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켜는 사람 /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심사평] 거리의 죽음·노래까지 품다 … 서정 미학의 진화
예심을 통해 올라온 10명 시인들의 작품들은 한국시단의 현재 지형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정적인 것’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시들과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시 쓰기의 기반으로 하는 시들의 접촉면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차 투표를 거쳐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나희덕과 김행숙의 시들이었다. 나희덕의 시들은 모범적인 서정시적 미학 위에 현실에 대한 감각과 ‘노래’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서 시적 진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심장을 켜는 사람’에서는 시가 가진 노래적인 성격을 극대화하면서 언어의 리듬과 소리의 질감들이 다른 음악을 탄생시킨다. 거리의 뮤지션, 버스커들의 음악을 묘사하는 언어들은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거리의 소음들도 그 음악을 우연한 일부이자 시적인 사건으로 엮어낸다. 한국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의 시가 최근에는 자연의 정숙함이 아니라, 거리의 죽음과 거리의 음악으로부터 시적 모티브를 발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오늘의 한국시의 성취를 각각 다른 지점에서 보여주는 김행숙과 나희덕 두 시인의 시적 변모가 가지는 새로운 가능성에 신뢰를 보내면서,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나희덕 시인에게 미당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다. 나희덕 시인의 영예가 한국 현대시의 지금까지의 고투에 대한 상찬으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정환·오생근·이광호·천양희·최승호
부수고 또 새로 짓는 시 … 매일 다른 심장으로 쓰겠다
나희덕(48)의 문학은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한다. 1989년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을 때 그는 소감에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발표 지면이 아니라 삶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25년 동안 세상의 고통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약속을 지켰다. 올해 미당문학상 은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18일 그를 만났다.
“영광입니다. 미당의 시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읽었고, 모국어를 다루는 감각이나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시선에 늘 감탄했어요. 석사논문 도 미당의 『질마재신화』에 대해 썼고요. 그는 타고난 서정시인이지만 자기 갱신을 거듭했어요.”
그도 미당처럼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 지었다. 특히 근 몇 년은 올해 초 발표한 시집의 제목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건 죽음과 비애와 눈물의 말이다. 20대의 나희덕은 사랑과 윤리,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고 30대엔 사랑과 치욕의 양면성을 알게 됐으며 마흔을 넘어서면서 도처의 죽음을 끌어안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타락한 것이고, 모범생이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일찍 결혼하고 나서 생활인으로서의 누추함을 알게 됐어요. 메워도 메울 수 없는 빚이 정신을 짓눌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엄마는 파란만장을 자초하고 산다’고 말해요. 일부러 불안정적인 요소를 늘려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시를 쓰기에 고집스럽고 완고한 저를 길들이고 죽이는 방법인 거죠.”
수상작인 ‘심장을 켜는 사람’에도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거리의 악사가 나온다. 조선대 교수인 그가 2년 전 영국으로 연구년을 갔을 때 본 풍경이다. 매일 다른 심장을 꺼내 노래하는 악사에게서 그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순간 피어났다 스러지는 꽃처럼 세상을 어루만지고 사라지는 시가 보였다”고 했다. 매일 다른 심장으로 시를 쓰겠다는 중견 시인의 의지도 느껴진다.
다시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고아원을 운영한 부모님 때문에 시인은 소외된 아이들과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만물에 대한 글썽임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은 시풍이 바뀐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나희덕은 국가나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희생된 개인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 저기, 오늘 하루 일용할 심장을 열심히 조이고 닦는 그가 보이는 듯 하다.
'국내 문학상 > 미당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회 미당문학상 / 김행숙 (0) | 2016.10.25 |
---|---|
제15회 미당문학상 / 최정례 (0) | 2015.09.22 |
제13회 미당문학상 / 황병승 (0) | 2013.11.03 |
제12회 미당문학상 / 권혁웅 (0) | 2012.09.20 |
제11회 미당문학상 / 이영광 (0) | 2011.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