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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 이성렬
비탈진 성곽을 비낀 햇살의 잦아드는 눈빛과
낡은 시계탑 그림자의 기우는 손목을 달래며
포구의 노을은 대기와 물의 붉은 포옹을 주선한다.
연락선들은 정사를 나눈 후 오색의 비린 체액을
물속으로 밀어내며 서둘러 떠나간다.
어느 옛 저자 뒷골목에서 수려한 두 검객 연인이
밀애할 때마다 현란한 칼춤으로 흐드러지게
애무한 뒤 번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주막 뒷문으로 엿본 주인장의 바지에 묻은
걸쭉한 정액만이 그 저녁의 진실로 남듯.
오래 들여다보면 물은 도도한 여자처럼
말을 건네지 않는다. 주름을 내보이지 않는 물의
견고한 나르시즘을 흔드는 건 바람의 빠른 걸음.
뛰어가듯 지나는 눈길의 사심 없음을 몇 점의
흰 물살이 알아채어 허리춤을 풀며 고백하면
한 줄 사연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숲의
나이테들을 지도에 표시한 후, 길섶에 풀린
등뼈 어디쯤의 매듭을 짚으며 밀회를 접는다.
또 어딘가에서 잠시 뜨겁게 껴안을 누군가를
마주치겠지, 유랑극단의 분장을 지우며.
———
* 이명세 감독, 〈형사-Du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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