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모든 희망을 / 이영광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 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혁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많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심사평] 충만한 시적 에너지, 미당의 서정성에 김수영의 불온성까지
올해 미당(未堂)문학상 본심에 올라온 시인 10명의 작품은 ‘지금, 여기’ 한국시의 성취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당문학상의 영예는 이들 시인들이 이미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특히 중견 시인과 젊은 시인의 작품이 균형 있게 본심에 추천됐고, 시단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40대 시인이 한국 시단을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본심에서 두어 명의 시인이 최종 후보로 거론되다가 이영광 시인을 수상자로 하는 데 의견이 모아진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수상자 선정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반갑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영광 시인의 작품은 그간 이 시인의 시작 과정에서 절정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최근 한국시단에서 부족해 보이는 시적 에너지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올해 발표된 모든 작품들이 상당한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었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된 ‘저녁은 모든 희망을’의 경우는 이 시인의 진정성과 언어의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금의 한국시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발견되는 저항적인 면모와 자기 생의 무게가 그대로 실려 있는 묵직한 정직성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라는 불온한 혁명의 언어들과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라는 자기모멸 사이에서, 희망을 치료하는 저녁의 위로가 가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와 ‘그’, 일인칭과 삼인칭의 언어를 중첩시키면서 시적 주체의 자리를 복수로 만드는 것 역시 동시대의 화법에 부합한다.
이영광의 시들에서 미당의 토착적인 서정성과 김수영의 불온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영광 시인의 수상은 한국시단의 오래되고 동시에 급진적인 시적 가능성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 신경림·황현산·김승희·최승호·이광호
어처구니 없거나 답답할 때, 시가 찾아왔다
11회째를 맞는 올해 미당문학상 본심 심사위원 5명의 인적 구성은 어떤 해보다도 다채로운 편이었다. 신경림·황현산·김승희·최승호·이광호, 면면이 선호하는 문학 경향, 이력 등이 그런 느낌을 준다. 창비와 문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계열의 문인들이 고루 참여했고, 연령대도 다양하다. 특히 민족문학 진영의 좌장 격인 신경림 시인은 스승 미당(未堂) 의 친일 논란에도 그의 이름을 기리는 문학상 심사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인 이영광(46) 시인은 그러니까 진영이나 계파를 뛰어 넘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이다. 사실 이씨 시에 대한 상찬(賞讚)은 예심 현장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시가 “최근 들어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준다”(문학평론가 강계숙), “모두 놓아버린 채 맨 몸으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시인 최정례) 등의 호평이 잇따랐다. 이런 이씨 시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씨는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75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그야말로 벽촌이다. 전기가 늦게 들어오면 시절도 늦게 가는 것인지 그의 부모는 출생 신고를 2년 늦게 했다. 이런 경우 낯익은 이유, 아이가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의 첫 시집에는 생년이 67년으로 돼 있다. 이씨는 두 번째 시집부터는 65년으로 바로잡았다. 이기인 등 실제 67년생 시인들이 맞먹으려고 하더란다. 서정시인도 ‘사소한 불의’는 참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98년 계간 ‘문예중앙’에 ‘빙폭’ 등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2003년 첫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2007년 두 번째 시집 『그늘과 사귀다』, 지난해 세 번째 시집 『아픈 천국』을 차례로 내며 조금씩 색깔을 바꿔 왔다.
가령 첫 시집의 표제시 ‘직선 위에서 떨다’에 대해 그는 “한 방향으로만 갈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에 대한 감회가 담긴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인터뷰 후 술자리에서다. 『그늘과 사귀다』에는 여백 많은 선시(禪詩)의 느낌을 주는 ‘경계’ 같은 작품이 들어 있다. 『아픈 천국』에는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다. 사건사고로 얼룩진 조간신문, 유령 같은 대리운전 기사, 살인적인 공교육 현장 등이 시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이씨는 “나는 과연 이 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이런 문제를 늘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추한 모습, 세상의 불합리하고 어두운 면이 보인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회피하지 말고 부딪쳐 통과해야 하는 일종의 숙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는 너무 어처구니 없거나 무서워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상태일 때 이씨를 찾아온다. 이때 답답함을 부르는 사건의 성격이 개인의 실존적 고통에 관한 문제인지 사회적 이슈인지는 상관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랑의 상처를 절절하게 노래하는 시도 나오고 사회비판적인 시도 나온다.
정작 독자의 눈길을 잡아 끄는 시편은 『아픈 천국』에 실린 ‘사랑의 미안’ 같은 시다.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미어지도록 안타까우면서도 강렬하게 사랑에 실패한 이의 절망적인 내면을 전한다. 여인의 몸은 불이다. 여인 내부에서 타오른 불길은 몸의 가장 바깥에 있는 예민한 감각기관, 눈을 젖게 만든다. 여기서 몸과 정서의 관계는 긴밀하다.
이런 점을 지적했더니 이씨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의식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조금 잃은 상태랄까, 그런 상태에서 어떤 말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 적는 때가 있다. 신체의 지각을 받아 적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시의 언어가 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씨는 또 “내면의 혼돈이든 무의식이든 이런 저런 영감들을 직관으로 잡아채 시를 쓰는 편”이라고 했다.
이씨는 미당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떻게 한 사람 안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과 정치적 과오를 저지른 흠결이 공존할 수 있는지가 관심사였다. 그는 “결국 그 원인을 미당 내면의 심층 충동이나 욕망 등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국면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 무의식에 대한 공부는 자신의 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씨는 “특별할 건 없다. 더 좋은 시, 지금까지 쓸 수 없었던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 걸까. 다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시 쓰는 사람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켜 시인이 시 자체가 돼버리는 시, 시 쓰는 사람을 어디론가 끌고가 버리는 그런 체험을 유발하는 시가 좋은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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