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가을 저녁의 말 / 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러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2010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nefing.com

 

 

[심사평] 격조 높은 서정시, 미당의 언어 감각에 제일 많이 다가갔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의 시인들의 작품은 한국시가 현재 도달한 경지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수작이었다. 심사 자체가 한국어의 향연과 다양한 상상력의 축제에 참여하는 뜻 깊은 경험의 순간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후보작들 가운데 단 한명의, 그것도 단 한편의 시를 지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심리적 갈등을 동반했다. 결국 논의 끝에 장석남의 가을 저녁의 말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수상의 영광은 사실 열 분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을 저녁의 말은 격조 높은 서정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늦가을 산골에서 밤을 보내는 화자의 스산한 심정을 안정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거기엔 나뭇잎이 물들고 떨어지는 자연 현상에 대한 언급에서 드러나듯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이 깃들어 있고 시골집에서 군불을 때고 누워 지내는 처지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나듯 일상성에 포박된 자아에 대한 회한 어린 성찰이 숨어 있다. 삶의 궁핍함에 대한 통찰이 언어의 투명성과 적절히 맞물려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그리 길지 않은 길이에 한국 현대시의 여러 뛰어난 선례에 대한 참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윽박질린 달이여에서 박용래를,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에서 김수영을, ‘유리창에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에서 정지용을 연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인은 말을 부리고 다루는데 능숙한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시인 미당의 언어 감각에 제일 많이 다가간 시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조로(早老)를 가장한 어투와 발상, 능청까지 그는 미당의 어떤 부분에 근접해 있다. 이점 그의 시는 이 상의 이름에 진정 부합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사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의 시가 때로 너무 점잔 빼고 노성한 척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에 대한 경계가 있었지만 이 역시 그의 시에 대한 애정과 기대에 기초한 것이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유종호·천양희·이숭원·김기택·남진우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nefing.com

 

 

 

미당은 즐거운 미로, 캐내도 캐내도 무언가가 나오는

 

가장 미당다운 시인이 제 10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본심에선 이런 말들이 나왔다. “장석남은 역시 시인이다.”(유종호) “미당에 너무 부합하는 게 걱정일 정도로 적절한 수상 아닌가 싶다.”(남진우) “본심에 오른 10명 중 가장 편차가 없고 가장 미당적인 시인이다.”(천양희) ‘우리말을 가장 잘 다루는 시인이라는 평을 들어왔던 그는 누구보다 미당 서정주의 시 세계를 사랑한 시인이었다. 기자에게 수상 소감을 털어놓던 그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미당을 흉내 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미당의 세계에는 캐내도 캐내도 무언가가 나오는, 그런 공간이 있으니까요. 미당은 즐거운 미로예요.”

 

그는 인천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나오는 섬 덕적도출신이다. 유년기를 유배된 듯 보내던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야 뭍(인천)으로 나왔다. 섬 소년의 태생적 외로움은 그에게 시를 쓰게 했다. 서울예대로 진학해서 작고한 최하림 시인, 오규원 시인에게 배웠다.

 

최하림 선생님은 속되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란 어디에 소속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하셨어요. 제가 속되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순결주의자도 아니지만 최소한 스스로와 싸움해야 한다는 마음은 갖고 있어요. 그래서 패거리 짓는 듯한 느낌을 싫어해요. 아웃사이더죠.”

 

그러나 문학이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90년대에 그는 손꼽히는 스타 시인이었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대번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때문에 영화 성철의 주역으로 캐스팅되기도 했다. 마지막 촬영만 남기고 결국 엎어져 극장에 걸리진 못했지만.

 

영화는 불교를 공부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거예요. 고교 때 스님인 급우가 있었는데, 저한테 입산을 권했어요. 그땐 절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니 망설였죠. 방 한 칸 차지하고 밥 먹고 책 읽을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입산했을 것 같아요.”

 

미당의 세계에 빠져든 것도 불교의 영향이 컸다. “어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들여다보는 이미지랄까요. 윤회, 영원을 산다는 미당의 불교적 세계가 저에게 잘 와 닿았어요.”

 

조로(早老)’한 느낌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런 걸 어떡해? 늙은이 생각을 하는 걸 어떡해? 애써 젊은 척 해요?”라고 되물었다.

 

빨리 늙고 싶달 정도로 노경(老境)’을 바라보고 꿈꾸는 면이 있어요. 절대로 안주하고 싶은 건 아닌데, 동양 시론(詩論)이나 화론(畵論)의 영향이 그런 세계를 자꾸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아요.”

 

늙은 척 능청을 떨든 어쩌든, 하여간 그는 타고난 시인이다.

 

일상과는 달리 살짝 떠 있는 상태일 때 시가 나와요. 딱 뭐를 하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설렌 상태에서 안 자고 서성서성할 때 시가 나오죠. 무당이 신을 불러오듯, 약간 투명해져야 벽 너머의 어떤 것이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잡사에 시달릴 땐 시가 나오지 않아 며칠을 들여 시인 모드로 전환해야 한다. ‘시인 모드가 되면 잘 될 땐 몇 편이고 한 자리에서 쏟아낸다. “저는 이른바 역작은 재미없어요. 난산이 산모든 아이에게든 좋을 리가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써지는 시가 좋죠.”

 

수상작 가을 저녁의 말도 그렇게 나왔다. 지난해 가을 양평 시골에 지어놓은 오두막집에 머물 때였다. 그가 관상용으로 키우던 토종닭들이 잘 시간이 되었는데도 자꾸 집에 들어가지 않고 꾸물거리며 나 자야 돼?’라 묻는 듯했단다. 그렇게 스산한 가을 풍경을 쓰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고라는 구절을 적었다.

 

나도 모르게 나왔고, 의미도 명확하지 않은데 지우긴 싫었어요. 수상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들여다보니 주소지를 떼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네요. 대지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갑갑함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땅과 발붙이고 사는 것에조차 답답함을 느끼는 그는 여전히 섬에서 사는, 시 안에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시인이었다.

 

시인으로 23년간 살아왔다는 게 징그럽고 놀라울 뿐이에요. 그러나 시가 아니었으면 뭘 했겠어요? 저에겐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이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