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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 / 박경자


높은 수직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남진아해 추자도를 거쳐 해풍 속에 자란 몸
17층 계단을 올라도 괜찮을 향기 품으며
지구처럼 둥근 화분 위를 걸어가고 있다
걷는 길에 각도를 만나면 발바닥은
재빠르게 휘어지며 속도를 감지했지만
늘 불 켜진 허공이 낯설어 어지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절벽은 없다
잠들지 못한 날은 때맞춰
유리창을 사이로 두고 이쪽과 저쪽을 오르내렸고
어느 지중해의 푸른 별이 겨드랑이 받혀주고 있었기에
공포는 잠시 바들거리다 떨어졌다
순환 기후에 촉수를 세우는 일도 이젠 통과다
어디든 바람타고 날아 보던 기억 안고
별을 물고 잠시 흔들리던 슬픈 입술은
갈라진 숯덩이 사이에서 천천히 말을 꺼낸다
한 때 어느 밀림에서 피웠을 사랑
꽃으로 피운다고
그 이마에 햇살 노랗게 드리우고
깔깔대며 물방울 공중으로 튕겨본다

 

 

 

입덧 / 이혜순


달이 다녀간 뒤 내 몸에서는 달앓이가 시작되었다
입안 이곳저곳 자라나는 너의 손가락
나는 빈 들판처럼 아름다운 달빛을 내밀고 싶다
나의 꽃은 가장 작고 신비한 방, 꿈에 꽃술을 섞어 놓아 누군가 걸어 다니는 방, 오직
너만이 나의 배 위에 머리를 묻고 내 꿈을 엿듣는다 나는 손톱을 다듬고 너의 머리를
쓰다듬다 한 움큼 달빛을 꺼낸다
달빛 속에는 너의 어린 소년이 걸어 다닌다 소년의 다리 아래에는 아름다운 언덕이
있고 그 숲속에서 달빛이 점점 짙어져 우리의 몸을 지운다
이 잠은 너무 달콤해 너에게 배달할 수가 없다 너는 쌔근쌔근 내 눈 안에 손을 넣고
숨을 뱉는다 이 우물은 너무 깊어서 별을 가둘 수가 없다
달이 우물에 빠지던 날 달개비 꽃이 우물가 숲 속에 피어 있었지
내가 생각나 얼마큼 생각나 그늘진 길에 쌓인 비가 너무 따뜻해 길 위에 앉아 있을 수
가 없다 너는 내 눈 속에 파란 잎의 꿈을 심는다
나의 몸이 파랗게 발효된다 나의 잠을 엿듣는 누군가의 눈빛에 파르스름한 달빛이 고
인다

 

 

 

뻘배 / 고영희


물때 맞춰 뻘배 들고 바다로 나가는 어머니
노가 되어버린 오른발, 뻘 깊숙이 배를 밀고 나간다

숨구멍만 보아도 누구 집인지 알아
수많은 내력을 한 장 한 장 들출 때마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감촉
뻘이 물컹 팔목을 휘감는다

무릎을 꿇어야만 제 몸을 열어주는 차진 뻘밭
빈 곳에 뿌려놓은 씨는 달이 품어
개흙의 심장소리로 키워낸 꼬막의 부챗살 무늬
어머니 눈가의 주름살과 닮았다

밀물 시간, 미처 챙기지 못해 떠내려가는 배 한 척
둥실둥실 멀어져 갔던 그날
아버지를 한 점으로 멀리 보내고
그만 가자하던 간기 빠진 목소리
갯골에 고인 갈매기의 울음, 하늘의 눈자위도 붉어진다

뱃고동소리 길게 눕는 어스름
만선의 배가 가라앉기 전 서둘러야 한다고
널에서 내려 긴 목을 뽑고 있는 어머니
뻘 묻은 생의 등 뒤로 파도가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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