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박상순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꼭,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무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사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심사평] "한국시 너무 소통만 강조…예술가의 문학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
이번 본심은 최근 한국시의 창공을 수놓는 10개의 별을 탐사하는 자리였다. 오랜 응시 끝에 심사위원들의 눈길은 성좌의 전위에서 독보적인 아우라를 분무하는 ‘박상순’이란 이름의 항성에 모아졌다. 이 별의 광원은 고독, 실험, 자유였다. 몰이해의 외로움을 견디며 기성의 예술 관념과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탈주해 온 그의 시는 늘 첨단이었다. 이런 개성이 집약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언어의 음악성과 회화성이 절묘하게 부각된 수상작은, 사랑에 빠진 이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단순한 일상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감 있게 구현하면서, 에로스적 욕망의 환희와 타나토스적 죽음의 비참을 복작거리는 이미지의 연쇄로 가시화하는데 성공한다. 반전의 미학도 돋보인다. 과장된 수사로 점철된 사랑의 찬가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돌연 몰락의 비가로 급전환된다. 이렇게 탈낭만화된 러브스토리 끝에 남는 것은,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낳은 한줌의 비애다.
또 다른 반전이 있다. 시인을 대변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이 쓴 이야기에 대해 회의하며 수정 가능성을 암중모색하지만, 사랑을 잃은 자의 허물어진 영혼처럼 완성될 수 없는 시 앞에 속절없다. 그러나 다시 시인의 심장은 미지를 향한 자기 갱신의 열정으로 약동한다. 절망의 심연에서 애인과 격렬히 포옹하듯 새로운 시상을 품고 전율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슬픈 사랑시로 쓴 아방가르드 시론이다. 박상순 시에 잉태된 무한한 이야기가 독자를 무진장 설레게 한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기택·류신·이광호·최승호·최정례
"내 시(詩) 아무리 어려워도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아"
17회째를 맞은 올해 미당문학상은 '고독한 언어 예술가' 박상순(56) 시인에게 돌아갔다. 외톨이, 고집불통을 연상시키는 수식어를 동원한 건 손쉬운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그의 시 세계 때문이다. 서울대 미대(서양화) 졸업이라는 남다른 이력도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 1993년 펴낸 첫 시집은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두 번째 시집은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었다. 적어도 시집 제목으로는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2004년 세 번째 시집 『Love Adagio』에는 '시는 가나다, 숫자,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는 '친절한' 소개 글을 붙였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제목의 가나다 등의 순서로. 독자의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수사 전략 따위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만나 보니 박씨는 고독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고독하게 칼을 갈았던 게다. 자기 작업에 대한 소신이 누구보다 투철해 보였다. 첫 문답부터 허를 찔렀다.
-소감은.
"별로 얘기할 만한 게 없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특별히 기쁜 것도 아니다.“
-대개 수상은 기쁜 일이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심사위원들이 좋게 읽고 평가해줬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박씨는 "아마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시 쓰기의 방향을 모색하는 중이다 보니 기쁨이 덜한 것 같다"고 했다. 변화는 반성에서 비롯된다. "기존의 작업이 뭔가 부족해 보이고, 등단 초기의 폭발적 감정이나 열정을 그동안 많이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작품에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①현실에서 출발하지만 그 흔적을 싹 지운, 순수한 언어 구축물인 시②세계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시적 자아가 무한 변주, 탈주를 감행하는 시. 이렇다 보니 박씨 시는 낯설 수밖에 없다. 백미는 독자가 자신의 시를 이해하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었다. 시집으로 묶지 않고 일기처럼 혼자만 두고 볼까 생각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시집을 냈고, 문학상을 받는다.
독자와 극단적으로 등지겠다는 게 아니다. 요즘 한국문학은 너무 소통만 강조하다 보니 하나의 개별자로서 예술가가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끌어올리는 문학적, 인간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 같다.
설령 자신의 시가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예술적 소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씨는 "수상작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을 포함해 지난 1년간 쓴 시들은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그래도 일상적 감정이나 정서가 들락거리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특히 수상작은 종전의 회화성 일변도에서 벗어나 음악성을 살리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그래선지 그리 어렵지 않다. 남녀의 불행한 결말을 비치지만 두근두근 설레는 사랑시다.
박씨는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내 작품도 현실과 아무런 상관 없는 허구적인 공상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현실이 녹아 있다"고 했다. 그의 어려운 시를 읽는 독법을 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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