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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얼룩말 나비와 아버지 / 최경심

 

봄볕 환한 길 위에 나비가 엎드려 누워 있다

꽃향기에 취해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잠을 자면서도 날개를 부리지 않았던 나비

곁으로 바짝 다가가도 꼼작하지 않는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긴 더듬이에 실린

가냘픈 숨결에서

힘겹게 건너는 시간의 끝자락이 보인다

 

등 위에 짊어진 인연 파마 버리지 못해

바로 눕지도 못하고 죽어간다

맥 놓은 날개 위에 망연히 앉아 있는

흑백 물결무늬 선명한 얼룩말

내리뜬 순한 눈에 고여있는 석별 적요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저 너머의 시간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자식들 편하라고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무너져 내리던 아버지의 날들은

불효의 긴 그림자로 남겨져

나는 지금도 가슴이 캄캄하다

 

나비 같은 호흡으로 밤을 세우고

동틀 무렵 기척도 없이 야윈 어깨를 내리시던

아버지도

등에 업힌 자식들 내려놓지 못하고 가셨으리라

 

아버지의 운구차가 지나가던 길에

활짝 핀 벚꽃은 세월이 흘러도 이울지 않는데

그 꽃잎 흩어져 밟히는 한길에서

죽어가는 나비가 눈에 밟히지만

그냥 돌아서고 만다

 

 

 

 

 

 

[은상] 젠가 / 김응혜

 

가슴에 품은 별 하나식 꺼내어 집을 지어요

우주에 걸쳐둔 한 가닥 줄이 구심력을 키우면

우린 맴맴 돌며 소실점을 찾아 가죠

 

긴장의 날 세우느라 하루가 무거워지면

눈물 발라가며 삭은 틈새 메우고

약 한 줌 툭, 털어 넣고 기우뚱한 생각을 불러들여요

 

세파의 경계에 가려움증 파고들어 출렁이면

뿍뿍 긁어 초토화된 울 엄니 초라한 집이 보여요

고인 힘 쥐어짜느라 굽은 등 위로

텅 비어가는 늑골 하나 빼서 계단을 만들면

버팀의 내공 한 겹 두터워지고

팽팽한 우주처럼 붉게 번져가는 눈자위 가늘게 떨려요

 

빈 가슴 졸이며 가둔 날숨

우주의 기울기 가늠하며

지나온 세월의 고팽이 풀어 구석구석 살피는데

 

잠시 수평을 놓친 허술함에

우당탕탕 탕탕탕

감마선 폭발같이 요란하게 허공을 찌르는 소리

들려요 짧은 조문과 함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정형화 의식 시작되면

계단은 슬며시 날개를 펴고

 

 

* 짓다라는 의미의 스와힐리어로 같은 크기의 직육면체 조각을 쌓아 만든

탑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한 조각식 빼어 맨 위로 다시 쌓아 올리는 게임

 

 

 

 

 

 

 

 

 

은상 시 조미선 하늘로 빛을 쏘아 올린 연어

동상 시 강지원 두 섬

동상 시 박성숙 걷지 않는 나무들

동상 시 손은주 물의 그림자를 지우며 간다

가작 시 문정은 남반구의 이방인

가작 시 오명옥 아틀란티스표범나비

가작 시 손은정 태광 미용실 30주년 기념 타월

가작 시 홍세영 꽃반지

가작 시 김하윤 사과즙

입선 시 황현숙 냉장고에서 시어 버린 김치를 꺼내면서

입선 시 김소나 수문을 잠그다

입선 시 박천숙 행복한 책의 나라

입선 시 김정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입선 시 김성아 셔틀콕

입선 시 임정수 할미가 살아가는 법

입선 시 손영미 사랑을 위한 비유법

입선 시 이정임 당신의 온도는요?

입선 시 김영숙 터미널 의자

입선 시 정옥자 노래로 지어진 나무

 

맥심상

 

고보경 1호선의 외국인

고은비 벚꽃 비 내린다면

권명희 엄마의 꽃밭

금동현 ?

기예은 나는 밥이 되었다

김명순 ()의 마지막

김문순 모반 母斑

김미선 오베르 쉬르 우아즈

김미순 일상의 베토벤

김미연 짱뚱어 잡이

김미옥 고청개 사월

김미향 부록을 편집하다

김영애 갈아 끼우는 풍경

김영욱 호구거리

김유리 오늘

김은순 죽간竹簡

김은영 갈매나무 헌책방

김지연 나의 활달한 경계

김지혜 아버지 산(())

김향숙 시큰거리는 어머니

김현재 빈집

김효정 정류장의 표정

박갑순 보청기

박미숙 수문장

박선희 바람꽃

박선희

박세혜 무통증

박수영 가을 종착역

박용숙 풍문

박은선 바다바라기

박은순 어머니의 푸성귀

박혜경 네 번째 계단에 앉아

박화선 호박은 처음부터 갑각류가 아니었다

배수영 로드 킬

백소영 아네모네 맨션

백소윤 뿔꽃

백승미 띄워쓰기

서미숙 시접

서유경 사과꽃향기

석성득 분재

석수정 찌라시

설은영 아버지, 어디쯤이세요?

손유빈 빈티지

송영화 풀의 본적

신복순 의류수거함

신지원 포화

신현정 뭇별

신혜숙 마른 꽃

심보람 사막

안명자 종기

안사임 우리는 눈썹으로 얘기했다

안성은 나무와 볕과 소란들

유선자 슬픔은 바이러스가 오는 길

유원희 꽃병의 몰락

윤경예 소똥구리 재발견

윤빛나 감자꽃 어머니

윤석열 진리상점

윤주희 균열 이후

이가원 빛나기엔 부족한

이가은 앵무새

이미순 바다 나이테

이보람 오래된 구두

이성숙 그대, 잠자리는 편안하신가

이숙희 깨꽃

이숙희 봄을 수저로 떠먹다

이순영 동물원

이은희 스타킹을 신고

이장산 먼지 찬가(삶의 노래)

이정애 프레임

이혜경 빗방울

이혜정 엑스트라

임명옥 지상에서 가장 작고 가장 쓸쓸한

임소형 도시의 나무

임진순 국시

장미자 봄날의 鄕愁

장서영 어제는 문밖에서 잎맥의 숨을 읽었다

장예은 동백

전영란 냄새의 무게

전진순 화살나무

정경숙 조각난 지붕

정수빈 골목길

정유리 , 어떤,

정유하 오늘 바다는 마름모꼴로 접을 수 있다

정은진 , 초식동물

정혜숙 엄마의 서랍

조은숙 꽃길

조재일 하늘에서 지상으로

조진희 추억의 맛

지주현 뿌리에서 꽃까지

차희영 방향

천현주 오늘도 몇 벌의 옷이 사람들의 머리를 싣고 걸어간다

최영희 돌아온 숟가락

최정란 소나기

한명희 기억의 반경

한혜원 카운트다운

허순옥 5의 계절

홍숙영 새참

홍은아 동해(東海)

홍효숙 잣나무 평상

황예솔 무동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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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점자익히기 /  원기자

누가 어둠의 꽃씨를 뿌렸는지

선이 고운 슈트를 박음질 하던 아버지가

황반변성을 앓기 시작했다

한 쪽 구석에 놓여있는 재봉틀

호기심에 돌려보다 마음을 찔렸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핏방울을 타고

아버지가 피우지 못한 꽃말이 들린다

작은 텃밭에 모종을 심듯

노루발을 따라 돌던 꽃무늬 원단

시신경이 죽어 가는 어두운 꽃밭에

은빛 더듬이 팔랑이는 나비가 날아왔다

햇살 넘어가는 창가에 구부정하게 앉아

손으로 세상 보는 법을 익히며

올 풀린 눈동자에 한 자 한 자 새로운 씨앗을 심는다

지문의 결을 따라

천천히 조절 다이얼을 돌려보지만

황반에 박힌 어둠은 수선이 어려워

아버지는 작은 텃밭의 풍경을 다시 재단한다

오톨도톨 점자를 따라 꿈을 박는

아버지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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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달을 건너는 성전 / 추영희

 

으슬으슬 한기로 이끄는 몸속의 길을 따라 마법에 걸린다고 한다.

말똥구리, 새의 깃털, 원숭이오줌 따위를 섞어 연기를 피우는 고대의 동굴

붉은 피로 주문을 걸어 달의 절기를 짚는다.

순결과 젊음이 수난인 고대의 나이, 사육제의 적기다.

 

처녀의 피가 차지 않으면 달이 차지 않을 거라 믿었다.

달이 해를 보내지 않을 거란 두려움에 싸늘한 달의 기운으로 떨었다.

늑대의 울음이 가까운 밤의 제단

달의 기운으로 해를 부르던 종족들

처녀의 긴 머리카락, 장수의 머리통을 바치며 샤먼의 달을 지난다.

다시 해가 떠오르지 않을까 두려운 왕들의 달력은

붉은 기운을 중심으로 날을 짚는다.

 

두려운 눈으로 꿇어앉은 어린 딸들아 어미의 아픈 피들아

처녀성을 빨리 잃고 싶은 초경을 알현한다.

이단의 희생을 제단에 올리던 때마다 순결한 달이 흘러내렸다.

사각의 우주가 모서리를 지우고 둥글게 돌고 돌아

숭배하지 않은 태양이 제 발로 고대를 빠져나오기까지

매의 발톱과 몰약과 코뿔소의 뿔 같은 것들 어렵게 구해지고

마법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주술을 견뎠다지.

 

저주를 풀듯 무사히 달 하나를 건너고 보름달이 차기 전

가장 신성한 첨탑에 깃발처럼 달이 걸릴 것이다.

개기일식을 두려워하던 달의 달력을 덮으며

밝은 해의 달력이 천기를 다 누설해버렸으니 태양력의 날을 세며

성역처럼 달을 지나는 몸

두터워진 자궁벽을 찢으며

고대의 달 아래 흘렀을 무고한 초경을 조문하듯 으슬으슬

한기로 하혈하는 달이 바야흐로

스스로의 성전이 되어 떠있다.

곧 달이요 궁전인 딸들아 어미의 아픈 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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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매조도梅鳥圖*를 두근거리다 / 최분임

 

  치맛자락에 달라붙는 연둣빛을 털어내고 들어왔습니다.

 

  세월의 말간 걸음걸이 당신의 기별인 듯 이곳은 염두에 두지 말라고 한바탕 퍼붓고 돌아섰습니다. 녹슨 쟁기, 가슴에 고랑을 만드는 기척을 다 북돋워 주지 못했습니다. 땅이 속눈썹을 떨며 일어서는 악착, 봄이라 불러주지 못했습니다.

 

  봄빛 우북한 매조도가 우물물 한 바가지에 꽃잎 몇 띄워 건네는 그 품을 헤아립니다. 한기 끝에 매달린 꽃을 고쳐 눈물 내려놓으라는 당부로 읽습니다. 뒤돌아보는 새 한 마리, 꽃 대신 당신에게 낯선 얼굴이었을 때 분홍에 가까웠던 시간을 묻습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매화나무, 여백의 방향을 결정짓지 않고 가장 먼저 도착합니다.

 

  처마 밑 둥지를 튼 슬픔이 툭 하면 날개를 펴는 통에 매조도 속 나뭇가지, 비어있기 일쑵니다. 털썩 주저앉은 툇마루를 물고 날아가는 새 두 마리, 먼 강진이 깃털처럼 흩날려도 다홍치마 화폭 당신은 끄떡도 않습니다.

 

  뒤돌아보면, 그리움은 그림자조차 거느리지 않고 피는 꽃 아니던가요. 뿌리도 모르고 향기도 없이 왈칵, 쏟아지는 허방 아니던가요.

 

 

*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이 시집간 딸을 위해 부인의 치마폭에 그림과 시를 그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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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 김명선


분질러 줘야 해 이 꽃은
호박꽃보다 못한
피자마자 분질러지는
대관령 고산지 조용한 흰 꽃울음 현장
햇빛의 손에서 분질러지는 싹둑 싹둑 소리
봄은 소쩍새 울 듯 그렇게 메아리 치고
꽃 대궁 검은 혈류 거꾸로 흘러
땅속 줄기 덩이 덩이 암처럼 자라나더라
팔 다리 후줄근해져 누런 병색이 돌면
사람도 그렇듯 생을 마칠 준비가 됐음을 알지
하지(夏至)엔 내다 팔아야지
매일 땅속의 황금알을 떠올리며 내 뱉은 한마디에
생의 마지막 유언 X코드
DNA에 새겨질 영 일의 숫자들이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합을 맞춰나가고 있지
우린 새겨진 비밀에 그처럼
독한 진실이 있다는 걸 모른채 살고 있잖아
감긴 눈에서 푸른 눈물이 싹처럼 나오기 전까지

 

 

 

찔레가 다녀가다 / 고순자


아버지를 산에 묻고 내려오던 날
길 숲 가장자리를 하얗게 펄럭이던 찔레가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와
울타리 위에 펼쳐놓은 광목처럼 바래가고 있었다
입안에 돋은 가시가 서로의 상처를 건들까
말문을 닫은 가족들
울타리 사이로 계절이 예닐곱 번 오고 가는 동안
말없이 피었다 지곤 했다
서리 묻은 바람 때문에
찔레가 피지 못한 이른 봄, 할머니는
풀 먹인 광목옷 한 벌씩 건네고는
희디흰 걸음으로 마당을 빠져나가고
또 한 번
처마가 출렁거리고
찔레인지 안개인지
자꾸 눈이 흐려지는 엄마는
어린 것들 눈망울로 길을 밝혔다
찔레가 다녀갈 때마다
엄마의 울음이 울타리 옆에 지천이었다

 

 

 

바다 도서관 / 윤옥란

 

새들의 전설과
물밑 발자국과 소리까지도
빠짐없이 기록되었을 변산반도 채석강
수억 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녀간
물의 흔적과 지층이 만들어 낸 바다의 서고,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자라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빗방울에 젖은 바다의 지문을 만져 본다
천둥번개와 바람의 뼈들이 설립한
최초의 해양도서관,
그들은 이미 죽었지만
죽어서도 바다의 하루를 산란하고 있다
멀리서 날아온 큰 부리가
시린 발끝을 세우고 바다의 규칙을 읽는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저 바위책
단 한 권 뺄 수 없고 대여 해 갈 수 없는
적송 한 그루도 뒤쪽에서서 가슴속으로 읽는다
수많은 눈길에 겉표지가 닳았다
갈피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여전히 저자는 말이 없다

 

 

 

감나무 아래서 / 최덕순


십오촉 등이 아른거려요
할머니는 부엌에서 미역국 끓이고
아버지는 담 너머 하늘만 바라보고 계셔요
아이가 울지 않아요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새끼줄이
마루에 길게 누워 눈만 꿈뻑거려요
닭들도 시간을 깨우지 못하고
아직 자리 떠나지 못한 달만 바라보아요
붉은 십오촉 등을 끄고 싶어요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감잎처럼
뒤척이다 말아야 하는 걸까요
바람의 무늬로 새겨진 제 몸 동여매고서
감잎들은 어디 바라보는 걸까요
십오촉 등이 깜빡거려요
아직 덜 익은 감이 나를 바라보아요
할머니는 아직도 미역국 끓이고
아버지는 새끼줄을 대문에 걸고 계셔요
고추가 사라진 새끼줄이 걸렸어요
땡감 하나가 놀라 떨어지네요
감잎들이 다시 뒤척이네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십오촉 등이 꺼지네요

 

 

 

조팝꽃 속의 엄니 / 신상숙


상고대처럼 피어난
조팝꽃이 쌀밥으로 보여서
더 배고팠다지
흰 밥 알갱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조팝나무가 제 새끼에게
밥 알갱이 뜯어 먹이는 것 보고
엄니는
흰쌀밥 고봉으로 퍼 담아
올망졸망 새끼들
한 끼라도 배부르게 먹이려고
그을린 부지깽이로
애꿎은 솥뚜껑만 두드렸다지
우수수 쏟아지는 꽃가루가
떡가루로 보여서 두 손 크게 벌렸다지
외할머니 생각 날 때
질 시루 보듬고서
옷소매로 뜨거운 눈물 훔쳤다지
엄니는
쑥버무리 한 시루 쪄서
친정나들이 가실 때
거적때기 가난 부엌바닥에 팽개치며
혼자 펑펑 울었다지
엄니 냄새 고봉밥으로 퍼 담는
보리 고갯길 옆 조팝꽃이
지금도 하얗게 꽃눈 내리고
엄니는 배고픈 눈 맞고도 웃고 계시네

 

 

 

용유도에서 쓰는 편지 / 권오성


용유도 선녀바위에서 보았네
태초의 바다, 검푸른 바다
갈매기 나직이 해변을 돌아
짧은 목을 세우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곳은
아린 계절과 함께 어린왕자의 작은 별이
넓게 몸을 불려가던 나의 서쪽이었네
새벽을 떠나온 원시의 번지가
검은 물거품을 물고 적도로 옮겨갔어도
총총한 별들을 묻고 사라진 이야기들이
붕 붕 뱃고동을 울리며 돌아오고 있었네
이제야 고백하네, 고도를 기다리며*
골리앗의 붉은 천을 몸에 걸치고
멀리 멀리 창을 던져야 하는,
에덴의 동쪽은 꼭 그와 같아서
수시로 태풍에 바다의 안부를 묻곤 했었지
용유도 바닷가에서 편지를 쓰네
오래도록 내게 붙잡힌 어린왕자에게
별에게
아직은 안녕이라고 쓸 수 없음을,
쓰고 있네

 

*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게트 희곡

 

 

 

역 / 주은화


스스럼없이 강둑에 앉아
저물어 오는 들녘
종착역을 바라봅니다
해마다 가난으로 울던
아버지
휘어진 등허리에 업은 화물차는
고달프면 쉬란 듯 황망한
기적을 뿌립니다
아버지의 큉한 눈 가상으로
장대 같은 구름이 패이고
일년삼백육십오일 무거운 화물에
살갗은 마른 장작개비처럼 굳어
혈액은 내 살 속으로 파고들고
오늘은 강둑에 풀벌레가 울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니
종착역 마지막 화물은

보리밭 푸른 물결일듯 꽤나 많나 봅니다

 

 

 

헐렁한 사람 / 허연숙


오토바이가 속력을 내자 사내의 몸이 커진다.
사내는 잠바 속 불룩한 바람의 힘으로 달리고 있다
주문받은 따끈한 시간이 식기 전에 사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지나고 잠
시 신호에 서있는 남자
가속의 속도로 사는 사람
속력을 올리면 몸은 다시 부풀어 오른다
신호에 걸려 배달지를 확인할 때마다
사내의 몸은 다시 홀쭉해진다
바람으로 사는 사람
그러나 그 흔한 봄바람 한 번 잡은 적 없고
신호가 바뀌는 짧은 시간을 반복하며
가늘고 짧은 굉음처럼 요란하게 살아온 사람
주머니를 몽땅 뒤져도 바람하나 잡히지 않는다.
저장되지 않는 바람
바람 품팔이, 하루 일당으로 받은 바람은 모이지도 쌓이지도 않는다
푸른 신호가 들어오고 저만치 앞서가는 사내
사거리를 휘며 방향을 틀고
길의 좁은 틈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바람이 가득 든 따끈따끈한 사내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그는 헐렁한 사람이었다.

 

 

 

방앗간, 돼지머리 웃다 / 고은별

 

방앗간에는 쌀보다 웃음이 많았다
달빛을 받은 간판이 개업일처럼 빛나는 밤
구석 먼지 틈에 숨어 있던 쌀 한 톨까지
모두 쓸려나간 가게에
다시 웃음이 차오르고 있다
눈 감은 채 웃고 있는 돼지 머리 앞에서
얼마 전 이사 온 부부는 무릎을 꿇는다
간절한 중얼거림이 도정된 쌀처럼
정성스레 쏟아지고
내일이면 밤의 이마에서 떨어져 나갈 간판
가운데 ‘쌀’ 글자가 유독 희다
옥상 너머 선 창백한 병원에서
방앗간 할머니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새벽, 다 큰 아들을 먼저 보낸 노모가
종일 덮고 있던 웃음을 벗겨내고
눈물로 퉁퉁 부는 일 이제는 없을 것이다
기름칠 새로 한 출입문도 더 이상 삐걱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사십 년 전 고기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할아버지는 이제 누가 기다려 줄까
웃지 않고도 웃고 있는 돼지의 콧구멍에
돌돌 말린 지폐가 꽂힌다
목숨을 잃고 얻은 웃음 위로
겹쳐지는 할머니 얼굴
잃을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어 미음처럼 웃기만 하던
할머니의 하얀 얼굴 한 되가 달빛으로 쏟아진다
쌀알을 걷어내고 터를 차린 젊은 부부에게도
할머니는 웃어줄 것이다
목을 따이고 눈을 끄집히고 콧구멍 귓구멍이 찔려도
마냥 웃는 저 돼지,
그 불굴의 미소보다 더한 불굴로 할머니는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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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의 우화 / 오유경


침대 위 누에 한 마리 미라처럼 누워 있다
고치 속에서 끊이지 않는 실패를 감으며
질긴 침묵을 수혈 받는 재단실의 풍경
성충을 꿈꾸며 바느질을 한 지 오래
점점 더 두터워지는 번데기 속에 혼자 남아
다 자란 몸을 구기며 제 속을 갉아먹고 있다
오래도록 펼치지 못한 날개의 매듭이 끊어지고
매트리스 위 더듬이처럼 돋아난 긴 울음은
움푹 파인 어둠을 향해 촉수 한 쌍을 뻗는다
번데기 여기저기 멍울처럼 맺혀 짓무른 흔적들
아직 아득한 절벽 속을 헤엄치고 있는지
덜 여문 고치를 뚫고 달빛의 시취가 돋아난다
오늘 밤 꿈의 유충이 난각을 깨고 변태할 때까지
실타래는 탈피되지 않은 허공 위로 풍구질을 하겠지
메마른 등뼈는 사라진 날개를 갈구해 굽어지고
켜켜이 슬어 있던 알들이 난생을 꿈꾸는 동안
아직 과업을 찢어낼 발톱을 기르지 못해
온몸을 뒤덮은 심지는 굳어진 채 타들어간다
주름진 표피를 뒤덮고 꿈을 꾸던 나날들이 굳어지고
움푹 파인 침대 위에 지친 몸을 모로 뉘인 채
한 땀 한 땀 헐거워진 막잠을 기워내고 있다
궁핍한 끈을 붙들고 바늘이 한 촉 빛나는 재단실
생의 마지막 매듭 위로 호흡이 박음질되고 있다

 

 

 

옥상에 펼쳐진 낡은 풍경 / 손호경


그의 집은 허공에 있다
대대로 줄을 타는 광대였고 떠도는 구름의 사촌이었다
가끔, 노숙에 길들여진 뼈들이 부러져서 바람을 놓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반경은 옥상 너머 펼쳐진 낡은 풍경
고만고만한 지붕과 낡은 창문을 바라보다가 헐거워진 잇몸으로 바람을 놓친 적도 있다
여전히 궁금한 것은 바람의 행로, 구름의 냄새를 맡으며 하늘의 높이를 잰다
날씨의 각도에 따라
사다리를 오르는 빨래바구니의 감정이 달라지고 하루의 방향이 결정된다
바람을 읽고 기록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 줄 하나를 물고 버티는 그들은 외골수
젖은 양말을 받아들 때마다
온종일 도시를 건너온 길을 읽어내고 와이셔츠 속에 든 바람까지도 찾아낸다
밖에서 속을 다 빼주고 온
사내의 행적을 잴 때마다 바지랑대가 흔들렸다
구겨진 셔츠 속에는 알 수 없는 바람도 가득했었다
언젠가 그를 놓친 적이 있었는데 바람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소문이 왁자했고
며칠이 지나서야 풀 죽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런 날은 몇 개의 다리가 부러지고 그의 목덜미에 이빨자국이 남았다
멀리서 수상한 바람이 다가온다
출렁출렁 서둘러 바람의 크기를 재는 플라스틱집게들
계단을 올라온 늙은 여자가 옥상 항아리 뚜껑을 덮는다
하루의 각도가 반쯤 기울었다

 

 

 

빨래 / 이숙희


낡은 건조대에 빨래를 너는데
덥썩 어머니의 마른 뼈가 잡힌다
만질 때 마다 차갑고 딱딱한 인공관절에서
그렁그렁 쇳소리가 난다
다리를 곧추세우며 애써 서 있는 건조대에
반 토막으로 접힌 어머니의 생이 걸려있다
거꾸로 매달려 태엽을 풀고 있는 몽땅한 그림자,
허기진 짐승이 마른 등짝을 아귀차게 발라대어
햇살 아래 떨어진 기억의 각질들이 희끗하다
쉽게 바람의 길을 내주지 않았던 꼿꼿한 고집이
변덕스런 날씨에 어깨를 늘어뜨린 기죽은 모습
달려오던 시간의 발걸음은 이곳에서 멈추었다
소멸될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기억의 그림자들
길게 목을 늘여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헐거워진 갈비뼈에 손을 넣어 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바람만 사는 어머니의 집

 

 

 

시골 간이역 / 조미선


잠시 쉬었다 가십시오
힘차게 레일을 달려온 기차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하차해
바쁘게 떠나는 사람들과
레일위에 몸을 싣는 사람들
기차는 또 다시 목을 길게 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처럼
휑하니 떠나가고
소란스럽던 역사는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갑자기 누군가 그리워져
눈물이 나오려는데
앞서가는 어느 촌로의
굽은 등이 안쓰럽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시선이 멈춘 곳
돌틈사이 노오란 민들레가
헤죽이 웃으며
봄햇살을 움켜쥐고 있다

 

 

 

봉제공장 쑥부쟁이 / 신영순


재봉틀소리 바쁘게 돌아가는 형광등 아래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여자가 사랑했던 비극은
호랑이에게 쫒기는 토끼처럼 언제나 눈이 벌건
가슴에 바람 든 여자들이 모여 일을 한다.
바늘이 햇살에 대일까 봐 이마에 커튼을 달고
재봉틀 앞에서 하 많은 사연을 뜯어 놓고 있지만
바늘귀는 들은 체 만 체 생의 구멍을 깁는다.
바람막이도 그늘도 없이 살아가는 봉제공장 여자들
단물 빠진 뽕짝 가사에 시름을 달래보지만
살아도 살아봐도 팍팍한 세상
깁고 또 기워도 늘 따라 다니는 한기
언제 한번 단내를 풍기며 살아 볼까
여자들의 하소연은 바늘이 지나간 땀수 같다.
형광등아래 뒹구는 원단들이 꿈꾸는 내일인 양
두 발로 하루를 뜨겁게 밟아도
귀가 하나 뿐인 바늘 앞에서 항상 고개를 숙여야 하는
봉제공장 여자들
이미 구멍 나 버린 사랑에 후회를 하며
애꿎은 발판만 와꾸와꾸 밟아 본다.

 

 

 

고향집 / 이 복 순


고향집을 찾으니
사립문 옆에 대추나무만 남겨둔 채
집은 텅 비어있었다.
한쪽으로 기운 기둥이
간신히 지붕을 이고
흙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속살을 내보인 채
문턱을 넘나들 때
버팀목이 되어주던 문설주만이
손때에 반들반들 닳은 채 버티고 서있다.
저 손때 속에
나의 손자욱도
하나 남았을까
봉당으로 들어서니
사십년 전에 떠났던
식구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꼴짐을 지고 사립을 들어서고
어머니는 부뚜막 한쪽이 허물어진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논둑에 엎디어
뱀딸기를 따는 나의 등 너머로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지나간다.
“얘야 저녁 먹어라.”
목소리만 들리는 어머니를 기다려
어둠이 내리는 고향집 뜰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청 계 사 / 김란희


산새 소리에
하늘에 걸린 연등이
흔들리는 청계사
오방색 화려한 단청의
팔작지붕 위에
고요한 어두움이 내리는
절 마당
요사 채 댓돌 위
하얀 고무신
빛바랜 대나무 문발 속에서
속세를 잊고자
인연을 밀어내며
무릎 구부려
두 손 모아
머리 조아리는 그 사연을
풍경 소리는 아는지
스치는 바람 소리도
흔들리는 나뭇가지에도
외로움에 우는 별빛도
법문인 것을

 

 

 

너무 긴 봄날 / 임순분


댓돌위 고무신 한 켤레 해거름을 넘기고 있다 먼지를 옴팡 뒤집어쓴 채 지친
기색마저 역력하다 한 달 전까지 만석지기 종가 맏며느리를 지켰던 우산댁 신이

초록 이끼가 버짐처럼 신발을 점령하고 있다 먼 논에서 낟가리라도 태우는지
코끝이 알싸해졌다
고무 탄내가 나도록 우물가에서 씻어대던 고무신, 어쩌면 올케는 가물거리는
신랑의 얼굴을 초례 날 신었던 고무신에 새기고 싶었는지 몰라
열아홉 신부가 목단꽃 이불에 품은 사랑을 전쟁이 앗아갔다
한 해가 지나 신랑 없는 신행길은 가시 속에 향기를 품은 흰 찔레꽃이 되어 북
상을 지나 강정모리를 휘감았다
육사1기생이던 종손 오빠는 은진 임씨 가문의 대들보였다 솟을대문 문턱을 오
르내릴 때마다 어린 내 숨통을 조여 오던 오빠의 이름은 이제 국군묘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칡덩굴보다 질긴 하루가 봄마다 뒷산에다 밤꽃을 흐드러지게 피웠고 붉은 철쭉
이 물고 온 접동새 울음에 창호지 문짝이 피리를 불었다
우신댁 언니는 묘비뿐인 집에서 하룻밤 인연인 남편과 영원한 합방에 들었을까
주인 없는 마당을 나직한 걸음으로 혼자 걷는다 어느새 고무신이 달빛을 머금
고 있었다

 

 

 

오래 된 골목 / 박경옥


푸성귀 같은 아이들 웃음소리
앞집 마루까지 들리던 낡은 골목길
어스름 날 저물도록
자치기 깡통 차기 흙냄새 펄럭이다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에
아이들 하나씩 달려가 버리고 나면
골목길도 꾸벅꾸벅 졸음에 겨워
어느새 하늘엔 별 총총히 피어났다
팥 칼국수 만들어 이집 저집 돌리고
골목 한 쪽 평상을 펴고 지나가던 사람들 불러
푸짐하게 한 사발씩 퍼주던 손때 묻은 인정이
담벼락 밑 채송화처럼 피어나던 길
오래전 버리고 떠난 허름한 그곳에
잉크 냄새 물씬 나는 편지와
구부러진 길 끝 만화방에서 들리는
아라비안나이트가 초저녁달을 밝히고
시계처럼 정확히 퇴근하시는 아버지 자전거소리
나비의 더듬이 같은 시간에 걸려 숨 쉬고 있다
낡은 골목 한 귀퉁이에 서서
내 이름 다시 불러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날
오늘

 

 

 

꽃이 고와도 숭이여 / 신정순


한해에 아들 둘을 잃어부렀어 봄에 하나, 가을에 하나
영감은 진즉에 오남매 냉겨두고 바람나서 나가부렀제
앞마당이 허전해서 꽃을 심었어
내 팔자가 드세니 꽃이 고운것도 숭이여
꽃을 저리 좋아하니 팔자가 쎈거라구 동네 여편네들
눈 흘기며 지나가대
어쩔거여 서방 나가고 새끼 둘 앞세운 내가 죄인이제
그래도 꽃이 좋아 명자를 심었어
고것이 숨어 피잖여, 곱기는 오죽 고와야제
새끼낳고 옆 동네서 잘 사는 서방인지 남방인지
미울때마다 내 가심팍 안짝에도 생채기가 나서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도 같고
이파리 뒤에 숨어 햇빛도 못 받을 것 같은디
빨갛게 잘도 피드라, 나도 그렇게 살았지 뭐
명자꽃이 참 좋다우, 그늘 속에 숨어 있어 더 고와보이고
어쩐지 수심도 깊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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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 / 박경자


높은 수직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남진아해 추자도를 거쳐 해풍 속에 자란 몸
17층 계단을 올라도 괜찮을 향기 품으며
지구처럼 둥근 화분 위를 걸어가고 있다
걷는 길에 각도를 만나면 발바닥은
재빠르게 휘어지며 속도를 감지했지만
늘 불 켜진 허공이 낯설어 어지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절벽은 없다
잠들지 못한 날은 때맞춰
유리창을 사이로 두고 이쪽과 저쪽을 오르내렸고
어느 지중해의 푸른 별이 겨드랑이 받혀주고 있었기에
공포는 잠시 바들거리다 떨어졌다
순환 기후에 촉수를 세우는 일도 이젠 통과다
어디든 바람타고 날아 보던 기억 안고
별을 물고 잠시 흔들리던 슬픈 입술은
갈라진 숯덩이 사이에서 천천히 말을 꺼낸다
한 때 어느 밀림에서 피웠을 사랑
꽃으로 피운다고
그 이마에 햇살 노랗게 드리우고
깔깔대며 물방울 공중으로 튕겨본다

 

 

 

입덧 / 이혜순


달이 다녀간 뒤 내 몸에서는 달앓이가 시작되었다
입안 이곳저곳 자라나는 너의 손가락
나는 빈 들판처럼 아름다운 달빛을 내밀고 싶다
나의 꽃은 가장 작고 신비한 방, 꿈에 꽃술을 섞어 놓아 누군가 걸어 다니는 방, 오직
너만이 나의 배 위에 머리를 묻고 내 꿈을 엿듣는다 나는 손톱을 다듬고 너의 머리를
쓰다듬다 한 움큼 달빛을 꺼낸다
달빛 속에는 너의 어린 소년이 걸어 다닌다 소년의 다리 아래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고 그 숲속에서 달빛이 점점 짙어져 우리의 몸을 지운다
이 잠은 너무 달콤해 너에게 배달할 수가 없다 너는 쌔근쌔근 내 눈 안에 손을 넣고
숨을 뱉는다 이 우물은 너무 깊어서 별을 가둘 수가 없다
달이 우물에 빠지던 날 달개비 꽃이 우물가 숲 속에 피어 있었지
내가 생각나 얼마큼 생각나 그늘진 길에 쌓인 비가 너무 따뜻해 길 위에 앉아 있을 수
가 없다 너는 내 눈 속에 파란 잎의 꿈을 심는다
나의 몸이 파랗게 발효된다 나의 잠을 엿듣는 누군가의 눈빛에 파르스름한 달빛이 고
인다

 

 

 

뻘배 / 고영희


물때 맞춰 뻘배 들고 바다로 나가는 어머니
노가 되어버린 오른발, 뻘 깊숙이 배를 밀고 나간다

숨구멍만 보아도 누구 집인지 알아
수많은 내력을 한 장 한 장 들출 때마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감촉
뻘이 물컹 팔목을 휘감는다

무릎을 꿇어야만 제 몸을 열어주는 차진 뻘밭
빈 곳에 뿌려놓은 씨는 달이 품어
개흙의 심장소리로 키워낸 꼬막의 부챗살 무늬
어머니 눈가의 주름살과 닮았다

밀물 시간, 미처 챙기지 못해 떠내려가는 배 한 척
둥실둥실 멀어져 갔던 그날
아버지를 한 점으로 멀리 보내고
그만 가자하던 간기 빠진 목소리
갯골에 고인 갈매기의 울음, 하늘의 눈자위도 붉어진다

뱃고동소리 길게 눕는 어스름
만선의 배가 가라앉기 전 서둘러야 한다고
널에서 내려 긴 목을 뽑고 있는 어머니
뻘 묻은 생의 등 뒤로 파도가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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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시를 쓰는 아기 / 조여랑


아기를 보면 시를 따로 쓰지 못한다
몸이 전부 시어詩語인 아기가 온몸으로
주어는 부드럽고 탄탄하게 문장을 시작한다
동사는 재잘재잘 강보와 베개를 돌아다니고
부사는 날렵하게 몸짓을 가누는데 빈틈없이 거든다
형용사가 꽃으로 피다가 나비 날다가
관형사는 몸짓의 대부분을 통통하게 의미를 살찌운다
목적어를 잊은 적이 없어서 알맞은 전치사가 제자리에 있고
인칭을 붙이지 않아도 분명한 주격
가정법을 쓰지 않아도 바라는 미래가 코앞에 있다
웃음과 울음과 짜증이 접속사로 물결 흐르며
귀여움이 과거분사를 지나 능동태를 붙잡고 언제나 현재진형이다
내 몸 안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을 때부터 양막 첫 장을 깨알 같이
행갈이는 내개 맡길 요량으로 한 번 고치거나 지우지 않고 썼다
아기가 몸으로 쓰는 문장을 읽다 보면
써 본 적이 없는 낱말이 수두룩
알려진 어휘로 받아쓰기에는 불가능한 글자들이 넘쳐난다
해독하느라 늪에 빠져 헤엄치다보면 시간은 의지 강한 미래 완료형
아기는 글귀를 달에서 별까지 옹알옹알 광속으로 쓴다
받아쓰는 것만으로도 공책이 차고 넘친다.

 

 

 

풍경 風磬 / 김수화


내소사 절집 앞에서 풍경 하나를 샀다
갈 곳 없는 그 소리를 둘둘 말아 집으로 가져와
문 밖에 걸어두었다
소리가 처마 밑에서 날았다.
타종의 승객이 타고 있다는 듯 댕댕 가끔 울린다.
아니, 물고기 우는 소리가 타고 있었다.

바람의 창문 같았다.
댕그랑거리며 잠깐 열렸다 닫히는 풍경이었다.
작은 고리도 지나가는 바람도 다 날개다
자주 그 밑을 확인하는 날들
깨진 씨앗 하나 떨어져 있을 것 같은 공중 소리의 발 밑
둥근 물방울 떨어진 흔적만 남아있다.

날아가는 것들은 모두 날개가 있다는데
흔들리는 저 금속성의 소리는 멀리 달아나지도 못한다.
어느 딱딱한 물로 날아오르려
밤낮없이 자신의 깃털을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느러미도 날개도 없는 단단한 주물 하나가
흔들리는 계율을 실천하고 있다.

문 밖의 소리는 문을 버리면 된다지만
문 안의 소리는 문을 열어도 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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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옷 한 벌 / 임미형


부채채 끝에 꽃잎이 펄럭이면
무릎에 비벼 풀실로 짠
모시 베 한 필 바꿔다가 마름질 한다
보일듯한 속내를 올올이 세어
박아서 자르고 또 꺾어 박아
참새 부리 같은 섶에서 매미소리가 나면
살금살금 뒤축을 들고 깃을 세운다
야무진 깨끼옷 곱솔 박음질이
흐트러지지 않는 물길처럼 곱디고울 때
치마 적삼 가지런히
찹쌀 풀 먹인 풀벌레 옷깃
새벽 이슬에 걸어 두었다가
자근자근 밟아 빠슷하게 다린 후
숫눈 같은 동정 달고 나면
한 송이 흰 연꽃이
먼 날의 인연처럼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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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택배를 출항시키다 / 오희옥

 

통영에서 수천 마리의 멸치 떼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종이 박스 모서리를 뚫고 출렁,

마룻바닥으로 쏟아졌다

멀미가 났을 것이다

 

해풍에 이마주름 말리시는 아버지

유자나무 열매에서도 지독한 비린내가 났다

내가 질색하며 뱉어버린 바다

토악질을 해도 늙지 않았다

해초에 몸을 감는 파도 따라

어망을 던지는 아버지

유자처럼 얼굴에 곰보자국이 선명했다

그때, 신음하는 물결

뜨겁게 할퀴어 찢기는 파도에

잘게 부서지는 아버지를 보았다

 

목이 늘어진 아버지의 바다가

택배로 배달되었다

달팽이관 안에서 탁, 탁 그물 터는 소리

거실 바닥으로 좌르르 쏟아졌다

종일, 멀미가 났다

 

 

 

 

 

 

[은상] 노을에 들다 / 조수일

 

대문을 열고 나오려다 멈칫, 숨을 죽인다

주차된 차 후미 귀퉁이를 잡고 바스라질 듯, 서있는 옷깃이 보인다

비둘기색 양복 바짓단 헐렁거림이 보여 온다

비스듬히 차체에 기댄 주렁이 보이고

주렁 끝 손잡이마냥 곡진하게 굽은 등이 보인다

노신사, 볼 일 보는 중이다

 

오줌발, 얼마나 곤궁스레 수척이 말랐는지 소리도 없다

뒷바퀴를 방울방울 새의 눈물, 그것처럼

타고 흘렀을 생의 끝자락이 보인다

비척비척 걸음을 뗀다

애가 타는지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해가 골목을 붉게 물들인다

잦은 잔바람에 이제는 노쇠해져 훌렁훌렁 넘어지는

집집마다 노송 한 그루, 지금 노을 속으로 들고 있다

 

문 틈새 담벼락 타고 막 피어오르던 넝쿨장미의 눈 가,

벌개진다

 

 

 

 

 

 

[은상] 길에서 별을 뽑/ 봉윤숙

 

영안실 담벼락 아래

낡은 숟가락처럼 등이 구부러진

뽑기 아줌마

귀퉁이 헌 보따리에 꽁꽁 묶인

과거를 푼다

가스버너 구멍마다

서걱이는 눈물바람 일어

눈을 뜰 수 없을 때마다

그녀 하늘을 본다

일순간에 솟아오르는 불꽃 파다닥

쭈그러진 생을 불에 올려놓고

부풀어 오르지 않는 생활에 소다를 넣고

가슴 밑바닥을 휘휘 젓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까맣게 눌어붙는 운명

울컥 뱉어내고 나면

양철판박이에 별 하나 깊숙이 박힌다

그때 길에서 서성이던 비둘기는

별을 훔쳐 달아나고

빼앗긴 별을 찾아

그녀 길을 떠난다

헤매고 다녀도 별을 찾지 못한 그녀

주저앉아 다시 별을 찍는다

팔짱 끼고 지나가던 남녀 한 쌍이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별을 뽑아

재빨리 사라진다

 

 

 

 

 

 

[은상] 노는 힘 / 이종임

 

하늘 말갛고 산수유 노랗게 핀 날

체험학습 나온 날

창경국지나 종묘 답사하고 경복궁 도착했을 때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가이드 선생님 팔에 매달렸다

그럼, 여기만 보고 쉬자는 말씀에

바람처럼 박물관 돌고 나왔다

박물관 앞마당 민속놀이기구들 보자

눈이 번쩍 떠졌다

꿀 찾은 나비 떼처럼

쌩- 날아서

패앵팽팽이 돌리고

굴렁굴렁 굴렁쇠 굴리고

탁탁 제기차고

쉬잉쉬잉 투호 던지고

어기엉차 수차 돌렸다

어른들은 꾀병 부렸다지만

우리 마음 저장고엔 노는 힘이 가득차 있어

건드리면 솟아난다

해지도록 퐁퐁퐁 솟아난다

 

 

 

 

 

[동상] 가을, 번개 맞다/ 김창희

 

번개의 번뇌일까

느닷없는 번개의 외침이 생경스러운 이른 가을

굳이 물어오지 않아도 될 안부

번뇌를 쏟아 부어 온몸으로 건네 온 짜릿함

동맥을 타고 흘러내려 저만치 아랫도리까지 흘러내리는

오줌저린 후의 낯선 느낌의 혼란스러움

 

번개 맞은 가을은 옴짝할 수 없을 만큼의 소용돌이로

기력이 쇠한 채 긴 울렁임만 가득하고

드러누운 싯누런 들판이 을씨년스럽다

 

 

 

 

 

 

[동상] 위령가 / 이애란

 

한산섬 바닷길 고동줄무늬 같은 시간이 내 혈관에 감겨 돈다. 파도의 가슴은 비릿하다.

 

골육의 정은 바다 밑 산소처럼 목울대에 간절하다. 육신은 물위로 떠올랐어도 바닷말에 간간히 맺혀있구나!

 

갈매기 목청을 길잡이로 하여 여수 오동동으로 달려가는 길. 방금 막춤을 끝낸 동백꽃송이 알알이 꿰 니

 

나라의 꽃으로 부활하는 성웅 이순신, 한산도가(閑山島歌) 내 애간장에 불을 놓는다.

 

땅위 붉은 꽃잎은 절정의 끝으로 떨어졌지만 우국충정의 이름 모를 꽃봉오리는 언제쯤으로 피워날까?

 

배 꽁무니로 쏟아내는 눈물, 해안을 지키던 함성, 하늘 까지 치솟던 북소리, 망부석이 부르던 애가.

 

물방울 모시적삼이라도 지어 입히고 싶다 하니 꽃구름의 심장이 햇살로 핀다.

 

제각각 섬들이 나를 붙잡고 제 혈육 보듯 눈들 반짝인다.

 

 

 

 

 

 

[동상] 바람의 관절 / 조미희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다

길고 긴 노동으로 관절이 닳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바람도 그늘로 찾아 든 것이다

일광욕을 즐기는 구름을 밀고

다시 일을 나서려는 바람을

구름이 자꾸 더 쉬라며 유혹하는 한낮

망설이는 바람에 나뭇잎 일렁인다

구름을 밀며 바람은 다시 일을 나선다

조각을 내며 모양을 바꾸는 구름

가끔 메마른 땅에 물을 주기 위해

먹구름도 데려와야 한다

산 위의 너럭바위 젖은 등짝도 시원하게 말려주어야 한다

하루 종일 퍼트려 놓은 햇살을 끌어 당겨 챙겨 놓는 오후

자물쇠로 밤새 별빛 그물을 치고

커다란 조명등 하나 끌어다 놓는다

바람은 다시 넓은 바다로 가 칭얼거리는

바다를 잠재우느라 밤새 뜬 눈이다

새벽에 보면 시퍼렇게 멍든 바람 절뚝거리며 골목을 지난다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 맥심상 수상작

 

 

 

 

오름에 오르다 / 장옥경

 

아픔은 명치끝에서 시작된다

가슴에 오목하게 파인 분화구

푸르슴한 물이 고여 있고

우수수 낙엽 떨어지거나 얼음이 얼기도 한다

항상 열려잇는 그곳은 덮개도 없어

수시로 검은 손들이 들락거리고

기초공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금방이라도

무너질듯 위태위태하다

무자년 4월의 통곡소리

꽃과 나무들이 불타오르던 기억

기울어가는 그믐달아래

명치에 두레박을 내렸던 그녀

시원한 물이 아니라 부들부들 떨고있는

물살의 그림자를 끌어올리고는

더 목이타는 갈증에 시달린다 

산방산 이래

유채꽃이 환하다

 

 

 

 

 

 

애기똥풀꽃 / 이인

소나무 그늘이 깊어진 언덕을 오르면 작은 돌무덤이 있다

 

태어난 지 삼칠일리 되도록 노란 똥물만 지리다가 죽은 아기의 무덤이다

엄마 젖에 볼만 비벼대다 울며 잠들었던 아기는

해 뜨기 전 무명천에 쌓여서야 짧은 숨소리를 내려놓는다

 

젖이 불어 돌고 돌면 푸른 이슬 털며 찾아가는 길에

길 숲 버려진 돌 주워 무덤에 얹어주던 것이 지금의 돌무덤이 되었다

 

꽃줄기 솜털 하얗게 돋아 오른 애기똥풀곷

무리지어 피어있다

 

젖비린내 나는 엄마의 가슴 파고들 듯 모시나비 한 마리

꽃술에 입술을 적시자

까르르 까르르 배냇짓을 하며 웃는 애기똥풀꽃

 

 

 

 

 

 

모래시계 / 강만순

비우고
또 비워낸다
한 묶음의 추억도
한 올의 아픔도

비우고
또 비워낸다

영혼 마디 마디
잔무늬 아림들도

비우고
또 비워낸다

그리움 맞닿은 그곳에서
마냥 그렇게.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 지영자

 

와! 엄마

만리포 해수욕장이네요

수년 전엔 기름띠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잖아요

여기

조개, 새끼 물고기 좀 봐요

하얀 은빛 같은 모래가

매우 아름답네요

 

엄마

나의 발자국이 파도로 지워졌어요

엄마 여기 모래성 쌓고 집도 지어요

내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집

푸른 바다

싱그러운 바람이

나를 행복하게 하네요

엄마 새들도 돌아왔어요

 

우리 가족도

만리포 해수욕장에

몸을 담그고

마음껏 파도를 헤쳐 나가요

따가운 햇살이 나의 등 뒤에서

바다로 밀어 넣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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