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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 김태인

 

 

애착은 없었으므로

한 치 망설임 없이 빈 둥지를 그렸다

추락은 비상(飛上)의 동력이라지만

어린 새는 공중을 날다 곤두박질쳤다

아가야 세상은 혼자 일어서는 거란다

나뭇가지는 약해 내용물을 울컥 쏟을 뻔했다

둥지는 바닥이 없어 기울이면 밑 빠진 독처럼

내려앉았지

공간을 접어 몇 겹의 시공을 밀어 넣었음에도

충분한 양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단지 왼손잡이여서

왼쪽 구석에 작은 둥지를 그려 넣었다

4B 연필을 집어 든 건

잿빛 눈빛이 친숙했기 때문

마침내 굵은 선의 파공으로 지나간다

둥지를 엎고 도화지를 찢을 만큼 둔탁하게

쏟아진 빈 둥지 옆에 한 아기가 울고 있다

부모는 둥지를 버리고 다른 차원의 높이로 날아갔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

바닥이 없는 마음처럼 지붕 없는 둥지를 이고

부화할 날들을 뒤로 한 채

늙은 나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린 새는 빈 둥지를 허물고 도화지를 떠났다

 

* 애착안정성 진단을 위한 투사검사(B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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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1번과 3번 지문의 영역 사이에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문장들이 꿈틀댄다

이해는 지문이 만든 미로를 뚫고

출제 의도는 몇 년 째 퇴로를 헤맨다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과정은 4번 지문의 출생으로부터

성장 그리고 죽음의 묘비명을 이해하기까지

 

3번 나뭇잎과 1번 잎사귀 중 옳지 않은 것은?

가장 나뭇잎 같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질문에 모든 잎사귀들은

말문의 잎맥을 막고 치를 떤다

가장 고양이 같지 않던 울음소리만 긴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진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순간은 질문과 사고의 이종교배이다

가장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은 몇째일까요?

문제 같지 않은 문제가

가장 꽃 같지 않은 꽃을 고르라는 질문을 던지고 간다

 

똑똑 물방울 돋는 약수터 바위틈에

5번 물결이 수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가장 꽃잎 같은 분홍 벚 꽃잎 아래로 숨어든다

열한 번 한숨과 아홉 번 어긋난 관절은

지면에 등장할 기회를 잃고

우리들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지문이었을까요?

 

 

 

순간기억상실

 

강한 휘발성을 띤 순간의 장소에서 당신의 기억은 웜홀로 증발된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블랙홀의 가공할 중력과도 같아서 지나가는 모든 현상을 끌어당겨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배출한다 실로 눈빛 깜박할 순간이다 서울역 앞 내 앞을 빠르게 지나는 한 여인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커피 잔이 균형을 잃고 두 시선을 직선의 관성을 한 순간에 집 어 삼 켜 버 렸 다 방향을 잃고 쏟아지는 커피 잔에 흙빛 기억을 왈칵 토해내며 핑그르 순식간에 비켜선 찰나 마주 오던 한 남자 나를 피해 급히 직진 괘도를 선회할 무렵 휴대전화 통화에 한쪽 기억을 먹혀버린 한 여성의 스텝과 엉켜 탱고의 피날레를 연출하고 만다 서로의 방향성 기억은 가방이 서로 부딪치며 사방으로 튕겨나간다 놀람과 통증과 불쾌감이 교차하는 연쇄반응으로 엉켜버린 공황은 순간기억상실증 옆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 이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유리창에 부딪히고 순간 걸음을 멈춘 바람에 날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서울 상공에 쌓이며 지표면 1mm를 덮어 수백만 마리의 미생물이 중금속으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순간기억상실의 연쇄반응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전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서울역 대합실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로 서서히 물들어 간다

 

 

 

틈새

 

얼굴 틈으로 날아오는 새,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제와 오늘 사이로 말과 행동을 자주 흘린다.

 

화장실 깨진 벽거울에 비춰진 조각난 얼굴, 나뭇가지 쪼개놓은 낮달처럼 틈새 파고든 눈코입은 온전히 꿰매내지 못한다.

 

찔끔찔끔 녹물 흘리는 수도꼭지, 전립선이 막혔는지 꽉 깍 나오는 울음이 길다. 한번 구겼다 펼친 살림처럼 모든 각이 흩어지듯 놓아두고 지우고 가야 할 것들.

 

휴지에 싸서 버린 얼굴이 넘쳐난다. 형광등 속이 까맣다. 한쪽 기억을 뜯어낸 벽지 여백이 길다. 미닫이문으로 바람이 스미고 대들보가 벌어진다.

 

한 귀퉁이 부서져 내린 계단으로 깃털구름이 몰려든다. 거울 속으로 한 줄 훈풍이 불고, 햇볕 든 꿰맨 틈으로 죽지 않은 뇌신경을 뻗는다.

 

얼굴 중앙으로 사납게 몰려오는 실금, 조각조각 붙은 파편이 흩어지듯 수십 개의 얼굴이 다시 부화한다. 푸드득

 

주름지고 패인 틈에서 솟구쳐 오르는 새 떼, 생의 어스름 골목에서 헐렁하지도 호락하지도 않다.

 

 

 

겨울, 유전자

 

 

하늘에 닳아가는 새들의 잊힌 무릎이어서

나는 둥근 손거울 안에 오랜 문명처럼 희미하게 닳아간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고기의 뼈를 대면하는 일처럼

 

나는

거울 위에 눕는 또 하나의 혈연

 

주먹도끼를 들고 오랜 자폐를 깨고 나오는 날

무르팍을 흐르는 달빛의 기도는 단말마 비명으로 깨져 한꺼번에 와장창 쏟아질 것이라 한다

 

깨어진 조각마다 고스란히 녹화된 아버지 얼굴과 내 눈빛이 바라보는 아이들

서로의 거울을 바라보며 부레가 닮아가는 예감을 터득하는지도 모른다

 

곱슬머리를 기억하기 위해 쌍꺼풀 닮은 눈빛이 더듬어가는

유전자 지도 속에서, 물고기 뼈를 바라보는 염색체 한 쌍이 잊힌 새의 무릎임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는 눈보라와 폭풍과 강추위를 이끌고 거울로 뛰어든 후 그 속에서 소리 없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손짓을 해도 대답이 없던 무성영화 같았던 거울 속에는 혈연으로 뭉쳐진 응고된 구름에서 잊힌 문명들이 펑펑 쏟아져 내립니다"

 

 

[수상소감]

 

응모를 한 후 바로 베트남 출장길에 올랐다. 몇 번의 낙선이 있었던 이유로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다. 전화가 안 되어 카카오톡으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먼 타국에서 혼자 맛보는 짜릿한 순간이 앞으로의 시쓰기에도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서정과 모던 사이에서 방황을 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시의 수준을 인정 받았다기 보다는 더 많이 노력하라는 노력상으로 생각하고 싶다.

 

몸에 깃털이 다 벗어진 느낌이다. 깃털이 다 빠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앞으로 어떤 깃털이 나게 될지 두려움 속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깃털은 다시 돋아날 것이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색깔과 모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기회를 주신 계간 <시산맥>과 심사를 해주신 송용구 시인님, 안차애 시인님, 이기와 시인님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심사평]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작품을 기대하며

 

70여명의 700여의 응모작에서 예심 통과하고 본심에 오른 작품 중 김태인, 이선유의 작품들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외 9편은 풍부한 습작의 연륜을 짐작케 할 정도로 언어의 연금술에 있어서 숙련된 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생(生)의 체험에서 얻은 주관적 사유(思惟)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객관적 공감대의 넓이를 확대할 수 있는 훗날을 기약한다.

 

김태인의 「새 둥지를 그리세요」외 9편을 주목하였다. 그의 시는 낱말, 어절, 문장 간의 의미의 연결고리가 튼실해보였다. 문장과 어절과 낱말은 몸의 각 기관처럼 의미의 자양분을 주고받으며 상호의존(相互依存)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수준의 편차가 거의 없는 10편의 응모작 중 특히 <순간기억상실>과 <지문>과 <틈새>가 심사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분주한 역대합실에서 보행자들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사건을 비롯하여 일상의 사건들 사이에 보이는 평범한 ‘틈새’들이 새로운 의미의 세포들로 채워지면서 ‘시’라는 유기체가 조직되어가는 과정이 혈액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사건, 하나의 사물과 또 다른 사물,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그 사람과 자연 간의 의미의 그물코들을 촘촘히 연결시키는 ‘연쇄반응’의 그물망을 유기적으로 직조(織造)하는 솜씨가 시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송용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심사평]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를 바라며

 

행복하게도 따끈따끈한 햇(?)시편들에 한나절이나 잠겨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다섯 분의 작품까진 추릴 수 있었으나 마지막 두 분의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 이선유의 ‘웅크린 남자’ 외 9편을 놓고는 다들 長考의 한숨이 깊었다.

 

하지만 ‘신인상’이라는 처음의 의도로 돌아가 짚어보니 한 분의 당선자가 풋풋하거나 촘촘한 시의 행간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다. 완성된 시편도 중요했지만 현상의 올과 감각의 결을 개성적인 안목과 언어로 얼마만큼 직조해내는가를 시금석으로 삼았다.

 

김태인의 시편들은 공기방울 같은 가벼운 감각과 진부하지 않게 행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행보가 강점으로 보이나 시편들 사이의 편차와 모호한 표현은 극복해야할 과제로 보인다. 이선유의 시편 ‘무늬’와 ‘깃털’을 한참을 쥐고 놓지 못했다. 그의 신선한 감각과 공교로운 언어의 결은 참으로 매혹적이었으나 자주 보이는 상투적 문구와 익숙한 묘사 등이 못내 걸렸다. 이미 詩魔에 든 분이니 한결 깊어진 풍모로 시단에서 반갑게 만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화투 패를 뒤집듯 지금 여기의 시편을 까서 보이고 또 다시 몇 모금의 시인으로 남는 가혹하고 이상한 동네(?)에 자발적으로, 설레어가면서 들어오신 것을 연민하고 또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안차애(시인. 본지 편집위원) 

 

[심사평]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을 기대하며

 

누구에게나 무의식 방에 “내면아이”가 살고 있다. 사십 살, 오십 살이 지나도 “내면아이”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어려져서 세상이 갑자기 낯설고, 먹먹하고, 불안하고, 불쑥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 몸뚱이만 커졌을 뿐이지 억압받고, 거부당했던 영유아기의 영혼은 무의식 안에 외소하게 남아 징징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길을 걷는 다는 건 그 어두운, 심층에 가두어 두었던 내면아이를 조심스럽게 들추어내어 달래는 과정, 정화와 치유의 시간을 할애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응모작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9편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한 소년이 울고 있다/울고 있는 아기 옆에 한 청년이 서 있다/치러야 할 것들을 치르고 있는 것인가/애초에 애착은 없었으므로”라는 시구에서도 극명히 들어나듯이 “나 안의 나” 은밀한 이중 자아의 현실적 괴리가 파헤쳐지고 있다. 그의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건 내면 심리를 현상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기법의 우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편 마다 숨은 심리와 표층 현의식, 또는 드러난 현상과 숨은 원형의 상관관계를 짜내는데 농익은 안목과 섬세한 세공술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앞으로도 그의 시작은 기울지 않고 더 탄탄하게 대양을 항해하리라 믿는다.

 

나머지 후보작들 중에서도 번뜩이는 시적 기교와, 독특한 발상과 전개가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있었으나 그것이 지속력이 없이 부분에서 그치거나 어느 대목에서는 장황하여 시적 리듬을 죽이는 경향이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 밖으로 밀리기도 하였다. 후보자들 모두 시를 아바타처럼 바라보고 자기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걸 보니 그들 중 우리 시단을 빛내는 걸출한 시백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는다.

- 심사위원 이기와(시인.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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