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심사평] 일상 뒤집는 섬뜩한 인식 … 능청스러운 해학으로 포장하다
미당문학상은 한 해에 발표된 시 작품을 망라한다. 엄정한 예심의 첩첩산중을 거쳐 최고의 한 작품을 가려 뽑고 그 과정과 결과를 함께 즐기는 축제다. 그런 험난한 과정을 헤쳐온 시인 10명의 작품에서 우리 문학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지형도를 보게 된다.
올해 최상의 과실답게 후보작들은 제각기 개성적이면서도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었지만 뜻밖에도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한 작품을 찾기는 어려웠다. 과거에 보여주었던 빼어난 성과에 미치지 못한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다 오히려 과도기적인 혼란에 빠진 시인들도 있었다.
논의는 길어지고 이견을 좁히는 일은 더뎠다. 논의와 숙고를 거듭한 끝에 권혁웅의 ‘봄밤’을 이견 없이 수상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수상작은 술 취한 샐러리맨에서 매일 죽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과 일상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얼핏 보면 자신은 빠지고 타인을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보면서 조롱하는 객관적인 태도 때문에 진정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거기에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삶의 비극적인 구조를 꿰뚫어 보는 뼈아픈 자각이 감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를 무수한 타인의 삶으로 확장시키는 지혜도 있다. 일상성을 뒤집는 섬뜩한 인식과 그것을 능청스럽게 풀어내는 해학에서도 이 시의 미덕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수상자의 다른 후보작 역시 통쾌하고 재미있다. 일부러 촌스럽게 쓴 것 같은 문장 밑에 숨겨진 날카로운 유머가 독자를 슬며시 웃게 만들지만, 단단히 멱살 잡힌 일상과 안일한 현실인식에 뒤통수를 후려치기 때문에 결코 편하게 웃어넘길 수는 없다.
허수경의 ‘연필 한 자루’도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수작이었다.
제 삶을 다 던진 것 같은 진정성과 끈질기고 집중적인 몰입이 느껴졌다. 외국에 있으면서 모국어의 감각을 잃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넓고 깊은 시야로 형상화한 결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올해 최고 작품인 동시에 한 시인에게도 최고의 작품 중의 하나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 김기택·김인환·오생근·정희성·천양희
“이제 도망갈 구석이 없어졌네요.”
제12회 미당(未堂) 문학상 수상작가인 시인 권혁웅(45)은 웃음기 번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인과 문학평론가라는 양다리를 걸친 이른바 ‘투잡족’이다.
“예전에는 시를 못 쓴다고 뭐라고 하면 ‘나 평론 쓰는데’라고 했고, 평론을 못 쓴다고 한마디 하면 ‘나 시인이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큰 상을 받고 나니 이제는 어디로든 피할 수 없게 됐군요.”
사실 엄정히 말해 그간의 무게중심은 ‘시인 권혁웅’보다 ‘평론가 권혁웅’ 쪽으로 약간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문단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미래파’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미래파’라고 명명만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세대론적인 욕망을 드러낸 것’이란 비판이 쇄도하더군요. 마치 최전선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분위기가 된 거죠. 정작 제 시는 과거파에 가까운데요.”
그런 논쟁 때문일까. 당시 그의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졌다. 평론가라는 꼬리표가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미당문학상 본심에 올라간 게 처음이에요. 예심에 포함된 것도 많지 않았고요. 평론가라서 잘 안 봐주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죠.”
그래서 그는 요즘 매우 즐겁다. 첫 본심 진출에 ‘미당’이란 큰 타이틀은 얻은 것을 넘어 ‘시인 권혁웅’에 온전한 방점이 찍혔기 때문이다.
“큰 상이라서 기쁘지만 더 좋은 건 시인으로 정색하고 인정받았다는 거에요. 처음 온 기회였고 그래서 더 감사해요.”
권혁웅은 깔끔한 건축물을 짓듯 시 작법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변신의 귀재’라는 별칭도 붙었다. 패러디(『마징가 계보학』)와 정치풍자(『소문들』), 연애시(『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를 거쳐 최근에 선보인 일상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도해왔다. 이러한 능란함 탓인지, 아니면 평론가라는 ‘부업’ 때문인지 그의 시에서 가슴을 때리는 감동을 느끼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시는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일대일 대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체계적인 생각을 통한 비유죠. 맞대는 방식, 잇대어 보기라고나 할까요. 감정에서 출발하는 시인의 작품은 여러 감정이 하나로 묶이는데, 제 시는 그런 작품들과는 좀 다르죠.”
시는 유머와 슬픔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힘들수록 유머를 더욱 의식했다고 설명했다. 시집 『마징가 계보학』에서 밝혔듯 어린 시절 그는 산동네에 살았다. 삶의 신산(辛酸)과 간난(艱難)을 직접 겪고, 봤던 시절이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을 징징대지 않고 유쾌하게 풀고 싶었어요. 가난한 시절을 겪은 사람만이 삶의 쓸쓸함과 아픔이 묻어나는 유머를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팍팍하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한 힘은 시였다. 그는 “시와의 만남이 구원이었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를 썼어요. 시가 나를 구해줬죠. 원하는 세상을 언어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내 입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죠. 사춘기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덜컥거릴 때 언어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이처럼 그는 유머와 해학을 창작의 무기로 삼아왔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일상을 파고들며 우리가 무심결에 놓쳐버리는 ‘일상의 만화경’을 빚어냈다. 그가 시를 ‘세속의 자식’으로 여기는 배경이다. 희비극이 뒤섞인 보통사람의 24시간, 그의 출발점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각하면서 일상을 주목하게 됐어요. 늙음과 쓸쓸함에 대해 쓰는 건, 언어가 시대와 함께 가는 거죠. 최근 마흔에 관한 시를 썼어요. 마흔은 등 뒤에서 청춘이 문을 닫고, 사회적으로 할 일은 많은 데 첫 사랑의 심정으로 살지 못하는 경계의 지대에요. 젊은 척하고 살아도 되는 30대와는 많이 달라요.”
미당 문학상 수상작인 ‘봄밤’의 주인공은 술에 취해 천변에서 잠든 샐러리맨이다. 만취한 봉급쟁이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매일매일 죽는 현대인의 풍경이 겹쳐지며 ‘지금, 여기’의 상황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는 평을 받았다. “대학시절 경험에서 나온 시에요. 그땐 술이 약해서 버스가 끊겨 걸어가다 집까지 못 가고 근처 천변 의자에서 자고 가는 일이 허다했거든요.”
그는 “시를 쓰게 하는 최초의 구절이 있다”고 했다. 감수성의 방아쇠를 당기듯, 마음에 드는 구절을 쓰면 시가 자신의 안에서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봄밤’에서는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 놓은 거다’라는 구절이 시가 태어난 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권씨는 “이제야 시인으로서 제대로 된 링 위에 올라온 느낌”이라고 자평했다. 시로 답을 얻은 만큼 이제는 시를 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생각이다. 시로 유머와 슬픔, 감동을 시로 전달하고 싶다며 그는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만주(滿洲)에서’를 인용했다.
“첫 구절이 ‘참 이것은 너무 많은 하늘입니다./내가 달린들 어데를 가겠습니까’에요. 방황의 넓이가 크다는 걸 표현하는 거죠. 땅만큼 하늘이 넓다는 의미를 멋지게 그린 거죠. 언어만이 감정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으니 그렇게 쓸 수 있도록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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