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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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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한국시 너무 소통만 강조예술가의 문학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

 

이번 본심은 최근 한국시의 창공을 수놓는 10개의 별을 탐사하는 자리였다. 오랜 응시 끝에 심사위원들의 눈길은 성좌의 전위에서 독보적인 아우라를 분무하는 박상순이란 이름의 항성에 모아졌다. 이 별의 광원은 고독, 실험, 자유였다. 몰이해의 외로움을 견디며 기성의 예술 관념과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탈주해 온 그의 시는 늘 첨단이었다. 이런 개성이 집약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언어의 음악성과 회화성이 절묘하게 부각된 수상작은, 사랑에 빠진 이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단순한 일상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감 있게 구현하면서, 에로스적 욕망의 환희와 타나토스적 죽음의 비참을 복작거리는 이미지의 연쇄로 가시화하는데 성공한다. 반전의 미학도 돋보인다. 과장된 수사로 점철된 사랑의 찬가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돌연 몰락의 비가로 급전환된다. 이렇게 탈낭만화된 러브스토리 끝에 남는 것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낳은 한줌의 비애다.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시인을 대변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이 쓴 이야기에 대해 회의하며 수정 가능성을 암중모색하지만, 사랑을 잃은 자의 허물어진 영혼처럼 완성될 수 없는 시 앞에 속절없다. 그러나 다시 시인의 심장은 미지를 향한 자기 갱신의 열정으로 약동한다. 절망의 심연에서 애인과 격렬히 포옹하듯 새로운 시상을 품고 전율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슬픈 사랑시로 쓴 아방가르드 시론이다. 박상순 시에 잉태된 무한한 이야기가 독자를 무진장 설레게 한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기택·류신·이광호·최승호·최정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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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 아무리 어려워도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아"

 

17회째를 맞은 올해 미당문학상은 '고독한 언어 예술가' 박상순(56) 시인에게 돌아갔다. 외톨이, 고집불통을 연상시키는 수식어를 동원한 건 손쉬운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그의 시 세계 때문이다. 서울대 미대(서양화) 졸업이라는 남다른 이력도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1993년 펴낸 첫 시집은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두 번째 시집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었다. 적어도 시집 제목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2004년 세 번째 시집 Love Adagio에는 '시는 가나다, 숫자,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친절한' 소개 글을 붙였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제목의 가나다 등의 순서로. 독자의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수사 전략 따위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만나 보니 박씨는 고독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고독하게 칼을 갈았던 게다. 자기 작업에 대한 소신이 누구보다 투철해 보였다. 첫 문답부터 허를 찔렀다.

 

-소감은.

"별로 얘기할 만한 게 없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특별히 기쁜 것도 아니다.“

 

-대개 수상은 기쁜 일이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심사위원들이 좋게 읽고 평가해줬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박씨는 "아마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시 쓰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중이다 보니 기쁨이 덜한 것 같다"고 했다. 변화는 반성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작업이 뭔가 부족해 보이고, 등단 초기의 폭발적 감정이나 열정을 그동안 많이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작품에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그 흔적을 싹 지운, 순수한 언어 구축물인 시세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시적 자아가 무한 변주, 탈주를 감행하는 시. 이렇다 보니 박씨 시는 낯설 수밖에 없다. 백미는 독자가 자신의 시를 이해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었다. 시집으로 묶지 않고 일기처럼 혼자만 두고 볼까 생각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시집을 냈고, 문학상을 받는다.

독자와 극단적으로 등지겠다는 게 아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너무 소통만 강조하다 보니 하나의 개별자로서 예술가가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끌어올리는 문학적, 인간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 같다.

 

설령 자신의 시가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예술적 소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씨는 "수상작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을 포함해 지난 1년간 쓴 시들은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그래도 일상적 감정이나 정서가 들락거리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특히 수상작은 종전의 회화성 일변도에서 벗어나 음악성을 살리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그래선지 그리 어렵지 않다. 남녀의 불행한 결말을 비치지만 두근두근 설레는 사랑시다.

 

박씨는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내 작품도 현실과 아무런 상관 없는 허구적인 공상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현실이 녹아 있다"고 했다. 그의 어려운 시를 읽는 독법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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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 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제16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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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이제 우리 시는 부드러운 집요함 알게 됐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에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우선 동의할 수 있었다. 첫째, 예년에 비해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대거 본심에 올랐다는 것과 이를 반영하듯 실험적 형식을 개진하는 작품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와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것이지만, 자신만의 방법론을 개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작품들은 때로 형식의지만을 지나치게 드러냈으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의 경우는 때로 태도가 문장보다 훌쩍 앞서 나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방법론을 개성적으로 고수하면서도 주관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면서도 문장의 탄력을 잃지 않는 작품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어렵지 않게 김행숙 시인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당선작인 유리의 존재는 특유의 다감한 어조 안에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장들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간격들을 정확하게 유지하면서 작품 전체의 사상(事象)에 깊이와 긴장을 부여한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와 같은 문장은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의 과제가 한국시에서 어떻게 달성되어 가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이 문장에 심사위원들의 탄복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이제 한국시는 부드러운 집요함을 알게 되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오생근·김혜순·송찬호·이영광·조강석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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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굉장히 잘 깨지는 존재아픔 함께 슬퍼할 수 있다면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고 했던 이성부(19422012)의 시구절을 비틀어 이렇게 사용할 수 있을까. 벅찬 기쁨, 오랜 소망 같은 것들은 그것들을 바란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때라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라고.

 

단단하면서도 가슴 아린 시 유리의 존재로 올해 미당문학상을 받는 시인 김행숙(46)의 경우가 꼭 그렇다. 김씨는 13일 인터뷰에서 더운날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서늘한 세숫대야 물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최근 1년 새 병명조차 모른 채 아팠다고 했다. 심할 땐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뼈와 관절들의 고통이었는데 진통제, 신경계통 약들을 오래 복용하자 시 쓰는데 필요한 예민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당선작 유리의 존재를 포함해 최근 1년간 간신히 쓴 8편 은 그런 몸과 마음의 악조건 속에서 건진 것들이다. 그래서 올해 수상을 전혀 예상 못했다는 것. 시라는 정신의 영롱함은 생살을 찢는 아픔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문학의 역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드러낸 셈이다.

 

당선작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김씨는 인간은 굉장히 잘 깨지는 존재인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힘들 뿐더러 충분히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어떤 간격,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라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 김씨의 등장은 시단(詩壇)의 사건이었다. 견고하고 단일한 시의 화자나 주체가 사라진 이상한 감각들의 세계에서 김씨는 오히려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인간 주체를 대신해 시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건 종종 귀신과 사춘기 악동, 혹은 분열된 시선 자체였다.

 

당선작은 그런 흔적을 품고 있다. 현실과 꿈의 질서가 교란돼 있고 심지어 죽은 자의 시선까지 상정한다. 살아있는 시인이 상상하는 시체의 시선, 그 시선에 비친 풍경은 그 이미지만으로도 섬뜩하고 참혹하다. 어떤 슬픔, 울음기마저 느껴진다.

 

시에 슬픔이 많은 이유를 묻자 김씨는 요즘 들어 부쩍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천사는 천사이되 고통을 대신하는 천사가 아니라 곁을 지키며 함께 슬퍼해주기만 해도 좋을 천사가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슬퍼한다는 건 단순히 우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현실의 개선을 꿈꾸는 슬픔, 그래서 힘이 센 슬픔이라는 거다.

 

김씨의 문학도 결핍에서 출발했다. 여러 사람 앞에 나서기 꺼려하는 성격을 고치는 데 시 쓰기가 도움이 됐다. “지금도 시를 쓸 때 가장 큰 충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씨의 슬픈 시는 아팠던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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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은 용의 홈 타운 / 최정례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 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 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세상사 대하자,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야? 다행히 선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 해 온 세상의 해충들이 창궐하여 다시 사해는 해충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 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니?

 

 

 

 

제15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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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대상들이 서로 비추고 산란, 매혹의 경지

 

산문시는 우리 시사에서 개척되지 않은 영역에 속한다. “행갈이하지 않은 시, 운율이 없는 시라는 형식적인 규정이 오해를 낳았다. 그동안의 산문시가 느슨한 시작 메모에 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정례의 산문시에서는 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연상을 타고 다른 이야기로 건너가고, 한 이미지가 변신담의 주인공처럼 모습을 바꾸면서 다른 이미지가 된다. 시가 진행되면서 중첩되어 있던 이야기들은 하나의 큰 이야기로 통합되고, 이미지들은 계열을 이루면서 중심 테마에 수렴된다. 이것은 한 번에 여러 개의 삶을 사는 일이자 여러 개의 현재가 이곳에서 웅성거리고 있음을 증언하는 일이다.

 

 이번 수상작도 그렇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을 뒤틀어 얻어낸 저 유머는,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라는 현실주의에 의해 부정되고, 화를 내는 한 사람(그는 용용 죽겠지?’의 대상이다)에 대한 묘사로 옮겨가며, 장례식장 가는 길에서의 상념(우리는 모두 죽으러 가거나 죽은 자를 위로하러 가는 길 위에 서 있다)을 거쳐, 참새/해충이라는 알레고리로 귀결된다. 여기에 이르면 어느새 해충은 사라지고 참새와 용의 대립이 민중과 권력자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누가 해충이니? 참새들이니, 아니면 참새를 멸절시켜 재앙을 부른 자니? , 화내는 너도 개천에서 났잖니?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모든 대상들이 서로를 비추며 무수한 의미들을 산란시킨다. 이 매혹적인 경지에 수상의 영광이 가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권혁웅·고형렬·김기택·이시영·황현산

 

 

 

 

 

개천은 용의 홈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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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일상의 고통 시라도 써 탈출을 꿈꾸다

 

저지방 우유, 고등어, 고무장갑, 자질구레한 쇼핑 물품을 차 트렁크에 싣는데 외국 사는 친구가 국제전화로 한가한 소리를 늘어 놓는다. 방심한 사이 웬 사내가 내 차를 들이받고, 친구는 전화를 끊지 않는다. 설상가상 동전을 돌려받겠다며 카트를 반납하러 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건너편 차 안에 갇힌 개는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는다. 제발 날 놓아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가사가 오늘 따라 가슴을 친다.

 

최정례(60) 시인의 2007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의 내용 일부다. 최씨는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곤 한다.

 

요컨대 지리멸렬해 고통스러운 삶 혹은 일상이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 소재다. 언제라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함정 같은 일상, 그곳에서 시인은 탈출을 꿈꾸거나 자주 신세 한탄에 빠진다.

 

수상작 개천은 용의 홈타운도 마찬가지다. 흔하디흔한, 그래서 일상적인 속담 개천에서 용 난다를 비틀었다. 시효가 지난(요즘은 어려서 잘 살아야 성공하기 때문에) 속담에 대한 반감을 익살로 버무렸다.

 

시인은 왜 일상을 고집하는 것일까. 최씨는 일상성이 힘이 세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의 언어는 관념적이기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강렬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일상을 담다 보니 시가 산문화된다는 점. 시인은 내 산문시와 그냥 산문은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가령 결론을 대놓고 말하지 않고 주변을 건드린다고 했다. 일종의 에둘러 말하기다. 그러기 위해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들을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다. ‘레바논이라는 중동의 나라 이름에 감정이라는 단어를 이어 붙여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시 레바논 감정’(2006년 시집 레바논 감정의 표제시)은 그렇게 태어났다.

 

최씨는 평소 불만이 시에 나타나는 것 같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개인 사정도 있지만 북창동식 미시꿀통같은 낯 뜨거운 이름의 술집이 버젓이 번화가에 자리잡은 우리의 천박한 유흥문화에 대한 불만도 있다. 사회적 불만이다. “시인이 그런 걸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시라도 쓰는 것이라고 했다.

 

거침 없이 활달한 시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졌다. “큰 상을 받아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데, 어렵거나 지겹지 않아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시를 쓰고 싶다.” 그의 후속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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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켜는 사람 /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심장을 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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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거리의 죽음·노래까지 품다 서정 미학의 진화

 

예심을 통해 올라온 10명 시인들의 작품들은 한국시단의 현재 지형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정적인 것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시들과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시 쓰기의 기반으로 하는 시들의 접촉면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차 투표를 거쳐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나희덕과 김행숙의 시들이었다. 나희덕의 시들은 모범적인 서정시적 미학 위에 현실에 대한 감각과 노래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서 시적 진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심장을 켜는 사람에서는 시가 가진 노래적인 성격을 극대화하면서 언어의 리듬과 소리의 질감들이 다른 음악을 탄생시킨다. 거리의 뮤지션, 버스커들의 음악을 묘사하는 언어들은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거리의 소음들도 그 음악을 우연한 일부이자 시적인 사건으로 엮어낸다. 한국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의 시가 최근에는 자연의 정숙함이 아니라, 거리의 죽음과 거리의 음악으로부터 시적 모티브를 발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오늘의 한국시의 성취를 각각 다른 지점에서 보여주는 김행숙과 나희덕 두 시인의 시적 변모가 가지는 새로운 가능성에 신뢰를 보내면서,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나희덕 시인에게 미당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다. 나희덕 시인의 영예가 한국 현대시의 지금까지의 고투에 대한 상찬으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정환·오생근·이광호·천양희·최승호

 

 

 

 

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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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고 또 새로 짓는 시 매일 다른 심장으로 쓰겠다

 

나희덕(48)의 문학은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한다. 1989년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을 때 그는 소감에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발표 지면이 아니라 삶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25년 동안 세상의 고통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약속을 지켰다. 올해 미당문학상 은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18일 그를 만났다.

 

영광입니다. 미당의 시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읽었고, 모국어를 다루는 감각이나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시선에 늘 감탄했어요. 석사논문 도 미당의 질마재신화에 대해 썼고요. 그는 타고난 서정시인이지만 자기 갱신을 거듭했어요.”

 

그도 미당처럼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 지었다. 특히 근 몇 년은 올해 초 발표한 시집의 제목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건 죽음과 비애와 눈물의 말이다. 20대의 나희덕은 사랑과 윤리,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고 30대엔 사랑과 치욕의 양면성을 알게 됐으며 마흔을 넘어서면서 도처의 죽음을 끌어안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타락한 것이고, 모범생이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일찍 결혼하고 나서 생활인으로서의 누추함을 알게 됐어요. 메워도 메울 수 없는 빚이 정신을 짓눌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엄마는 파란만장을 자초하고 산다고 말해요. 일부러 불안정적인 요소를 늘려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시를 쓰기에 고집스럽고 완고한 저를 길들이고 죽이는 방법인 거죠.”

 

수상작인 심장을 켜는 사람에도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거리의 악사가 나온다. 조선대 교수인 그가 2년 전 영국으로 연구년을 갔을 때 본 풍경이다. 매일 다른 심장을 꺼내 노래하는 악사에게서 그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순간 피어났다 스러지는 꽃처럼 세상을 어루만지고 사라지는 시가 보였다고 했다. 매일 다른 심장으로 시를 쓰겠다는 중견 시인의 의지도 느껴진다.

 

다시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고아원을 운영한 부모님 때문에 시인은 소외된 아이들과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만물에 대한 글썽임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은 시풍이 바뀐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나희덕은 국가나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희생된 개인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 저기, 오늘 하루 일용할 심장을 열심히 조이고 닦는 그가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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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프로 / 황병승

 

 

찬비를 맞으며 삼 일 만에 귀가했을 때 집안은 어두웠고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했지요. 지난 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우리는 약속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를 철사로 꽁꽁 묶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석고를 들이부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석고가 부서져 날리는 새벽.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당신은 살구를 한 번도 사 온 적이 없어...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 마음속에 뿌리 내리지 못했을까... 당신은 살구 대신 복숭아를 사오곤 했지, 나는 복숭아 알러지가 있는데... 언제나 당신뿐이라고, 언제나 당신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지요.

 

여자는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내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이고 있을 때면 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었지요. 나는 그때마다 다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두더지처럼 생긴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아 있는 동안 아름답고 근사한 것들을 만들자. 죽는 순간까지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연연하고 고려하자.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녀의 두더지 같은 얼굴을 볼 수 없겠지요. 그녀가 건네주던 따뜻한 차와 간식도 더 이상 받아먹을 수 없을 것이고 그녀의 순박한 말투와 웃음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겠지요.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술집의 나무 계단을 올라섰습니다. 내일은 프로, 내일은 프로. 중얼거리며, 말이지요.

 

 

 

 

제13회 미당 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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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황병승의 '실패'는 완벽한 도달의 이면 우리 시의 미래다

 

심사위원들은 장시간 논의 끝에 황병승 시인의 내일은 프로2013년도 미당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황병승은 시적 모험에 온몸을 내던진 젊은 시인들의 대표주자며, 이와 관련해 문단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의 고통스럽고도 힘찬 시어가 우리말의 표현 역량을 크게 높였으며, 우리 시 발전에 한 획을 긋는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본심에 올라온 열 사람 시인 가운데 수상자를 포함한 네 시인에게 논의가 집중됐다. 김행숙 시인은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들은 팍팍한 일상에서 늘 촉촉한물기를 얻어내곤 한다. 농담처럼 또는 방심한 독백처럼 시작하는 말은 아슬아슬하게 전개되던 논리가 갑자기 선회하는 지점에서 때로는 분노가, 때로는 경이가, 때로는 관능이 어른거렸다.

 

이수명 시인의 시는, 늘 그래 왔듯이. 현실과 상상의 접경을 기민하게 넘나들었다. 견고한 인식의 틀과 간명한 문장으로도 현실을 낯선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인의 특이한 재능이다. 그의 일관된 탐구적 자세도 심사위원들이 짚고 가야 할 덕목이었다. 최정례 시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의 조각들을 이어 맞추어 또 하나의 현실로 끌어올리는 시법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끌었다. 삶의 깊은 고통이 다듬지 않은 산문의 음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점도 그의 시가 다른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

 

황병승은 말로 가능한 온갖 표현력을 동원하여 인식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주제에 천착하는 노력이 감명을 주었다. 그의 주제인 실패는 어떤 완벽한 도달의 이면이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그는 완전한 성공에도 실패하지만, 완전한 실패에도 실패한다. 인간조건으로서의 이 실패의 기록은 어떤 종류의 성스러운 자비심에 이른다. 미당문학상이 한국시의 주력을 이끌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의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사인·김혜순·송찬호·이시영·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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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2012 미당 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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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일상 뒤집는 섬뜩한 인식 능청스러운 해학으로 포장하다

 

미당문학상은 한 해에 발표된 시 작품을 망라한다. 엄정한 예심의 첩첩산중을 거쳐 최고의 한 작품을 가려 뽑고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즐기는 축제다. 그런 험난한 과정을 헤쳐온 시인 10명의 작품에서 우리 문학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지형도를 보게 된다.

 

올해 최상의 과실답게 후보작들은 제각기 개성적이면서도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었지만 뜻밖에도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한 작품을 찾기는 어려웠다. 과거에 보여주었던 빼어난 성과에 미치지 못한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다 오히려 과도기적인 혼란에 빠진 시인들도 있었다.

 

논의는 길어지고 이견을 좁히는 일은 더뎠다. 논의와 숙고를 거듭한 끝에 권혁웅의 봄밤을 이견 없이 수상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수상작은 술 취한 샐러리맨에서 매일 죽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일상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얼핏 보면 자신은 빠지고 타인을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보면서 조롱하는 객관적인 태도 때문에 진정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거기에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삶의 비극적인 구조를 꿰뚫어 보는 뼈아픈 자각이 감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를 무수한 타인의 삶으로 확장시키는 지혜도 있다. 일상성을 뒤집는 섬뜩한 인식과 그것을 능청스럽게 풀어내는 해학에서도 이 시의 미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수상자의 다른 후보작 역시 통쾌하고 재미있다. 일부러 촌스럽게 쓴 것 같은 문장 밑에 숨겨진 날카로운 유머가 독자를 슬며시 웃게 만들지만, 단단히 멱살 잡힌 일상과 안일한 현실인식에 뒤통수를 후려치기 때문에 결코 편하게 웃어넘길 수는 없다.

 

허수경의 연필 한 자루도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수작이었다.

 

제 삶을 다 던진 것 같은 진정성과 끈질기고 집중적인 몰입이 느껴졌다. 외국에 있으면서 모국어의 감각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넓고 깊은 시야로 형상화한 결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올해 최고 작품인 동시에 한 시인에게도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 김기택·김인환·오생근·정희성·천양희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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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망갈 구석이 없어졌네요.”

 

12회 미당(未堂) 문학상 수상작가인 시인 권혁웅(45)은 웃음기 번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인과 문학평론가라는 양다리를 걸친 이른바 투잡족이다.

 

예전에는 시를 못 쓴다고 뭐라고 하면 나 평론 쓰는데라고 했고, 평론을 못 쓴다고 한마디 하면 나 시인이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큰 상을 받고 나니 이제는 어디로든 피할 수 없게 됐군요.”

 

사실 엄정히 말해 그간의 무게중심은 시인 권혁웅보다 평론가 권혁웅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문단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미래파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미래파라고 명명만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세대론적인 욕망을 드러낸 것이란 비판이 쇄도하더군요. 마치 최전선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분위기가 된 거죠. 정작 제 시는 과거파에 가까운데요.”

 

그런 논쟁 때문일까. 당시 그의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졌다. 평론가라는 꼬리표가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미당문학상 본심에 올라간 게 처음이에요. 예심에 포함된 것도 많지 않았고요. 평론가라서 잘 안 봐주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죠.”

 

그래서 그는 요즘 매우 즐겁다. 첫 본심 진출에 미당이란 큰 타이틀은 얻은 것을 넘어 시인 권혁웅에 온전한 방점이 찍혔기 때문이다.

 

큰 상이라서 기쁘지만 더 좋은 건 시인으로 정색하고 인정받았다는 거에요. 처음 온 기회였고 그래서 더 감사해요.”

 

권혁웅은 깔끔한 건축물을 짓듯 시 작법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변신의 귀재라는 별칭도 붙었다. 패러디(마징가 계보학)와 정치풍자(소문들), 연애시(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를 거쳐 최근에 선보인 일상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도해왔다. 이러한 능란함 탓인지, 아니면 평론가라는 부업때문인지 그의 시에서 가슴을 때리는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시는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일대일 대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체계적인 생각을 통한 비유죠. 맞대는 방식, 잇대어 보기라고나 할까요. 감정에서 출발하는 시인의 작품은 여러 감정이 하나로 묶이는데, 제 시는 그런 작품들과는 좀 다르죠.”

 

시는 유머와 슬픔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힘들수록 유머를 더욱 의식했다고 설명했다. 시집 마징가 계보학에서 밝혔듯 어린 시절 그는 산동네에 살았다. 삶의 신산(辛酸)과 간난(艱難)을 직접 겪고, 봤던 시절이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을 징징대지 않고 유쾌하게 풀고 싶었어요. 가난한 시절을 겪은 사람만이 삶의 쓸쓸함과 아픔이 묻어나는 유머를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팍팍하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한 힘은 시였다. 그는 시와의 만남이 구원이었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를 썼어요. 시가 나를 구해줬죠. 원하는 세상을 언어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내 입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죠. 사춘기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덜컥거릴 때 언어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이처럼 그는 유머와 해학을 창작의 무기로 삼아왔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일상을 파고들며 우리가 무심결에 놓쳐버리는 일상의 만화경을 빚어냈다. 그가 시를 세속의 자식으로 여기는 배경이다. 희비극이 뒤섞인 보통사람의 24시간, 그의 출발점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각하면서 일상을 주목하게 됐어요. 늙음과 쓸쓸함에 대해 쓰는 건, 언어가 시대와 함께 가는 거죠. 최근 마흔에 관한 시를 썼어요. 마흔은 등 뒤에서 청춘이 문을 닫고, 사회적으로 할 일은 많은 데 첫 사랑의 심정으로 살지 못하는 경계의 지대에요. 젊은 척하고 살아도 되는 30대와는 많이 달라요.”

 

미당 문학상 수상작인 봄밤의 주인공은 술에 취해 천변에서 잠든 샐러리맨이다. 만취한 봉급쟁이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매일매일 죽는 현대인의 풍경이 겹쳐지며 지금, 여기의 상황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는 평을 받았다. “대학시절 경험에서 나온 시에요. 그땐 술이 약해서 버스가 끊겨 걸어가다 집까지 못 가고 근처 천변 의자에서 자고 가는 일이 허다했거든요.”

 

그는 시를 쓰게 하는 최초의 구절이 있다고 했다. 감수성의 방아쇠를 당기듯, 마음에 드는 구절을 쓰면 시가 자신의 안에서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봄밤에서는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 놓은 거다라는 구절이 시가 태어난 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권씨는 이제야 시인으로서 제대로 된 링 위에 올라온 느낌이라고 자평했다. 시로 답을 얻은 만큼 이제는 시를 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생각이다. 시로 유머와 슬픔, 감동을 시로 전달하고 싶다며 그는 미당 서정주(1915~2000)만주(滿洲)에서를 인용했다.

 

첫 구절이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늘입니다./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습니까에요. 방황의 넓이가 크다는 걸 표현하는 거죠. 땅만큼 하늘이 넓다는 의미를 멋지게 그린 거죠. 언어만이 감정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으니 그렇게 쓸 수 있도록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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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모든 희망을 / 이영광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 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많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2011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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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충만한 시적 에너지, 미당의 서정성에 김수영의 불온성까지

 

올해 미당(未堂)문학상 본심에 올라온 시인 10명의 작품은 지금, 여기한국시의 성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당문학상의 영예는 이들 시인들이 이미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특히 중견 시인과 젊은 시인의 작품이 균형 있게 본심에 추천됐고, 시단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40대 시인이 한국 시단을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서 두어 명의 시인이 최종 후보로 거론되다가 이영광 시인을 수상자로 하는 데 의견이 모아진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수상자 선정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반갑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영광 시인의 작품은 그간 이 시인의 시작 과정에서 절정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최근 한국시단에서 부족해 보이는 시적 에너지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올해 발표된 모든 작품들이 상당한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었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된 저녁은 모든 희망을의 경우는 이 시인의 진정성과 언어의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금의 한국시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발견되는 저항적인 면모와 자기 생의 무게가 그대로 실려 있는 묵직한 정직성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라는 불온한 혁명의 언어들과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라는 자기모멸 사이에서, 희망을 치료하는 저녁의 위로가 가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 일인칭과 삼인칭의 언어를 중첩시키면서 시적 주체의 자리를 복수로 만드는 것 역시 동시대의 화법에 부합한다.

 

이영광의 시들에서 미당의 토착적인 서정성과 김수영의 불온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영광 시인의 수상은 한국시단의 오래되고 동시에 급진적인 시적 가능성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 신경림·황현산·김승희·최승호·이광호

 

 

 

 

아픈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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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없거나 답답할 때, 시가 찾아왔다

 

11회째를 맞는 올해 미당문학상 본심 심사위원 5명의 인적 구성은 어떤 해보다도 다채로운 편이었다. 신경림·황현산·김승희·최승호·이광호, 면면이 선호하는 문학 경향, 이력 등이 그런 느낌을 준다. 창비와 문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계열의 문인들이 고루 참여했고, 연령대도 다양하다. 특히 민족문학 진영의 좌장 격인 신경림 시인은 스승 미당(未堂) 의 친일 논란에도 그의 이름을 기리는 문학상 심사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인 이영광(46) 시인은 그러니까 진영이나 계파를 뛰어 넘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이다. 사실 이씨 시에 대한 상찬(賞讚)은 예심 현장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시가 최근 들어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준다”(문학평론가 강계숙), “모두 놓아버린 채 맨 몸으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시인 최정례) 등의 호평이 잇따랐다. 이런 이씨 시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씨는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75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그야말로 벽촌이다. 전기가 늦게 들어오면 시절도 늦게 가는 것인지 그의 부모는 출생 신고를 2년 늦게 했다. 이런 경우 낯익은 이유, 아이가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의 첫 시집에는 생년이 67년으로 돼 있다. 이씨는 두 번째 시집부터는 65년으로 바로잡았다. 이기인 등 실제 67년생 시인들이 맞먹으려고 하더란다. 서정시인도 사소한 불의는 참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98년 계간 문예중앙빙폭등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2003년 첫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2007년 두 번째 시집 그늘과 사귀다, 지난해 세 번째 시집 아픈 천국을 차례로 내며 조금씩 색깔을 바꿔 왔다.

 

가령 첫 시집의 표제시 직선 위에서 떨다에 대해 그는 한 방향으로만 갈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에 대한 감회가 담긴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인터뷰 후 술자리에서다. 그늘과 사귀다에는 여백 많은 선시(禪詩)의 느낌을 주는 경계같은 작품이 들어 있다. 아픈 천국에는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다. 사건사고로 얼룩진 조간신문, 유령 같은 대리운전 기사, 살인적인 공교육 현장 등이 시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이씨는 나는 과연 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이런 문제를 늘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추한 모습, 세상의 불합리하고 어두운 면이 보인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회피하지 말고 부딪쳐 통과해야 하는 일종의 숙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는 너무 어처구니 없거나 무서워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상태일 때 이씨를 찾아온다. 이때 답답함을 부르는 사건의 성격이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관한 문제인지 사회적 이슈인지는 상관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상처를 절절하게 노래하는 시도 나오고 사회비판적인 시도 나온다.

 

정작 독자의 눈길을 잡아 끄는 시편은 아픈 천국에 실린 사랑의 미안같은 시다.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미어지도록 안타까우면서도 강렬하게 사랑에 실패한 이의 절망적인 내면을 전한다. 여인의 몸은 불이다. 여인 내부에서 타오른 불길은 몸의 가장 바깥에 있는 예민한 감각기관, 눈을 젖게 만든다. 여기서 몸과 정서의 관계는 긴밀하다.

 

이런 점을 지적했더니 이씨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의식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조금 잃은 상태랄까, 그런 상태에서 어떤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 적는 때가 있다. 신체의 지각을 받아 적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시의 언어가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씨는 또 내면의 혼돈이든 무의식이든 이런 저런 영감들을 직관으로 잡아채 시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이씨는 미당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과오를 저지른 흠결이 공존할 수 있는지가 관심사였다. 그는 결국 그 원인을 미당 내면의 심층 충동이나 욕망 등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국면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 무의식에 대한 공부는 자신의 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씨는 특별할 건 없다. 더 좋은 시, 지금까지 쓸 수 없었던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 걸까. 다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시 쓰는 사람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켜 시인이 시 자체가 돼버리는 시, 시 쓰는 사람을 어디론가 끌고가 버리는 그런 체험을 유발하는 시가 좋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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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2010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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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격조 높은 서정시, 미당의 언어 감각에 제일 많이 다가갔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의 시인들의 작품은 한국시가 현재 도달한 경지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수작이었다. 심사 자체가 한국어의 향연과 다양한 상상력의 축제에 참여하는 뜻 깊은 경험의 순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보작들 가운데 단 한명의, 그것도 단 한편의 시를 지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심리적 갈등을 동반했다. 결국 논의 끝에 장석남의 가을 저녁의 말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수상의 영광은 사실 열 분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을 저녁의 말은 격조 높은 서정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늦가을 산골에서 밤을 보내는 화자의 스산한 심정을 안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거기엔 나뭇잎이 물들고 떨어지는 자연 현상에 대한 언급에서 드러나듯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이 깃들어 있고 시골집에서 군불을 때고 누워 지내는 처지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나듯 일상성에 포박된 자아에 대한 회한 어린 성찰이 숨어 있다. 삶의 궁핍함에 대한 통찰이 언어의 투명성과 적절히 맞물려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에 한국 현대시의 여러 뛰어난 선례에 대한 참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윽박질린 달이여에서 박용래를,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에서 김수영을, ‘유리창에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에서 정지용을 연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인은 말을 부리고 다루는데 능숙한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시인 미당의 언어 감각에 제일 많이 다가간 시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조로(早老)를 가장한 어투와 발상, 능청까지 그는 미당의 어떤 부분에 근접해 있다. 이점 그의 시는 이 상의 이름에 진정 부합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사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의 시가 때로 너무 점잔 빼고 노성한 척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에 대한 경계가 있었지만 이 역시 그의 시에 대한 애정과 기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유종호·천양희·이숭원·김기택·남진우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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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은 즐거운 미로, 캐내도 캐내도 무언가가 나오는

 

가장 미당다운 시인이 제 10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본심에선 이런 말들이 나왔다. “장석남은 역시 시인이다.”(유종호) “미당에 너무 부합하는 게 걱정일 정도로 적절한 수상 아닌가 싶다.”(남진우) “본심에 오른 10명 중 가장 편차가 없고 가장 미당적인 시인이다.”(천양희) ‘우리말을 가장 잘 다루는 시인이라는 평을 들어왔던 그는 누구보다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를 사랑한 시인이었다. 기자에게 수상 소감을 털어놓던 그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미당을 흉내 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미당의 세계에는 캐내도 캐내도 무언가가 나오는, 그런 공간이 있으니까요. 미당은 즐거운 미로예요.”

 

그는 인천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섬 덕적도출신이다. 유년기를 유배된 듯 보내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야 뭍(인천)으로 나왔다. 섬 소년의 태생적 외로움은 그에게 시를 쓰게 했다. 서울예대로 진학해서 작고한 최하림 시인, 오규원 시인에게 배웠다.

 

최하림 선생님은 속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란 어디에 소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셨어요. 제가 속되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순결주의자도 아니지만 최소한 스스로와 싸움해야 한다는 마음은 갖고 있어요. 그래서 패거리 짓는 듯한 느낌을 싫어해요. 아웃사이더죠.”

 

그러나 문학이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90년대에 그는 손꼽히는 스타 시인이었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대번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때문에 영화 성철의 주역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마지막 촬영만 남기고 결국 엎어져 극장에 걸리진 못했지만.

 

영화는 불교를 공부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거예요. 고교 때 스님인 급우가 있었는데, 저한테 입산을 권했어요. 그땐 절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니 망설였죠. 방 한 칸 차지하고 밥 먹고 책 읽을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입산했을 것 같아요.”

 

미당의 세계에 빠져든 것도 불교의 영향이 컸다. “어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들여다보는 이미지랄까요. 윤회, 영원을 산다는 미당의 불교적 세계가 저에게 잘 와 닿았어요.”

 

조로(早老)’한 느낌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런 걸 어떡해? 늙은이 생각을 하는 걸 어떡해? 애써 젊은 척 해요?”라고 되물었다.

 

빨리 늙고 싶달 정도로 노경(老境)’을 바라보고 꿈꾸는 면이 있어요. 절대로 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동양 시론(詩論)이나 화론(畵論)의 영향이 그런 세계를 자꾸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아요.”

 

늙은 척 능청을 떨든 어쩌든, 하여간 그는 타고난 시인이다.

 

일상과는 달리 살짝 떠 있는 상태일 때 시가 나와요. 딱 뭐를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설렌 상태에서 안 자고 서성서성할 때 시가 나오죠. 무당이 신을 불러오듯, 약간 투명해져야 벽 너머의 어떤 것이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잡사에 시달릴 땐 시가 나오지 않아 며칠을 들여 시인 모드로 전환해야 한다. ‘시인 모드가 되면 잘 될 땐 몇 편이고 한 자리에서 쏟아낸다. “저는 이른바 역작은 재미없어요. 난산이 산모든 아이에게든 좋을 리가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써지는 시가 좋죠.”

 

수상작 가을 저녁의 말도 그렇게 나왔다. 지난해 가을 양평 시골에 지어놓은 오두막집에 머물 때였다. 그가 관상용으로 키우던 토종닭들이 잘 시간이 되었는데도 자꾸 집에 들어가지 않고 꾸물거리며 나 자야 돼?’라 묻는 듯했단다. 그렇게 스산한 가을 풍경을 쓰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라는 구절을 적었다.

 

나도 모르게 나왔고, 의미도 명확하지 않은데 지우긴 싫었어요. 수상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들여다보니 주소지를 떼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네요. 대지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갑갑함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땅과 발붙이고 사는 것에조차 답답함을 느끼는 그는 여전히 섬에서 사는, 시 안에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시인이었다.

 

시인으로 23년간 살아왔다는 게 징그럽고 놀라울 뿐이에요. 그러나 시가 아니었으면 뭘 했겠어요? 저에겐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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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간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는 주변의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2009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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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반갑다, 현실 성찰이 있는 시세계

 

본심에서 김행숙·김경주·송재학 등이 마지막까지 거론됐다.

 

당선자인 김언의 시는 매우 흥미로운 발상법으로 우리의 삶과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시에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있고, 또 환상도 섞여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김언은 리얼리스트일 것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주로 감각의 세계에 탐닉하고 있는 요즘, 김언이 지닌 현실에 대한 성찰적 지성은 반길만한 것이다.

 

기하학적 삶, 기하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의 모순된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시이다. 점이란 부피를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모순을 암시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명제화한다. 그 명제들은 다른 어떤 익숙한 잠언들보다 흥미로운 잠언이 되어 독자의 사유를 자극한다.

 

가령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라는 구절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이별 후의 덤덤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라는 구절은 우리의 감각이 느끼는 세상은 늘 미심쩍지만 그러나 그것이 관여하는 3차원의 이 현실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인식을 산뜻하게 밝혀놓는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체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에서는 사소한 일상적 삶의 의미에 갇혀 살면서 보다 큰 삶의 근원적 의미가 있음을 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김언의 시에는 현실과 환상 그리고 직관과 이성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다.

 

심사위원 오생근·이시영·김혜순·이남호·송찬호

 

 

 

 

백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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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길에서 길 잃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심 심사는 어느 해보다 격렬했다. 심사위원들의 시론(詩論)과 시론이 격돌했다. 거칠게 구분하면, 대상(세계)과 시적 자아의 일치를 꾀하는 전통 서정시와 둘 사이의 균열에 주목하는 모더니즘으로 진영이 나뉘었다.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팽팽한 대립이었지만 젊은 시인 김언(36)씨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뜻밖이다. 그가 두 달 전 펴낸 세 번째 시집 소설을 쓰자에 대한 평론가 신형철의 다소 과장된 해설, “(그의 시를) 하루 세 편 이상 읽을 경우 머리가 폭발할 위험이 있다경고처럼 김씨의 시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씨 앞에서 시가 어렵다는 내색을 하면 안 된다. 김씨는 1998년 부산의 시 계간지 시와 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이달 초 당선 인터뷰에서 김씨는 대뜸 뜻밖이다. 한동안 무척 외로웠다. (인정받기를)체념했었다고 말했다. “지방 출신 시인이 겪는 차별은 상상 이상이어서 미당문학상을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김씨는 아무도 자신의 시 세계를 알아주지 않는 울분을 산문을 통해 풀어왔나 보다. 그의 시는 감정의 물기 없이 담담하지만 산문은 과격하다. 계간 문예지 문학동네가을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난해시는 비평가가 제 안목을 벗어나는 시에 가하는 가장 손쉬운 복수라고 일갈했다. 비평가들, 잘 모르면 난해시란 딱지 붙이고 품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기색 없이 잠자코 그의 시 설명을 듣는 게 맞다.

 

김씨는 시는 뭔가 변화시켜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열심히 읽은 탓이다. 그 책에서 김씨가 건진 한 문장은 예술사란 결국 예술이 아니었던 것이 예술이 되어가고, 예술이었던 것이 예술이 아닌 것이 되어가는 역사라는 것이다.

 

김씨는 예술 대신 시를 집어넣었다. 그 결과 부모님 공경이나 자연보호처럼 자명한 내용을 얘기하는데 굳이 시가 나설 필요 있나. 당연하고 잘 아는 길에서 새삼 길 잃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입장을 얻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김씨가 채택한 전략은 스스로 개발한 일종의 생각 틀인 사고모형을 활용하는 것이다.

 

미당문학상을 안긴 후보작 29편과 시집 소설을 쓰자를 관통하는 사고모형은, 인간의 시선에 오류가 없다는 전제 하에 사건을 관찰하는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오히려 사건이 고정돼 있고 인간이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그런 인간의 불완전성을 김씨는 추상적 진실을 추구하는 기하학에서도 읽는다. 기하학적 진실 중 하나는,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로 표면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구()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서 두 번째 행의 우리(인간)는 구라는 구절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당선작의 나머지 행들도 곱씹어 봐야 하는 성찰을 담고 있다.

 

김씨는 그러나 나에게 시는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들의 의미 없는 말놀이처럼, 단어의 이상한 조합과 배열이 연출하는 생경한 세계를 즐겨보라는 당부다.

 

심사위원들은 김씨를 언어 탐구라는 시적 모험에 나선 개성적 시인이라고 평했다. 그러니 말놀이를 대하는 약간의 가벼움과 앞서 언급한 팁을 참고 삼아 김씨의 시편을 더듬어 보시라. 요즘 한국시의 가장 이상한 골짜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독자가 하나 둘 생겨날 때 김씨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김씨는 미당문학상 수상으로 이미 상당한 위안을 얻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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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송찬호

 

 

!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2008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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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전통적 감각에 담긴 서정 미당의 언어 마술보는 듯

 

이미 자세히 보도된 바와 같이, 본심에는 비교적 젊은 시인에서부터 원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시인 열 분이 올랐다.

 

원로시인들은 원숙하고 익숙하고 안정감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비교적 젊은 시인들은 새롭고 패기에 찬 사유와 당돌한 언어를 보여주었다.

 

심사의 논의는 원숙함과 안정감을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움과 당돌함을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이 논란은 미당문학상의 성격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미당문학상은 그 해에 발표된 작품 중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에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작품상이다.

 

이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인의 경력이나 원숙함 또는 새로움이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미당문학상 수상작들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매우 아쉽고 불안한 마음으로, 원숙의 편안함과 당돌의 불편함을 우선 옆으로 미뤄두었다.

 

한편 원숙함 속에는 비슷한 높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봉우리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하나의 우뚝 솟은 봉우리를 찾는 심사위원들의 눈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했다.

 

또 당돌함 속에는 매력과 힘에 미치지 못하는 거칠고 미숙한 표현들이 더러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을 피해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공기는 내 사랑’(정진규), ‘저수지 관리인’(김명인)같은 원숙함의 미덕과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심보선) 같은 새로움의 반짝임과 사유의 저돌성은 특히 포기하기 힘들어 자주 재론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논의의 테두리는 겨울 시금치 밭’(장석남), ‘늙은 산벚나무’(송찬호), ‘가을’(송찬호) 등으로 좁혀지면서 다시 완성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을 아우르고, 새로움과 안정감을 아우르는 개념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정통적인 형식성과 언어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충족시키고 있는 작품으로, 심사위원들은 송찬호 시인의 가을을 선택했다.

 

가을은 전통적인 감각과 언어로 가을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미당선생이 지녔었던 언어의 마술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분위기와 어조에는 백석의 느낌도 있다.

 

장난기와 천진함도 있다. 또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리와 운율의 미학이 특별한 수준에서 성취되어 있음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대가(大家)의 옛날작품을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은 복고적인 작품이다. ‘가을속의 가을은, 오늘날 비현실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상실한 미학을 복원해 보여준다.

 

해체와 잡종과 금속성의 21세기 전자시대에, ‘가을이 보여주는 복고적 감각과 언어 미학은 뜻밖의 전위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송찬호 시인은 무거운 형이상학적 사유 대신에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를 추구하고 있다. ‘가을은 그 가운데서도 수작이다.

 

가을에서 멋지게 구현된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 사이버 세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황현산·문인수·이시영·김혜순·이남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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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으며 시 쓰지만 내 운명

 

미당문학상 수상작 가을은 사실 예심에선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코스모스’ ‘소나기등 송찬호 시인의 다른 작품이 물망에 올랐었다. ‘가을은 콩이 단단히 여물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젊은 세대들의 경험 밖 풍경이다.

 

콩은 자기 씨를 퍼뜨리기 위해 콩깍지를 스스로 찢고 나옵니다. 가을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콩알이 1m 이상씩 탁탁 튀어나와요. 아주 역동적이죠.”

 

시선은 콩알총에서 허리 구부정한콩밭 주인에게로 옮겨간다. ‘이제 산등성이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는 콩밭 주인. 죽음을 이보다 더 환하게 예언할 수 있을까. ‘황두 두말 가웃이면 부피론 40리터가 채 안 된다. 농사 규모로는 매우 적다. 그런데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라며 콩새에게 남은 콩을 주워가라고 재촉한다.

 

적은 규모에서의 조화랄까. 어릴 때 보았던 가장 아쉽고 따뜻한 풍경을 시로 옮길 수 있다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모자란 대로 나누며 사는 삶.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도달했음에도 3만 달러, 4만 달러를 재촉하는 현대인들이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가치다.

 

사실 시인은 황두 두말 가웃의 소출에도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지녔다. 1987년 등단 후 여태 시집 세 권 낸 게 전부다. 시 청탁 마감을 잘 어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끙끙 앓으며 시를 써내는 편이라서다. 그 흔한 산문집 하나 내지 않았다. 시적 완성도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건 그래서다.

 

어떻게 해야 시와 내가 갈등을 빚지 않고 화해하며 오래도록 쓸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남들보다 워낙 적게 내고, 나이도 있으니 앞으로 얼마만큼 시를 쓸 수 있을까 싶어 한 편 한 편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되지요.”

 

KTX가 표준인 시대에 시인은 비둘기호같은 속도로 산다. 인터뷰를 하러 서울까지 오는 길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기차를 한번 탔단다. 그가 사는 충북 보은군에서 서울까지 차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이지만 시인에겐 운전면허가 없다. 남들은 모두 서울로만 향하는데 고향에 머무는 까닭을 물었더니 나고 자란 곳이라서란 답이 돌아온다. 남들이 불편하겠다고 생각할 뿐 자신은 불편할 게 없단다. ‘아무개골 시인이란 수식어로 주목받을 수도 있을 텐데, 그에겐 오로지 시로써 이야기하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있다.

 

시를 쓰게 된 게 운명적이라면 너무 비장하고, 그냥 시 쓰는 팔자입니다. 자연스럽게 시 쓰는 길로 들어섰으니 부지런히는 아니라도 꼼꼼하게 쓰자는 주의죠.”

 

시 앞에선 보통 꼼꼼한 게 아니다. 시인은 지난 겨울부터 동시에 손을 댔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에게 시 좀 같이 만들어보자며 살살 꼬였다. 같은 제목을 두고 부녀가 각각 시를 썼다. 딸에게 시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었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열댓 편 써봤는데 시가 썩 잘 됐단 생각은 전혀 안 들고, 딸은 말을 안 듣고. 그래도 잘하면 올 겨울엔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가을도 어른을 위한 동시라 할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시인은 잊혀져 가는 옛 풍경과 마음 씀씀이뿐 아니라 동심마저도 살려내고 있었다. 시 한 편으로 이보다 더 배부를 수는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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