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 김명선
분질러 줘야 해 이 꽃은
호박꽃보다 못한
피자마자 분질러지는
대관령 고산지 조용한 흰 꽃울음 현장
햇빛의 손에서 분질러지는 싹둑 싹둑 소리
봄은 소쩍새 울 듯 그렇게 메아리 치고
꽃 대궁 검은 혈류 거꾸로 흘러
땅속 줄기 덩이 덩이 암처럼 자라나더라
팔 다리 후줄근해져 누런 병색이 돌면
사람도 그렇듯 생을 마칠 준비가 됐음을 알지
하지(夏至)엔 내다 팔아야지
매일 땅속의 황금알을 떠올리며 내 뱉은 한마디에
생의 마지막 유언 X코드
DNA에 새겨질 영 일의 숫자들이
땅속에서 비밀스럽게 조합을 맞춰나가고 있지
우린 새겨진 비밀에 그처럼
독한 진실이 있다는 걸 모른채 살고 있잖아
감긴 눈에서 푸른 눈물이 싹처럼 나오기 전까지
찔레가 다녀가다 / 고순자
아버지를 산에 묻고 내려오던 날
길 숲 가장자리를 하얗게 펄럭이던 찔레가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 와
울타리 위에 펼쳐놓은 광목처럼 바래가고 있었다
입안에 돋은 가시가 서로의 상처를 건들까
말문을 닫은 가족들
울타리 사이로 계절이 예닐곱 번 오고 가는 동안
말없이 피었다 지곤 했다
서리 묻은 바람 때문에
찔레가 피지 못한 이른 봄, 할머니는
풀 먹인 광목옷 한 벌씩 건네고는
희디흰 걸음으로 마당을 빠져나가고
또 한 번
처마가 출렁거리고
찔레인지 안개인지
자꾸 눈이 흐려지는 엄마는
어린 것들 눈망울로 길을 밝혔다
찔레가 다녀갈 때마다
엄마의 울음이 울타리 옆에 지천이었다
바다 도서관 / 윤옥란
새들의 전설과
물밑 발자국과 소리까지도
빠짐없이 기록되었을 변산반도 채석강
수억 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녀간
물의 흔적과 지층이 만들어 낸 바다의 서고,
하늘과 바다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자라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빗방울에 젖은 바다의 지문을 만져 본다
천둥번개와 바람의 뼈들이 설립한
최초의 해양도서관,
그들은 이미 죽었지만
죽어서도 바다의 하루를 산란하고 있다
멀리서 날아온 큰 부리가
시린 발끝을 세우고 바다의 규칙을 읽는다
세세토록 변함없는 저 바위책
단 한 권 뺄 수 없고 대여 해 갈 수 없는
적송 한 그루도 뒤쪽에서서 가슴속으로 읽는다
수많은 눈길에 겉표지가 닳았다
갈피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여전히 저자는 말이 없다
감나무 아래서 / 최덕순
십오촉 등이 아른거려요
할머니는 부엌에서 미역국 끓이고
아버지는 담 너머 하늘만 바라보고 계셔요
아이가 울지 않아요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새끼줄이
마루에 길게 누워 눈만 꿈뻑거려요
닭들도 시간을 깨우지 못하고
아직 자리 떠나지 못한 달만 바라보아요
붉은 십오촉 등을 끄고 싶어요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감잎처럼
뒤척이다 말아야 하는 걸까요
바람의 무늬로 새겨진 제 몸 동여매고서
감잎들은 어디 바라보는 걸까요
십오촉 등이 깜빡거려요
아직 덜 익은 감이 나를 바라보아요
할머니는 아직도 미역국 끓이고
아버지는 새끼줄을 대문에 걸고 계셔요
고추가 사라진 새끼줄이 걸렸어요
땡감 하나가 놀라 떨어지네요
감잎들이 다시 뒤척이네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십오촉 등이 꺼지네요
조팝꽃 속의 엄니 / 신상숙
상고대처럼 피어난
조팝꽃이 쌀밥으로 보여서
더 배고팠다지
흰 밥 알갱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조팝나무가 제 새끼에게
밥 알갱이 뜯어 먹이는 것 보고
엄니는
흰쌀밥 고봉으로 퍼 담아
올망졸망 새끼들
한 끼라도 배부르게 먹이려고
그을린 부지깽이로
애꿎은 솥뚜껑만 두드렸다지
우수수 쏟아지는 꽃가루가
떡가루로 보여서 두 손 크게 벌렸다지
외할머니 생각 날 때
질 시루 보듬고서
옷소매로 뜨거운 눈물 훔쳤다지
엄니는
쑥버무리 한 시루 쪄서
친정나들이 가실 때
거적때기 가난 부엌바닥에 팽개치며
혼자 펑펑 울었다지
엄니 냄새 고봉밥으로 퍼 담는
보리 고갯길 옆 조팝꽃이
지금도 하얗게 꽃눈 내리고
엄니는 배고픈 눈 맞고도 웃고 계시네
용유도에서 쓰는 편지 / 권오성
용유도 선녀바위에서 보았네
태초의 바다, 검푸른 바다
갈매기 나직이 해변을 돌아
짧은 목을 세우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던
그곳은
아린 계절과 함께 어린왕자의 작은 별이
넓게 몸을 불려가던 나의 서쪽이었네
새벽을 떠나온 원시의 번지가
검은 물거품을 물고 적도로 옮겨갔어도
총총한 별들을 묻고 사라진 이야기들이
붕 붕 뱃고동을 울리며 돌아오고 있었네
이제야 고백하네, 고도를 기다리며*
골리앗의 붉은 천을 몸에 걸치고
멀리 멀리 창을 던져야 하는,
에덴의 동쪽은 꼭 그와 같아서
수시로 태풍에 바다의 안부를 묻곤 했었지
용유도 바닷가에서 편지를 쓰네
오래도록 내게 붙잡힌 어린왕자에게
별에게
아직은 안녕이라고 쓸 수 없음을,
쓰고 있네
*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게트 희곡
역 / 주은화
스스럼없이 강둑에 앉아
저물어 오는 들녘
종착역을 바라봅니다
해마다 가난으로 울던
아버지
휘어진 등허리에 업은 화물차는
고달프면 쉬란 듯 황망한
기적을 뿌립니다
아버지의 큉한 눈 가상으로
장대 같은 구름이 패이고
일년삼백육십오일 무거운 화물에
살갗은 마른 장작개비처럼 굳어
혈액은 내 살 속으로 파고들고
오늘은 강둑에 풀벌레가 울어도
돌아오시지 않으니
종착역 마지막 화물은
보리밭 푸른 물결일듯 꽤나 많나 봅니다
헐렁한 사람 / 허연숙
오토바이가 속력을 내자 사내의 몸이 커진다.
사내는 잠바 속 불룩한 바람의 힘으로 달리고 있다
주문받은 따끈한 시간이 식기 전에 사거리를 지나고 골목을 지나고 잠
시 신호에 서있는 남자
가속의 속도로 사는 사람
속력을 올리면 몸은 다시 부풀어 오른다
신호에 걸려 배달지를 확인할 때마다
사내의 몸은 다시 홀쭉해진다
바람으로 사는 사람
그러나 그 흔한 봄바람 한 번 잡은 적 없고
신호가 바뀌는 짧은 시간을 반복하며
가늘고 짧은 굉음처럼 요란하게 살아온 사람
주머니를 몽땅 뒤져도 바람하나 잡히지 않는다.
저장되지 않는 바람
바람 품팔이, 하루 일당으로 받은 바람은 모이지도 쌓이지도 않는다
푸른 신호가 들어오고 저만치 앞서가는 사내
사거리를 휘며 방향을 틀고
길의 좁은 틈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바람이 가득 든 따끈따끈한 사내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그는 헐렁한 사람이었다.
방앗간, 돼지머리 웃다 / 고은별
방앗간에는 쌀보다 웃음이 많았다
달빛을 받은 간판이 개업일처럼 빛나는 밤
구석 먼지 틈에 숨어 있던 쌀 한 톨까지
모두 쓸려나간 가게에
다시 웃음이 차오르고 있다
눈 감은 채 웃고 있는 돼지 머리 앞에서
얼마 전 이사 온 부부는 무릎을 꿇는다
간절한 중얼거림이 도정된 쌀처럼
정성스레 쏟아지고
내일이면 밤의 이마에서 떨어져 나갈 간판
가운데 ‘쌀’ 글자가 유독 희다
옥상 너머 선 창백한 병원에서
방앗간 할머니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새벽, 다 큰 아들을 먼저 보낸 노모가
종일 덮고 있던 웃음을 벗겨내고
눈물로 퉁퉁 부는 일 이제는 없을 것이다
기름칠 새로 한 출입문도 더 이상 삐걱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사십 년 전 고기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할아버지는 이제 누가 기다려 줄까
웃지 않고도 웃고 있는 돼지의 콧구멍에
돌돌 말린 지폐가 꽂힌다
목숨을 잃고 얻은 웃음 위로
겹쳐지는 할머니 얼굴
잃을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어 미음처럼 웃기만 하던
할머니의 하얀 얼굴 한 되가 달빛으로 쏟아진다
쌀알을 걷어내고 터를 차린 젊은 부부에게도
할머니는 웃어줄 것이다
목을 따이고 눈을 끄집히고 콧구멍 귓구멍이 찔려도
마냥 웃는 저 돼지,
그 불굴의 미소보다 더한 불굴로 할머니는 웃을 것이다
'국내 문학상 > 동서커피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회 동서문학상 수상작 (0) | 2017.10.11 |
---|---|
제12회 동서커피문학상 (0) | 2014.11.28 |
제11회 동서커피문학상 가작 (0) | 2012.11.09 |
제11회 동서커피문학상 동상 (0) | 2012.11.09 |
제11회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0) | 2012.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