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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 / 이순희

 

그는 글 동냥하며 근근이 살았다

언어에 굶주려 극심한 눌변에도 시달렸다

어쩌다 곳간이 찼다 싶어 열어보면

가득 들어찬 망상과 허상들.

 

어느 새벽 그는 길을 떠났다

詩는 말과 절이 합쳐졌으니

말의 신전으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말씀을 확인해 보리라 작정했다

험준한 산길 올라 들어선 산사에는

아무리 찾아도 말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바람 고요해지자

가부좌 틀고 면벽한 말씀의 뒷모습,

묵언 수행 중인 듯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다

그 염주 다 닳아 한 점으로 남게 될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을 듯 꼿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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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 앞에 다시 옷깃을 여미며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저는 많은 시집을 버렸고, 그러고 나서도 많이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제 시집은 누구에게 읽어보라고도 못하고 작업실 벽에 기대어 빽빽히 쌓여있습니다. 버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갓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쁨보다는 왠지 당혹스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동안 연유야 많겠습니다만 저는 시에 올인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잘 알기에 기쁨보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먼저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저 또한 여느 수상자들처럼 기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면 이번 수상이 그동안 제 시업의 성취가 특별해서가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시에 자신을 다 걸고 사는 시인도 있는데, 저는 시를 때로는 소홀히 때로는 너무 무심하게 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시는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는군요. 사실 저도 새벽에 앉아 시를 마주 대하면 언제나 마음이 열리곤 합니다. 일상에 묻어둔 이런저런 응어리도 다 풀어주고 하소연도 묵묵히 받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시가 언제까지 저의 이런 푸념들을 받아주기만 하겠습니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저는 시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 곧추세우려 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시 앞에 서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시와 함께 동행 하겠습니다. 저의 삶이 바로 시가 되도록 정성을 다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부족한 저의 시를 수상작으로 선고(選考)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상을 제정하고 운영에 진력하시는 반경환 선생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려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시를 쓴다고 이러저러한 저를 한결같이 지켜봐 준 남편과 딸, 아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본질에 이르는 길 찾기의 시학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란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루카치에 따르면 시는 원초적 고향, 곧 선험적 고향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험적 고향으로 가는 길 찾기이다. 루카치는 이 선험적 고향을 사회철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하이데거는 언어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다르지 않다. 루카치가 말하는 선험적 고향은 에덴과 같은 낙원인데, 그곳에서는 인간의 언어와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꿈꾸는 시적 세계와 다르지 않다. 서정시의 꿈은 언어와 사물이 일치하는 상태, 곧 언어가 그 본질적 능력을 회복하는 상태이다. 즉 모든 언어가 대화적 능력을 회복하는 상태이다.

 

제20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작이 된 이순희의 시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은 언어의 본질적 능력을 찾아가는 구도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말(言)이 머리를 깎았다는 행위는 말이 자신의 머리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에 이르는 인식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시의 세계, 곧 언어의 신전(言+寺)을 찾아간다. 언어의 신전이란 언어와 사물이 일치하던 원초적 시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해서 모든 시어가 본질적인 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보들레르가 말한 만상조응(萬象照應)의 경지이기도 하다. 시인이 언어를 매개로 사물과 일치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물아일체이고 소요유(逍遙遊)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경지는 시인, 아니 모든 예술가가 꿈꾸는 절대미의 경지이고 절대자유의 경지이고 황홀경의 경지이다.

 

이순희 시인은 이제 본격적인 시의 세계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어쩌면 그런 열락(悅樂)의 세계를 이미 맛보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법열이니 열락(悅樂)이니 하는 것들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고 서로 통하는 게 그런 상태이다. 그게 바로 도에 이르는 길이다. 이순희 시인의 시들이 그런 도에 이르는 길을 찾고, 그 도를 즐기는 것, 도락의 입문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면서 심사평을 마무리한다.

 

- 심사위원 최서림, 반경환(심사평: 최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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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 김참

 

사흘 내리 내린 눈이 모든 것을 덮었다. 구층 우리집도 눈 속에 파묻혔다. 냉기 도는 계단을 밟으며, 나는 일층으로 내려왔다. 현관을 박살내고 들이닥친 눈이 우편함 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오월도 끝나 가는데 무슨 눈이 이토록 퍼붓는단 말인가. 누군가 뚫어놓은 통로를 따라 막장 광부처럼 조심조심 걸었지만 눈 밖 세상으로 통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언 손 비비며 천천히 걷다 발을 헛디뎌 다른 통로로 굴러 떨어졌다. 꽁꽁 얼어붙은 사람 몇이 차가운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흔들어 봤지만 미동도 없었다. 온기도 생기도 없었다. 어두운 통로를 휘감고 돌며 낮은 기타소리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한참 걸었지만 통로는 막혀 있었다. 언 손 불어가며 길을 내는 동안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배고프고 춥고 졸음도 쏟아졌으나 잠들면 얼어 죽을 것 같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하루하루가 꿈처럼 지나갔다. 머리부터 발톱까지 꽁꽁 얼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눈을 파헤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벽이 허물어지고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멀리서 희미하게 불빛 하나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불 켜진 창이 보였다. 얼어붙은 창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여기 누가 있냐고, 아무도 없냐고, 아무도 안 계시냐고, 커다랗게 소리 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이중기, 윤의섭, 길상호 등저 <사이펀문학상 수상시집>(사이펀 현대시시인선 12)
 

사이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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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즐거운 마음으로 Jazz 연작을 마무리

어떤 말로 수상소감을 시작할지 한참 고민했지만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10월 어느 오후,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었습니다. 조만간 어느 문학상을 받을 예정이라, 제가 또 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소식을 알려온 배재경 선생님이 다른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사이펀 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려왔기에, 상을 받아도 된다는 건 알았지만 사실은 통화하는 동안 상을 또 받아도 되나? 하는 행복한 고민을 했습니다.

집에 와서 사이펀에 발표했던 시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눈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입니다. 저는 올해 들어와 Jazz 연작을 쓰기 시작했는데 사이펀에 발표했던 시도 Jazz 연작에 포함시킬까 고민하다가 따로 제목을 붙여 발표했습니다. 사실은, 며칠 전 어느 잡지에 두 편의 시를 넘기며, 시작 메모에 Jazz 연작을 마무리 한다고 적었습니다. 올해엔 신작시 청탁이 더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한해 시 농사를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수상을 하며, 두 편의 시를 더 쓰게 되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Jazz 연작을 마무리합니다. 시를 쓰는 시간은 늘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모두가 힘든 해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태어나 처음 마스크를 써 봤고, 발을 다쳐서 깁스도 했습니다. 병원에선 입원을 하라고 했지만,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라도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아픈 발로 절뚝거리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처럼 행복한 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한 해에 두 번의 상을 받게 되는 행운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사이펀 문학상은 더 특별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심사를 해주신 강은교 선생님, 김성춘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 김참 시집 <초록 거미>(신생시선 58)
 

초록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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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을 통과해서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정익진의 「유리 바다」 외 1편, 최휘웅의 「코로나」, 한정원의 「조슈아 나무 아래의 감자」 외 1편, 최은묵의 「리플리 증후군」 외 1편, 김참의 「미궁」 외 1편이었다.

본심에 오른 다섯 분의 작품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시력과 뛰어난 시적 테크닉 그리고 개성적인 언어의 운용을 보여주고 있어 수상작 한 분을 선정하는데 고심이 많았다

시적 긴장을 잃지 않고 주제를 치열하게 밀고 가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성과, 사물에 대한 인식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대상 작품들은, 현재 한국시의 다양한 목소리와 그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사이펀 문학상의 높은 위상을 짐작 하게 했다.

그 가운데 수상작으로 선정된 김참 시인의 작품들은, 불확실한 미궁 같은 삶 앞에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면서 고통스런 현실의 삶을 큰 폭의 상상력으로 아름답게 전개 시키고 있어 높은 신뢰감을 주었다.

오월에도 눈이 내리는 이곳, 통로는 막혀 있고, 거리에는 얼어붙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암울한 도시, 그러나 어두운 통로 끝에서 들려오는 낮은 키타 소리가 있고, 멀리 불 켜진 창들이 아직도 보이는 도시,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고, 하루하루가 꿈처럼 지나가는 이 곳, 우리 사는 곳, 음악과 눈송이, 꽃을 감각적으로 대비시킨 김참 시인의 환상적인 시편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수상자 김참 시인께 축하를 드리고, 본심에 오른 시인들께도 건강과 건필을 빈다.

- 심사위원 김성춘(시인. 전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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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방 / 김은상

 

 

그녀의 눈망울에 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저녁이 환해질수록

점점 작아지던 그녀의 방.

 

목련이 피어나고 있었다.

 

백태 안쪽 가만히 귀를 대보면

눈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보다 야트막하게

대문 쪽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코흘리개 아이들을 품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그녀의 등이 낡은

지붕으로 휘어져 가는 사이

 

아이들은 얼굴보다 큰 뻥튀기를 깨물며

흙벽 모서리에 난 구멍을 긁었다.

 

술에 취해 밤의 목덜미에 칼끝을 대고

새벽을 엎지르는 아비를 긁는 것인지.

 

그런 악천후를 피해 돌아오지 않는

이역의 어미를 긁는 것인지.

 

철없이 벽은 긁을수록 환해져,

 

커져가는 햇빛과 엉켜

킥킥대며 방바닥을 뒹굴었다.

<

봄을 향한 나무의 비명이 꽃이라면

고통은 적멸에 가닿는 생의 환호일까.

 

수북이 쌓인 폐지 속에 숨었다가

세상보다 아득한 온기에 몸을 말고

스르르……,

 

눈을 감아버린

어린 고양이들의 잠.

 

곪은 달은 아물었다

덧나기를 반복하며

목련나무 가지 위에서 부풀었다.

 

혹 월식이 그리워지는 그믐이면

그녀는 명치끝에 고인 울음을

마른 밥그릇 떨어뜨려 설거지했다.

 

닦을수록 그늘이 깊어지는 꽃의 이명,

화들짝 달무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무도 깨지 않은 목련의 밀실이 있었다.

 

 

 

 

[수상소감]

 

사랑할 수 있을까?

 

청년의 어떤 날이었다. 삶의 기근을 원망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태어나고 싶냐고.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태어나고 싶지 않아. 나는 벽에 주먹질하며 소리쳤다. 그럼 왜 살아야 해? 엄마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이 세상을. 어머니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순간 알 수 없는 분노와 침묵이 뒤엉켜 방 모서리를 적셨다. 어머니가 내 손을 어루만졌다. 고요한 목소리가 울음을 끌어안았다. 사랑해라.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그때 즈음이었다.

 

시작의 난제는 동일성의 시학에 있었다. 모든 비유가 세계에 대한 폭력이거나 나에 대한 자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지켜 온 신념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내가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내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분열을 앓았지만 이 또한 불가해한 삶을 향한 변명이거나 방어기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이 명치 가득히 차오를 때면 마음의 저편에서 어머니의 말이 불효처럼 떠내려 오곤 했다.

 

김수영은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며 그것이 시의 형식이라 했다. 나는 수많은 시의 형식을 연습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곳에 사랑하는 자의 어쩔 줄 몰라 함이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있어 시를 그만 쓴다는 건 사랑을 멈춘다는 뜻이었고, 사랑을 멈춘다는 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절필을 다짐하면 늘 누군가가 찾아오곤 했다.

 

이재훈 형이 그랬고, 길상호 형과 강재남 누나가 그랬다. 김산과 기혁 시인이 그랬고 김지명 시인이 그랬다. 리안 형, 박민혁, 김대진, 변혜지와 같은 소중한 문우들 역시 따뜻한 온기로 곁을 내주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건 당신을 사랑하기 원한다는 의미였으며, 아직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남아 있다는 선언이었지만, 정작 나는 나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고마운 이름들이 많다. 김영국, 조영애, 현근, 영근, 준근, 은경, 애상, 은희. 나는 이들의 아들이자 동생이며 형이고 오빠이지만 매 순간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고마움과 애틋함을 전한다. 그리고 은사인 박형준 교수님과 김춘식 교수님, 박판식 시인께도 고개를 숙인다. 제자로서 한 번쯤 근사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고 싶었다. 끝으로 마음속에 간직한 이름들을 호명할 수 있도록 행운을 선물해 준 상상인 편집진과 심사위원께도 감사를 표한다. 나에게 주신 행운에 보답하는 길이 온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의 모습을 살아내는 일임을 다시금 기억하겠다.'

 

 

 

 

[심사평]

 

1상상인작품상후보로 1차 심사를 거쳐 올라온 11편의 작품들은 고루 미학적 품격과 개별성을 갖추고 있어서 우선 본심으로 올릴 세 작품을 고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심사를 맡은 우리는 가변차선, 목련의 방, 잎사귀이 세 작품을 본심에 올리자는 데 모두의 의견이 빠르게 일치했다. 난관은 지금부터였다. 최종에 오른 시편들은 하나 같이 완성도가 높아서 어느 한쪽에만 점수를 주기가 애매했다. 무엇보다 세 작품의 언어가 가진 경향이나 성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는 있어도, 각각의 문학적 가치를 놓고 본다면 그 미학적 위상이나 의미심장함의 경중을 따지는 자체가 부질없이 느껴졌다. 이는 선정 이유를 변하는 여타의 글에서 흔히 만나는 푸념을 여기서도 반복하듯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선택을 치열하게 번복한 끝에 제1회 상상인작품상 수상작은 김은상 시인의 목련의 방이 선정되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목련의 방은 두 개의 풍경으로 나눌 수 있다. 밤마다 술에 취해 식구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아비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어미, “얼굴보다 큰 뻥튀기를 깨물며 흙벽 모서리에 난 구멍을 긁고 있는 아이들. 이처럼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되는 가족 서사가 시의 배경이라면 신산한 삶의 비명과 울음이 전경화된 것이 목련의 방이다. ‘은 가족 서사 속에 갇힌 고통과 울음을 바깥으로 외재화하는 동시에 네모난 흙벽안으로 그것을 투영시켜 가둔다. ‘은 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그녀의 방이자 삶이고, “햇빛과 엉켜/ 킥킥대며 방바닥을 뒹굴던 아이들의 공간이자 생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폭력에 노출된 마음은 방에 갇힘으로써 극복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마음이 회복되지 않은 시는 그것을 읽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구체로 드러나는 타자의 서사가 보편적 슬픔을 획득했음은, 극복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미적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극성은 한국인에게 꽤 보편적이다. 그리고 이 보편성이 지닌 공감의 힘이 존재의 슬픔을 승화시킨다. 넉넉한 보편성의 미학과 더불어, 김은상의 시가 의식의 고투로 더욱더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 심사위원  이성혁 전해수 신상조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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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덕 / 남상진

 

 

너는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는 난생의 몸으로

막막한 물속 세상에서

파도를 견디며 살아내기란

눈물을 제 살 속으로 말아 넣는 일

짜디 짠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고 연명하던 시절

깊은 수심의 물속을 견디는 일은

스스로 빈틈을 여며 단단해지는 것

 

태풍이 몰려와도

바위의 멱살을 부여잡고 버티던 하루가

물속에서 눈물 한 방울로 맺혔을까?

 

누군들 제안에 눈물 자루 하나 키우며 살지 않을까

 

아름답고 붉은 석양은

수면 위만 비추는 멀고 먼 그림 속 세상

 

밀려오는 세파에 온몸으로맞서고

일렁이는 너울에 흔들리며 키워온

단단하고 둥근 집

 

껍질 한 꺼풀 벗겨

입안에 넣고 깨물면

툭!

숙성된 향기가

온몸으로 번지는 너는

깊이 발효된 맛으로

오래된 봉인을 푼다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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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ㅡ시에게ㅡ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주 굵은 밧줄을 달고 부동의 자세로 정박해 있던 나를 가위에 눌려 깬 골목에서 낯설게 만나곤 할 때마다 그리 멀지 않은 풍경이 내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난감한 일이라 여기기엔 묶여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젠 놓아야지
이젠 벗어나야지
한 꺼풀 벗고 뱀처럼 매끈하게 가야지
당신의 모습이 목젖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하루
어둠에 꼬리 잡힌 짐승처럼 가르릉 거리던 밤에도
세상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쓰고 지우고 쓰고 버렸습니다

서러울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석축을 쌓듯 당신을 내 안에 쌓았습니다
비 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에도 당신은 내 안에 가지런히 쌓였습니다
손금보다 더 깊이 처마 끝 풍경소리보다 더 아름답게 나를 에워싼 당신은
나를 두른 완벽한 성입니다
계절을 건너온 바람과 성벽을 휘감아 도는 안개에도 젖지 못한 나는
당신의 색깔로 채색되고 내 안에 나는 없고 당신으로만 가득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젖은 옷을 염려하기보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시절에도 당신은 거부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이자 심중의 고향이었습니다
고통도 즐거움도 당신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어도 당신은 내 안의 고귀한 신이고 종착역입니다
빗방울이 모인 계곡의 물처럼 청량하게 내 안을 흐르는 당신으로 나는 매일매일 젖고 행복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벗어날 수도 쏟아 낼 수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계곡에 뿌리내린 자귀나무 꽃술처럼 당신을 가꾸어 가겠습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당신 속으로 더 깊이 나를 밀어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당신을 기도 할 것입니다
나를 어루만져 주는 당신 품 안에서 평화를 이루겠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
당신을 더 섬세하게 섬기며 살겠습니다
손 등에 돋아난 솜털처럼 내 안에 뿌리 박힌 당신을
영원히 가꾸며 살아가겠습니다

일어서야지
떨치고 일어서야지
부질없는 이승의 티끌을 잡고 당기는
아둔한 줄다리기의 시간들
이젠 놓고 바람처럼 매끈하게 가야지
몇 천 겁을 걸어도 닿지 못할 고향이 내 안에 있었구나
한 뼘도 되지 않는 내 안의 우주를
왜 여태 모르고 살았나
잘 살펴라
눈을 크게 떠서
고도 없고 애도 없는 집에서 넌출넌출 살아가기를
이 새벽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부디 바람의 대 자유를 그대 안에 들이소서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당신의 우주에 들 시간입니다
부디,
다시 평화롭기를

코로나 19로 인해 지친 심성으로 모두가 어두운 한낮입니다.
부디 힘내시고
보잘것없는 시를 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의 품에서 더 열심히 놀고 아파하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시 앞에 더 바짝 엎드리겠습니다.

 

 

 

 

철의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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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20년이 참으로 잔인하게 지나가고 있다. 코로나19, 폭우, 태풍 삼중고에 일상이 무너지고 경제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행동이 제약을 받았고, 문화생활의 범위는 더 좁아졌다. 이러한 사실이 내 년, 아니면 내 후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에 앞이 더 아득하기만 하다. 벌써부터 코로나 이후의 경제와 문화를 걱정하는 학자들이 예측을 하거나 대책을 연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려운 시대나 시기일수록 시는 희망과 극복의 메시지로 역할을 다하여 왔고 또 그렇게 쓰면서 시인들 또한 버텨왔다. 그래서 애지문학회에서도 그간 쓴 좋은 작품을 모아 애지작품상을 심사하여 코로나19에 지친 독자들이나 회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한다. 올해는 코로나19 여건으로 운영위원들이 모임을 갖지 못하고 온라인 상으로 예심에서 올라온 10여 편을 두고 최종 후보작 3편을 선정하였다. 남상진 시인의 「미더덕」과 최혜옥 시인의 「블랙 스완」 그리고 유계자 시인의 「붉은 맨드라미 아래」가 바로 그 해당 작품들이다. 공교롭게도 3편 모두가 올해 발간한 애지사화집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세 작품이 모두 작품성이 뛰어나 투표를 해준 회원들이 조금은 고민했을 법도 하다.

 

이번에 올라온 후보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비유나 이미지를 갖고 시적자아를 확장해나가는 방식이 담대하고 진정성이 뚜렷해서 선자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았으리라고 본다. 9월 7일부터 21일까지 2주간 회원들의 투표를 마친 가운데, 박빙의 차이로 2020년 제7회 애지작품상은 남상진 시인의 「미더덕」에게로 돌아갔다. 남상진 시인은 2014년 애지로 등단하여 첫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와 두 번째 시집 『철의 시대 이야기』를 상재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그의 시세계는 어느 한 곳에 편향되어 있지 않고 다양성에 대한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예를 들면 「맹그로브」에서는 요양병원 복도를 걷는 맹그로브 뿌리같이 수척한 아버지를, 「사막의 내력」에서는 사막과 아내라는 교집합에서 서걱거리고 건조한 발자국의 아내를, 그리고 애지작품상에 오른 「미더덕」 또한 “미더덕”을 통해 드러내는 신산한 삶에 대한 껍질을 발효된 맛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사물을 대하는 다양성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첫 행은 이 시의 서론이자 결론이다. 도저하고 강인한 결론을 지어놓고 그 결론을 풀어가는 그만의 시적태도가 사뭇 진지하고 단단해 보인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잃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다양성의 상실 이유는 감각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인들뿐만 아니라 남상진 시인도 마찬가지로 감각이 획일화되는 것을 경계하여 독자들의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왜곡시키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 최종 후보작에 올라 좋은 작품으로 선전을 해주신 최혜옥 시인과 유계자 시인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지난 4년간 저를 믿고 따라주신 애지문학회 회원 여러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일동(심사평 회장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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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크기 / 조영심

 

 

그리움에는 닿지도 못할 한 뼘 엽서를 본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간절한 전언인 양

최초의 선언인 양

붙잡고 있는

 

방금 보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울컥

보고 싶어지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그림

 

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벼랑 끝에서도 한 줄 소식에 달게, 매달리는 날들

 

단단한 그리움 아쉬움 모두를 이 작은 종이그릇에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까

 

바다 건너온 바람이 옆에서 소리 높여 활자를 읽어주자

다섯 줄 골똘한 단문

한 뼘씩 목마른 곡절로 행간을 넓혀가며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중인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

내 속까지 파고드는 둥그런 파동

자꾸 터져만 간다

 

 

 

 

그리움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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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금방 보고 돌아서면 다시 딸이 보고 싶다는 어머니를 그리움의 높이로만 바라보며 돌아서던 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등으로 바람결에 날아든 낙엽처럼, <제18회 애지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습니다. 당황하여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또한 낭패스럽기도 하여 햇볕 쪽으로 옮겨 놓았던 화분들을 바라봅니다. 시들거리던 화초가 햇살비를 맞고 눈에 띄게 힘이 올라 잎들도 윤기가 흐릅니다.


문득 나의 시간도 거기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2005년 처음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송수권 교수님과 시 공부를 시작하여 <산문시사>문학 동호인들과 시를 공부하던 중 2007년 『애지』로 등단하여 시인의 이름을 달았고, 그 뒤 5년마다 『담을 헐다』 『소리의 정원』 『그리움의 크기』 시집 3권을 내놓았으니 2020년 올해로 15년 차 시인입니다.

 

신神이 파놓은 시詩의 함정에서 언어의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것이 시詩라면 저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신의 함정에 빠져 버린 셈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마다 그분과 함께 젖은 곳에서는 설움을 대신하는 곡비가 되었고, 필요하다면 광대가 되어 외줄을 탔습니다. 제가 한 일은 오직 그분의 방문에 기꺼이 혹은 기어이 응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응답의 즐거움으로 하루해가 짧았고 한편 한편의 기쁨에 뿌듯했습니다.

 

나의 시의 모지인 <애지문학상>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시를 쓴답시고 남의 울음에 내 설움을 섞어 곡하는 곡비 놀음은 아니었나? 어름사니 흉내 내며 어설프게 외줄에 올라 부채를 펴고 접는 잔재주만 부린 것은 아닌가, 뒤 돌아보게 됩니다.

 

<제18회 애지 문학상>은 아직 어설프고 빈곳이 너무 많아 그곳을 따스한 햇살비로 채워주신 거라 믿습니다. 나의 시도 어느 누군가에는 한 줌 햇살비가 되어 생기를 불어 넣으라는, 세상의 생명을 북돋우는 곡비요 어름사니가 되라는 주문의 말씀이라 믿습니다. 더욱 정진하라는 심사위원님들과 반경환 『애지』 주간님 격려의 뜻을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심겠습니다.

 

 

 

소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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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지난해 겨울호부터 이번 가을호까지 각종 지면을 통해 발표된 시들 중에서 엄선된 10편의 후보작을 읽고, 그중에서 <애지> 2020년 가을호에 발표된 조영심의「그리움의 크기」를 제18회 애지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한해동안 생산된 그 많은 시편중에서 작품 하나를 고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선정 기준도 심사자의 주관이 많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작품의 미학적 완결성이 뛰어나고, 앞으로 애지문학상의 위상을 진취적으로 이끌 작품을 고르기 위해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조영심의「그리움의 크기」는 선명한 이미지와 깊이 있고 절제된 언어로 그리움의 정서를 실감있게 그려냈다. 이 시에 개입된 서사도‘휠체어에 앉은 그녀’나‘바다 건너온 바람’정도로만 노출되어 있어서, 시상의 전개를 압박하지 않으면서 외려 그런 서사의 여백이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어 좋아 보였다. 이 시의 화자가 연민의 감정으로 지켜보는 “휠체어에 앉은 그녀”는,“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벼랑 끝”생의 막바지에 도달한 사람일 터이다. 그녀는 가족과 떨어져 요양기관에서 지내는 듯하고, 거기서 그리운 사람들로부터 부쳐오는 엽서의 “한 줄 소식에” 매달려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칫 상투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던‘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이 시에서 생의 말년의 고독을 대변하고 그에 저항하는 삶에 대한 의지와 애착의 기호로 절절하게 읽힌다.“작은 종이 그릇”인 한뼘 엽서에 “다섯 줄 골똘한 단문”으로 시작하여 “다섯 줄 장문”을 넘어 “하늘과 땅이 알고 있을/그녀만의 방언”으로, 무한대의 그리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게 그런 연유이다. 요즘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러 병원으로 간다. 현대인의 죽음의 장소가 치료와 재활이 목적인 병원이라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양원도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길목의 마지막 처소일 수도 있다.

 

시 「그리움의 크기」에서도 신체와 정신의 쇠락과 질병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는 노인 세대가 처한 현실을 언뜻 엿볼 수 있다. 그속에서 노년의 고독과 소외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의연하다. 노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지금, 이 시는 개인사적 이야기를 넘어 넓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삶과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에 광활한 삶의 영지를 대부분 잃고, ‘휠체어’라는 작은 영토에서 안간힘을 다해 그리움의 제국을 일으키려는, 삶의 비장미를 한껏 고양시킨, 조영심의 「그리움의 크기」를 올해 애지문학상으로 선정하는데 흔쾌히 동의했다. 수상자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반경환, 송찬호(심사평 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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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가 / 홍재운

 

 

A4 용지는 비누를 모릅니다 빗방울은 음악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트렁크는 오늘의 핵심을 모릅니다 핵심은 나를 모릅니다 아파트는 인천공항을 모르고 인천공항은 소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기 날아가는 바닥의 하늘은 푸른 신호등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새가 아닙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소파를 꿈꿀 수 없으며, 암 덩어리들이 교차로일 수 없으며, 그래서 안나푸르나에는 지금도 물고기들이 산으로 흘러갑니다 22번 게이트를 빠져나간 오늘이 흘러갑니다 오늘부터 침대는 침대의 생각을 모릅니다 거울은 새벽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절은 사람의 길을 따라 오지 않습니다 흐르는 음악은 길이 없습니다 어제의 비가 오늘도 내립니다 오늘 내린 어제가 내일도 내립니다 바다 건너 13시간은 입이 아니기에 나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은 바다가 아니기에 구겨진 양말 앞에서 사라진 오늘에 대해, 나는 알 수 없습니다 줄줄 흘러내리는 나를 모릅니다

 

 

 

 

안녕, 푸른 고래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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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와세계 작품상 심사 경위

 

<시와세계작품>은 선과 아방가르드를 통한 현대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작가를 발굴하고 격려하는 취지에서<시와세계작품상>이 제정되어 올해로 제 5회를 맞는다.

 

수상작품은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정하였으며 예심위원은 전년도 수상자이거나 수상 범주에 들지 않는 시인들로 구성하여 51일부터 선발작업에 들어갔다.

 

예심위원은 선발기준에 따라 2000-2010년 사이 등단한 시인으로 2012년 여름호부터 2014년 봄호까지(8) 시와세계에 발표한 시 2편을 중심으로 선발하고 타우수문예지에 실린 3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시와세계의 창간목적과 본 상의 설립목적에 맞는 현대시, 아방가르드 시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에게 관심을 두고 선발하였다.

 

1차로 20명의 시인들을 선발하고 다시 편집부에서 7명의 시인을 선발하여 심사 1주일 전에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심사위원들께 송달하였다.

 

본심 심사는 설태수 시인과 이수명 시인 그리고 시와세계주간인 송준영 시인이 심사를 하였다.

 

5시와세계 작품상본심에 오른 후보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강미영 (2005)-<잔치>4

2. 김영찬 (2002)-<삼각형이 생각 할 줄 안다면>4

3. 유형진 (2001)-<허니 밀크 랜드의 녹슨 이마와 축축한 손>3

4. 이제니 (2008)-<작고 검은 상자>4

5. 조민 (2004)- <속수무책>4

6. 최승철 (2002)- <눈 속의 탁상시계1>4

7. 홍재운 (2005)-<오늘 비가>4

 

먼저 송준영 주간이 <시와세계작품상>의 취지와 심사경위, 심사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심사에 들어갔다.

 

심사방법은 3명의 심사위원이 3명의 시인을 추천하고 교집합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2-3명 시인의 작품을 집중 분석 토론하여 그중 1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검토 분석하면서 현대시의 모호성과 난해함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난해함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본다면 첫째는 독자와의 소통단절 혹은 소통 부재에서 오는 난해함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작품의 깊이가 너무 심오하여 독자가 소통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이 두 가지는 결국 통념적인 가족성의 문제 유기성의 문제이며 우리 몸의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않듯이 동맥경화증적인 시의 문제점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현대시에서의 이질적인 정보와 이미지 병치 기법, 자유연상을 통한 문장 병치기법, 자동기술법등 다양한 기법을 동원하는 현대시의 폭 넓은 표현으로 소통의 음역을 확보할 수 있는 시들에 대한 토론이 중점으로 이루어졌다.

 

심사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3명의 시인을 가려내는 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이수명 시인이 홍재운, 최승철 시인을 추천했고, 설태수 시인은 홍재운 최승철, 이제니, 김영찬 시인을 추천하였으며 송준영 시인은 강미영, 홍재운, 유형진 시인을 추천하였다.

 

심사위원 3명의 추천을 받은 홍재운 시인과 2명의 추천을 받은 최승철 시인을 대상으로 토론을 했다.

 

최승철 시인의 시 눈 속의 탁상시계1」 「눈속의 탁상시계 2두 편은 좋은 작품이며 거대한 역동적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하였고, 그의 리얼리즘적인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고 말하였다.

 

심사위원 3명의 추천을 받은 홍재운의 시는 5편이 모두 고르게 우수하며 특히 오늘비가」「역광」 「소설이 오고가 주목을 받았다.

 

오늘 비가는 부재의 현실을 모릅니다로 반복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폭 넓은 문장과 감각을 교차하며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심히 떠오르는 대상은 소년이지만 시인은 소년이 아닌 자신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는 아파트 안의 자신이다. 주목을 받은역광은 표면이 넓고 힘이 있는 작품으로 독특한 구조와 상호 협동하는 문체들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메시지의 통일성과 일관성이 메타적이다. 홍재운 시인의 소설이 오고또한 아름답고 경쾌한 작품이며 홍재운의 시들은 피가 고루 흐른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평하였다.

 

이와같이 홍재운의 시들은 살아 움직이는 리듬감과 거침없는 진전과 확산, 그리고 언어의 마찰이 넓고 좁은 각도를 지나 객관적인 설득력을 얻기까지 그의 뛰어난 창조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동안 제5시와세계 작품상심사에 수고해주신 예심위원 김미정, 이덕주, 본인을 포함한 최세라 시인과 본심 심사를 맡아준 설태수 시인, 이수명 시인 그리고 본지의 주간 겸 발행인 송준영 시인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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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 / 김현신

 

 

의 웃음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진한 웃음은,

어쩌면 더 진한 신음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기호로 실감한다

 

지하육각형의 방에서 퇴색해가는 구멍은, 눈발 냄새가 난다 무거울 것도 가벼울 것도 없는, 뼈의 감정 같은 우울의 무게가 더해진다 몸을 움츠리는 그림자는, 흐느끼는 눈발은, 어떤 원죄도 속죄도 모르리라, 이 아름다운 외투는 신들이 길을 잃은 자세이다, 제 살을 뜯어먹은 입이다 그건, 꼬리가 잘리고 살갗이 갈라지고 말라터진 파편 위를 지나는 형상이다

 

구불거리는 충동에 시달린다 긴 목에 체인을 감는다

 

납처럼 굳어갈지 모르는, 공포다 구멍을 맴돈다 흉터를 긁으며 오직 구멍을 찾아

충동은 빈곳을 채워간다 누군가,

 

은빛비늘을 만지며 섬듯한 촉감을 빈들에 채울 수 있을 건가, 의 꼬리는 늘 허공이다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허리가 긴 파도다 귓속말을 엿듣는 살갗은, 다시 우울의 무게가 더해진다 폐기되는 죽음은 여전히 비수다 몸은 희고 길지만 음색은 굵고 파편냄새를 풍긴다

 

는 당연히 전달 받은 자의 몫이다

유전자 깊숙이 나를 새겨본다

 

 

 

 

애수역에서 트렁크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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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 낯설지만 아름답다

 

낯선 공간을 맴돌았다 꽃이 피지 않는 봄, 대지는 차가 왔고. 스스로 습지를 찾아가는 열정도 간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타자와의 교감을 성립하려했다. 언어를 사랑 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우려고 했다. 도시의 어두운 모퉁이를 맴돌았고, 텅 빈 내면은 그저 흐느끼고 있을 뿐, 뒷모습은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 시의 세계에 꽃을 피우려 했다.

 

시간을 부정하고 싶었고, 존재의 영원성을, 부재의 아픔을, 시로 전달하고 싶었다. 시공을 넘어서는 언어의 꽃,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교감하려고 했고, 갈증과 우울 불안으로 가득한 이미지를 폭발하기도 했다. 죽음과 소멸로 가득한 시어들이 종일 가슴으로 흐르는 그 압박을 벗어나기 위해 푸가의 기법을 쓰기도 했다. 어쩌면 소멸로부터 자유스러워지려는 변신의 욕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대책 없는 상실감으로 아팠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옴으로써 아름다운 소멸을 시 속으로 끌어들였다. 불안은 내면의 세계요. 선험적인 감정이다. 거대하고 낭만적인 시인의 모습과는 달리 항상 작고 초라한 쇄락해가는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현실과 초월의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가끔, 부재에서 존재를 발견하곤 했다.

 

, 무언지도 모르면서 를 썼고, 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 죽음과 소멸, 사라지는 것들, 어둠으로 가득한 시어를 남발했다. 시는 읽을 때도 어렵고 쓸 때도 어렵다. 이별도, 불안도 그 존재를 가볍게 겉만 핥으며 지나간다. 부족함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시를 썼고, 심한 갈증을 참으면서도 시를 썼다. , 심오하고 아름다운 시적창조는 언어의 위반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 무어냐고 물으면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림자의 말, 언어의 꽃, 생생하게 감지되는 물결이다. 들리지 않는 돌의 말, 자꾸 말을 걸어보고 싶은 동료,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는 고백 같은 거, 알 수 없는 칼바람의 끝 같은 거, 잿빛 구름 같은 거, 혼자 끓어 넘치는 커피 물 같은 거,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중간인지 모호하지만, 이 순간 나는 <시인>이란 언어에 매력을 느낀다. 이제야, 시의 세계에 첫발을 디뎌보는 느낌이다. 지금도 홀로 시를 쓰고 있는 시를 사랑하는 문우들과 고독을 함께하고 싶다. 앞으로 더 넓어진 시각으로 볼 수 없었던 세계를 깊숙이 바라보는 초월적인 시공을 통하여 언어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시인이 되려고 한다.

 

끝으로 늦은 나이에 시를 향한 열정으로 헤매는 나를 이해하고 용기를 갖도록 도와준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 동행하고 있는 문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시 속에서 흐느끼고 있는 가냘픈 나에게 끊임없이 시인의 길로 인도해주신 스승님들, 그 깊은 가르침을 평생 양식으로 간직할 것이며, 이번에 수고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와세계작품상>을 제정해주신 <시와세계> 발행인 겸 주간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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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대화 / 김미정

 

 

어항의 입구가 벌어진다

그 넓이만큼 퍼진 귀의 식욕이 수면을 바라본다

물고기가 투명한 소리를 뱉는다 ; 삼킨다

언젠가 말하지 못한 고백처럼

우린 어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항이 꿈틀거린다

투명한 울림, 소리의 본적이다

입술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힘껏 던져도 깨지지 않는 혀를

너는 내민다 ; 넣는다

입 모양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당신의 말들이

쌓이고 쌓여 어항을 채운다

사다리가 늘어나고 큰 자루가 필요하다

소리가 움직인다 아래 ;

잎사귀들이 함께 넘친다

이제 귀는 떠난 소리를 그물로 떠올리고 있다

물고기들이 강을 따라 흘러간다

어항의 침묵이 시끄럽게 들리는 오후

누군가 유리컵을 두드리고

헐거워진 귀가 바닥에 떨어진다

 

 

 

 

물고기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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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별맛도 나지 않는 시간 속으로

 

입 안 가득 고여 오는 오늘의 맛, 또 어제의 맛, 하늘 속에 박혀있는 구름의 맛이 숙성되어가는 시간들이다. 착각과 오해로 뒤엉킨 이름다운 혼동이 사랑이라면 내 시는 사랑의 오독이다. 구름의 낱말들이 얼굴로 쏟아진다. 몸에서 둥글고 단단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실루엣 가득한 창들이 우리를 마주하는 밤, 별맛도 나지 않는 시간이 별처럼 걸려있다. 입 안 가득 고여 오는 그 시간들이 가 되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깃발을 보여준다. 나의 손과 발과 혀가 닿고 싶은 곳이며 일상의 표면을 뚫고 불현듯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언어로 꽃피워낸 시편들이 일상 속에서 경계의 능선을 그린다. 세상의 껍질이 조금 열린 듯 빛이 새어 들어온다.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아니 웅크리고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뭔가를 찾고 있다. 그것이 발밑에 가라앉은 먼지인지, 보도 블록사이 고개 내민 잡풀인지 모른다. 하지만 난 웅크린 자세다. 태초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웅크린 자세로 연약함을 무기로 하여 지금껏 버티어 왔다. 나 자신이 어떤 대상과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내 안에 숨어 있던 내가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가까스로 알아차린다. 그 순간, 시가 태어난다. 점점 녹아 사라져가는 풍경이 내 시의 배경이다. 나를 키운 것은 사라져가는 밤바다의 불빛이고, 결핍이며, 고독과의 연대였다. 이제 그 무엇을 위해 미끄러지며 변화할 것이다. ‘그 무엇이 곧 소멸해 버리고 말지라도 존재의 순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별맛도 나지 않는 시간 속으로 치열하게 달려가 조금 더 깊이 손과 발을 넣어 만질 것이다.

 

끝으로 나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주는 가족들과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항상 뜨거운 손길로 격려와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는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영원한 의 원천이 되어주신 이승훈 교수님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린다.

 

 

 

 

[심사평] 본질과 현상의 해동점

 

예심은 전년도와 같이 시와세계편집부에서 하였으며 2012426일 목요일 오후 6, 시와세계사무실에서 본심이 이뤄졌다. 본심은 발행인 겸 주간인 송준영 시인과, 김영남 시인, 이재훈 시인이 심사했다. 3<시와세계작품상> 본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강윤순 발라드3

2. 김미정 투명한 대화3

3. 박장호 허공의 개미집3

4. 서승현 편백나무 숲의 연리지처럼3

5. 심언주 소통의 안과 밖3

6. 유금옥 나무와 나의 공통점3

7. 유현숙 불의 원죄3

8. 최금진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3

9. 한미숙 너의 담배는 어디 갔니?1

10. 홍재운 연금술사의 환상여행3

 

본심은 미리 배부한 작품을 검토하고 추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송준영 주간은 강윤순, 김미정, 유금옥, 최금진 시인을 김영남 시인은 김미정, 유금옥, 홍재운 시인을 이재훈 시인은 박장호, 김미정, 유금옥, 최금진 시인을 추천하여 결국 수상 후보는 김미정, 유금옥, 최금진 시인으로 좁혀졌다.

 

가장 먼저 논의된 최금진 시인의 경우, 작품이 다소 장황하고 변신에 대한 노력이 아쉬울 뿐 아니라 시와세계가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와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간 최금진 시인이 보여준 문명에 대한 자의식, 도시인의 고투 등 본인만의 차별화된 서정을 보여준 점, 지속적으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점 등은 높이 평가되었다.

 

두 번째로 유금옥 시인의 경우, 밝고 경쾌한 표현과 발상 리듬 등이 장점이나 작품이 다소 평면적이며 깊이가 약하여 당선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 없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마지막으로 김미정 시인의 경우, 본질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며 경제적인 언어,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는 태도 및 현대시가 나아갈 방향과 관련지어 볼 때도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김미정 시인의 하드와 아이스크림을 제3<시와세계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송준영(시와세계 발행인) 김영남,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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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이외의 것 / 이근화

 

 

삼십 미터 위의 나뭇잎

나뭇잎

기린의 입속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도 미치고 말거야

십오 분 동안 나뭇잎

삼일 동안 나뭇잎

그러나 나뭇잎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많다

나는 빵 이외의 것은 믿지 않아

빵이 찢어지면서 거짓말이 툭 튀어나올 때

나의 입술은 왜 부풀어 오르는가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하고 백색이어도 좋은가

네 입속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

커다란 손에 입 맞추고

나는 바깥이 된다

안녕

안녕

안녕

그 다음은 무엇이 될까

너의 손바닥에 들러붙어도 좋을까

 

네 손바닥으로부터

비 오는 골목길처럼 부드럽게 풀려나온다면

빵 이외의 것에 대한 믿음도 솟아오르겠지만

나는 너무 남아돌아서 문제다

굶주린 사자처럼 나뭇잎을 센다

하나

그 다음은 너무 쉬운 것 같다

 

너는 지켜지지 않는 약속

믿음은 자라고

믿음은 부풀고

믿음은 터진다

동네 빵집을 탐구하듯

오래된 슈크림과 소보로를 무너뜨리듯

너를 무너뜨리고

 

빠른 속도로 나뭇잎 나뭇잎 나뭇잎

서서 자는 기린의 옆에 눕는다

허공이라는 달콤한 이불을 덮는다

영원토록 떨어지는 나뭇잎이 있다면

나뭇잎의 생도 그럴 듯해지겠지

반듯하고 차가운 병원 건물이 식빵 같았고

군침이 돌고 말았다

 

저 많은 병의 이름을 입속에 넣고 굴린다면

나의 얼굴과 너의 표정이 하나가 되는 마술이 펼쳐지겠지

대신에 나는 너를 주머니에 넣고 꾹꾹 눌렀다

꺼내서 조금씩 씹었다

목구멍으로 거짓말이 어렵게 넘어갔다

이제 나뭇잎을 주울 차례

네가 검은 새가 될 때까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끝까지 거울을 본다

긴 손가락으로 빵을 찢는다

 

 

 

 

칸트의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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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딱딱하고 가지런한 이름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면 좋겠다. 날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계절마다 이름을 바꾼다면 이 어수선한 봄날, 내게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이름이 두 글자가 아니라면 또 어떨까. 오늘 나는 고양이 목걸이를 하고 걸어가는 목 쉰 사람’ . 내일은 꿈속의 물컹한 손가락’ . 이름이 없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냥 나를 이라 불러 줬으면 좋을 것 같은 날도 있다. 내가 쓴 작품들을 나의 긴 이름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내가 길어지거나 뚱뚱해지거나 재밌거나 지루하거나. 그런데 오늘도 내 이름은 가지런하고 삐딱하다. 내 앞으로 우편물이 세 개 도착했다. 우리집 꼬마는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다 까까 꼬꼬라 부른다. 밥도 과일도 책도 텔레비전도 까까 꼬꼬가 있으면 좋겠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아무나에게 손을 흔들고 무엇에게도 다 인사를 한다. 다 사랑할 수 없어서 나는날마다 다른 이름을 꿈꾸고 헤매고 멈추고 넘어지는 것 같다. 나의 긴 이름을 불러주신 송준영, 이만식, 이수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좀 더 창조적으로 살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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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2004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2006),우리들의 진화(2009) 윤동주상 젊은 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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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치고 훔치고 / 김이듬

 

 

번개처럼 떨어지는 접시를 받았다

바나나가 있는 접시였다

바나나가 좋아

난 바나나가 좋아

다 주세요

위에 대고 소리 질렀다

 

내일부터 접시 닦기를 할 거예요

내 꿈은 작고 웃기는 거

 

껍질을 벗기면 하얀 과육이 나오고 빨면 즙이 나오는

바나나는 신기해

나는 아껴서 핥아먹었다

눈을 감고

달빛이 펼쳐진 장원에 누워

조금만 부드럽게

 

어서 자둬

내일은 바쁠 거야

 

내 신발에 축축한 발을 담고 있는 너

만나기 전인지 후인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이 마지막으로 널 본 날이었어

우리가 큰돈을 벌 생각은 아니었잖니

 

오늘은 푹 자자 내일부터 바쁠 거야

 

눈을 떠보니 학교였고

새벽 두 시에

난 물을 마시려고 수도 아래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명랑하라 팜 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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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1포에지로 등단하여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와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 산문집 모든 국적의 친구』 『디어 슬로베니아를 발간했다.

 

1회 시와세계작품상(2010)과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을 수상했다. 경상대, 경남과학기술대 등에 출강하며 진주KBS라디오 김이듬의 월요시선(月曜詩選)’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작가로 선정되어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간 생활했고, 2013년 여름부터 석 달간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한국작가로 참가하였다.

 

2020히스테리아(Hysteria)시집으로 미국에서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 수상했다.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1인 독립 책방 책방이듬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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