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 이돈형
한 이불 덮고 한솥밥 먹고 같은 치약을 써도 한사람이 될 순 없지만 속을 비친 당신의 눈 속에 기분을 들였다
낡은 피아노를 조율하듯 끊임없이 익숙함을 빼내며 기거하는 동안 생필품은 닮아가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누군가 질러놓은 불이 타인의 기분으로 활활거리듯 지를 때마다 나는 부스럭거리게 되고
이불을 털다 우리가 기분파거나 구원파라는 걸 알았다
들인 기분이 내가 아닌 것처럼 뭔가를 잘못해 벌서는 것처럼 말썽을 일으키고
한 이틀 당신의 귀밑에 있다가 살비듬 같은 막막을 담으려 때로는 얼음주머니를 꺼내왔다
자주 종일이 붓고 애쓰는 일이 감기로 옮아 내가 콱 쏟아지는 일이 생겨도 기분은 여전히 당신의 기분
미래를 말하면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버리는 것처럼
기분은 언제나 온전함이 없는 한 때 같아 무엇을 생각하지 않을 때 올바른 기분이 들었다
[수상소감]
나는 잘 있는지요?
비가 내립니다. 이번 비는 많은 양을 예보하고 있어 좋습니다. 이런 날은 일상을 미뤄두는 것이 비에 대한 예의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는 온전히 비랑 놀아도 되겠습니다. 내게 빗소리는 때가 조금 낀 거울 같습니다. 제 자신을 비춰보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때가 껴있어 그동안 울고 웃었던 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저 슬픔 하나 달랑 뒤에 감추고 있는 한 사내의 덤덤한 표정만 보일 뿐입니다.
비는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비를 바라보다가 비를 맞다가 흘러가기에 바쁜 비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낙하의 가려움에 대해 묻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진 기분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아마도 같이 흘러가고 싶은 까닭입니다. 여전히 흘러가는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제자리일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허공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놓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늘 비에게서 많이 배우지만 배워도 다시 배워야 하는 까닭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잊어버리고 다시 배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이번 생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잊고 배우길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조금 넉넉하게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얼마 전 고무나무를 분갈이하다 가지를 하나 부러뜨려 물병에 꽃아 두었습니다. 버릴 수도 있었는데 왠지 맘이 그랬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물병 안에서 잔뿌리를 내렸습니다. 스스로 고무나무가 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은 화분에 옮겨 심고 밖에 내놨습니다. 가지가 한 나무로 흘러가기 시작한 날입니다. 고무나무는 지금 밖에서 비를 흠뻑 맞고 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시를 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를 쓰면서 시 역시 내게 때가 조금 낀 하나의 거울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먼지가 쌓여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없고 너무 깨끗하게 닦아놓으면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여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이미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었으니. 그러니 써야겠지요. 아마도 애지문학회에서 제게 이 상을 준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의미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까지만 놀겠습니다.
그럼 한번 만납시다.
[심사평]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문학의 시작은 전쟁으로부터 죽음과 공포를 없애고 평화를 지향하여야 하며, 자본주의의 소득과 분배에 대해 불균형과 불평등을 해소시켜주어야 하며, 자연 환경의 훼손과 이상기후 등 자연재해를 방지하여 인류에게 생명인식을 갖게 해주는데 있다고 하였다. 문학의 근본적인 목적을 가라타니 고진이 포괄적으로 잘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평화, 소득과 분배, 생명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기본권이자 문학의 본질적인 주제에 대한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문학에 대한 접근과 해석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시뿐만 아니라 여타의 예술분야도 진화를 거듭하여 체위를 바꾸거나 시각도 달리해왔다. 서정시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들이 새로운 내용과 형태로 대거 시도되거나 자생하기 시작하였다. 자생한 시들은 계파를 형성하며 층위를 두텁게 하였고 남들과 다른, 특히 기존의 방식이나 기존의 것들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과 해석마저 되지 않은 시들이 난무하였다. 시가 산문화되기 시작하였고, 길이가 늘어났다. 오히려 짧은 시가 시 같지 않게 느껴지는 불편한 시대가 되었다. 그저 복잡다단한 현실세태로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다양한 문체의 시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난마의 시대에 시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몇 편의 시와 시인들을 만나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 지난 8월 31일에 출판기념회를 한 태화장에서 애지회원들이 추천한 작품을 가지고 운영진이 모여 애지작품상 후보를 선정하였다. 회원들이 추천한 작품은 모두 19편으로, 복수 추천한 작품과 우수작품을 먼저 후보작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토론과 회의를 통해 세 편으로 압축하였다. 이돈형의 「올바른」, 최백규의 「이상기후」, 유계자의 「바다 회사」 이 세 편이 후보작품에 올랐다. 애지문학회 카페에 후보작품을 공지하고 마감시한인 9월 20일까지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최다표를 얻은 이돈형 시인에게 올해의 작품상이 돌아갔다. 투표에 참여를 해주신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돈형 시인의 「올바른」은 미래를 말하면 미래는 더 미래로 가버리는 올바른 정신세계에만 집착하지 않고 화자가 바라보는 타자에 대한 생필품처럼 닳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낡은 피아노를 조율하듯 끊임없이 시도하여 결국은 불안한 의식을 거부하고 온전한 의식세계를 뚜렷하게 획득해내고 있다. 시가 메시지를 전하는 궁극적인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시를 써가는 진실성에서 감지되는 이돈형 시인의 시세계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인간 이돈형으로 시적 진실에 닿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사람냄새가 많이 나며 따뜻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많은 회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애지작품상을 수상한 이돈형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여 ‘익숙함을 빼내어 불이 타는 타인의 기분’을 더 확장하여 ‘올바른 기분’을 내밀하게 견지하고, 작품창작활동에서도 항상 “올바른”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각인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애지문학회 회원 일동(글,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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