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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외 4편 / 오정국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 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 

 

무한에서 무한으로 연결된 밤의 터널

무궁한 밤의 아이로 나는 태어났어요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모두 다섯 개

 

불타는 산막의 거적때기 너머에

백발의 무사가 앉아 있어요

칼날 스친 얼굴에 불빛 어룽지면

나도 모르게 광대뼈를 쓰다듬죠

 

내가 만진 죽음 헤아릴 수 없고

나는 전생과 후생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죽음의 불사신이

저의 괴로움을 나에게 덧씌워

기담과 괴담, 로맨스가 끝이 없네요

 

죽은 자의 말소리와 그림자에 둘러싸여

밤의 피륙을 얽어 짜는데

 

어떤 유령은

요양병원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는 소식

침상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그 숨을 받아먹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단팥죽 몇 숟가락 얻어먹는다지요

 

결국 테두리만 남게 되는 이야기지만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수레바퀴가 멈춰지질 않네요

 

 

 

먼눈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 외지(外地)1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보면

번갯불의 거울 조각과

뽕나무 등결의 검붉은 나이테,

표지가 뜯겨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구나

 

먼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가는 담장의 꽃들

철 따라 익어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

** 미국 흑인 영가<Broken Promises>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전생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얼굴에 분칠하고 고개 드는 꽃들에게 

- 외지(外地)2

 

지나치는 것들마다 실성한 입이었다 미안하다 들꽃들아, 용서해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들을 껴안아 눈물 흘리게 하였다 간밤의 비바람을 어찌 견딘 것이냐 백지처럼 말갛게 고개 드는 꽃들아, 둑길도 저렇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얼굴에 분칠하고 하늘대는 꽃들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치 말아다오 내 얼굴을 뭉개 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의 입술을 핥고 깨물고 짓이겨놓았다

시전문지 현대시학은 제7회 '전봉건문학상'에 오정국 시인의 시집 '재의 얼굴을 지나가다'를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전봉건문학상'은 현대시학을 창립한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이번 수상자인 오정국 시인은 1956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등의 시집이 있다. 서라벌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아울러 올해 현대시학신인상에 유정, 박서영 시인을 당선자로 선정했다.

 

서강대 문학을 전공한 유정 시인은 시 '코프만 씨 아아아! 1' 외 4편,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박서영 시인은 시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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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인상 / 강인한


1

다들 불 끄고 잠든 밤
앞마당 우물에 나와 끼얹는 물소리
희다.

열여덟 블라우스 흰 교복
복숭아처럼 솟은 가슴
희다.

잠들락 말락 어렴풋한
틈새로
차갑게 끼얹는 한 줄기
물소리.


2

진심으로 달라고 하면
주고 싶데요,
나는.

지나간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목소리
들린다.

웃고 있는 사진 속
향연(香煙)처럼

물소리.

 

 

 

두 개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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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두 개의 인상을 꽃피운 시인의 실존 의식

 

한국 시문학사에서 전봉건은 전후(戰後)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될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시단이나 학계에서는 모더니즘을 현실 인식이 없는 개념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지배적인 것은 모더니즘을 문학의 한 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리얼리즘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전봉건문학상의 심사평에서 이와 같은 점을 제기한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고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나 연구자 중에서 전봉건과 강인한의 시 세계에 대한 관련성에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봉건 시인이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인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다고 볼 수 없고, 강인한의 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봉건의 시 세계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충격과 상흔을 극복하려고 한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력에 대한 강인한 의지로 인간 실존의 존엄성과 가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가 춘향연가」「속의 바다」「」「625등을 제재로 삼고 연작시를 쓰고, 견고한 시인 정신이 반영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유구한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 그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남진우가 전봉건 시전집(문학동네)을 간행하면서 전봉건 시 세계의 본질을 에로스의 시학이라고 진단한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전봉건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사랑의 정신과 항일성의 언어로 극복하려는 모더니즘 시를 추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지향은 자연을 순수하게 노래한 소위 서정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의 모더니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등장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동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도덕, 사상, 윤리, 종교 등에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몸소 겪어야 하는 불안과 소외 등을 주체적으로 반영해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현실 인식을 회피하거나 역사의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한 운동입니다.

 

한국전쟁이며 독재정권을 몸소 겪은 전봉건이 추구한 시 세계 역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단지 아방가르드적인 유럽 계열의 모더니즘보다는 감정을 적절히 통제하고 대상을 직관과 이미지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영미 계열의 모더니즘 시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국 전봉건은 전후의 한국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현대성의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결은 다소 다르지만 전봉건의 시 세계는 박인환, 김수영, 김종삼, 김규동 등과 같은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인한의 시 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건이 앞 산자락에서는/아버지가 죽었다/뒤 산자락에서는/작은아버지가 죽었다/앞 산중턱에서는/삼촌이 죽었다”(625 21)라고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한국전쟁이 가져온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한 모습은, 강인한이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강변북로) 것으로 여긴 권력자를 비판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독재 권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봉건이 수천 년 수만 년을 돌 속에 갇혔어도/억척같은 그 어둠에 갇혔어도/눈 똑바로 뜬 물고기가 어찌 휘황한/황금빛이 아닐 수 있을 것이며/그 어둠 깨지자 어찌 꼬리쳐 하늘로/하늘로 솟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36)라고 상상한 것처럼, 강인한은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동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빈 손의 기억)라고 돌의 생명력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전봉건이 아직도/좀 어두운”(625 1) 시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맞서 이제/곧 밝은/새벽”(625 3) 을 기다리듯이 강인한은 어둠을 걷어내는 웃음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강인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방관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닳는대응을 합니다. 아픈 상황에 자신의 아픈 몸을 밀어 넣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기꺼이 맞서는 세계인식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자신의 눈을뜨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자욱이 풀어줍니다.

 

화자는 자신이 피가 닳는응전으로 헌신했을 때 실존의 조건들이 희게 말하고/희게 웃는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각이나 우연적인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삶의 체험과 현실 인식을 통해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 내에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질풍노도의 시대”(질풍노도 시대가 있었다)를 거쳐온 강인한 시인의 고투가 씨알로 빛나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 사진 속/향연(香煙)처럼//물소리”(두 개의 인상)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탄생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맹문재오형엽)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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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시인이 제6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작으로 강인한 시인의 두 개의 인상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1000만원을 수여하게 된다. 전봉건문학상은 1950년대 모더니즘 대표 시인 전봉건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리기 위해 2015년 마련됐다. 1회 김행숙시인, 2회 송재학 시인, 3회 김상미 시인, 4회 이승희 시인, 5회 한영옥 시인이 수상했다.

 

현대시학 작품상은 전형철 시인의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을 수여받는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가장 왕성하고 개성적인 시작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에게 수여한다. 박용래, 김종삼, 조영서, 김선영, 임성숙, 정진규, 이원, 이장욱, 이덕규, 박형준, 이병률, 이인원, 장석원, 위선환, 권혁웅, 조연호, 조말선, 우대식, 이승일, 이은규, 전형철 시인 등이 역대 수상했다.

 

현대시학 2020 신인상은 서종현 시인(‘4), 하시안 시인(‘파일의 방식4)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는 각각 상패와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

 

이 상은 현대시학’ · 현대시학사가 주최하고 전봉건문학상·현대시학 작품상 운영위원회가 주관, 금보성 아트센터가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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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라, 슬픔 / 한영옥

 

 
입추 지나고
광복절 지나고
추적이던 빗물 끝
아릿하게 번져오는,
생량머리가 묻혀온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못 받은 척 쭈그려 앉아
말쑥하게 새로 올라온
쑥 한줌 실하게 뜯어
뜯던 자리에 도로 뿌린다
오너라 슬픔,
쑥 이파리 태워 매운 눈 비비며
꺽꺽 같이 죄다 울어버리자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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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건 문학상을 주관하는 격월간지 '현대시학'은 지난해부터 출간한 시집 중, 20년 이상된 중견 시인의 시집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해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다.


지난해부터 출간한 시집 가운데 20년 이상된 중견 시인의 시집을 대상으로 심사해 시상하는 ‘중견시인’ 부분은 한영옥 시인의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이 뽑혔다.

한영옥 시인은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비천한 빠름이여’ 등을 썼다. 한 시인은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으로서의 고통과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하면서 비극적 속성을 통해 삶을 역설적으로 위무하는 따뜻한 세계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한편 제5회 전봉건 문학시상 시상 부분은 중견시인, 현대시학 작품상, 신인상이다. 상금은 이옥채 시네마건설 대표와 금보성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이 후원한다.

 

제 5회 현대시학 '전봉건 문학상' 시상식이 성황리에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거리두기로 두차례 연기된 시상식이 25일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수상자와 가족 그리고 현대시학회 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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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 이승희

 

 

벽지 속에서 꽃이 지고 있다 여름인데 자꾸만 고개를 떨어트린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그런가 하여 허공에 꽃잎을 만들어주었다 나비도 몇 마리 풀어주었다 그런 밤에도 꽃들의 訃音부음은 계속되었다. 옥수숫대는 여전히  그 사이로 반짝이며 기차는 잘도 달리는데 나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꽃과 살았다 반쯤만 살아서 눈도 반만 뜨고 반쯤만 죽어서 밥도 반만 먹고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 나는 혼자서 꽃잎만 피워댔다 앵두가 다 익었을 텐데 앵두의 마음이 자꾸만 번져갈 텐데 없는 당신이 오길 기다려보는데 당신이 없어서 나는 그늘이 될 수 없고 오늘이 있어서 꼭 내일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니라는 걸 알게 되어도 부음으로 견디는 날도 있는 법 아욱은 저리 푸르고 부음이 활짝 펴서 아름다운 날도 있다 그러면 부음은 따뜻해질까 그렇게 비로소 썩을 수 있을까

 

나는 같이 맨발이 되고 싶은 것

맨발이 되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으면

어디든 따뜻한 절벽

여기엔 없는 이름

어제는 없던

구름의 맨살을 만질 수 있지

비로소 나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세상에 없는 나를 만나는 일

이 불편하고 쓸쓸한 증명들로부터

더는 엽서를 받지 않을 거야

이 세상을 모두 배웅해버릴 테니

이건 분명해

견딜 수 없는 세계는 견디지 않아도 된다

창문에 매달린 포스트잇의 흔들림처럼

덧붙이다가 끝난 생에 대하여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그래서 좋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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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은 제4회 전봉건문학상에 이승희 시인의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 선정됐다고 27일 밝혔다.

전봉건 문학상은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현대시학이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1회에는 김행숙의 “에코의 초상”이, 2회에는 송재학의 “검은색”이, 3회에는 김상미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당선된 바 있다.

이번 수상자인 이승희 시인은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97년 계간 “시와 사람”에 작품을 발표,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수상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와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에 이은 세 번째 시집이다.

심사위원단(문정희/송재학)은 이 시집의 세계는 “사물/사람과 문학이 왜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연민의 발화”로 시작하며, 사물/사람과 문학 간의 거리에 대한 섬세한 질문과 답변을 담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이 시집에서 ‘여름’은 시인이 하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이라며, 이것이 “사상은 시가 아니지만, 시는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전봉건 문학”과 연결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상금은 1천만 원이며, 시상식은 현대시학 50주년 기념식에 맞춰 내년 2월 말에 열릴 예정이다. 일시와 장소는 추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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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백서 / 김상미


아주 가끔은 우울하고 대부분은 명랑해요
사람들은 내가 명랑한 걸 좋아하지 않아요
명랑은 우울보다 격조가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명랑하고 싶어요
무엇에든 광적으로 집착하는 체질이 못 되거든요
광적인 집착은 병적인 우울을 낳지요
언제나 노심초사 전전긍긍
어디에서 불행이 오는지 어디로 행복이 달아나는지
쉴새없이 탐색하고 추적해야 하거든요
그러다보면 점점 명랑에서 멀어져 우울한 괴물로 변해버리죠
정말이지 나는 그런 거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단것보다 쓴 것을 더 좋아한 탓인지
여하한 고통 위에 또 고통을 세워 그 안에 아무리 사나운 북쪽 창을 달아놓아도
내 열병은 시들 새도 없이 하루 만에 거뜬히 끝나버려요
쓸데없이 진지하고 쓸데없이 합리적이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값비싼 망원경 따위는 집착 강한 우울한 사람들에게나 모두 줘버려요
나는 그냥 바람 부는 길가에 앉아 무언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릴래요
무언가가 다가와 황홀하게 나를 감동시켜주길 원할래요
로댕의 대성당처럼 가우디의 카사 밀라처럼 언제든지 떠나고 싶은 지중해처럼
지로나의 내밀한 구시가지처럼 고야의 검은 집처럼 김정희의 아름다운 세한도처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뒤뚱뒤뚱 해맑은 어린아이의 단순 명쾌한 웃음소리처럼
오성의 드높은 담장 단번에 밀치고 들어오는 놀라운 명랑에
자연스레 내 온몸 빠져들기를 원해요
아주아주 오래된, 처음과 끝 같기를 원해요
너도나도 창백한 백합꽃 같은 우울에 매달려
격조 있던 본래의 심연 구기고 구겨 뒤틀린 철갑 같은
고상 찬란한 신종 우울증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자랑스레 뻐기든 말든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언제나 명랑하고 싶어요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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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신서정파의 기수이며 1969년 [현대시학-창간:전봉건, 발행:전기화, 편집주간:고형렬02-701-2341] 창간하여 한국시단의 위상을 드높인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제정한 ‘제3회 전봉건문학상’과 새로운 사유와 감각으로 미래 한국시단을 이끌어갈 인재를 발굴하는 ‘2007년도 현대시학 신인상’ 시상식이 ‘2018년도 현대시학 총회’와 함께 2월 23일 종로구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는 시집'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펴낸 김상미 시인이 선정되었다.전봉건문학상은 지난 한 해 발간한 중견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와 평가를 통해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

심사위원(이경림 시인, 이숭원 문학평론가)들은 심사평에서 “김상미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생의 진실과 비밀에 마주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화법, 유사한 시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과 변화를 창조하는 그의 매혹적인 표현법은 이제 어떤 경지에 이른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자인 김상미 시인은 1957년 부산 초량동에서 출생하였고, 1990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하였다.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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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창고 / 송재학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는 색조 때문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무엇이던 쌓아두기에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족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느리게 엎드렸는데 귀가 없다 먹거리만 쟁여놓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몸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한 검은색은 위로의 손바닥이 만지는 시간의 늙은 표면이다 산을 넘어야 하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에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오래된 말이다

 

 

 

검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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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송재학(61) 시인이 선정됐다고 상 운영위원회가 30일 밝혔다. 수상작은 시집 '검은색'이다.

 

심사위원단은 "어느 페이지로 들어서든 사물들이 시를 넘어서 나아가는 장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때로 절벽 같은 위태로움으로, 평야와 같은 광대함으로 시를 열어 보인다"고 평했다.

 

수상작과 수상 소감, 심사평 등은 월간 시 전문지 '현대시학' 10월호에 실린다. 시상식은 오는 11월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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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초상 / 김행숙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에코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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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현대시학사가 전후 신서정파의 기수로 알려진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김행숙 시인이 결정되었다. 수상 시집은 김행숙 시인의 에코의 초상이다. 전봉건문학상은 지난 한 해 발간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상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심사위원(남진우, 홍일표, 권혁웅, 조재룡)들은 김행숙의 시집에코의 초상도처에 선언과 주장과 판결의 웅성거림만 가득한 세계에서 힘겹게 에코의 연약한 목소리를, 그 사라져가는 현존을 기억하고 이어가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은 이번 시집에서 아름다운 시적 메아리를 낳고 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한 삶에서 뿜어 나오는 미광 하나로 김행숙이 공동체 저 밑바닥의 무의식을 불러내 지금-여기의 절망을 차분히 기록해나갈 때, 그의 시는 벌써 조용한 절규이며, 이 비극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조금만 울려도 좋다고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하고도 아름다운 실천이다라고 평하였다.

 

수상 작품과 수상 소감, 심사평 등은 월간 현대시학10월호에 발표될 예정이다.

 

수상자인 김행숙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이 있고, 현재 강남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 제9회 노작문학상과 2014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올해의 좋은시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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