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모필 胎毛筆 / 박분필
진한 먹물에 붓을 찍습니다 생명선이 살아있어
차람차람 붓끝이 차진 태붓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태안에서 그리고 태어나서 다시 백일을
더 자란 딸애의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울림이
고물고물 기어 나와 그의 심장에 닿습니다 그렇게
사군자를 쳤고 좋은 글귀 뽑아 열두 폭 병풍
준비해 두었는데
시집을 안 가겠다 물러서지 않는 딸
30여 년 걸어놓았던 실고리가 삭아 걸지조차 못하는
붓만 같습니다
한때 붉은 발가락이었고 말랑말랑한 마디였고
솜털이었던 저 닮은 손주라도 안고 온다면야 명주실로
짱짱한 고리를 만들어 붓걸이에 걸어둘 것인데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어내 버린
침묵 한 자루
근 삼 년 만에 그가 다시 붓을 잡습니다
젖배 곯은 아기가 젖을 빨 듯
물 타지 않은 진한 먹물을 빨아들이는 붓
그가 탱탱해진 붓을 어르고 달래는 일은 침묵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 내는 일
입 성근 잣나무 한 그루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아래
쌓기도 하고 흩기도 했던 한 생의 명암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의 호흡들이 골고루
펴 발라진 오두막 한 채
지난한 한 생을 떠받친 서까래가
그저 고요히 달빛을 뿜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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