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단풍 / 장성진


빈 골목에 조등이 하나 내걸렸다

불빛이 어린 상주처럼 꾸벅꾸벅 존다

산 것은 잠들고 잠든 것은 승천하는 밤


조문을 끝내고

신발을 신다가 본다

끝까지 남아 밤새 화투를 쳐주는 먼 친척처럼

접이식천막도 치워 허허벌판인 하늘에

단풍잎 몇 개 엉덩이 붙이고 있다

댓돌 위에 배 까집고 뒤집어져 있는

뒤축부터 바싹 닳은 신발들마냥

영락없이 한 가계의 유전같다

때론 내색 않고 그저 버티어 주는 것들,

다 식은 파전이나 우물우물 씹으며

툭툭 내뱉는 되지도 않는 소리가

곡소리보다 더 든든할 때가 있다

속 편하게 취하고 또 익숙한 인기척 내주는

부좃돈처럼 고만고만한 저

마룻바닥 위의 존재감들이

제법 묵직한 이유다

바람이 차거나 말거나

상 물리고도 만면에 홍조를 띤 채

연신 패를 뒤집는

저 뚝심의 혈통

양말 벗은 발바닥까지 붉다

조등보다 붉다

 

 





민들레의 꿈 / 백현빈


수 일 전부터 포클레인의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녹슨 철사줄이 끊어지고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들이

자기들끼리 조각나 부딪칠 때


친구와 부르던 노래는

한 움큼씩 깨져나갔다.


추억의 흔적들을

흙먼지 속에 묻어두고

모두가 떠난 그 자리,


비뚤게 이어진 돌계단 틈에

한 송이 노란 민들레가

살며시 피어났다.


어두운 돌의 틈새에서

노란 빛을 비추며

사라져 가는 휘파람을 불러와

향기로운 화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몽실거리는 봄날의 음표가

하얀 구름 따라 함께 이어지며

조각난 노란 노래를

하나씩 붙여나갈 때


잃어버린 꿈 앞에

민들레 한 송이,

노래하는 입술로

오롯이 살아났다.


 


 

728x90


깊은 산에 숨어있는 한 무덤을 바라보다 / 조수윤

- 기호에 대한 명상 마침표


겨울산 속에 누군가의 마침표 하나 찍혀 있다

주어 술어 한 짝씩 가난한 짚신 문장도

다이아몬드 오팔빛깔 잘난 것들도

무겁게 찍힌 마침표가 되어서


쉿-

조용히 누워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문장같은

터널 안에서

불같이 달리다가도 결론에 다다르면

누구든지 마침표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하지만 마침표는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하기에

왕릉을 올려다보는

애기무덤은 슬퍼하지 않는다


하얀 눈을 깔고 그 위에 꽃을 피우며

다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될 것을 알기에

마침표 정수리 끝에 누워 동그랗게 동그랗게

낡은 꿈을 말아 새 꿈을 꾸고 있다



728x90

 

방동 약수터 이야기 / 하운정


맑은 물줄기, 묻힌 돌을 돌고 돌아

조선 형종 심마니시절

산신령이 준 산삼을 캐고

그 자리에서 물이 솟아났다는 전설을 품어 감싸 쥔다.


오랜 세월 동안 솟은 물을 홀짝 들이켜고도

아직은 뭔가 모자라다는 듯

깊은 세월의 이끼를 쓰고

사람을 기다린다.


그리고

내린천 물줄기에서 흘러나오는 고요를 머금어 본다.

어느새 그 고요함 속에

몇 겹의 혼이 벗겨져

나를 더 머무르게 한다.


 

 



이른바, 마지막 / 유하연


병든 나

가래 낀 침은 뱉어도

뱉어도 멀리 가지 않는다


하루 아홉 번 이동할 리 없는 눈동자를 굴려가며

백비둘기 지켜본다

소원을 비는 눈에서 맥박소리가 나자

구구, 구구절절

어느새 늙은 철쭉 잎 뽑아낸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로 묻는다 어디 아프니?

별 아파 보이지 않는 조그만 꽃, 아…아…

하마터면 터질 뻔했다

하천을 따라 흐르는 계단을 밟고 서자

말 못하는 꽃잎 아찔한 향내가 옷자락에 묻었다


음, 꼭 다문 입

아, 벌려 깨물었더니


마른 혀 속으로 허공 긋는 꽃 하나 담겨온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

순식간이다


 

 

 

728x90

 

 

여자, 철쭉꽃을 보며 울다/ 목정은


녹슨 철근이 어긋나는 소리 가청주파수의 정점 찍고 귓가로 들어온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슬쩍 내려놔보는 리어카 여자는 어깨가 뻐근하다 슈퍼 주인 눈총 온몸으로 받으며 몇 개 주워오지도 못한 라면박스 그나마도 물 먹어 흐물대는데 구겨진 손가죽 위로 늘어나는 것은 먼지가 끼어도 뺄 수 없이 비좁은 밭고랑 그렇게 극락이라던 서울은 사람 뿐 아니라 종잇장도 그렇게 넘쳐나 그렇게 헐값이다 무게를 가늠해보니 깊이 패인 주름이 뻐근해 한숨 내쉬는데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철쭉꽃 여자는 문득 기억도 나지 않던 수십 년 전이 떠오른다


겨울이면 눈물나게 추웠던 여자의 고향 여자는 겨울만 오면 여기서 칼바람에 코 베이느니 서울가 눈 뜨고 사람 손에 코 베이겠다고 서울타령하다 어미의 알밤 맞곤 했다 겨울이 그리도 얄망스럽던 고향 그래도 봄 오면 고 단내 나는 입 안 가득 연분홍 철쭉꽃 가득 물곤 했는데 여자는 분홍꽃 수줍게 머리에 꽂아보던 그때를 생각한다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 이제는 파뿌리 듬성듬성 얽힌 검은 실타래만이 헐벗은 머리 감싸 안고 있는데 여름 오면 너도 나도 발가벗고 뛰어내리던 내린천 그대로 있을까 손가락 끝 주름 잡힐 정도로 멱 감다가 어두워질 때 즈음이면 허겁지겁 빤쓰 바람으로 집 내려와 와구와구 입에 집어넣던 옥수수 아 좋겠다 노랗고 고소한 것 그때 처럼 다시 한 번 입 안에 한가득 넣어봤으면


굽이굽이 산 너머 보따리 하나 챙겨들고 떠나오던 강원도 내 고향, 인제, 돌아가면 언제 도착하나 흐드러진 연분홍꽃 서울로 바득바득 꾀인 지아비 다방 레지년과 짐싸서 나른 후 슬하 자식 하늘로 상경시킨 죄 많은 여자의 보따리를 톡 터뜨린다 가.고.싶.다.돌.아.가.고.싶.다. 주문처럼 읖조리는 여자, 철쭉꽃을 보며 울다



 

 


[심사평] 시를 관통하는 자신만의 언어와 정서적 발현 방법


  박인환 문학상의 제정은 당시대의 모더니즘modernism을 확대 발전시키는 취지라기보다는 박인환 시인이 당대에 모더니즘의 시적 창조성을 통해 한국시의 전통적 흐름을 바꾸면서 개안開眼하여 그가 새로운 문학적 지평을 열어 시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시의 발전과 새로운 시적 성취를 가져 올 수 있는 참신한 신인을 발굴하여 시대성과 더불어 한국시를 발전시킬 역량을 키워낼 수 있는 신인을 발굴한다는 데에 주안점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대에는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한 정서적 발상과 환치능력, 그리고 그 내면을 다스리는 자신만의 언어와 정서적 환기력이 시인의 힘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일구어내는 “감동을 내재시킨 시“가 좋은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박인환 시인의 시적 성취가 모더니즘modernism의 창조적 능력에 있다 하여도 그 힘을 모방한 “현대적 모더니즘”으로 포장된 시가 대학생들에게 기대하는 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응모에 참가한 여러 편의 시 중에서도 간혹 박인환적朴寅煥的 모더니즘에 기대어 최근 주목을 받았던 미래파 요소를 곁들여 엽기성, 환상성, 애매성으로 포장한 시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활달한 상상력과 신선한 감각과 내재 된 깊은 감동이 있는 시가 “실험정신”보다는 앞서야 하리라는 견해가 선자選者들의 공통적 의견이었다.

  박인환 시인의 성취에 버금가는 시적 상상력, 그리고 활달한 언어들이 빚어내는 정서적 발흥이 시의 “감동”을 주관하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래야 한국시의 발전과 가능성에 기여하게 되리라는 선자選者들의 고뇌에 따라 시 읽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시적 발전 가능성과 언어를 다루는 힘이 느껴지는 시가 있었지만 그에 값하는 감동에 이르는 데에는 미흡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아쉽지만, 대상大賞 작품을 내기에는 다소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종 심사에 오른 목정은의 “여자, 철쭉꽃을 보며 울다.”와 유하연의 “이른바, 마지막”, 그리고 하운정의 “방동 약수터 이야기” 3편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위의 세 편을 놓고 토의를 한 결과 목정은의 “여자, 철쭉꽃을 보며 울다.”를 최우수상 작품으로 정하자는 의견을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운정의 “방동 약수터 이야기” 등은 너무 지역의 특성이나 향토적 정황에 결부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시적 소재를 다루는 솜씨나 그 구조적 탄탄함에는 호감이 갔지만 전체를 통과하는 이미지가 매우 단조롭고 평면적인 증명사진과도 같은 시적 왜소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유하연의 “터진 노을”은 시의 해독에 다소간 지적 상상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가 보낸 몇 편의 시가 매우 고르고 안정적이며 시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시 속에 장치한 사물의 공간이 경우에 따라서는 미래파 적 요소인 엽기성이나 애매성이 투영되어 의미망을 포착하는 공간이 다분히 자기담론적 성향을 보여주어 충분한 연결성에 의문이 일었다.

  그에 비하면 “이른바, 마지막”은 철쭉꽃이 피는 모습의 형상화가 돋보였다. 그러나 도입부인 첫째 연의 형상화가 다소 시적 연결에 괴리감을 주어 충분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그 절실함을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엿보여, 아쉽지만 우수상 작품으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목정은의 “여자, 철쭉꽃을 보며 울다”는 활달한 언어들이 상상력과 잘 결합 되어 있는 시로서, 첫째 연에서 “극락이라던 서울은 사람뿐 아니라 종잇장도 그렇게 넘쳐나 그렇게 헐값이다.”라든가, 둘째 연에서 “겨울만 오면 여기서 칼바람에 코 베이느니 서울 가 눈 뜨고 사람 손에 코 베이겠다고 서울타령” 하던 여자를 등장시키고, 셋째 연에서 “서울로 바득바득 꾀인 지아비 다방 레지년과 짐 싸서 날아간 후 슬하 자식 하늘로 상경시킨 죄 많은 여자”로 늙어버린 삶의 곤고함을 활달한 상상력과 결합하여 “보따리를 톡 터뜨린다 가.고.싶.다.돌.아.가.고.싶.다.”는 언술로 그 삶의 역정을 관통하며 “주문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원초적 그리움을 철쭉꽃 터짐으로 형상화한 솜씨가 돋보였다.

  이번 심사를 통과하여 당선된 새로운 신인들의 시적 향상과 발전에 보다 큰 기대를 걸며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유창섭. 권순영. 전형철

 

 

 

 

728x90

 

 

소양강 / 강영숙

 

나를 후들기고 간 늦겨울비

복숭아나무들 눈꼽 떼기 시작했고

포도나무 밑 냉이들은

저들끼리 속살거립니다

이럴 때는 혼자하는 여행이 참 좋겠습니다

마른 뚝새풀 듬성듬성한 논두렁 길은

그새 해동을 꿈꿉니다

 

산기슭, 봉분 몇 둘러 앉아

인생은 바람이래요

남은 생은 둥글게 살다 오라나요

문득, 호랑가시나무 감아오르던 댕댕이 덩굴처럼

당신의 등에 기대어 살아온 나를 봅니다

낚시꾼들 붐비던 강물은

날아간 멧새 한 마리 찾느라 두리번거립니다

 

먼 길 돌아온 소양강에

헝클린 마음 풀어놓습니다

떼지어 앉았던 철새들 날아오르며

잠시 팽개친 나를 데리고

북으로 날개를 젖습니다

북쪽으로 갈수록 환했습니다

 

 

 

728x90

 

 

미시령 휴게소 / 이병철

                                                    

허리춤에 먼 길을 숨긴 미시령 휴게소

서리 낀 우리창 밖에는 폭설이 쌓이고

옷을 털며 들어서는 사람들 손길에

철문을 붙들고 있는 스프링이

늙은 말의 아킬레스건처럼 삐걱거린다

모두 어디서 도망쳐 왔을까

저마다 얼굴을 감추려는 듯

우동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에

고개를 묻은 채 말이 없는 사람들

대설주의보에 붙잡힌 새벽이

두시와 세시 사이에 멈춰있는 동안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고

담배와 신문을 구입한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로 차에 시동을 켠다

벌떼보다 맹렬한 눈발 속으로

후미등 불빛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폭설 내린 산악도로 일대에는

야생동물 울음소리 뜨문뜨문 울려 퍼지고

누군가 마시다 남긴 커피만 식어가는

텅 빈 휴게소

눈 뜨고 자는 물고기의 꿈을 꾸듯

형광등 몇 개 밝혀둔 간이 매점이

먼 스노채인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심사평]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응모한 편 수도 만만찮거니와 작품의 수준도 향상된 편이었다. 새봄 나무 이파리처럼 싱싱하거나 혹은 갓 구워 낸 빵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기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응모자들이 주최측에서 요구하고 있는 주제, 즉 <인제의 자연, 풍물, 문화를 소재로 한, 인제의 이미지 홍보를 주제로 한 내용>을 간과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 경우 작품의 성공여부에도 불구하고 우선 심사대상에서 제외 되는 대접을 해야 했다. 또 하나는 인제지역의 지명이나 풍물, 혹은 자연대상을 시화 하는데 견강부회한 점이 많았다.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접근은 시를 억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미시령 휴게소>외 여러 편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보였으나 <미시령 휴게소>는 객관화 된 대상들에게서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내면화된 구체성을 지니고 있어 대상으로 뽑기에 이의가 없었다. 강영숙은 <물봉선화>와 <소양강>에서 비슷한 역량을 봉주었으나 언어의 간결성이나 대상을 굵은 터치의 데생처럼 보여주는 역량이 돋보여 <소양강>을 우수작으로 선택했다.

  모든 응모자들에게 성원을 보내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이상국(시인, 만해마을 운영위원장) , 최병헌(시인, 인제문협 회장)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