 작품이 심사자의 이메일로 들어왔다.

 

1번 -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외 9편

2번 - 아스피린의 알리바이 외 9편

3번 - 그 외 9편

4번 - 내연(內緣)의 땅 외 9편

5번 - 가시를 바르며 외 9편이었다.

 

한 편의 시가 그 한 편으로서 스스로 움직이는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기본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더해 그런 무난함을 넘어 새로운 발견이든 정서적 극대화든 그 시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신인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시인이 언어의 운용보다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시 안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은 각자 추천 번호를 단톡방에 올렸다. 1번이 한 표(A 심사위원), 2번 3번이 각 한 표(B 심사위원)씩 나왔다. 심사위원은 다시 한번 1번 2번 3번을 읽으면서 꼼꼼하게 검토하였다. 마지막 1번과 2번으로 추리고, 고심 끝에 최종 수상자를 2번으로 결정하였다.

 

3번 - 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이 좋고, 자신만의 사유를 확장해 나가려는 방식에서 숙련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의 효과에 비해 정제되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표현들이 다소 아쉬웠다.

 

1번 - 의미나 맥락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무겁지 않고, 진지함보다는 사소함을 통해 핵심에 다가가려는 태도가 잘 읽혔다. 질문에 대한 다양한 해답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이미지의 운용이 활달하고 경쾌하나 한편으로는 가볍다는 혐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2번 - 마음에 어떤 움직임을 일으키는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그 이유를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움직임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그 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힘이 그것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욕조가 젖은 발을 들고 서 있다/ 물방울이 몸을 말아 공중으로 떠나는 동안”에서 보듯이 서정적인 울림을 담백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비극적 세계를 따뜻하고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에 믿음이 간다.

 

이번 2020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수상자는 한상신 시인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그 첫걸음이 시의 진정성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산맥 안에서 기존 등단자와 빠르게 동화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본심 : 이화은 이승희 / 예심 : 조희진 최지원 김정현(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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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외 4편 / 한영미

 

 

라면으로 첫 끼니를 때운다

바닥엔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쓰다만 이력서들

열정 하나로 통했던 시대는 갔다

모래 수렁을 떠도는 비문의 유령들,

오늘은 이 회사에서 내일은 저 회사에서

같은 얼굴을 만나고도 기억하지 못한다

모래바람은 깊은 수렁을 덮기도 하고 만들어내기도 한다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은 처음 몇 번의 좌절이면 족했다

움직일수록 흘러내리는 모래의 깊이는

늪처럼 빠져들고, 바닥처럼 측량되지 않는다

입구가 사라지는가 하면 출구가 봉합되기도 한다

수렁이 무덤이 되는 것은 한순간,

어제도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왔다

가수와 진수가 구별되지 않는 교묘함에도

구덩이를 채운 숫자는 갈수록 넘쳐난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 쌓여가는 빈 소주병이

발굴된 유물의 전부가 될 것이다

전화 한 통이면 빠져나올 수 있는 꿈이면 좋겠다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 시어 빠진 김치 쪼가리로

후르륵 위장을 채운다

내비게이션 토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낯선 얼굴들이 모래 수렁에서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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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온 고양이

 

 

이빨과 발톱 세우고 울고 싶을 땐 언제든

울 수 있는 길냥이가 되고 싶어요

울 수 없는 시간이 낭만인가요

안락을 위해 몸을 둥글게 말아 가장

보드라운 털을 내어 주어야 하는 일과

희롱하는 손끝에도 냐아옹!

그대 기쁘게 하는 콧소리,

그때마다 털이 바짝 일어서요

손끝을 와락 물어뜯고 싶어져요

좋은 옷, 머리에 달아준 분홍 꽃리본

날마다 입김 불어 건넨 사랑한다는 말,

연애를 위해 시를 쓸까요 시를 위해

연애를 할까요

너는 나라는 말의 함정에 한 번쯤

빠져본 기억 있다면 누구든 알 수 있어요

이제 그만 소설적 진실*을 밝히고 싶어요

밤거리를 걸어요 온 털끝 세우고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걸어요

상대가 놀라도록 두 눈 크게 떠요

어두울수록 빛나는 광채

집 나온 고양이에게 더 이상

집은 필요 없답니다

 

*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차용.

 

 

굴레방다리

 

 

아현동 굴레방다리 하면 목줄이 떠오른다

둥근 모양이 세 개나 들어가는 아현동이란 지명이

입 벌린 사람들의 모습 같아서, 그들의 허기진 뱃속 같아서,

소가 벗어놓고 와우산으로 누웠다는 굴레가

골목 어디쯤에선가 나타나

기다렸단 듯이 목을 거칠게 잡아챌 것만 같은 동네

흑백 사진 속 배경으로 만나는 그곳에서

부모님의 목줄 덕으로 어렵게 대학까지 마쳤다

가난은 꿈도 사치라는 말을 배웠지만

철수된 고가 다리처럼 빠져나와 모두가 잘살고 있다

날마다 걷던 웨딩드레스 거리는 왜 그렇게도

퇴락한 슬픔이었는지,

조화롭지 못한 방석집과 한데 나열되어

흰빛이 눈처럼 순백색이 아닌 술집 여자들의 덧칠된 화장처럼

이물스러웠던 기억

밀폐된 어둔 공간을 찾아들던 검은 양복 입은 남자들의 술 취한 모습과

그들의 손을 잡아끌던 눈빛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화려한 여자들과 마주칠 때면

그녀들이 입을 먼 미래의 웨딩드레스가 궁금해지곤 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여전히 웨딩 타운으로 화려한 동네

이따금 생각나는 곳이지만 그와 동시에 목부터 죄어드는 곳,

모두가 치열했던 시절이 재개발된 모습으로 지워졌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 

 

 

 

목관(木棺)

 

끝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지

책장을 넘기듯 무심코 지나가는 하루하루

난 나의 변화무쌍한 책을 읽느라

어느 날 갑자기 너의 책이

찢길 수도, 찢겨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치 못했어

오늘 아르카디아에 살고 있다면

내일도 당연히 붉은 태양 아래 짙푸른 땅 밟으며

황금 같은 시계 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리라고 생각했어

날마다 안부를 묻는 건강한 목소리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도

인사도 생략한 채 보냈을까

꽃상여에 묻혀 떠나는 너 보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빈 하늘 바라보며 바다만 그렸어

어디든 하나로 이어져 있으리라고

이제는 나란 책을 펼치면 매 페이지에

부록처럼 달라붙어 있는 목관과

짧은 한 줄의 글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 니콜라스 푸생의 그림 작품에 쓰인 글 차용. 

 

 

 

일대 일 대응설*

 

​꽃을 꽃이라 부르지 말자

세상 만물 이름 정해지지 않은 건 없다지만

밟고 가는 사람들에 따라 산길은 모양이 달라지지

없던 길도 눈앞에 펼쳐지고

있던 길도 초야에 묻혀 사라지기도 하지

같은 강물에 두 번 몸 담글 수 없듯이

네가 아는 나도 네 앞의 나일 뿐,

합목이 된 나무마다 비틀린 모양새를 보면

제각각 다르지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뜨겁게 타올라

엉켜 붙은 절정의 모습도 있지만

겨우 무늬만 하나인 채로 합목이라 불리는 것도 있지

상대의 손끝 아래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불감의 여자일 수도

가장 현란한 요부일 수도 있어

여기저기서 부르는 욕보다 못한 이름에 갇혀

그 값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

 

꽃을 꽃이라 가두지 말자

오늘도 내일도 그 이름 밖으로 모두가 흘러가지

길도 나무도 강물도 그리고 너도

 

* ‘모든 사물과 개념은 일대 일 대응관계​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상소감] 불편한 시와 손잡고

 

시와 오래된 연인처럼 살아왔습니다. 벅차게 가슴 뛰던 날도 있었고, 눈빛만 마주 보아도, 손끝만 닿아도, 하나로 소통되던 날도 있었습니다. 지치지 않고 머물러 주어 고마웠다고, 다정한 인사 건네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좋았던 시간보다 힘겨웠던 시간들이 많았지만, 주저앉는 순간마다 다른 의미를 생성해 빈손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던 숱한 날들이 떠오릅니다.

 

이번 등단을 계기로 십여 년 전,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모해도 열정은 살아 있었던 그때 정신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불편한 시를 쓰겠습니다. 지혜와 성찰을 통해 나 자신만이 아닌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깊이 새기겠습니다. 비바람과 햇살과 삶의 유의미한 부스러기를 줍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온몸으로 시를 쓰라던 김수영 시인의 말을 떠올립니다.

자유하는 시의 정신과 삶이 한 몸이 되는 날까지 오늘을 에너지 삼아 걷고 또 걷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직접 전해주신 󰡔시산맥󰡕 대표님과 부족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먼저 감사 인사드립니다.

 

언제나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임정일 선생님과 허경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강산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함께해온 예술촌 선배들과 문우들 사랑합니다. 문향 가족, 소중한 곰시 동인 역시 동행이 든든했습니다. 직장 일과 시 작업으로 늘 바쁜 아내와 엄마를 한결같이 지지해 주는 내 소중한 가족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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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앞에서* 외 4편 / 박민서

 

 

벽에 찍힌 손바닥은 붉은 비명이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천천히 시드는 비명, 동여맨 손목들, 실핏줄처럼 아주 느리게 담을 넘고 있다

 

지문 없이 찾아갈 수 없는, 먼 시대를 떠돌고 있는 언어, 손가락마다 불꽃을 달았다 벽을 밀어내고 있는 기원이 종유석처럼 자란다 말이란 다 자라지 않으면 더듬거리는 법이다

 

손을 맞대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벽은 얼마나 오랜 연대가 시큰거리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흘러가는 지문들이었을 뿐

 

동굴처럼 웅크리고 있는 부족

손목을 관통하고 있는 터널

 

명칭을 나누어 가진 관계가 있었다면 한 손목을 잡고 위로하는 다른 손목을 볼 때도 있지, 손톱이 자라지 않는 손바닥 벽화, 마주보지 않고서는 손을 맞출 수 없어 여전히 벽을 향해 있다 두 번 다시는 접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았다

 

온갖 말들이 들락거리는 관절, 말은 모두 벙긋거리며 동굴을 지나친 것들이어서 악담과 정담이 함께 있다

 

며칠 악담으로 시큰거리는 내 손목이 아프다

 

* 스페인 북부 지역의 카스티요 산에 있는 동굴 속 채색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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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연필 한 자루엔

몇 개의 얼굴이 들어 있을까

남자가 더듬는 손끝에서

여자의 얼굴이 돋아나오고 있네

태초에 신의 말씀으로

천지와 동물과 사람을 지었다고 했으니

말씀은 검은색이네, 흑심(黑心)이네

신은 늙고

초라한 형상을 하고

마로니 그늘에 앉아서

제가 빚은 젊은 처녀를 힐끗거리고 있네

신의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필은 깎이게 되지만

지나온 것들은 평면이었네

자기 얼굴을 쓰다듬을 때는

난감하거나 피곤한 얼굴

손에는 표정이 묻어 있네

마른 빵을 맛없이 조금씩 뜯어 먹고는

- 지 어미와 꼭 닮았어

손이 기억하는 얼굴이 있었네

액자 속의 화분처럼

얼굴이 옮겨가는 것을 보았네

쓱쓱, 그가 도화지 귀퉁이에 리본을 긋네

여자가 뚜벅뚜벅

영안실로 걸어 들어가네

 

 

물소리

 

깊이 숨어 사는 물은 맑아요

끊어지지 않은 물소리는

장인의 솜씨

그곳이 물을 닦는 공장일 거라는

추측을 해보곤 합니다

 

물이 물을 닦는다는 소리

흘러가면서 앞과 뒤를 깨워줘요

 

물 주름을 벗겨내며

물을 닦는 바람을 바라봐요

태풍에 넘어진 나무의 잔영을

소소한 빗줄기의 흔적을

그늘에 구겨진 혼잣말을

누가 떠밀지 않아도

둘둘 말려가는 것을 봅니다

 

물이 물을 닦는 이유는 무엇인지

가끔 흙탕물 세제를 푸는 일도

구멍 난 나뭇잎 몇 장 띄우는 일도

물이 물을 닦는 일이에요

 

숨어 있는 물을 처음 만나는 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내 얼굴이 사실은

모두 처음 만나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 사이에 흐르면서 구겨지는

얼굴의 재촉,

되돌아가지 못한 소리들

얼굴은 가장 맑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했어요

 

손으로 휘이 저으면 생기는 물의 페이지

물이 내 얼굴을 닦고 있어요 

 

 

 

 

 

낱말 퍼즐게임

 

 

우리 두 사람은 H열 좌석에 앉았다 그도 나도 한(韓)이나 홍(洪)이 아니다 좌석의 엉덩이 자국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나의 첫 낱말풀이는 G열 왼쪽

첫 번째 칸에서 시작한다

 

저기 D열의 가운데 남자는 머리가 솟았으니 고(高), 뒤쪽 F열의 남자는 등받이를 발로 쳐대니 굽은 다리 장(張)이 분명하다 중간에 낀 E열의 여자는 팝콘을 한 주먹씩 입속에 넣으니 권(拳)인데, 주먹이 가득 찼다는 뜻일까 아니면 주먹을 부른다는 뜻일까 두 갈래로 땋은 머리 B열의 왼쪽과 투블록컷 머리 오른쪽과 입맞춤을 하니 호(好)가 맞다

 

눈동자를 굴리는 스크린은 우리 눈을 구슬처럼 가지고 논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은 적 없다

 

누군가의 머리와 나의 꼬리가 만난다 각각 생각이 다른 세로의 첫 글자와 가로의 첫 글자는 닮았지만 끝내 연결 안 되는 좌석이 있다

 

비어 있는 번호, 도무지 풀리지 않는 퍼즐 판, 빈 의자에 구름처럼 가볍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한 조각 퍼즐 속에 꽉 끼워져야 한다

 

가로와 세로를 따라가는 오후의 퍼즐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구는 이쪽입니다 뒤집힌 퍼즐 판의 낱말들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제의 미로

 

침엽의 미로에 서 있다

 

바람의 모양으로 무늬가 들어 있는 미로

아이는 헤매는 것으로 길을 부르고

울음으로 조형의 벽을 삼는다

 

키가 보이지 않는 정원, 길은 푸른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아이는 왜 작아지는 것으로 크지 않는 건지

젖이 아프다

 

젖을 물리는 순간 출구와 입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육된 정원은 모두 손등이나 손끝을 닮는다

뱀처럼 구부러져 있는 나무들

울음소리를 따라 점점 미로가 되어 간다

 

표정은 사라진 얼굴이 되고

대신 구겨진 미로들이 얼굴로 몰려든다

 

구부려 누운 잠은 계절을 보려고 하는 것

어느 틈에 자라는 전정으로 매듭과 키를 정한다

 

동맥(動脈)은 종착이 있는지

젖어버린 발바닥은 안 보이는 키를 자라게 하는 정원일 뿐

바닥으로 바쁠 뿐

 

울타리가 있는 정원은 갖지를 못했다

입구와 출구가 있어 계절은 몸을 바꿀 것이고

접혀지거나 지나가는 것을 지우거나

발소리 숨어버린 어제의 길만 남아 있다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이다

 

 

[수상소감] 새로 산 신발 뒤꿈치의 손가락 틈

 

잘생긴 막대기 하나로 한여름 들창을 받쳐놓았던 적이 있다

막대기는 갓 더위를 받치고 있었고 늘어진 포도나무를 받쳤고 오래전에는 새를 잡기 위해 바구니 옆구리를 받치고 있다가 익어가는 들판의 논을 받쳐놓기도 했다

한 번도 앞으로 돌아올 수 없는 벽의 뒷면엔 보여주기 싫은 크레이터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이에는 동네 아이 하나가 자치기로 동심을 받쳐놓았고, 빗방울이 빗 소리를 받쳐놓아 쉬었다 갔다 아버지 대신 굳은살 박인 어머니 손은 반평생 자식을 받치고 있어 한때 기울어진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받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시에게 말을 걸었다 몽환적인 곳에서 그 대상을 부를 때는 땅에 귀를 낮게 기울여도 표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산길을 혼자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대상이 너무 많아 빠른 속도로 쫓아가 손으로 잡아보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잡히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수없이 버렸던 시들, 압력밥솥에 마음을 꾹 눌러두고 배회할 때마다 미련 없이 시는 아침에 뜨거운 수증기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는 나와 은유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첫발을 내디뎠다 그물을 어깨에 메고 그 표상을 찾아다닐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찾고 있었다 그때 메시지 ‘잘하셨어요 등단에는 운명 같은 게 있나 봐요 좋은 시로 보여주세요 축하합니다’ 그때 실감이 났다 용기가 생겼다 책상에 등을 말고 앉아 있는 몸에 태엽 감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물구나무를 서도 나를 받쳐줄 막대기 하나 생겼다

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놓을 때마다 초심을 불러주곤 했던,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김석환 교수님이 많이 기뻐하실 것 같다 끝까지 믿고 함께해준 우리 가족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명지대학원 동기들, 스터디그룹 케빈과 빛별 친구들, 오랜 문우 써니 언니들, 토즈반 문우들, 시와 운명으로 만난 친구 양비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당선 소식을 전해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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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외 4편 / 이소현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

오아시스의 밤은 낡은 허물만 남겨 주었고

낮은 아지랑이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허물어졌다

 

갈대를 엮어 만들었다는 밀짚모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갈대는 매정한 허공을 찔러댔지만

태양은 비 대신 땀을 선물해주었지

물 한 병은 십 달러

십 일의 하루를 견디는 가격이라서

혀 밑으로 달콤한 온기를 숨기곤 했어

쉽게 녹아내리던 단어들

 

지나온 발자국으로 써 내린 이야기

결국 한숨들은 짓궂은 모래바람에 지워질 것이다

사막여우는 열을 뱉어내는 법을 알지만

나에겐 옹골진 귀조차 없어

지나친 그림자로 귀를 틀어막고 사막을 건넜지

 

더 먼 곳에 닿으면 빛이 있을까

스물의 귀퉁이는 쉽게 허물어지고

어설픈 꿈들을 엉성하게 베어 먹으면

붉게 핏자국이 베인 발바닥은 이제

차가워진 허공을 떠돌지

 

자꾸만 지워지던 발자국 나는

스무 시간 십삼 만원 최저도 받을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므로

오아시스, 초록 야자수가 우거진 오아시스엔

이미 낡은 팻말이 서 있는데,

 

나의 오아시스는 꽤 늦게 찾아오는 법이지

맨발로 사막을 걷고 있는 하루

나는 이방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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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어느 날 일그러진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매일 같은 문장을 읊으며 내일을 가늠하던 어느

외국인 노동자

그는 베트남 사람들처럼 조금은 희어지고 싶다며

쓰게 웃었다

 

나는 안녕,

인사하는 법을 잊었다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언제나 슬퍼

깨진 거울에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연습을 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던 문장들

결국 나의 하루는 고작 몇 천 원짜리인데

 

티브이에선 재산의 95%를 기부했다던 어느

부자의 소식이 즐겁게 춤췄다

그에게 남은 5%는 오억

나는 오백원 통장잔고를 보며 웃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

 

일그러진 얼굴은 희게 나오지 않는다는 건

낡은 공장의 철문을 두드리던

거친 손길들로부터 배운 것

스물 몇을 겨우 지나간 날들에선 꽤 쓴맛이 났다

 

거울엔 내가 모르는 사람만이 바르게 서 있다

오늘의 일그러진 시간들을 내일이면

한 줌 한숨에 흩어질 테니 나는

조그맣게 안녕,

인사했다

오늘의 배웅인지 내일의 마중인지 모를

안녕

 

 

 

 

별천지

 

새벽이면 아빠는 별 찌꺼기를 안고 들어왔다

이른 아침마다 하루를 쓸어내던 아빠

그의 몸에선 퀴퀴한 그림자 냄새가 나곤했다

 

새벽은 하루를 억지로 삼켜대다 붉은

토악질을 하곤 했다

깊은 목울대를 차고 나오던 울음들

결국 모두는 등 뒤에 저를 숨기고 있다

 

달빛으로 쓸어내던 골목엔 유난히 태양이 늦게 도착했다

지나치게 높은 아파트 때문이라며 웃는 동안

아빠는 스러진 빗자루를 들었다

흔적들을 담아내던 시간 하늘엔

오늘의 별빛이 조금 피어올랐다

 

밤이면 떨어져 내릴 별들은 환했고 차가웠다

어깨에 쌓이는 건 누구의 고난

고난들은 방황하다 가난처럼 아빠의 어깨로 쏟아졌다

 

긴 속눈썹에 끼던 유난히 짙은 먹구름

장래희망의 질문에 대해 나는 기린을 읊었고

도장을 찍어주던 아빠는 빨갛게 번진 이름을 쓰다듬었다

방구석엔 별들이 쌓였다

새벽에 잠든 아이를 달래듯 나는 별을 안았다

누군가의 울음은 아주 조금

오늘의 일기가 되기도 했으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 그림이 그리워져

허공에 한숨으로 그림을 그렸다

 

별로 도배한 집에는 아직

차가운 공기만 부유하는데 아빠와 나는

한숨으로 온기를 메웠다

별천지가 된 밤,

별천지가 된 방

 

 

 

 

아스팔트 런웨이

 

눅눅한 공기를 쥐고 길을 걸었다

차가운 이야기는 꽤 눅눅해지는 법

나는 또각이는 소리가 나던 걸음으로 물기를 털었다

오후의 열기가 짙어지던 날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길을 걸었다

어두운 색 옷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먼지구덩이를 살아야 한다

자박거리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진다

꿈벅일수록 많은 숨을 내뱉던, 아스팔트

그 진득한 찌꺼기

 

잎사귀는 꽃 대신 담배를 피웠다

바퀴의 궤적이 그리던 시간

그들은 매일 촉박한 일상을 넘겼다

나만 넘기지 못하던,

오늘의 페이지는 이미 어제의 페이지가 되어 있던 시간

 

언제나 팽창하는 노래를 불렀다

터지기 직전의 콧노래

낮잠의 색처럼 자꾸만 바래가는 것 같은 날이면 우울해져

하늘도 노래지고는 했으니까

문득 별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같던 검정의 길 위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은 사실 지나간 위로

이 길을 뒤꿈치로 잘근잘근 밟아댄 사람들

그들이 그림자 뒤에서 몰래 훔치던 눈물은

같은 그림에 대해 진부한 감상을 토해낸다

덥네,

발끝으로 올라오던 열기들

 

아스팔트를 걸었다 무의미한

런웨이를 모델처럼,

또각

 

 

 

 

카무플라주

 

나는 주기적으로 우울해지고는 했다 공장에서 잿빛 연기가 쏟아지듯 나의 하루는 회색조였다 모든 빛을 삼키던 어둠의 계열

그림자는 종종 짙어졌다 악어처럼 진흙 속에 몸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앞집 2층에 사는 오빠에게 배운 첫 키스처럼 눅눅한 하루 쓰레기 냄새가 나는 포옹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한없이 우울해져 다시 하루를 오물거렸다 어느 파충류처럼 쉽게 색을 바꾸고 싶어 보호색처럼 배경에 녹아들거나 그림자가 되어 아무런 발에나 차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상은 쓸모없이 밝았다

 

잎맥처럼 복잡한 삶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평지는 꽤나 깊고 길었다 건조한 걸음 사이에선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는 규칙 거짓으로 적은 자기소개서에 대해 증명하라는 어느 면접관에게 두 마디만 던졌다

날카로운 칼날에 얼굴이 비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사실 이건 세상에 내뱉고 싶던 문장 어느 뒤통수에서든 들이치던 시선은 커터칼 심처럼 날카로웠으니 나는 얼떨결에 쥐어든 합격증을 찢어버렸다 공장이길 포기한 우울공장에서

 

나의 색은 무슨 색이야 사실

나는 아무런 빛도 없는데

아무런 빛이 될 수 없는 것일지도

하늘은 쓸데없이 파래서 나는 문득 하염없이

우울해졌다

 

 

 

[수상소감]

 

갑자기 어지럼증이 느껴져 눈을 감았습니다. 지구의 자전소리가 듣고 싶어 귀를 틀어막고 상상을 유영했습니다. 너무 우울하고 관념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낭만적인 은유에 대해 고개를 저었습니다.

 

함부로 문장을 쓰던 어린 날. 제가 올곧은 단어들을 내뱉을 수 있게 도와주신 아버지와 제 시선을 감싸 안아주시고 모진 말 뒤에서 격려와 희망을 주시는 가슴으로 낳아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의 원천이 되어주는 50명의 요정들과 1명의 천사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년도. 첫 번째 스물을 음미하며 새로운 시작들을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잘 걸어 나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만, 저와 부모님의 삶의 이력들을, 그 거창한 고난들을 진솔하게 뱉어내는 거친 시를 쓰겠습니다. 시인의 숙명은 삶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뜨거운 아스팔트 밭길을 맨발로 걸어 나아가겠습니다. 덧붙여 제가 끌어안고 싶던 사회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모든 생명들이 조금 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저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거친 진실을 마주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마주한 모든 관계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제 시의 바탕이 되었다는 걸 전하고 싶습니다. 긴 터널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신 권주희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우리의 현대시 역사는 100년을 건너오면서 많은 시도와 새로움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렀다. 상대시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화기의 신체시에서부터 굽이굽이 궤적을 남긴 시인들은, 그 이전에 없었던 지평을 새로이 열어온 분들이었다. 전쟁의 역사는 승자를 기억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와 작품을 기억한다. 이에 등단 이후 전문가의 대열에 합류한, 혹은 합류하려는 시인은 당대나 이전의 시풍에 안주하려는 게 아니라 신-지평을 구현해 내려는 의지의 소유자라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에 응모한 150여명의 작품 중, 7명의 응모자 작품을 본심에 올렸고, 그 중 최종 본심에서 논의되었던 세 분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소현의 「이방인」외 9편, 강희정의 「행성넘버 4797」외 9편, 황신의「내연(內緣)의 땅」외 9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첨예한 눈금과 논박을 요구한 작품은 「이방인」과 「내연의 땅」이었음을 밝힌다. 이토록 심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은, 선배 시인이 다하지 못한 바를 다음 세대가 능히 북돋우고 이어나가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서렸기 때문이요, 우리 문단의 지층을 더욱 비옥하게 하려는 데에도 뜻이 있음이다.

 

이소현은 수상작 「이방인」에서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이라는 문장을 첫 줄에 놨다. 독해가 수월찮은 조합이다. 물도 아닌 “열기를” 마셨다거나, 더욱이 “맨발로” 마셨다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알레고리가 형성되고 독자가 상상의 문을 열 수 있는 틈, 즉 다양한 공간이 생겨난다.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접합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일절이기도 했는데, 그 외 작품에서도 웬만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다른 분들께도 다음 기회가 반드시 행운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원한다.

 

- 심사위원 정숙자(시인) 

 

 

[심사평] 관념 중심과 사물 중심의 상상력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심사 의뢰를 갑작스럽게 받고 이메일로 온 일곱 분의 작품을 여러 번 깊이 있게 읽었다. 보내온 작품들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기명으로 번호만 매겨진 작품들을 크게 대변해 보면 관념 중심의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서 표현의 객관성이 결여된 면이 있지만, 그러한 관념적 사유가 오히려 낯설고 신선하게 읽힌 경우와 사물 중심의 상상력을 통해서 객관적 사유와 표현의 일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대별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함께 심사를 한 정숙자 시인은 전자의 시를 선호하고 필자는 후자의 시를 선호하는 바람에 정숙자 시인은 3번(이방인 외 9편)과 5번(그림자 외 9편)을, 필자는 2번(그날의 신발들 외 9편)과 4번(행성 넘버 4797외 9편)과 6번(내연의 땅 외 9편)을 최종심에 올리고 카톡과 전화로 의견을 조율했지만 공통된 의견에 근접한 시인이 한명도 없어서 예심위원의 의견까지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예기치 못한 산통을 겪고 태어난 시인이 「이방인」 외 9편을 투고한 이소현 시인이다. 이소현 시인과 마지막까지 겨룬 시인은 황신 시인의 「내연의 땅」 외 9편과 강희정 시인의 「행성넘버 4797」 외 9편이다.(투고자의 이름은 심사 후에 공개되었다.)

 

먼저 필자가 주목한 강희정 시인의 시들은 「행성 넘버 4797」, 「꽃총」, 「오늘과 동전은」, 「바콜로드에서 짐 풀기」처럼 다양한 소재를 균형 잡힌 상상력으로 이끌어가는 솜씨가 믿음직스러웠다. 반면에 몇몇 작품은 단조롭거나 패턴화된 구조를 띠고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에 「내연의 땅」, 「허공이 익는다는 것」, 「에덴의 방정식」, 「생각이 많은 날」 등 다양한 소재를 긴장감 있는 언어로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가는 힘을 보여준 황신 시인의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의 시들은 단순하지 않은 상상력과 깊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완결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시는 다른 심사자의 눈에는 새로움이 부족한 시로 읽혀져 제외되었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소현 시인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좋은 표현에 비해 객관화되지 않은 관념적 진술이 거슬렸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은 오히려 표현의 일관성을 거스르는 관념적 진술이야말로 새로운 실험성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보았다. 필자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먼저 「이방인」의 첫 연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로 시작되는 첫 구절부터 막연하고, 두 번째 시 「불가살이」는 1연에서 밥풀에서 태어나 쇠를 먹고 살아가는 ‘불가살이’의 모습이 2연에 오면 트럭을 모는 사람으로 갑자기 바뀌어서 표현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소현 시인을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수상자로 동의한 것은 이 시인의 앞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다. 긴 호흡의 시를 활달한 상상력으로 끌고 가는 장점을 살리고 앞에서 지적한 결점을 보완한다면 앞으로 우리 시단의 새로운 계절이 될 것이다.

- 심사위원 박남희(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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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의 배꼽 외 4편 / 박동민

 

 

방문의 배꼽을 꼬옥 누르는 순간부터 사춘기는 시작된다

 

성벽은 높고 천장은 낮은 다락

프레스코화 속 성인(聖人)이 두 손 모아 배꼽의 심지에 불을 붙이면

펑, 소리와 함께 사생활의 구름이 성채를 덮는다

 

웅크린 가슴의 단추 하나 풀고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는 사춘기

저요 저요 대신 쟤요 쟤요

팔랑이는 창문은 나무의 자세를 따라한다

 

단추 하나 더 풀어볼까

합법의 우듬지에서 불법의 밑동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수시로 넘나드는 사춘기의 배꼽

 

밖에서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배꼽은 열리지 않아요

멋있는 척 어른인 척하지 않아요

뭘 자꾸 척척 해내라는 거예요

겁나거나 골나지 않아요

골라도 내가 골라요

 

성스러운 손으로 빼꼼 성문을 열고

흔들리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오후

 

천장의 야광별이 넝쿨손을 타고

광장의 배꼽으로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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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맞선, 甲과 乙의 동화

 

 

소장 접수

 

한 번 보실래요?

절친한 변호인이 느닷없이 야밤에 소장을 보내주었다 첨부된 사진 속 여드름 자국이 틀린 맞춤법처럼 도드라졌다 각하해버릴까, 소개팅은 몰라도 맞선은 싫었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 명절, 후견인들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못 이기는 척 만나보겠다는 답변서를 즉각 제출했다

 

제1회 변론기일

 

드디어 법정에서 맞선, 원고 甲과 피고 乙

수차례 법정을 들락날락 했지만 처음처럼, 간단히 신원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환하게 웃는 제3자 丙판사가 메뉴판을 건넸다 첫 만남부터 펼쳐진 심리적 공방

차 많이 막히셨죠?

실은 마실 차보다 타고 온 차가 궁금했다 딱 벌어진 보닛에 사진보다 각진 얼굴 두툼한 에어백과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시원한 목소리

그는 세단보단 신형 지프에 가까웠다 게다가 국산차, 그녀는 애국자니까

 

조정절차

 

역시 믿고 쓰는 국산차

애프터서비스가 확실하다 몇 건의 통화와 문자가 뻥 뚫린 도로를 내달렸다 신호 한번 걸리지 않고 그린라이트,

추정이 간주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회 변론기일

 

사람은 사계절을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 乙의 지론

절친하고도 친절한 丁변호인은 나이도 있는 만큼 지나친 검증과 감정(鑑定)은 삼가길 권고했다 丁을 믿고 몇 번의 데이트를 이어갔다 접촉사고 같은 돌발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변론 종결 및 판결 선고

 

甲은 乙에게 고백을 했다

‘당신의 그루터기가 될게요. 우리 사랑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아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압류 당한 피고

더 이상 그들은 맞선 상대가 아니었다

악수하며 법정을 나오는 화해의 당사자

쌍방을 대리한 丁은 기꺼이 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계절의 묵시적 갱신이 수십 번 이어졌고

원고 甲돌이와 피고 乙순이는

호숫가 청둥오리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거북처럼 오래오래

분양받은 보금자리에서

서로서로 항복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부러짐은 이렇게 말했다

 

낙타들이여,

우측통행 표지판을 보면 왼쪽으로 걸어라 보이지 않던 오른쪽 얼굴이 지나가리라

빈 좌석의 유혹을 견디고 서서 가라앉은 아침의 표정을 읽어라

음모에 찌든 찌라시 대신 눅눅한 책장에 눈길을 주어라 그대들이 펼치는 곳마다 길이 태어날 것이다

그 길에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무언가(無言歌) 들리리라

 

사자들이여,

엘리베이터를 며칠씩 굶겨라 굶어도 배가 부른 놈들이다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는 불길이다 폭발적인 반응으로 계단의 몰락을 몰고 오는 놈들이다

흡혈모기를 사랑하라 그대들의 죽음과 그 현장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수호천사다 혼자 먹던 편의점 도시락에 담긴 혼을 기억하는 자다 남은 반찬들은 그대들이 짊어지고 갈 잉여다 놀랄 나머지들이다

 

청춘들이여,

우선순위 영단어를 아직도 외우는가 상해버린 숙회처럼 단어들은 비리지 않은가

책상에 그어진 금은 지우고 금을 넘었는가 자율학습은 자유로운가

한쪽 소매에 더듬이 같은 이어폰을 끼고 킥킥 웃다가 떴다! 척후병의 외침에 수학공식보다 정교하게 사다리를 걷어찼는가 그런데 매점은 누가 다녀오기로 했는가

 

육체여,

울고 싶을 때 크게 웃어라 울다가 웃어도 괜찮다

토할 것같이 괴로울 때 ‘토마토’를 읊조리며 더듬이를 세워라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미끼를 물어라 더듬더듬 찌가 흔들리면 몰려올 삐끼들을 물리쳐라

기억하라 지렁이의 마지막 꿈틀거림을, 상대는 강하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반복되는 시간표의 피복을 벗기고 날 것이 되어 날아올라라

 

당신이여,

부러짐이 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규칙의 칠판에 예외를 그으러 강을 거스르는 은어 떼들이 보이는가

해금소리 들린다

산이 이마에 닿을 것 같은 오지에 당신을 묻었다.

 

 

 

 

 

오이도(烏耳島)

 

 

까라면 까!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귀가 없어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저기, 까마귀가 날고 있어요 까마귀는 눈이 없어요 까막눈도 알 수 있어요

눈 좀 빌려 주실래요

 

까라면 까! 발랑 까진 것들, 가랑이 사이로 통과!

까진 건 무릎 밖에 없어요 까진 것들은 더 깔 게 없어요

까졌다고 까면 잠깐만요,

 

더듬지 마세요! 친밀이 침입이 되는 순간 소름 돋아요 허벅지에서 더듬이가 돋아요 수작 부리지 마세요 건넨 적도 없는 잔을 채우라니요 쏟지도 않은 말을 담으라니요 대거리할 가치도 없는 대가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나미, 토할 것 같아요 등 좀 두드려주세요 아니다 등 좀 빌려 주세요 어부바해주세요

 

림보를 통과하면 까마귀들의 귀 무덤

문고리 없는 집의 둥그런 처마에서 태어나

부러진 숟가락을 쫑긋 세우고 걷는 까마귀의

마귀의 귀까지

 

물이 점점 차올라요 몸이 점점 떠올라요 날아올라요 귀에서 마귀가 툭 튀어 나와요 귀 좀 빌려 주실래요 탱자나무 가시로 귀 파드릴게요

귀도 없고 눈도 없는 까마귀는 칼을 물고 있어요 칼자루가 없는 칼로 시간을 두드려요 갈수록 무뎌지는 날로 시간을 구부려요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자장가 소리 들리세요

섬들이 꺼이꺼이 가라앉고 있어요

 

 

세로수길 가로등

 

 

내가 어둡대요

밤새 손들고 벌 받는 중에도 쉴 새 없이 까부는 난데

바닥에 붙은 은색 껌종이처럼

나의 꿈도 통통 튀는 용수철이었죠

 

커서 뭐가 되려는지

뭐라도 되겠지, 하시던 분들

보세요!

나는 매일 런웨이를 걸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워킹 워킹,

배운 적은 없죠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옷걸이들이 홋홋 모자를 쓰고 걷네요

나는 통유리 앞에서 마네킹이 웃을 때까지 춤을 춰요

이렇게 흥이 많은데 내가 어둡다니 원

 

어젯밤에는 발톱에 페디큐어를 칠하다가 미친년처럼 웃었어요

런웨이에선 절대 웃으면 안 되거든요

 

요새 시즌이라 먹어도 자꾸 말라요 체질인가 봐요

모가지보다 다리가 길어서 슬픈 족속

 

자기 전에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사실 워킹보다 중요한 건 턴 턴,

 

뒤도 안 돌아보고 꿈속으로 워킹 워킹

배우지 않은 걸음으로

 

 

[당선소감]

 

제 몸속에 항아리를 심었습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읽고 그린 것들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런 습관이 관습이 될 때쯤 하나씩 꺼내 추체험(椎體驗)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허리띠와 넥타이를 풀고 알몸으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아 아, 외쳤습니다. 제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듣는 것처럼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둥치에 끈을 단단히 묶고 엄마의 배꼽 속으로 들어가는 그 설렘이 좋았습니다.

 

엄마의 살결이 여전히 그립습니다.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보드라운 부분에 손등을 대면 잠이 금방 옵니다. 엄마의 귀와 배꼽과 팔뚝을 만지는 버릇이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행진곡이 마태수난곡처럼 들렸던 겨울과 몇 시간 동안 아가리를 굳게 다문 수술실을 떠올려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떨어질까 마음 졸였던 시간, 제가 골라준 장갑 끼고 서로 팔짱 끼고 생태하천길을 따라 소풍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냉장고 속 아이스크림처럼 엄마 몸에 산다는 나쁜 병 덩어리도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고, 목련을 볼 수 없어도 봄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봄은 옵니다. 겨울비를 놓치고 봄눈에서 내려 얼굴을 바꾸는 나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서서히 녹아 손가락을 빠져 나가는 아이스크림처럼.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지도를 잃고 길을 헤매던 저에게 지남철(指南鐵)을 건네주신 고경숙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자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품처럼 차가운 이 핏덩이를 낳고 길러주신 아버지, 엄마 덕분에 저는 차가운 입김으로 수많은 당신의 뜨거운 이마를 짚을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조정인, 유종인 시인님, 예심을 봐 주신 최연수, 진혜진, 강주 시인님 고맙습니다. 아들처럼 아껴주신 큰아버지, 큰어머니, 김동훈 교수님, 친형처럼 든든한 김봉철 교수님, 천웅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인 등극을 해주신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시작(詩作)은 반(半)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이라 모자라고 반이라 충분합니다. 끊임없이 반을 채우고 반을 비워나가는 시를 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방에서 구석만 찾아다니던 제가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손목이 되어준 아내 연미, 연미를 낳아주신 장모님, 곧 태어날 ‘봄’에게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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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열풍 외 4편 / 이동우

 

 

질투가 조화造花를 만들었다는 이 도시의 풍문

 

장미꽃은 허브티 한 잔 다 마시기도 전에 시들었다

시간이라는 벌레가 결 사이사이 주름으로 숨어들고

소행성 B612,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도 시든다

 

꽃을 냉장고에 넣는다

냉기와 서리로 화장한 꽃은 신선 유지 기능이 만족스러운지

더는 질투하지 않는다, 안에선 시간도 언다

언 꽃에게 한창때 사진은 보여 줘도

거울은 안 된다

박제된 젊음, 그 탱탱함을 회상하는 ‘복고復古’ 사진전이 열렸고

주말 내내 붐볐다

 

딸아이 스케치북에서 시들지 않는 꽃을 발견했다

아내는 빨간 크레용으로 그려진 장미에서

샤넬 No.5 향도 맡고

꽃을 쫓는 나비의 숨소리도 듣는다

 

땅의 보폭에 맞춘 그리니치 표준시를 거부하고

시곗바늘을 꺾는 사람들 하지만

수분과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훈제의 과정은 막지 못한다

요즘 들어 얼굴보단 빈 풍경을 찍는 아내

걸을 때마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가 난다

 

도시를 뒤덮은 풍문이 자욱해진 밤

냉장고에서 꽃을 꺼내 말해 준다

꽃잎이 다 져도 넌 장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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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전개

- 버려진 20리터 종량제 봉투들

(웅크린 자세로, 구겨진 표정으로, 무릎 꺾인 순간으로)

 

길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면

닫혔던 골목이 열린다

밤의 주인들이 후각으로 서열을 매겨

옆구리를 단번에 찢는다

불법 투기된 냄새에

얼룩무늬 몇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앙칼진 울음에 허공이 깨진다

먹이 다툼에서 밀린 그림자가

트럭 밑으로 사라진다

 

이슥해진 밤이 어둠을 담으면

한껏 부푼 골목이 터질 차례

금 간 담벼락마다 웃풍이 거세지고

틈새로 쏟아진 소란의 흔적이

전신주를 타고 축대 끝

옥탑방까지 타전된다

골목에서 쫓겨난 이들이 뒤척인다

벼린 발톱에 긁힌 길바닥이

게워내는 낮 그림자

밤의 숨구멍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집 앞 외등이 동공을 가늘게 뜨고

길은 어둠 속 꼬리를 치켜세우는데

 

 

 

비유하자면 겨울밤

 

빗댄 색들 가운데 의인화한 것 위주로 한 움큼 집는다 원고지에 조심스레 풀어내자 숨과 섞여 진해진다 입을 그려 주고 표정을 선물한다 비로소 꿈틀거린다

 

촛불 하나 켜고 둘러앉는다 의외로 책이나 옷가지보다 가구들이 말이 많다 핀란드 자작나무 탁자는 고향 얘기만 몇 시간째다 눅시오(Nuuksio) 숲, 이곳저곳에서 눈밭 헤치고 모인 고아들

 

벽시계도 수다스러운데 둥근 것들은 했던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늘 대유에서 시작된다 괜한 격식을 차리거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사달이 난다

 

직유는 늘어지기 일쑤고 ……, 은유는 둘을 뻘쭘하게 잇곤 한다

 

창을 열자 촛불이 어둠 사이로 얼른 두 손을 밀어 넣는다 허공이 하얗게 벌어진다 첫눈이 닿소리처럼 내린다고 해야 할지, 이 계절의 첫 페이지다, 라고 우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내 몸에도 불이 들어온다 별은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막다른 바다

 

어머니가 골목 어디쯤에서 물질하면서부터

조각난 일상

나는 집 앞 깨진 외등 아래 주저앉는다

어둠을 끌어당겨 제 몸을 덮은 밤바다처럼

스스로를 지워 버린 잠녀

겨우내 소금기 짙은 밭은기침만 골방 안으로

덕장 밑으로 쑤셔 넣었다

바람이 마당에 부려 놓은 갯내

눈가에서 파도가 참방거릴 때면

잠녀는 골목을 길게 이어

갯가로 나가려 했다

물소중이 걸린 옷장 안으로 펼쳐진 허름한 바다

방바닥에 흘린 물을 보고 바당이라 외치며

철퍽철퍽 바닷물을 두드렸고 이어지는

삭풍에 삭아 가는 노랫소리

이엿사나 이어도사나 이여 이여 이어도사나

자신의 근원인 마을 앞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밤

눈보라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사투를 벌였고

갯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포말 속에서

새벽은 후렴처럼 일렁였다

간신히 잔잔해진 숨비소리

잠녀는 또다시

물허벅에 담긴 파도 소리를 쫓아

막다른 골목에서

구부정하게 짠맛을 캔다

 

어머니가 두고 간 망사리

나는 삿대도 없이

골목에 잠긴 물길 더듬으며

널린 조각들을 맞춰 간다

골목마다 바다가 넘실거린다

 

 

 

 

봄 외출

 

권투 선수가 매니큐어를 바른다

사각 링처럼 각진 손톱

땀내 위로 뿌려지는 꽃잎

글러브를 벗은 손가락은

발가벗은 것 같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꽃잎이 샌드백에 가 붙는다

가쁜 호흡들이 달라붙은 곳

심판이 휘슬을 분다

함성이 모인다

꿀꺽, 카운트다운을 삼키는 벽

맞아도 손톱은 꿋꿋하게 자랐다

밖으로만 자라는 퍼런 멍

숨기고 싶어 주먹을 말아 쥐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손톱

얻어 입은 옷처럼 껑충하다

햇빛이 죽죽 팔을 뻗는다

원투! 원투!

섀도복싱은 이제 그만

가볍게 쥔 주먹 안에서

사각 링이 구겨진다

쫙 펴자, 순식간에

만개하는 손가락들

소녀가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당선소감]

 

하루하루 충실했으나 시가 잘 써지지 않아 허전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밤새 시에 대해 이야기할 선후배가 없어 외로웠으나, 어쩌면 그래서 자유로웠다.

 

조금 늦은 내 글쓰기는 아직 유년의 골목 어디쯤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 나를 일으켜 다시 달릴 수 있게 한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뒷덜미를 잡는 창작에 관한 회의.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달리며 조금씩 깨닫는다. 우직한 반복이 저 스스로의 리듬으로 마침내 한계를 넘어서리라.

 

굽이쳐 뻗어가는 ‘시산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험준한 산세山勢에 주눅 들지 않겠다. 한 발 한 발 내딛겠다.

 

마지막으로 내 시의 근거와 얼개가 되어준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영원히 반짝여 달라고 …….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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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 김태인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

바닥이 없는 마음처럼 지붕 없는 둥지를 이고

부화할 날들을 뒤로 한 채

늙은 나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새는 빈 둥지를 허물고 도화지를 떠났다

 

* 애착안정성 진단을 위한 투사검사(B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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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1번과 3번 지문의 영역 사이에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문장들이 꿈틀댄다

이해는 지문이 만든 미로를 뚫고

출제 의도는 몇 년 째 퇴로를 헤맨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과정은 4번 지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그리고 죽음의 묘비명을 이해하기까지

 

3번 나뭇잎과 1번 잎사귀 중 옳지 않은 것은?

가장 나뭇잎 같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질문에 모든 잎사귀들은

말문의 잎맥을 막고 치를 떤다

가장 고양이 같지 않던 울음소리만 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순간은 질문과 사고의 이종교배이다

가장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몇째일까요?

문제 같지 않은 문제가

가장 꽃 같지 않은 꽃을 고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간다

 

똑똑 물방울 돋는 약수터 바위틈에

5번 물결이 수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가장 꽃잎 같은 분홍 벚 꽃잎 아래로 숨어든다

열한 번 한숨과 아홉 번 어긋난 관절은

지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지문이었을까요?

 

 

 

순간기억상실

 

강한 휘발성을 띤 순간의 장소에서 당신의 기억은 웜홀로 증발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블랙홀의 가공할 중력과도 같아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끌어당겨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배출한다 실로 눈빛 깜박할 순간이다 서울역 앞 내 앞을 빠르게 지나는 한 여인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 균형을 잃고 두 시선을 직선의 관성을 한 순간에 집 어 삼 켜 버 렸 다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커피 잔에 흙빛 기억을 왈칵 토해내며 핑그르 순식간에 비켜선 찰나 마주 오던 한 남자 나를 피해 급히 직진 괘도를 선회할 무렵 휴대전화 통화에 한쪽 기억을 먹혀버린 한 여성의 스텝과 엉켜 탱고의 피날레를 연출하고 만다 서로의 방향성 기억은 가방이 서로 부딪치며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놀람과 통증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연쇄반응으로 엉켜버린 공황은 순간기억상실증 옆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이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유리창에 부딪히고 순간 걸음을 멈춘 바람에 날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서울 상공에 쌓이며 지표면 1mm를 덮어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중금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간기억상실의 연쇄반응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서울역 대합실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틈새

 

얼굴 틈으로 날아오는 새,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와 오늘 사이로 말과 행동을 자주 흘린다.

 

화장실 깨진 벽거울에 비춰진 조각난 얼굴, 나뭇가지 쪼개놓은 낮달처럼 틈새 파고든 눈코입은 온전히 꿰매내지 못한다.

 

찔끔찔끔 녹물 흘리는 수도꼭지, 전립선이 막혔는지 꽉 깍 나오는 울음이 길다. 한번 구겼다 펼친 살림처럼 모든 각이 흩어지듯 놓아두고 지우고 가야 할 것들.

 

휴지에 싸서 버린 얼굴이 넘쳐난다. 형광등 속이 까맣다. 한쪽 기억을 뜯어낸 벽지 여백이 길다.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스미고 대들보가 벌어진다.

 

한 귀퉁이 부서져 내린 계단으로 깃털구름이 몰려든다. 거울 속으로 한 줄 훈풍이 불고, 햇볕 든 꿰맨 틈으로 죽지 않은 뇌신경을 뻗는다.

 

얼굴 중앙으로 사납게 몰려오는 실금, 조각조각 붙은 파편이 흩어지듯 수십 개의 얼굴이 다시 부화한다. 푸드득

 

주름지고 패인 틈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 떼,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헐렁하지도 호락하지도 않다.

 

 

 

겨울, 유전자

 

 

하늘에 닳아가는 새들의 잊힌 무릎이어서

나는 둥근 손거울 안에 오랜 문명처럼 희미하게 닳아간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고기의 뼈를 대면하는 일처럼

 

나는

거울 위에 눕는 또 하나의 혈연

 

주먹도끼를 들고 오랜 자폐를 깨고 나오는 날

무르팍을 흐르는 달빛의 기도는 단말마 비명으로 깨져 한꺼번에 와장창 쏟아질 것이라 한다

 

깨어진 조각마다 고스란히 녹화된 아버지 얼굴과 내 눈빛이 바라보는 아이들

서로의 거울을 바라보며 부레가 닮아가는 예감을 터득하는지도 모른다

 

곱슬머리를 기억하기 위해 쌍꺼풀 닮은 눈빛이 더듬어가는

유전자 지도 속에서, 물고기 뼈를 바라보는 염색체 한 쌍이 잊힌 새의 무릎임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보라와 폭풍과 강추위를 이끌고 거울로 뛰어든 후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손짓을 해도 대답이 없던 무성영화 같았던 거울 속에는 혈연으로 뭉쳐진 응고된 구름에서 잊힌 문명들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수상소감]

 

응모를 한 후 바로 베트남 출장길에 올랐다. 몇 번의 낙선이 있었던 이유로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다. 전화가 안 되어 카카오톡으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먼 타국에서 혼자 맛보는 짜릿한 순간이 앞으로의 시쓰기에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정과 모던 사이에서 방황을 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의 수준을 인정 받았다기 보다는 더 많이 노력하라는 노력상으로 생각하고 싶다.

 

몸에 깃털이 다 벗어진 느낌이다. 깃털이 다 빠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어떤 깃털이 나게 될지 두려움 속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깃털은 다시 돋아날 것이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색깔과 모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기회를 주신 계간 <시산맥>과 심사를 해주신 송용구 시인님, 안차애 시인님, 이기와 시인님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심사평]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작품을 기대하며

 

70여명의 700여의 응모작에서 예심 통과하고 본심에 오른 작품 중 김태인, 이선유의 작품들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외 9편은 풍부한 습작의 연륜을 짐작케 할 정도로 언어의 연금술에 있어서 숙련된 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생(生)의 체험에서 얻은 주관적 사유(思惟)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객관적 공감대의 넓이를 확대할 수 있는 훗날을 기약한다.

 

김태인의 「새 둥지를 그리세요」외 9편을 주목하였다. 그의 시는 낱말, 어절, 문장 간의 의미의 연결고리가 튼실해보였다. 문장과 어절과 낱말은 몸의 각 기관처럼 의미의 자양분을 주고받으며 상호의존(相互依存)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수준의 편차가 거의 없는 10편의 응모작 중 특히 <순간기억상실>과 <지문>과 <틈새>가 심사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분주한 역대합실에서 보행자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사건을 비롯하여 일상의 사건들 사이에 보이는 평범한 ‘틈새’들이 새로운 의미의 세포들로 채워지면서 ‘시’라는 유기체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이 혈액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사건, 하나의 사물과 또 다른 사물,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그 사람과 자연 간의 의미의 그물코들을 촘촘히 연결시키는 ‘연쇄반응’의 그물망을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솜씨가 시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송용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심사평]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를 바라며

 

행복하게도 따끈따끈한 햇(?)시편들에 한나절이나 잠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섯 분의 작품까진 추릴 수 있었으나 마지막 두 분의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 외 9편을 놓고는 다들 長考의 한숨이 깊었다.

 

하지만 ‘신인상’이라는 처음의 의도로 돌아가 짚어보니 한 분의 당선자가 풋풋하거나 촘촘한 시의 행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완성된 시편도 중요했지만 현상의 올과 감각의 결을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로 얼마만큼 직조해내는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김태인의 시편들은 공기방울 같은 가벼운 감각과 진부하지 않게 행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행보가 강점으로 보이나 시편들 사이의 편차와 모호한 표현은 극복해야할 과제로 보인다. 이선유의 시편 ‘무늬’와 ‘깃털’을 한참을 쥐고 놓지 못했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공교로운 언어의 결은 참으로 매혹적이었으나 자주 보이는 상투적 문구와 익숙한 묘사 등이 못내 걸렸다. 이미 詩魔에 든 분이니 한결 깊어진 풍모로 시단에서 반갑게 만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화투 패를 뒤집듯 지금 여기의 시편을 까서 보이고 또 다시 몇 모금의 시인으로 남는 가혹하고 이상한 동네(?)에 자발적으로, 설레어가면서 들어오신 것을 연민하고 또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안차애(시인. 본지 편집위원) 

 

[심사평]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을 기대하며

 

누구에게나 무의식 방에 “내면아이”가 살고 있다. 사십 살, 오십 살이 지나도 “내면아이”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려져서 세상이 갑자기 낯설고, 먹먹하고, 불안하고, 불쑥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몸뚱이만 커졌을 뿐이지 억압받고, 거부당했던 영유아기의 영혼은 무의식 안에 외소하게 남아 징징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길을 걷는 다는 건 그 어두운, 심층에 가두어 두었던 내면아이를 조심스럽게 들추어내어 달래는 과정,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할애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라는 시구에서도 극명히 들어나듯이 “나 안의 나” 은밀한 이중 자아의 현실적 괴리가 파헤쳐지고 있다. 그의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건 내면 심리를 현상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기법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편 마다 숨은 심리와 표층 현의식, 또는 드러난 현상과 숨은 원형의 상관관계를 짜내는데 농익은 안목과 섬세한 세공술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앞으로도 그의 시작은 기울지 않고 더 탄탄하게 대양을 항해하리라 믿는다.

 

나머지 후보작들 중에서도 번뜩이는 시적 기교와, 독특한 발상과 전개가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있었으나 그것이 지속력이 없이 부분에서 그치거나 어느 대목에서는 장황하여 시적 리듬을 죽이는 경향이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 밖으로 밀리기도 하였다. 후보자들 모두 시를 아바타처럼 바라보고 자기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걸 보니 그들 중 우리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는다.

- 심사위원 이기와(시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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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오차 (외 4편)

 

최연수

 

 

 

그해, 인구조사는

호흡 가파른 동네를 오르내렸다

 

목련나무 마디 굵은 손이 가리킨 골목

오래거나 갓 핀 송이를 통계 낸 필체가 흐릿한지

가지는 여러 번 센 숫자를 담에 눌러 적었다

 

눈 먼 봉오리들이 발을 헛딛는 높은 지대

샛길은 몰래 짐 가방을 챙겨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는 소식을 괄호로 남겨두듯

나무는 숨은 꽃을 암산으로 헤아렸다

 

무료함만 켜놓고 일 나간 집들

익숙한 이름을 들고 다시 골목 칸칸을 두드릴 때면

지붕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산 번지 빈칸을 채운

고요 한 채와 찢어진 연과 붕붕거리는 꽃의 시종들

눈부신 외출을 마친

인기척 없는 신발을 센 나는 사월 옆에 숫자 2를 적었다

 

마른 젖을 물린 어미개와 마주친 순간 녹슨 고리처럼

표정이 얽혔다 풀어지고

서류철엔 몇 마리 울음이 추가되었다

 

계약직 같은 봄날, 낮과 밤이 다른 오차와 통계

수수료를 떼듯

하얀 방에 들어앉은 목련 촉이 팍, 끊어지고

학점과 맞바꾼 길에선 저걱 저걱 유리 밟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캔디

 

  

하품을 뱉는 한낮에

누가 설탕을 뿌려놓았을까

 

누운 그림자를 따라 정오마저 가지런해지면

노란 포도알이 가물가물 닫힌다

수염에 찔린 비린 햇살이 나비모양으로 흩어진다

 

네 다리를 늘어뜨린 나른한 호흡을

쪽쪽 빨아먹는 바닥

볕은 셀로판지처럼 바스락거리고

지붕에서 옥상으로 건너뛰던 아슬한 착지와

골목을 뒤지던 배고픔이 따스한 손에 다 녹는다

 

오물오물

고양이를 아껴먹는 노파

고요한 하품이 주름진 입 속으로 뛰어든다

 

떠도는 울음을 불러 갈치 한 토막을 굽는 동안

발톱은 안으로 휘어졌다

매끄러운 소리를 무릎담요로 덮고 앉으면

말랑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류

 

쓰다듬을수록 동그래지는 사탕

침침한 눈과 귀로 녹여먹는 뒷맛이 달다

 

  

드므*

 

 

주술이 통하는 곳이 얼굴이라면,

신은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이목구비를 만들었다

 

어떤 사무친 마음 있는지

물거울 속 또렷한 얼굴이 중얼거리고

내 손가락에 놀란 수피水皮가 재빨리 지문을 찍었다

 

어느 궁에서 본 드므 속엔 밤마다 당황한 불이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비추는 순간,

말끄러미 올려다봤다는 화마

떠다니는 달에 황급히 얼굴을 벗어 걸어도

푸시시 불은 꺼졌다고 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제 자신을 꺼버려야만 했을까

놀란 걸음이 서둘러 빠져나가고

잠시 고요한 파문이 남았을 것이다

 

불을 다스리는 건 냉수밖에 없지,

가슴을 끈 아버지에게선 여울목 물소리가 났다

그래도 남은 화기가 있는지

약수 한 통 받아들고 오솔길을 내려가셨다

 

그 밤, 냉장고를 열자

낯익은 손이 방금 다녀갔는지 흔들리다 잦아든 갈증

유리컵으로 옮긴

찰랑이는 거울 속엔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가 있었다

 

 

* 넓적하게 생긴 큰 독. 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을 간다는 주술적 의미.

 

 

 

우산의 시간

 

  

엄마를 따라간 그날, 공장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왼쪽을 열면 정오의 해가,

오른쪽을 열면 구름이 내걸리고

 

심장 쪽을 믿는 엄마가 우측 문을 열자

구름을 숨긴 포자들이 날아들었다

섶다리 밀려온 수상한 기미가 함께 떠다녔다​

 

검은 하늘은 자주 무너졌다

손잡이 망가진 우리 집,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만 웃었다 ​

 

꽃무늬 양산을 내던지고 우산공장으로 출근한 엄마

챙 좁은 우산 같은 월급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젖은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슬레이트지붕에 대못이 박히는 시간

살이 부러진 여름은 길에 나뒹굴고

구멍 난 하늘이 방 안 양동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구름사촌이었던 우리는 퐁, 퐁, 리듬에 맞춰 잠이 들었다

 

정오의 해를 찾아 나선 부도난 양산의 계절

먹구름 몰래 펼쳐든 우리들 웃음에서

녹슨 쇳소리가 났다

 

 

 

프릴의 계절

 

  

음료를 삼키는

건조한 그의 후두가 펌프질을 했다

 

빨대 꽂힌 주스 팩이 홀쭉해졌다

 

꽃들이 모두 뛰어내린 허전한 목

바람이 핥는 꽃대가 불안하다

마지막 꽃냄새를 들이켜는 바람의 양볼이 쏙 들어간다

 

프릴은 허전한 목들이 하루를 사는 방식

꽃잎 무성한 계절,

꽃나무들이 몇 겹 주름 속으로 속내를 감춘다

 

변종된 겹 백일홍이 숨긴 뒤편은 수상쩍고

목도리도마뱀의 프릴은 치명적인 무기다

 

지금은 시린 발을 감춘

늙은 연밥이 거꾸로 매달리는 계절

황혼은 거리의 불빛들을 숲으로 끌어오고

목이 허전한 나뭇가지들이 노을 목도리를 칭칭 감는다

 

움츠린 외투 안주머니에 그의 봄날이 있듯

노란 부리를 감싼

숲속 프릴 속에는 숨겨둔 온기가 있다

 

 

 

최연수

 2015년 《시산맥》, 영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누에, 섶을 뜨겁게 껴안다』, 평론집『이 시인을 조명한다』.

 

 

            —시산맥 2015년 봄호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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