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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축사 수첩 / 박형권

 

 

트럭에 실릴 때 한 번 우시고

도축장에 도착했을 때 한 번 우시고

보정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우셨다

그는 모든 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가 보정틀 안에서 모로 누웠을 때

나는 안면의 중앙을 전용 총으로 타격했다

나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뻗어버린 그가 예기치 못한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 때

나는 그가 그분인 걸 칼에 베인 듯 알았다

무논의 써레질이 있게 하시고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게 하시고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의 일을 있게 하신

그분인 걸 알았다

그분이 쏟아놓으신 눈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지 망연하였다

아주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셨다

저 먼 곳 더 크신 우주의 누군가가 대신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 전생을 반추할 줄 모르는

나의 식욕을 위해

우주 밖의 더 크신 공백이 안타깝게 부어주는 숭늉 한 그릇이었다

애초에 소처럼 반추위를 가지지 못한 나는

위장을 더부룩하게 채우면 그만이고

이웃과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계획을 위해

한 번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은

흘려도 흘려도 담을 줄 모르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그분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내 우편함에 이미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 행성의 이름으로 뜨겁게 견뎌낸 그분의 여름을

나는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고기덩이셨지만

우물우물 여물 씹는 소리로 온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셨다

 

 

 

 

도축사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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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소에 관한 시에 당선소감을 적자니 한 슬픈 소에 관한 생각만 나고 좀 멋진 소재를 찾으려는 머리를 가슴이 와서 턱턱 막는다. 결국 가슴을 따르기로 한다.

 

반드시 필必 자와 사랑 애愛 자를 쓴 둘째누나의 이름에는 다음번엔 반드시 아들을 낳자는 백부님과 백모님의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분은 둘째누나 아래로 딸 둘을 더 낳으셨다. 도시로 일 나간 부모님 덕에 어릴 때 큰댁에 간 나는 누나들의 경쟁적인 사랑에 싸여서 자랐다. 특히 둘째누나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나와 비록 사촌이지만 머루 다래 으름을 따면 자기 입에 넣지 않고 꼭 내 입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방앗간 집 개가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다 나대신 물리기도 했다.

 

둘째누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백부님과 백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했다. 누나에게 공부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고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심성 때문이었다. 다른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공부하러 나가고 둘째누나는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 미련스러울 정도로 논밭 일을 했다, 저녁에는 풀어놓은 소를 몰고 내려왔다. 소를 몰고 오는 시간은 누나에게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끔 누나와 함께 소를 몰고 올 때도 있었다. 해가 뉘엿할 때 소를 몰고 오는 누나는 천생 하루 일을 마친 소였다. 자기 기분은 말하지 않는 누나가 무슨 마음인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공부하고 싶다. 머리가 아파서 공부가 될지 모르겠지만.’ 천하장사 같은 누나가 아프다고 말하다니.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둘째누나는 이웃마을로 시집가고 딸 하나를 낳고 삼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뇌수막염이라고 했다. 백부님이 혼자 한탄하시는 걸 나는 들었다.

 

“소 같은 것... 부모형제에게 희생만 하고 갔어.”

 

자기를 내주고 가는 사람들, 석가와 예수와 간디... 모두 소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소는 자기를 내줌으로써 한 우주를 탄생시킨다. 슬픈 소들이여, 아름답다.

 

이 상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전당포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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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가 예술가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인의 창작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극단의 현실에서 비현실적 비의을 읽어내고 그 누구도 발견한 적 없는 눈물을 추려내어 함부로 흩뿌려대고 있는 멋진 시 두 편을 만났던 탓이다. 그 한 편이 박형권의 ‘도축사 수첩’이다. 나는 저 시편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의식을 잃어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읊조리며 눈물을 흘렸을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의 모습은 언제나 거대하고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저렇게 나약하고 처연한 형상으로 인간들에게 수시로 다가왔다 돌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짜 신의 모습일 런지도 모르며 신의 모습이 꼭 그랬으면 좋겠다.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신은 인간적이며 사랑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형권의 시편에서는 소의 목숨을 주재하는 도축사가 실은 신의 지위에 있으나 시인은 소에게 그 지위를 넘기고 있다. 신이며 곧 각이 떠져 부위별로 다른 생물들에게 분배될 육신을 조용히 내놓는(약자의 어쩔 수 없는 처지라고는 말하지 말자) 모습은 예수의 그것과 차마 닮아있다. ‘보정 틀’에 섰거나 누웠을 때의 모습은 인간의 교화를 위해 시정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연설을 해왔을 ‘그’의 형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박형권의 신이나 신철규의 신이나, 그들의 슬픔이나 눈물은 환생이나 윤회의 오리엔탈적 정서를 함의하고 있다. 눈물은 고통과 슬픔, 환희의 부산물이고, 엎디어 우는 자의 등어리 위로 드러나는 애처러움과 눈물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어떤 저울로도 달 수 없을 것이다. 박형권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애지문학회 일동(글 민경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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