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 열풍 외 4편 / 이동우
질투가 조화造花를 만들었다는 이 도시의 풍문
장미꽃은 허브티 한 잔 다 마시기도 전에 시들었다
시간이라는 벌레가 결 사이사이 주름으로 숨어들고
소행성 B612, 어린 왕자가 돌보던 장미도 시든다
꽃을 냉장고에 넣는다
냉기와 서리로 화장한 꽃은 신선 유지 기능이 만족스러운지
더는 질투하지 않는다, 안에선 시간도 언다
언 꽃에게 한창때 사진은 보여 줘도
거울은 안 된다
박제된 젊음, 그 탱탱함을 회상하는 ‘복고復古’ 사진전이 열렸고
주말 내내 붐볐다
딸아이 스케치북에서 시들지 않는 꽃을 발견했다
아내는 빨간 크레용으로 그려진 장미에서
샤넬 No.5 향도 맡고
꽃을 쫓는 나비의 숨소리도 듣는다
땅의 보폭에 맞춘 그리니치 표준시를 거부하고
시곗바늘을 꺾는 사람들 하지만
수분과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훈제의 과정은 막지 못한다
요즘 들어 얼굴보단 빈 풍경을 찍는 아내
걸을 때마다 재깍재깍 초침 소리가 난다
도시를 뒤덮은 풍문이 자욱해진 밤
냉장고에서 꽃을 꺼내 말해 준다
꽃잎이 다 져도 넌 장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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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전개
- 버려진 20리터 종량제 봉투들
(웅크린 자세로, 구겨진 표정으로, 무릎 꺾인 순간으로)
길고양이들이 기지개를 켜면
닫혔던 골목이 열린다
밤의 주인들이 후각으로 서열을 매겨
옆구리를 단번에 찢는다
불법 투기된 냄새에
얼룩무늬 몇 마리가 싸움이 붙었다
앙칼진 울음에 허공이 깨진다
먹이 다툼에서 밀린 그림자가
트럭 밑으로 사라진다
이슥해진 밤이 어둠을 담으면
한껏 부푼 골목이 터질 차례
금 간 담벼락마다 웃풍이 거세지고
틈새로 쏟아진 소란의 흔적이
전신주를 타고 축대 끝
옥탑방까지 타전된다
골목에서 쫓겨난 이들이 뒤척인다
벼린 발톱에 긁힌 길바닥이
게워내는 낮 그림자
밤의 숨구멍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집 앞 외등이 동공을 가늘게 뜨고
길은 어둠 속 꼬리를 치켜세우는데
비유하자면 겨울밤
빗댄 색들 가운데 의인화한 것 위주로 한 움큼 집는다 원고지에 조심스레 풀어내자 숨과 섞여 진해진다 입을 그려 주고 표정을 선물한다 비로소 꿈틀거린다
촛불 하나 켜고 둘러앉는다 의외로 책이나 옷가지보다 가구들이 말이 많다 핀란드 자작나무 탁자는 고향 얘기만 몇 시간째다 눅시오(Nuuksio) 숲, 이곳저곳에서 눈밭 헤치고 모인 고아들
벽시계도 수다스러운데 둥근 것들은 했던 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오해는 늘 대유에서 시작된다 괜한 격식을 차리거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 사달이 난다
직유는 늘어지기 일쑤고 ……, 은유는 둘을 뻘쭘하게 잇곤 한다
창을 열자 촛불이 어둠 사이로 얼른 두 손을 밀어 넣는다 허공이 하얗게 벌어진다 첫눈이 닿소리처럼 내린다고 해야 할지, 이 계절의 첫 페이지다, 라고 우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내 몸에도 불이 들어온다 별은 보려는 사람에게만 뜬다
막다른 바다
어머니가 골목 어디쯤에서 물질하면서부터
조각난 일상
나는 집 앞 깨진 외등 아래 주저앉는다
어둠을 끌어당겨 제 몸을 덮은 밤바다처럼
스스로를 지워 버린 잠녀
겨우내 소금기 짙은 밭은기침만 골방 안으로
덕장 밑으로 쑤셔 넣었다
바람이 마당에 부려 놓은 갯내
눈가에서 파도가 참방거릴 때면
잠녀는 골목을 길게 이어
갯가로 나가려 했다
물소중이 걸린 옷장 안으로 펼쳐진 허름한 바다
방바닥에 흘린 물을 보고 바당이라 외치며
철퍽철퍽 바닷물을 두드렸고 이어지는
삭풍에 삭아 가는 노랫소리
이엿사나 이어도사나 이여 이여 이어도사나
자신의 근원인 마을 앞바다를 향해 제를 올리던 밤
눈보라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사투를 벌였고
갯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포말 속에서
새벽은 후렴처럼 일렁였다
간신히 잔잔해진 숨비소리
잠녀는 또다시
물허벅에 담긴 파도 소리를 쫓아
막다른 골목에서
구부정하게 짠맛을 캔다
어머니가 두고 간 망사리
나는 삿대도 없이
골목에 잠긴 물길 더듬으며
널린 조각들을 맞춰 간다
골목마다 바다가 넘실거린다
봄 외출
권투 선수가 매니큐어를 바른다
사각 링처럼 각진 손톱
땀내 위로 뿌려지는 꽃잎
글러브를 벗은 손가락은
발가벗은 것 같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꽃잎이 샌드백에 가 붙는다
가쁜 호흡들이 달라붙은 곳
심판이 휘슬을 분다
함성이 모인다
꿀꺽, 카운트다운을 삼키는 벽
맞아도 손톱은 꿋꿋하게 자랐다
밖으로만 자라는 퍼런 멍
숨기고 싶어 주먹을 말아 쥐면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손톱
얻어 입은 옷처럼 껑충하다
햇빛이 죽죽 팔을 뻗는다
원투! 원투!
섀도복싱은 이제 그만
가볍게 쥔 주먹 안에서
사각 링이 구겨진다
쫙 펴자, 순식간에
만개하는 손가락들
소녀가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당선소감]
하루하루 충실했으나 시가 잘 써지지 않아 허전했다. 술 한 잔 기울이며 밤새 시에 대해 이야기할 선후배가 없어 외로웠으나, 어쩌면 그래서 자유로웠다.
조금 늦은 내 글쓰기는 아직 유년의 골목 어디쯤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 나를 일으켜 다시 달릴 수 있게 한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뒷덜미를 잡는 창작에 관한 회의.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달리며 조금씩 깨닫는다. 우직한 반복이 저 스스로의 리듬으로 마침내 한계를 넘어서리라.
굽이쳐 뻗어가는 ‘시산맥’으로 나를 인도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험준한 산세山勢에 주눅 들지 않겠다. 한 발 한 발 내딛겠다.
마지막으로 내 시의 근거와 얼개가 되어준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영원히 반짝여 달라고 …….
[심사평]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며칠 눈이 왔다. 마른 겨울이 한참 이어지다가 눈을 맞으니, 이건 감당할 수도 감당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새로움, 그 세계 자체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섯 분의 시편들은 그 자체로 눈부신 서설(瑞雪)의 조짐이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거르는 일이 때론 무망(無望)해지곤 한다.
굳이 첨언을 하자면, 「기다림을 저장하는 방법」은 서정적 감각이 나름 빛났으나 어떤 구태가 엿보였고, <댄서들의 칼날>은 흔적의 새로움이 발굴하는 세계가 새뜻했으나 좀더 기대되는 활기와 심도가 있는 듯 보였다. <이방인>은 능란한 말부림이 여실했으나 자기복제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듯했고, <소설가 무명씨의 하루>는 유머러스한 알레고리를 가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시문이 매력을 끌었으나 완숙되지 않은 분위기가 걸렸다. 그럼에도 <소설가 무명씨>外는 번다한 요즘의 시문 패턴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점 등의 기대치가 높아 손을 놓기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이들의 낙마의 변(辯)이 아니라 가능성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더 깊고 넓어지리라.
박동민은 우선 사물과 주변의 상황을 내밀하지만 자폐적이지 않는 시적 논의(論議)로 이끌어가는 재담이 엿보였다. 자아와 세계 사이를 불화와 연애 같은 관계적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멜랑콜리가 경쾌하고 능숙하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어눌한 고민이 그를 키울 것이다. 이동우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재치 있게 알아가는 것 같다. 고전적 교감을 오늘의 생활과 그 저변을 통해 변주해내는 내밀한 상상력은 확장력이 있어 듬쑥해 보인다.
두 분 시인의 걸음 앞에 어떤 우여곡절도 즐거운 고통이 되길 바란다.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유종인(시인)
[심사평]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2017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응모자 124명 중 1차, 2차 예심을 거친 총 여섯 분의, (이름을 지운) 작품파일이 심사자 각자에게 메일로 왔다. 심사자 각자는 세 분의 작품을 고른 후 공개심사에 들어갔다. 박동민 / 이동우의 작품이 겹쳤고, 각자 이이후 / 김완수의 작품들을 거론하는 긴밀한 과정을 거친 후 박동민 / 이동우를 당선자로 낼 수 있었다.
본선 : 박동민 / 이동우 / 이이후 / 김완수 / 최혜란 / 방혜선
박동민 「사춘기의 배꼽」 외 10편은 성장통을 겪는 사춘기 과정에서 ‘N포기시대’라 지칭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암울한 표상까지를 발랄한 화법으로 예민하게 짚어냈다. 상황을 전개해 가는 서사의 근육도 탄탄했으며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졌다. 앞으로 활달하고 개성적인 그만의 시 세계를 열어 갈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더욱 정제되고 내밀한 문장에 대한 고민은 그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이동우의 「동안 열풍」 외 9편은 그간의 시작(詩作)의 연혁을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대상과 관찰자 간(間) ‘사이의 서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안정적이다. 시, 「막다른 바다」는 절차탁마의 과정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이후의 「댄서들의 칼날」외 9편 전반은 소시민의 왜소한 일상에서 휘발되는 내밀한 감정의 현재성을 유연하게 드러냈다. 시, 「안의 일과 밖의 일」을 눈여겨보았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
박동민, 이동우 제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자폐와 오독은 문학의 필연(왕가위 감독)이라 했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선자(選者)들은 미혹과 매혹 사이, 더 많이 갈등하고 더 많이 방황해야 하리라.
- 심사위원 조정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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