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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영화법(投影畵法) 외 4편

 

조 희 진


  투명 물고기였다 어시장 대형 수족관에서 보았던 살을 발린 물고기처럼 당신은 남은 뼈와 꼬리만으로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날숨 뱉고 아가미만 뻐끔거렸다
 
  당신의 깊은 속살까지 떠온 밤, 캄캄한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내가 점점 투명해졌다 유리파편처럼 부스러진 별 부스러기들이 남쪽물고기자리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주머니 속 거슬러 받은 동전이 더욱 쩔렁거렸다

 

  앙상하게 격자무늬로 남은 당신의 창, 당신의 서랍에는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가는 당신의 붓, 당신의 명분들이 가지런히 그대로 놓여 있다 뾰족한 붓끝을 물에 적신다 핏기가신 밤하늘에 아픈 갈비뼈 하나를 긋는다 쩍쩍 갈필이 난다

 

  자꾸 갈라지려는 내가 면도날처럼 선명해지고 싶어 눈 꼬리를 치켜뜨고 날카롭게 눈썹을 다듬는다 당신의 비린 냄새도 A병동 냉동 수족관에서 서서히 얼어붙어 화석처럼 선명하게 굳어갈 것이다 자라나지 않은 눈썹을 한밤중에 일어나 또 민다 

 

 


‘오늘’이라는 매뉴얼 

 

  이 달의 카달로그에도 네 바코드는 없었다 여전히 과거로만 똬리를 트는 내 인식 속의 오류, 단 한 번도 눈으로 마주친 적 없는 너를 마른 빵처럼 뜯어 먹다 이불 속으로 발을 뻗는다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덮고 멀티의 배꼽을 누른다 절반쯤 익어가는 정오의 햇덩이, 절반의 광고방송, 뉴스는 언제나 수족관의 열대어처럼 소리 없이 입만 달싹이는 현란한 구문의 반복 
  
  조간신문의 풍성한 메뉴는 새벽 네 시의 공복 속으로 던져진다 초고속 CCTV에 반짝, 우주 공간의 별 하나로 네가 찍힌 건 수년 전이었고 붉은 직인이 찍힌 네 생의 독촉장은 잊을 만하면 또 배달된다 오늘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시든 사과 향, 먹다만 사과는 금세 갈변되었다 햇살 한 번 들인 적 없는 위장 속에선 자꾸 신물이 올라왔다 사과껍질 안쪽에 붙은 과육, 그 사소한 분량만이라도 반송하고 싶다 슬픔 어딘가에 더 딱딱하게 익어갈 부드러운 육질이 남아 있다면 

 

  툭툭 굵은 실밥 터지는 소리 들린다 누군가 내 겨드랑이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 끝, 검은 빗물만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아직 끌러보지도 않은 크고 작은 상자 위, 또 배달된 젖은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가고 있다 터진 겨드랑이에 시침핀을 꽂는다 배열이 일정하지 못한 모서리의 아픈 시간들이 지금 무겁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견인


  오래 버텨온 그가 무허가 컨테이너 박스처럼 녹슬어 가고 있다 튿어진 나일론 잠바 사이 그가 걸어온 구비 진 길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자바라 방충망 샷시 인테리어... 때 절은 소매 끝의 내력이 건설 삼보중기 문고리에 쩍쩍 달라붙고 있다 뚜껑이 없어져버린 그의 잠속에서 이월의 난로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썬팅이 벗겨져 피부각질처럼 나달거리는 창문 안으로 부려진 시간들이 보인다 먼지 속에 박제된 꿈의 도구들, 벽의 내부로 찬바람 들이칠 때마다 죽은 빙어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반쯤 떨어져 나간 차양이 표정을 철거당한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덜컹거리고 있다 리모델링할 수 없는, 눈동자 속으로 얼어붙은 하늘 한 자락 무심히 펄럭인다 비장하게 녹슬어 가고 있는 철문처럼 눈꺼풀이 잠깐 열렸다 천천히 닫힌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 사이로 타들어가고 있던 꽁초가 그 이력의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다

 

 

 

비상등


저 쪽이 들판이라고 말해준 건 너였고
이 길이 곧 바로 동쪽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말해준 것도 뭉뚝한 너의 두 눈,
초봄이었지
몇 개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났는데 대관령에서 또 터널을 만났다
그런데 이게 뭐야,
육중한 몸의 앞다리 두 개를 펼쳐들고 언제나 어정쩡한 직립의 자세로 서 있는 백말의 조각상처럼 불쑥,
내 앞을 끼어든 것도 너잖아
작년에 핀 복사꽃이 올해도 복사꽃이라고? 오늘은 어제의 복사판이라고?
깜빡거리는 네 눈빛의 의민 또 뭐야,
내 기억이 안개 속에서 자꾸 지워지잖아
이 길 위에서 눈 한번 딱 감았다 떴을 뿐인데
저 들판의 꽃들은 언제 피었다 언제 져버린 걸까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네 눈빛 속의 말들
그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내 기억의 들판을 말해 줘

 

 

 

우기, 그렇게

 


물 향기 수목원 편백나무 울타리 곁에는 아카샤 모텔만 땅속으로 뿌리를 번성해 가고 있었다   
 
유리문 굳게 닫힌 미소지움 안과, 진료실 책상 위로 얇은 일간지들 묵묵히 쌓여가고 있었다

 

서로를 오해하거나 견주려 들지도 않았다
 
둥글게 솟아오른 미소지움 원시의 안구 속으로 몇 차례 낙뢰의 환영들이 흘러갔다  
 
백내장의 눈시울 같은 계절 그 너머, 양 날개 그물 살 부비는 소리 들렸다
 
불거져 나온 광대뼈, 나비 한 마리 슬쩍 앉았다 간 흔적, 단치마 사그락거리며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등 갈퀴 풀숲을 헤치고 막 날아오르려는 북방기생 나비처럼 활짝 펴든 양 날개, 결절된 등 비늘의 시간들이 흩날렸다 

 

흐드득 풀숲에 떨어진 보드라운 잎맥들과 거세게 몰아쳤던 유월의 단상들이, 그렇게
 
긴 장마의 출구였다

 

 

 
[당선소감]

 

둑을 무너뜨리고 방류되는 물길 위의 한 잎 나뭇잎 
 
  무릴 지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늘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군가가 단지, 제 피부색이 조금 검다는 이유로 출생년도가 조금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지나친 세금을 물린다면, 그건 분명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어떤 것도 새로 만들거나 조작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목적지가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전혀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이겠지요.
  불투명한 사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 시창작반이었습니다. 아마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편들을 접했을 때였을 겁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사조나 미학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우주적 상상력을 시에 투영시킨 작품들, 특히 만년의 꾸준한 창작활동을 본받고 싶었단 말을 감히 해도 될 지요.
  강둑을 무너뜨리고 방류되는 물길처럼, 시시각각 역마다 사람들이 방류됩니다. 제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흘러들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때에 따라 방류되는 그 물길 위의 한 잎 나뭇잎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산맥’이라는 역에 방류된 제 시가 어떻게 해석될지 어떤 반열에 놓일지 걱정이 앞섭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 수업에 뛰어들어 얼떨떨해 했을 때의 최정례 선생님, 밥숟가락도 제대로 못 쥐는 제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숟갈질을 가르치며, ‘시’라는 ‘잡곡밥’의 거칠고도 쓴 맛을 곱씹게 만들어 주신 이덕규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돈이나 밥이 되는 것도 아닌 시 쓰는 것을 곱게 봐준 가족들께 고맙단 말 하고 싶고, 주야로 함께한 노작 시창작반 동료들, 햇살들도 늘 제 옆에  있다는 것, 잊으면 안 되겠지요.
  제 시의 방류를 도와주신 시산맥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희진

경남 함안 출생, 경기 오산 거주, 한국방송통신대 일본어과 졸업

104208hanmail..net

 

 

 

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 외 4편

 

지 연


1
사내는 물비린내가 난다고 했다
여뀌꽃이 피기 전에 여자
유방암 항암치료를 하고 돌아왔다
사내는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면서
샵을 누르며 웃는 소리

 

계단을 내려가며
여자는 빛을 밟고 밟았다
외가로 보낸 딸아이를
왼쪽 젖무덤에 올려놓았다

 

2
도려진 가슴을 만졌다
살갗에 입을 부딪치며
수많은 여뀌가 숨구멍을 찾고 있었다

 

여자의 외짝 무덤이 철렁 떠오를 때마다 나는 욕실로 간다 전신 거울에 맺힌 물방울들 십년이 지났지만 가묘(假墓)의 하루, 하루가 흘러내린다 나에게 이혼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여자의 시간이 온다 몸에 붙은 젖무덤이 파헤쳐진다 여뀌들이 솟아오른다 물이 잘 빠지는 무덤에 여뀌꽃 어머니, 미끄럼 타는 물방울들 가묘 위에 가묘들

 

저승에 한쪽 가슴을 주고
이승에서 꺼져가던 여자
물방울에 기대면
나에게 빈젖을 물리고
여뀌꽃 피기 전에
투둑 떨어집니다

 

 

 

친절한 금자씨 2013 


어두운 방에서 고시공부하다 실성한 여자
산굴뚝나비처럼 걸어가고 있었어
연기처럼 날아올랐어
골짜기를 지나 바다를 지나 머나먼 사막

 

산굴뚝나비가 노을 한 입을 베어 물었어
네발을 겅중 세우고 날개를 접었다 펴고 있었어
광활한 어둠이 전갈처럼 다가왔어
표범무늬 날개눈이 커지고 있었어
삼켜도 삼켜도 날개로 달려오는 전갈들
산굴뚝나비 선인장에 숨어 이슬을 빨았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사구 그 깊은 창고에
산굴뚝나비 가시로 눈을 빗질했어
별이 떨어지고 있었어 아니, 하얀 모래알
여자가 그림자 속에서 속삭였어
전갈이 가위를 세웠어

 

그림자 머리가 쪼개지고 표범이
표범무늬 날개눈 속에 얼굴이
허기진 산굴뚝나비처럼
날개를 접었다 폈다 했어
모래 바람이 쏟아졌어
생의 메마른 무늬들
가루약 같은

 

 

 

봄에 따시끼를 듣다

 

  오후 세 시가 되면 사내는 알람처럼 멜로디언을 불지 사람들이 힐끔힐끔 못을 날리지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화단에 앉아 나비야 노래를 스타카토로 깨워 부르지 천분(天盆)에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온다고 뛰어다니지

 

  아이들이 몰려오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지 따시끼 따시끼 왕따 시끼 따시끼 나비 반주에 맞춰가며 침을 튀기지 사내는 팔을 휘저으며 갓 심은 팬지꽃 위로 올라서겠다는 듯 꽃을 밟지 아파트 값이 내려갈까 조마조마한 사람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한다지

 

  통장이 삼천지구대에 민원을 넣었는지 사내가 사라졌지 지하주차장 벽에 아이들과 따. 시. 끼. 짖어대듯 유성 펜으로 썼다는 풍문만 있지 반올림 건반을 징검다리 삼아 이사 갔는지 벙그러진 입으로 나비가 떼 지어 들어갔는지 알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지 몇몇 사람이 화단에 물을 주었다지

 

  바람이 문을 때렸지 햇살이 방범창을 뚫고 들어왔지 봄이 언제 적에 왔는지도 모르느냐고 바닥을 쳤지 따시끼, 순간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나비가 공중 위로 날아올랐지 따시끼 따시끼 왕따 시끼 따시끼 벽지에 앉아 멜로디언을 불었지 자리끼 같은 따시끼 봄이 환장하게 피어났지

 

 


환풍기

 


1
  그는 화장지를 돌돌 말아 왼쪽 귀를 막았어 자신보다 먼저 진물 흘리는 귀를 참을 수 없었어 꽃을 만나면 꽃을 나비를 만나면 나비를 돌돌 말아 넣었어 왼쪽 귀에 밀어 넣으면 오른쪽 귀로 빠져나가는 진물 더듬이들 한번은 먹바람을 한 움큼 잡아 귀에 넣고 양쪽 귀를 막았어 우왕우왕 뇌벽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 경기를 일으키던 나무들이 아주 잠시 하늘을 보여주었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십자드라이버로 화장지를 빼고 싶었어 거짓말쟁이, 이상한 일이었어 그가 돌려서 빼놓은 바닥의 화장지가 꽃이 나비가 솔바람이 환풍기가 되어 도는 것이었어

2

  내 최초의 기억은 때에 전 환풍기를 바라보는 일이었어 돌아가는 환풍기에서 곧게 뻗어 들어오는 빛, 혀끝으로 핥고 싶었어 어머니는 분식집을 했어 밀가루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넣고 치대고 밀고 떼었어 뜨거운 물에 수제비가 풀어지듯 나는 자라 도로를 핥는 바퀴를 보았어 그 바퀴를 따라 걷다보면 집에서 얼마나 멀어지는지 몰랐어 길은 잃기도 쉬웠지만 잃어버릴수록 찾기도 쉬워졌어 메뉴판을 꼼꼼히 훑어보고 오세요 손님처럼 아버지

3
  차 한 대가 순식간에 지나갔어 길이 기침하여 뱉은 돌멩이를 발로 찼어 길은 구심점을 향한 환풍기의 날개, 날개를 타고 나는 길과 바퀴를 눈으로 핥았어 속도에 튕겨진 돌멩이처럼 그가 휴지를 돌리며 나를 따라왔어 해가 붉게 환풍기를 돌렸어 노을, 그가 손을 뻗어 허공의 노을을 돌돌 접었어 아버지를 닮은 그가 내 손에 쥐어준 노을이 어지럽게 돌다 손바닥에 박혔어 그와 나만이 아는 외곽의 노을이 바퀴살이 되어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나는 손을 들어 오른쪽 귀를 막았어

 

 


바람 바이러스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삭발한 여자가 인형을 만든대

 

삐걱이는 의자에 앉으면 벽에 자꾸 머리를 찧는 바람의 말이 들린대 아이는 벽에 머리를 파륵파릅 찧는 아이였대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새벽 예배에 다녔대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이가 옆으로 흔들거렸대 여자는 아이를 업고 찬송가를 불렀대 그때 처음으로 아이가 여자의 등에 깊이 머리를 기대었대

 

등에서부터 바람이 지나갔대
바람이 여자에게 우왁 달려왔대
가슴에 머리를 찧는 바람을 안고
여자는 인형을 만들었대

 

걸어 다니지 못해서 무릎 닳은 바람
추워서 어쩌냐고 여자는 이불을 뜯어 인형 옷을 만들었대 바람이 새처럼 이야기를 한 것도 그즈음 이었대 엄마엄마 얼었던 눈이 흘러내려 엄마엄마 내 몸에 목이 아픈 꽃이 필까? 말 못하던 아이가 눈을 후비며 이야기 한대 문에 걸린 인형도 테이블에 앉은 인형도 모두 이불 한 조각, 조각난 천의 시간이 여자의 등을 바라본대 빗방울이 고인 오목한 등 바라보다가 목을 앞뒤로 흔드는 인형들은 바람을 토닥토닥 덮어준대 바람을 따라다니는 인형의 헤엄 다리는 밤새 해어져 여자는 다리를 더 촘촘히 바느질 한대

 

여자는 하얀 실처럼
바늘의 뾰족한 눈물이 되어
수시로 세상의 안과 밖을 시침질 한대

 

  대에 대에엥 종이 울리면 누구나 바람의 호위병 가게 문을 연대 바람이 사람들의 등으로 달려가 머리를 훕훕훕 찧는대 어른들은 여자의 인형을 안고 헐겁게 웃는대 여자의 등에 바람 길이 생겨난대

 

 

 

[당선소감]


  시는 내 무의식을 끝없이 끌어올리는 설렘이었습니다. 그 두근거림은 오래지 않아 나를 할퀴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더 이상 설렘이 아니라 살풀이가 되어 주술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무당이 된 듯 나는 발에 땅을 딛지 못하였고 작두 위에서 아슬아슬 울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베이고 떨어지기를 수십 번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내 인생 위에 시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내가 쓴 시가 나와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러다 시와 떨어져 지내기로 했습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벽면 그림자를 후려쳤습니다.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고 쓸 수도 없었습니다. 텅 빈 시간과 풍경이 나를 채웠다가 어둠으로 지워졌습니다. 무방비로 심심하였으나 그 심심함 속으로 햇볕이 드나들었고 풀벌레가 지루하게 울기도 했습니다. 이제 시에게 매달리지도 끌려가지도 않겠습니다.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떠나면 떠난 대로 동행하며 걷겠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노랑으로 건너가는 논두렁을 보았습니다. 익어가며 깊어가는 알곡들이 바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닥이 남루하지 않겠지요. 내 후미진 바닥에도 꼬물꼬물 기어가는 것들 걸어가는 걸들 뛰는 것들이 있겠지요. 눈물겹게 한 생을 적시는 것들 초라하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들……. 저들의 노래를 끝없이 받아 적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가는 길목에 내 가난한 발을 올려도 좋겠습니다. 바짓가랑이에 이슬이 적시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가난한 눈으로 오래 바라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들뜨지도 않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기뻐해주신 스승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자신이 행복해야 읽는 사람도 행복하다며 아버지처럼 응원해주신 김동수 교수님, 쓰고 쓰다보면 된다며 주눅 든 어깨를 토닥여주신 문신 선생님, 두 분 스승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기 위해 느리고 깊게 걷겠습니다. 밤 열시가 넘도록 치열하게 공부했던 ‘글벗’ 식구들과 멀리서도 박수를 보내고 있을 ‘온글’ 식구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재미없는 시를 또박또박 읽어주던 수현이, 마냥 잘한다고 칭찬했던 성민이, 읽어라 배워라 따끔하게 지적했던 남편 김동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돌아보면 주변이 나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분들과 풍경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잡아주신 시산맥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35회 전북여성백일장 시부문 장원.   2013년 미션21크리스천 신춘문예 동시 가작 당선.

kiki2174@hanmail.net

 

 

 

 

[제 7회 시산맥 신인상 심사평]

 


앞으로 펼칠 활약상을 기대하며

 

  시인에게는 천지간의 운행원리를 물리적인 측면이나 심리적인 측면에서 천착해 들어가려는 탐구의지가 있어야 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 내재된 사회적 또는 역사적 시점에서의 갈등과 모순, 순행적인 측면과 역행적인 측면, 조리와 부조리를 가늠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심미적으로 시적 플롯을 구성해야 다각적으로 독자와 소통이 될 수도 있고 다채로운 플롯의 묘미가 있는 형상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선험 내지는 경험적 인식에서 빚어진 삶의 미학과 메시지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작품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시작의 기법을 충실히 습득할 의무가 있다. 작품(시)을 형상화함에 있어 시적 기교가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여 기법과 기교를 충분히 익히되 작품을 쓸 때에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시작법에 소홀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는 모든 시인의 염원이기도 한 ‘좋은 시’를 생산하는 것이 요원해질 수밖에 없고 시간을 아무리 벼려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취지를 갖고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총 82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되었고, 이 중에서 24명의 250여 편이 예심을 통과하였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답게 대체로 기본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체로 서사적 플롯이나 극적 플롯이 편향적으로 치우쳐진 플롯구성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는 기성시인들의 작품을 살피면서 겉만 보고 따라 쓰는 결과로 보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독창성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과하다보니 시의 본질을 구현하는 데에는 소홀하고 기교만 두드러지는 작품도 꽤 있었다. 그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김미옥, 김욱, 김일곤, 이재근, 임희선, 정은, 조희진, 지연, 홍애니, 황선주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러한 문제를 다소 극복한 것으로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의 작품에 주목하여 세심히 읽고 다각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며 토의하였다. 그런 다음에 최종으로 김욱, 조희진, 지연, 황선주의 작품을 선하였고, 다시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오랜 시간 동안 다시 평가하며 토의한 끝에 지연, 조희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하였다.
  김욱의 작품은 시적 구성이 원만했고 의미를 재현해내는 시적 표현의 유연함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시적의미를 구현하는 심도가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황선주의 작품은 시적 기교가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시적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측면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비록 당선작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들의 시적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여 앞으로의 기대를 갖게 하였다.
  최종적으로 지연의 작품 「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 외 4편과 조희진의 작품 「투영화법(投影畵法)」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지연의 작품 「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에서는 슬픔을 슬픔의 의미에만 가두지 않고 여성성과 모성으로 심화시켜 잘 녹여내 형상화한 특징이 빼어나 보였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이러한 심미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주는 형상성을 잘 갖췄다는 측면에서 당선작으로 뽑는 데 망설임이 없게 하였다. 조희진의 작품 「투영화법(投影畵法)」에서는 화자가 처해진 현실 속에서의 결핍과 초조함이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이 비추는 현상이 우리 삶의 비극적인 측면을 반추하게 하는 기운을 갖고 있었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사물이나 현상을 관조하면서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삶의 미학을 특징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점이 두드러져 당선작으로 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이 흡족하기보다는 앞으로 펼칠 활약상에 기대를 거는 심정이 더 크다. 더욱 정진해서 이후에 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사위원 : 김광기(글) 박남희 나금숙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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