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활짝 핀 꽃 외 4편 / 김이응
엄마는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말했다
초경을 하지 않은 계집애들과 몽정 없는 사내애들이
숨바꼭질하던 무싯날,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껌 씹는 언니들이 육낭거지 팔 때,
술래의 딸꾹질이 때맞춰 날 때,
고드래뽕이라며 한 마장쯤 내달리다
도깨비고비에서 넉장거리로 무너지던 저물녘
아카시아 단내가 이마를 스쳐올 때,
물음표를 떼어내며 첫사랑에 눈뜨던 초여름은
웅덩이마다 도롱뇽이 슬어놓은 알알이 몽글몽글해
무덤 많은 논틀밭틀로 질러가던 내 발소리에 놀라
오줌 지리고 돌아온 밤
담 없는 그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나 많아
잉큼잉큼 뛰는 아랫배도 숨길 수 없어
너른 변두리로 쏘다닐 즈음
더 이상 감출 수 없어
아까징끼로 가슴팍을 문대던 엄마
아가씨야 가시에 찔렸다며 말 더듬던 내 동생
딸꾹질이 뚝 멈췄을 때,
질겅질겅 씹던 껌을 삼켜버린 무싯날은
내 몸에서도 아가씨 꽃 지린내 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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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게르한스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파 말기입니다
이자라고도 불리는
X번째 투시 그림입니다
마이크로네시아의 산호초 같기도 하고
썩은 과일의 씨앗 같기도 한
폴립들이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여기
이 섬이 랑게르한스죠
달력에서 달아난 어느 일요일 오후
그림자에
쫓기던 화가는
내분비선에 실린
옛 애인의 검은 양산에 놀라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흥건해진 손바닥으로 피하지방층을 가리려 했다지만
자율신경계의 교란이란
단맛에 길들여진 원숭이의 눈썰미엔
어쨌거나 달달한 포도당의 장난인데
창녀의 웨딩드레스처럼 부푼
유령해파리
촉수처럼 뾰족한
바늘로
찔러댄
셀 수 없는 우점종들
보호색으로 가릴수록
빛에 빛을 더할수록
도드라지는 그늘에서
화가의 엉덩이가
바나나처럼 짓무르고 있습니다
피사체의 해부학 시간,
마취된 카메라
동공이 풀어지고 있습니다
십이지장에서 비장까지
리아스해안선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복제하셨습니까?
그럼, 캔버스에 사인해주시지요
사라진 옥상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언니들은 섬, 구름, 섬, 구름을 부르며 구름을 더 좋아했다
나는 발, 구름, 발, 구름을 굴리는 언니들이 더 좋아졌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날에도 언니들이 웃는다
바다 끝까지 간 사내는 돌아올 힘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믿으며
섬, 구름, 섬, 구름처럼 들뜬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구름다리를 건너다닌 옛날을 떠올리며 빨래를 밟으며
나도 옛날에 어린애였단 건 믿을 수 없지만 믿음직한 언니들은 껌을 씹는다
어느 호주머니에서 한숨이 빠져나올지 모르는 아주머니처럼
풍선껌을 부풀리다 손톱으로 터뜨린다
해바라기보다 키 큰 바지랑대 사이로 몰려다니는 먼지들
그 사이로 마르는 빨래들, 언니들은 마르지 않고
네 시가 되면 어째서 이 빠진 접시 같은 기분에 젖는지
접시꽃과 헷갈리는 꽃 이름이 떠오르지 않을수록
그녀들은 구름을 더 좋아했다
빨래가 젖는다 비옷이 없는데도 언니들은 더 이상 젖지를 않고
비 맞은 비웃음은 쓰지만 쓴웃음은 소리가 없는데
실소로 번지면 황혼이 올까? 황혼은 종기보다 더 잘 터질까?
그녀들이 웃는다 요실금 터진 할머니처럼 찔끔찔끔 웃는다
어느 그림자가 먼저 추락할지 모르는 초저녁
헤프게 웃던 언니들은 나팔꽃처럼 축 처진 외줄을 타고,
구름, 빵, 구름, 빵, 노래하다 사라진 그녀들은 언제나 빵이 더 필요했다
추파춥스
입술이 달려간다,
사랑을 받으러
혀를 밀고 들어간다,
맛의 자기장으로
추파!
불알을 꼭 쥐고
두드리는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한 옥타브
실로폰의 행성들
살살 녹는 이것은 사탕이 아닌 사랑
색깔로 흥행을 점치는 이것은 사탄이 아닌 사랑
발상의 궤도부터 다른
삐딱한 달리*처럼
입자가속기에 태양계를 넣고
돌린다
혓바닥의 미뢰로 떨어진
별똥별은
쪽, 쪽, 터져
운석들의 달달한 스캔들은
은하수로
쫙쫙~
퍼져
두 볼이 부푼다,
젖꼭지를 빠는 힘으로
알을 삼킨
아이들의 꿈이 팽창한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여름 들판의 사탕수수처럼
사르르 녹는 사카린의 핵융합으로
붉은 데이지의 꽃술과 고양이 성운의 푸른 눈에
침을 바른 거짓말로 완벽하게 포장되는
삼킬 수 없는 추문!
살릴 수 없는 추락!
명왕성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
이빨 빠진 아이들이 문상 온 날,
이것은 끈끈한 설탕의 죽음
이것은 뼈대만 남은 태양의 주검
실눈 뜬 아이들 머리 위로
개미 떼가 몰려든다
* 막대사탕 ‘추파춥스’의 포장지 로고를 데이지 꽃으로 디자인한 살바도르 달리
물집의 성분
기분 따라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꽃밭,
그곳은 무섭게 고요했다
고요는 물끄러미의 동사,
곧 축축해지는 건조체였다
엄마는 활짝 핀 꽃을 옮겨
현실을 허구로 바꾸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날마다 내 귀에 꽂은 것은
바람,
곧 시들해지는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화였다
그래도 그곳은 꽃의 무덤,
눈물을 부어주면
신기루처럼 젖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는
부끄럼이 많고
부끄러움은 구멍 난 빤스 같았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어보는 엄마도
가랑이 사이에 낀 빤스 같아
구멍 많은 오아시스에
엄마를 꽂았다
너, 그렇게 살면 세상이 좁아져,
꽃들이 농담을 했다
피부가 차갑고 투명한 농담,
썰렁한 사후경직이 일어났다
진짜 같은 조화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엄마는 죽어서도 엄마 같았다
다래끼를 터뜨렸을 뿐인데
구멍마다 엄마가 새어 나왔다
몽정처럼 부드럽게
[수상소감]
오래된 핸드폰은 자주 꺼진다. 핸드폰에 배터리를 연결해놓아도 금세 충전이 되지 않는다. 다급한 전화가 올 일 없는지라, 뭔가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핸드폰이 꺼져 있어도 무심할 때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낯선 번호가 떠 있은 걸 발견했을 때는 핸드폰보다 더 오래된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충전을 해두었기에 그나마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통화음 다음으로 낯선 남성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여성분이시네요. 저는 이름 때문에 남자분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 네. 제 본명이 좀 그렇죠. 하지만 제 시는.......” “아뇨. 시도 중성적인 면모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원고를 보내면서 즉흥적으로 만든 필명이 떠올렸다. ‘김이응’ 34대 종손 집 맏딸로 태어났으니 아버지의 성은 버릴 수 없었고, 시인으로 거듭나는데 심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어머니의 성은 꼭 넣고 싶었다. 하지만 두 개의 성 다음엔 뭘 넣지?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따라가니 답은 쉽게 구해졌다. 그리고 <시산맥>신인문학상에 응모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름을 썼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시를 발표할 때마다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될 줄은 전혀 예상은 못한 채 말이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 문학 공부를 시작할 즈음부터 내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이름으로 불려본 적 없는 괴물이 되면 사람들의 세상이 낯설게 보일 듯싶었다. 하지만 ‘괴물-되기’는 슬프고 외롭고 심지어 억울했다. 입이 있지만 정작 입을 열어야 할 때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에둘러 처음 문학에 입문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곳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연애 시편들과 함께 하는 봄날이었지만, 내 시를 읽어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봄날마저 떠났다. 그래도 여름날은 용케도 찾아와 비교적 젊은 내게 아동문학이란 밝은 옷을 건네주었지만, 나로서는 제아무리 잘 골라 입어도 어쩐지 빌려 입은 남의 옷만 같았다. 결국 나는 훌훌 벌거벗고 조용히 숲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한편 두려웠던 가을 숲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알아챌 수 없던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시는 나다워졌을까? 쓰면 쓸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래된 핸드폰을 바꾸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바꿀 생각이 없다. 이상한 고집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실은 시라고 끄적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벗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돌고 돌아 어렵게 되돌아온 원점인 시(詩) 마을에서 언젠가 찾아올 겨울을 맞이할 생각이다. 홀로 걷고 있던 내게 이름을 묻고 도반이 되어준 <시산맥>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뒤처져 걷고 있던 내게 관심을 가져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당선 소식에 그 누구보다 기뻐해 준 엄마가 잘 걷지 못하신다. 한 가지 놀라운 건 내가 시 쓰는 걸 그 누구보다 반대했던 아버지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내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그 두 분께 ‘김이응’을 소개한다. ‘응이라고?’ 되묻는 막냇동생 내외의 목소리는 환청일까? 바라건데, ‘고모가 김이응이야?’ 라고 확인할 조카들에게 내 시 역시 수수께끼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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