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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덕 / 남상진

 

 

너는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는 난생의 몸으로

막막한 물속 세상에서

파도를 견디며 살아내기란

눈물을 제 살 속으로 말아 넣는 일

짜디 짠 바닷물을 들이마시고

삼키지도 뱉어내지도 못하고 연명하던 시절

깊은 수심의 물속을 견디는 일은

스스로 빈틈을 여며 단단해지는 것

 

태풍이 몰려와도

바위의 멱살을 부여잡고 버티던 하루가

물속에서 눈물 한 방울로 맺혔을까?

 

누군들 제안에 눈물 자루 하나 키우며 살지 않을까

 

아름답고 붉은 석양은

수면 위만 비추는 멀고 먼 그림 속 세상

 

밀려오는 세파에 온몸으로맞서고

일렁이는 너울에 흔들리며 키워온

단단하고 둥근 집

 

껍질 한 꺼풀 벗겨

입안에 넣고 깨물면

툭!

숙성된 향기가

온몸으로 번지는 너는

깊이 발효된 맛으로

오래된 봉인을 푼다

 

 

 

 

현관문은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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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ㅡ시에게ㅡ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다고 여겼습니다
아주 굵은 밧줄을 달고 부동의 자세로 정박해 있던 나를 가위에 눌려 깬 골목에서 낯설게 만나곤 할 때마다 그리 멀지 않은 풍경이 내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난감한 일이라 여기기엔 묶여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젠 놓아야지
이젠 벗어나야지
한 꺼풀 벗고 뱀처럼 매끈하게 가야지
당신의 모습이 목젖에서 맴돌다 삼켜지는 하루
어둠에 꼬리 잡힌 짐승처럼 가르릉 거리던 밤에도
세상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쓰고 지우고 쓰고 버렸습니다

서러울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석축을 쌓듯 당신을 내 안에 쌓았습니다
비 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에도 당신은 내 안에 가지런히 쌓였습니다
손금보다 더 깊이 처마 끝 풍경소리보다 더 아름답게 나를 에워싼 당신은
나를 두른 완벽한 성입니다
계절을 건너온 바람과 성벽을 휘감아 도는 안개에도 젖지 못한 나는
당신의 색깔로 채색되고 내 안에 나는 없고 당신으로만 가득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젖은 옷을 염려하기보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시절에도 당신은 거부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이자 심중의 고향이었습니다
고통도 즐거움도 당신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어도 당신은 내 안의 고귀한 신이고 종착역입니다
빗방울이 모인 계곡의 물처럼 청량하게 내 안을 흐르는 당신으로 나는 매일매일 젖고 행복합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벗어날 수도 쏟아 낼 수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계곡에 뿌리내린 자귀나무 꽃술처럼 당신을 가꾸어 가겠습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당신 속으로 더 깊이 나를 밀어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당신을 기도 할 것입니다
나를 어루만져 주는 당신 품 안에서 평화를 이루겠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
당신을 더 섬세하게 섬기며 살겠습니다
손 등에 돋아난 솜털처럼 내 안에 뿌리 박힌 당신을
영원히 가꾸며 살아가겠습니다

일어서야지
떨치고 일어서야지
부질없는 이승의 티끌을 잡고 당기는
아둔한 줄다리기의 시간들
이젠 놓고 바람처럼 매끈하게 가야지
몇 천 겁을 걸어도 닿지 못할 고향이 내 안에 있었구나
한 뼘도 되지 않는 내 안의 우주를
왜 여태 모르고 살았나
잘 살펴라
눈을 크게 떠서
고도 없고 애도 없는 집에서 넌출넌출 살아가기를
이 새벽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부디 바람의 대 자유를 그대 안에 들이소서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당신의 우주에 들 시간입니다
부디,
다시 평화롭기를

코로나 19로 인해 지친 심성으로 모두가 어두운 한낮입니다.
부디 힘내시고
보잘것없는 시를 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의 품에서 더 열심히 놀고 아파하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시 앞에 더 바짝 엎드리겠습니다.

 

 

 

 

철의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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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20년이 참으로 잔인하게 지나가고 있다. 코로나19, 폭우, 태풍 삼중고에 일상이 무너지고 경제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행동이 제약을 받았고, 문화생활의 범위는 더 좁아졌다. 이러한 사실이 내 년, 아니면 내 후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에 앞이 더 아득하기만 하다. 벌써부터 코로나 이후의 경제와 문화를 걱정하는 학자들이 예측을 하거나 대책을 연구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려운 시대나 시기일수록 시는 희망과 극복의 메시지로 역할을 다하여 왔고 또 그렇게 쓰면서 시인들 또한 버텨왔다. 그래서 애지문학회에서도 그간 쓴 좋은 작품을 모아 애지작품상을 심사하여 코로나19에 지친 독자들이나 회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한다. 올해는 코로나19 여건으로 운영위원들이 모임을 갖지 못하고 온라인 상으로 예심에서 올라온 10여 편을 두고 최종 후보작 3편을 선정하였다. 남상진 시인의 「미더덕」과 최혜옥 시인의 「블랙 스완」 그리고 유계자 시인의 「붉은 맨드라미 아래」가 바로 그 해당 작품들이다. 공교롭게도 3편 모두가 올해 발간한 애지사화집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세 작품이 모두 작품성이 뛰어나 투표를 해준 회원들이 조금은 고민했을 법도 하다.

 

이번에 올라온 후보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비유나 이미지를 갖고 시적자아를 확장해나가는 방식이 담대하고 진정성이 뚜렷해서 선자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았으리라고 본다. 9월 7일부터 21일까지 2주간 회원들의 투표를 마친 가운데, 박빙의 차이로 2020년 제7회 애지작품상은 남상진 시인의 「미더덕」에게로 돌아갔다. 남상진 시인은 2014년 애지로 등단하여 첫 시집 『현관문은 블랙홀이다』와 두 번째 시집 『철의 시대 이야기』를 상재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그의 시세계는 어느 한 곳에 편향되어 있지 않고 다양성에 대한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예를 들면 「맹그로브」에서는 요양병원 복도를 걷는 맹그로브 뿌리같이 수척한 아버지를, 「사막의 내력」에서는 사막과 아내라는 교집합에서 서걱거리고 건조한 발자국의 아내를, 그리고 애지작품상에 오른 「미더덕」 또한 “미더덕”을 통해 드러내는 신산한 삶에 대한 껍질을 발효된 맛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사물을 대하는 다양성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첫 행은 이 시의 서론이자 결론이다. 도저하고 강인한 결론을 지어놓고 그 결론을 풀어가는 그만의 시적태도가 사뭇 진지하고 단단해 보인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다양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잃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다양성의 상실 이유는 감각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인들뿐만 아니라 남상진 시인도 마찬가지로 감각이 획일화되는 것을 경계하여 독자들의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왜곡시키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 최종 후보작에 올라 좋은 작품으로 선전을 해주신 최혜옥 시인과 유계자 시인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아울러 지난 4년간 저를 믿고 따라주신 애지문학회 회원 여러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일동(심사평 회장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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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 이돈형

 


한 이불 덮고 한솥밥 먹고 같은 치약을 써도 한사람이 될 순 없지만 속을 비친 당신의 눈 속에 기분을 들였다

낡은 피아노를 조율하듯 끊임없이 익숙함을 빼내며 기거하는 동안 생필품은 닮아가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누군가 질러놓은 불이 타인의 기분으로 활활거리듯 지를 때마다 나는 부스럭거리게 되고

이불을 털다 우리가 기분파거나 구원파라는 걸 알았다

들인 기분이 내가 아닌 것처럼 뭔가를 잘못해 벌서는 것처럼 말썽을 일으키고

한 이틀 당신의 귀밑에 있다가 살비듬 같은 막막을 담으려 때로는 얼음주머니를 꺼내왔다

자주 종일이 붓고 애쓰는 일이 감기로 옮아 내가 콱 쏟아지는 일이 생겨도 기분은 여전히 당신의 기분

미래를 말하면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버리는 것처럼

기분은 언제나 온전함이 없는 한 때 같아 무엇을 생각하지 않을 때 올바른 기분이 들었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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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나는 잘 있는지요?

비가 내립니다. 이번 비는 많은 양을 예보하고 있어 좋습니다. 이런 날은 일상을 미뤄두는 것이 비에 대한 예의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는 온전히 비랑 놀아도 되겠습니다. 내게 빗소리는 때가 조금 낀 거울 같습니다. 제 자신을 비춰보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때가 껴있어 그동안 울고 웃었던 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저 슬픔 하나 달랑 뒤에 감추고 있는 한 사내의 덤덤한 표정만 보일 뿐입니다.


비는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비를 바라보다가 비를 맞다가 흘러가기에 바쁜 비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낙하의 가려움에 대해 묻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진 기분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아마도 같이 흘러가고 싶은 까닭입니다. 여전히 흘러가는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제자리일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허공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놓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늘 비에게서 많이 배우지만 배워도 다시 배워야 하는 까닭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잊어버리고 다시 배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이번 생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잊고 배우길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조금 넉넉하게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얼마 전 고무나무를 분갈이하다 가지를 하나 부러뜨려 물병에 꽃아 두었습니다. 버릴 수도 있었는데 왠지 맘이 그랬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물병 안에서 잔뿌리를 내렸습니다. 스스로 고무나무가 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은 화분에 옮겨 심고 밖에 내놨습니다. 가지가 한 나무로 흘러가기 시작한 날입니다. 고무나무는 지금 밖에서 비를 흠뻑 맞고 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시를 왜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를 쓰면서 시 역시 내게 때가 조금 낀 하나의 거울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냥 놔두면 먼지가 쌓여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없고 너무 깨끗하게 닦아놓으면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여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이미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었으니. 그러니 써야겠지요. 아마도 애지문학회에서 제게 이 상을 준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는 의미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까지만 놀겠습니다.

그럼 한번 만납시다.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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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문학의 시작은 전쟁으로부터 죽음과 공포를 없애고 평화를 지향하여야 하며, 자본주의의 소득과 분배에 대해 불균형과 불평등을 해소시켜주어야 하며, 자연 환경의 훼손과 이상기후 등 자연재해를 방지하여 인류에게 생명인식을 갖게 해주는데 있다고 하였다. 문학의 근본적인 목적을 가라타니 고진이 포괄적으로 잘 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평화, 소득과 분배, 생명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기본권이자 문학의 본질적인 주제에 대한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문학에 대한 접근과 해석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시뿐만 아니라 여타의 예술분야도 진화를 거듭하여 체위를 바꾸거나 시각도 달리해왔다. 서정시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들이 새로운 내용과 형태로 대거 시도되거나 자생하기 시작하였다. 자생한 시들은 계파를 형성하며 층위를 두텁게 하였고 남들과 다른, 특히 기존의 방식이나 기존의 것들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과 해석마저 되지 않은 시들이 난무하였다. 시가 산문화되기 시작하였고, 길이가 늘어났다. 오히려 짧은 시가 시 같지 않게 느껴지는 불편한 시대가 되었다. 그저 복잡다단한 현실세태로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다양한 문체의 시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난마의 시대에 시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몇 편의 시와 시인들을 만나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 지난 8월 31일에 출판기념회를 한 태화장에서 애지회원들이 추천한 작품을 가지고 운영진이 모여 애지작품상 후보를 선정하였다. 회원들이 추천한 작품은 모두 19편으로, 복수 추천한 작품과 우수작품을 먼저 후보작으로 올리고 나머지는 토론과 회의를 통해 세 편으로 압축하였다. 이돈형의 「올바른」, 최백규의 「이상기후」, 유계자의 「바다 회사」 이 세 편이 후보작품에 올랐다. 애지문학회 카페에 후보작품을 공지하고 마감시한인 9월 20일까지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최다표를 얻은 이돈형 시인에게 올해의 작품상이 돌아갔다. 투표에 참여를 해주신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돈형 시인의 「올바른」은 미래를 말하면 미래는 더 미래로 가버리는 올바른 정신세계에만 집착하지 않고 화자가 바라보는 타자에 대한 생필품처럼 닳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낡은 피아노를 조율하듯 끊임없이 시도하여 결국은 불안한 의식을 거부하고 온전한 의식세계를 뚜렷하게 획득해내고 있다. 시가 메시지를 전하는 궁극적인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시를 써가는 진실성에서 감지되는 이돈형 시인의 시세계는 시인으로서보다는 인간 이돈형으로 시적 진실에 닿아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사람냄새가 많이 나며 따뜻하다. 이러한 사실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많은 회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애지작품상을 수상한 이돈형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여 ‘익숙함을 빼내어 불이 타는 타인의 기분’을 더 확장하여 ‘올바른 기분’을 내밀하게 견지하고, 작품창작활동에서도 항상 “올바른”을 조명하는 시인으로 각인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애지문학회 회원 일동(글,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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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박 / 김지요

 

 

돌아 갈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5분 간격으로 오는 전화에 대고

연신 중얼거린다

상대가 없는 혼잣말을 하듯

여긴 터미널이야

터미널이라고 했잖아

 

타야 할 차를 놓치고도

흥건한 취기에 즐거운 그는

아무 걱정이 없다

 

어디든 데려다 주는 터미널이니까

 

걱정 마 터미 늘이야

 아서 간 다고 했자느

막차 끊기믄 태택시 타믄 대지 머

먼지 쌓인 간이 의자에

목적지에 사로잡혀 달려 온

몸을 다 내려놓는 중이다

 

꼬인 혀는 쉽사리 풀리지 않고

사내의 행동에 실실 웃는 사람들과

어차피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같이 웃어도 좋은 사내

 

막차 같은 하루가 저물고

행인 1,2,3이 사라지고

 

애가 타는 신호음이 계속 되어도

괜찮아 터미널이야

 

괜찮아 터미널이야

 

 

 

 

붉은 꽈리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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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8할이 바람이었던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모로 누워 대숲 소리를 듣거나 먼 하늘을 보며 비나 바람이 몰아 올 것을 걱정하곤 했다. 어느 가을 해질 무렵이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마루에 막 닿기 시작했고 할아버지의 시조창이 시작되었다. 고사리손으로 마루를 닦던 나는 자꾸 눈가가 젖어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쓸쓸함이 몰아왔다. 체념과 관조로 얼룩진 노래를, 곡비가 되어 대신 울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내게 그늘이 왔고 시가 내게로 왔다.

 

지난한 시간을 그늘을 세공하는데 허비했다. 수상 소식은 잠깐 나의 그늘을 환하게 했다. 다시 구름이 몰려온다. 상을 탄다는 것이 어깨에 짐을 한껏 지게 된 무게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수상소식을 함께 한 지인이 내게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두렵지 않다. 고 했지만 두렵다.  이 함께 있는 나의 오래 된 연인과 새로이 연애할 일이 두렵기만 하다. 미련스러운 미련이 여기까지 오게 했을 것이다. 아픈 연애를 참고 지내 온 스스로 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주목 받지 못하는 모든 변방의 시인들과 이 상을 함께 하고 싶다. 막차 같은 하루를 보낸 터미널박들과도 함께 하고 싶다. 시는 우리를 어디로 건 데려다 줄 것이니까

 

시의 발원지가 못나고 부족한 것들로 시작 된다는 것은 다행이다. 부족한 작품으로 상을 타는 부끄러움을 조금은 눙칠 수 있게 되었다. 애지의 식구들과 지혜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이론이 유입된 이후 한국현대시는 주지적 경향에 음악성, 회화성, 입체성 등을 가미하여 급진적으로 시의 영역과 토대를 확장하여 왔다. 1935년에 김기림이 역설한 시작에 있어서의 주지적 태도는 시에 기교적인 측만 내세운다하여 프로문학 진영의 임화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기교만 내세우다보니 시에 있어서 본질적인 진정성과 내용이 무시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기림은 결국 시의 내용을 중시한 오든이나 스펜더의 이론을 수용하여 전체시론을 강조하면서 시작에 있어서 주지성뿐만 아니라 핍진성도 고려하자는 대안을 내놓게 되었다. 2000년대 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한층 진화된 시의 경향들은 한국시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정형화되어 있던 시와 시작법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시는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진 않는다. 그렇다고 시라는 개념을 치장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쓰지도 않는다. 시는 그저 시일뿐이다. 그 시를 판단하는 주체는 독자이고 감동에 있다.

 

이번 애지작품상 후보에는 김은상 시인의 첫사랑과 김지요 시인의 터미널박이 올랐다. 이 두 작품은 전형적인 에즈라 파운드 계열과 김기림이 수용한 전체시론을 보는 것 같아 최종심에 올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기쁨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많은 회원들의 선택은 박빙을 이루었으나 근소한 차이로 김지요 시인의 터미널박이 작품상의 영광을 안았다. 김지요 시인은 2008년 애지로 등단하여 첫 시집 붉은 꽈리의 방을 상재하고 돈독한 시심으로 그만의 시세계를 꾸준히 구축하여 왔다. 그의 첫 시집에 수록된 마루를 읽다는 그의 내밀하고 탄탄한 시력을 증명해주고 있다.

 

애지작품상 수상작인 터미널박도 그러한 일련의 연장선에서 보여준 현대인의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고단한 삶을 술에 취한 대화체로 풀어내고 있다. 시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인 핍진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회원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않았나 싶다. “막차 같은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터미널박은 어디든 데려다 주는 터미널이야라고 말하며 스스로 아득한 희망을 확신하고 있다. 그 아슬아슬한 희망을 애가 타는 신호음으로 포착하는 장면은 비단 터미널박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터미널박이라는 익숙한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회원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 터미널박을 쓴 김지요 시인이자, 애지를 빛내는 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애지문학회 회원일동 (글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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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미어캣 / 김지명

 

 

조심은 태초에 파수병이었다 실패한 파수병이었다

 

해바라기로 서서 병정놀이를 한다 멀리서 달려오는 당신 신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침묵의 하얀 천을 깔고 웃음조차 달아난 각이 서는 아침 쪽으로 서서

 

꼭 그래야만 하는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조심은 병정놀이를 한다 폭식의 근성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목구멍을 채우도록 여기 보세요 당신이 낳은 짐승이에요 간절한 눈빛이 살아있는 쪽에서

 

비가 와서 하루쯤 걸러도 되지만 조심은 병정놀이를 한다 작은 조심들이 배가 고플까봐 어제 받지 못한 답을 들을까봐 엄마 마음으로 발을 움켜쥐고 서서 아빠 자세로 꼿꼿이 서서 벽이 없는 사육장 쪽에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병정놀이를 한다 천리 너머 먹구름 위를 걷는 당신의 양말 냄새에 코를 박고 떼를 쓴다 내 고향은 어디냐고 내 집은 왜 땅굴이냐고

 

그럼에도 믿는다고 병정놀이를 한다 믿음이 뿌리내려 모스크 지붕을 올렸다 뿌리가 칭칭 감아올라 지붕은 호흡이 곤란하다 아교질처럼 끈적한 믿음은 얼마나 물성이 깊은가

 

조마조마 병정놀이를 한다 불안이 조심을 공중으로 들어올리고 조심은 불안을 타고 내려와 공기보다 가볍게 다른 공중으로 엉덩이를 이동 한다 노을이 흩어지는 사원 저쪽으로

 

큰 바위가 울어 모래알로 부서져 내릴 동안 천사 소리인지 악마 소리인지 모를 당신 말씀을 내버렸던 쪽으로 서서

 

 

 

 

쇼펜하우어 필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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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처음은 불편해 붉습니다

 

발이 닿지 않아

추위라는 수목한계선을 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

홍가시나무입니다

 

사계절 안부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태생은

뒤가 없고

생각도 없어

몸만 초록초록 빛나는 혼자 가는 숲입니다

 

낯선 땅에 고개 꺾어 그림자놀이에 목을 뺍니다

가위가 보자기를 이기고

보자기가 주먹을 이기고 나면

심장 지근거리에서 불안이 집을 짓습니다

시인이란 이름 겨우 올린 시인처럼

더욱 작아지는 그림자의 진술

 

느릿느릿 걷다가 새 울음소리에 몰두하는 고양이처럼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멀대처럼 공중의 깊이 속으로

그림자만 검게 길어졌습니다

더 이상 위쪽을 몰라 단단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쪽으로만 치우쳐

고양이가 왜 나무 위에 우는 새에 집착하는지

시의 꽃으로

시의 낯꽃으로 피어도 되는 건지

주소지를 제대로 모르는

나는 홍가시나무처럼

사계절을 홀로 기웃거립니다

 

처음은 모자라 부끄러워 붉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데 저를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애지>와 애지문학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배려 잊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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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지난 9 18일 대전시 용문동에 위치한 이돈형 시인의 사무실에서 10 여 명의 시인들이 추천해 준 25명의 시인들 작 32편을 두고 애지문학 작품상 후보 심사회의를 가졌다. 이 중에서 4편을 선정해야 할 심사는 행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였다. 후보에 오른 작품들 모두가 각자 지니고 있는 작품세계가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태윤의 <나는 내 감정들을 나의 노조라고 불렀다>, 이돈형의 <간판>,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 정진혁의 <접속사> 4편으로 압축하여 회원들에게 작품상 선정을 위한 투표를 독려했다. 9 28일 투표 마감 결과, 총 투표인원 수 34명에서 11명의 표를 얻어 2위를 차지한 이태윤의 <나는 내 감정들을 나의 노조라고 불렀다>와 각축을 벌여 15명의 표를 획득한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에게 작품상이 돌아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이 언어에는 말하는 것, 듣는 것, 쓰는 것, 읽는 것 모두가 작용하고 있다. 시에도 말하는 것, 듣는 것, 쓰는 것, 읽는 것의 요소들이 서로 삼투압처럼 작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시는 시인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창조하고, 시를 통해 자기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 가진 언어를 통해 존재의 집을 열기에는 이질적인 것들이 참으로 많다. 시인이 의도한대로 작품세계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와 존재의 집을 일치시키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대상접근의 방법에 대한 원근법, 사물과 사유에 대한 분리와 결합,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응축과 확장 등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인들을 퍼즐처럼 잘 맞추어야 하는 견고한 내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는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동질적인 것을 회복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번 작품상에 선정된 김지명의 <어쩌다 미어캣>이 이러한 본보기를 잘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어쩌다 미어캣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병정놀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여러 가지 이질적인 이미지를 지적해냄으로써 조심 불안 사이에 내재하는 당신 말씀으로 동질성을 회복하고 있다. ‘당신 신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간절한 눈빛으로 벽이 없는 사육장에서 아빠 자세로 꼿꼿이’ ‘먹구름 위를 걸으며 아교칠처럼 끈적한 믿음과 물성을 직접적으로 연상시켜 주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은 조심 불안한 날의 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미어캣이라는 동질성으로 결합하여 잘 드러냈다. 이러한 점에서 다수의 회원들 표를 얻지 않았나 싶다.

 

김지명 시인에게 애지문학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더 나아가 애지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학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주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일동(애지문학회 회장 권혁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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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사 / 황봉학

 

 

태초에 땅에는 검은 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돌로 점을 치는 주술사가 있었다

그는 돌에서 화살촉을 꺼내 이리떼를 죽이고 곰을 죽였다

이리와 곰을 먹고 자란 그는

주술의 힘을 빌려 다른 종족의 머리에 화살을 박았다

화살촉이 두려운 종족은 그의 종이 되고

그는 돌에서 황금을 꺼내 왕관을 만들고

자궁을 향락이라는 이름으로 병들게 했다

그는 돌에서 탑을 꺼내 신전을 세우고 신을 만들었다

주술의 힘은 악어의 자궁보다도 강하다

그는 마침내 돌에서 우라늄을 꺼내 스스로 신이 되었다

주술 한 마디로 이 땅을 또 다른 돌로 만들 수 있다는 그는

또 다른 주술사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주술 읊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주술사는 태초에 어둠에서 태어난 것임을 그는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땅 곳곳에서 새로운 주술사가 태어나고

주술의 힘을 믿는 그들은 또 다른 종족의 머리에

잘 다듬어진 돌을 겨눌 것이다

 

 

 

 

주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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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릴 적 내가 고뿔을 앓으면 어머니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곤 했습니다.

무당이 부르는 신들, 주문들, 무구巫具들이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열이 오르는 아픔 속에서도 나는 딴 세상을 경험하고는 했습니다. 특히 무당의 시퍼런 칼날이 내 입을 벌리고 차가운 물을 흘러내리면 나는 꾀병처럼 고뿔이 낫고는 하였습니다.

그때 본 무당을 나는 내가 갈 수 없는 먼 세상의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무당이 굿을 하며 읊어대던 주술,

그 주술을 나도 읊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나 가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도 가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도 주술을 읊으려고 산마루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주술은 도중에 끊어지고 주술 읊기는 중단되기 일쑤입니다.

어른이 되어 첫 여행지인 타이완박물관에서 나는 또 주술사의 흔적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만난 무구인, 거북이 등껍질을 보고 상형문자처럼 생긴 문형이 아득한 옛 인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뜨지 못했던 기억이, 그 후 내가 다시 거북이 등껍질을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향일암이었습니다.

돌에 촘촘히 새겨진 거북이 문형, 나는 주술을 외우면 저 태고의 조상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를 읽어 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 후로 나는 돌을 들여다보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돌만 보면 아득한 지구의 탄생을 알 것만 같고 돌이 인류의 삶을 결정지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술이 새겨진 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돌을 찾아 산과 강을 헤맸습니다.

이 혼돈의 세계를, 모순의 세계를 풀어줄 주술이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주술의 첫 마디를 풀게 해준 <애지>와 애지 회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또 다음 마디를 풀어줄 주술을 찾아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심사평]

 

시의 묘미는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차이성 속에서 유사성을 필요충분조건으로 비유를 사용하는 데 있다. 황봉학 시인의 주술사는 주술사가 주술을 통하여 보이지 않게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비책묘계를 다 짜낸다는 스토리텔링 구조로 희화화시킨 수작秀作이라고 할 수가 있다. 주술 한 마디, ,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군주 국가를 몰락시키거나 대대손손 왕권을 잡는 일을 금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워 여기저기 주술사 (통치자)를 속출시키지만, 결코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 최고 권력자들의 권력 남용과 전쟁으로 다른 종족의 머리에 위협을 가하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2016년도 애지문학회 작품상에는 42명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강서완의 단축적 이미지들로 속도감 있게 엮은 고전적 불볕과 황봉학의 스토리텔링이라는 이야기 구조 주술사가 경합을 벌였다. 2위와 3표의 차이로 12표를 얻어 황봉학 시인의 주술사 1위의 영광을 차지하게 됐다. 황봉학 시인께 축하 인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 애지문학회 회원 일동(,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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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축사 수첩 / 박형권

 

 

트럭에 실릴 때 한 번 우시고

도축장에 도착했을 때 한 번 우시고

보정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우셨다

그는 모든 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가 보정틀 안에서 모로 누웠을 때

나는 안면의 중앙을 전용 총으로 타격했다

나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뻗어버린 그가 예기치 못한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 때

나는 그가 그분인 걸 칼에 베인 듯 알았다

무논의 써레질이 있게 하시고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게 하시고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의 일을 있게 하신

그분인 걸 알았다

그분이 쏟아놓으신 눈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지 망연하였다

아주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셨다

저 먼 곳 더 크신 우주의 누군가가 대신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 전생을 반추할 줄 모르는

나의 식욕을 위해

우주 밖의 더 크신 공백이 안타깝게 부어주는 숭늉 한 그릇이었다

애초에 소처럼 반추위를 가지지 못한 나는

위장을 더부룩하게 채우면 그만이고

이웃과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계획을 위해

한 번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은

흘려도 흘려도 담을 줄 모르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그분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내 우편함에 이미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 행성의 이름으로 뜨겁게 견뎌낸 그분의 여름을

나는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고기덩이셨지만

우물우물 여물 씹는 소리로 온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셨다

 

 

 

 

도축사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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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소에 관한 시에 당선소감을 적자니 한 슬픈 소에 관한 생각만 나고 좀 멋진 소재를 찾으려는 머리를 가슴이 와서 턱턱 막는다. 결국 가슴을 따르기로 한다.

 

반드시 필必 자와 사랑 애愛 자를 쓴 둘째누나의 이름에는 다음번엔 반드시 아들을 낳자는 백부님과 백모님의 염원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분은 둘째누나 아래로 딸 둘을 더 낳으셨다. 도시로 일 나간 부모님 덕에 어릴 때 큰댁에 간 나는 누나들의 경쟁적인 사랑에 싸여서 자랐다. 특히 둘째누나의 사랑은 지극하였다. 나와 비록 사촌이지만 머루 다래 으름을 따면 자기 입에 넣지 않고 꼭 내 입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방앗간 집 개가 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야말로 혈투를 벌이다 나대신 물리기도 했다.

 

둘째누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백부님과 백모님을 따라 농사일을 했다. 누나에게 공부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고 어른들의 말을 잘 따르는 심성 때문이었다. 다른 누나들은 모두 도시로 공부하러 나가고 둘째누나는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 미련스러울 정도로 논밭 일을 했다, 저녁에는 풀어놓은 소를 몰고 내려왔다. 소를 몰고 오는 시간은 누나에게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끔 누나와 함께 소를 몰고 올 때도 있었다. 해가 뉘엿할 때 소를 몰고 오는 누나는 천생 하루 일을 마친 소였다. 자기 기분은 말하지 않는 누나가 무슨 마음인지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공부하고 싶다. 머리가 아파서 공부가 될지 모르겠지만.’ 천하장사 같은 누나가 아프다고 말하다니.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둘째누나는 이웃마을로 시집가고 딸 하나를 낳고 삼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뇌수막염이라고 했다. 백부님이 혼자 한탄하시는 걸 나는 들었다.

 

“소 같은 것... 부모형제에게 희생만 하고 갔어.”

 

자기를 내주고 가는 사람들, 석가와 예수와 간디... 모두 소 같은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소는 자기를 내줌으로써 한 우주를 탄생시킨다. 슬픈 소들이여, 아름답다.

 

이 상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전당포는 항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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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논리적일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가 예술가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시인의 창작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극단의 현실에서 비현실적 비의을 읽어내고 그 누구도 발견한 적 없는 눈물을 추려내어 함부로 흩뿌려대고 있는 멋진 시 두 편을 만났던 탓이다. 그 한 편이 박형권의 ‘도축사 수첩’이다. 나는 저 시편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의식을 잃어가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읊조리며 눈물을 흘렸을 ‘예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의 모습은 언제나 거대하고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저렇게 나약하고 처연한 형상으로 인간들에게 수시로 다가왔다 돌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어쩌면 진짜 신의 모습일 런지도 모르며 신의 모습이 꼭 그랬으면 좋겠다.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신은 인간적이며 사랑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형권의 시편에서는 소의 목숨을 주재하는 도축사가 실은 신의 지위에 있으나 시인은 소에게 그 지위를 넘기고 있다. 신이며 곧 각이 떠져 부위별로 다른 생물들에게 분배될 육신을 조용히 내놓는(약자의 어쩔 수 없는 처지라고는 말하지 말자) 모습은 예수의 그것과 차마 닮아있다. ‘보정 틀’에 섰거나 누웠을 때의 모습은 인간의 교화를 위해 시정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연설을 해왔을 ‘그’의 형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박형권의 신이나 신철규의 신이나, 그들의 슬픔이나 눈물은 환생이나 윤회의 오리엔탈적 정서를 함의하고 있다. 눈물은 고통과 슬픔, 환희의 부산물이고, 엎디어 우는 자의 등어리 위로 드러나는 애처러움과 눈물의 무게는 너무 무거워 어떤 저울로도 달 수 없을 것이다. 박형권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애지문학회 일동(글 민경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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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의 세계 / 김은주

 

 

숲이라 불리던 나무들은 한동안 자라기를 멈췄다

그림자를 잘게 부수는 데에만 밤과 초록을 쓸 때

먹는 것에 색의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누구지?

나는 밤과 오렌지가 좋은 사람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쓰며 친해질 때

아이들은 자주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나무 밑에 둘러앉은 무리가

그늘이 짜놓은 레이스를 뭉개며 시끄러울 때

공원 벤치는 요의(尿意)를 겨우 참는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든 척 하는 남자와

빈약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엎드린 여자

다른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을 하나의 병에 꽂아두고 같은 냄새를 견디게 하는 일 사이에

투명한 벽을 종교로 삼은 늙은이들이 있다

 

마른 몸에 액체를 바르고

쓴맛과 단맛이 뒤엉켜 둥글어질 때까지

실온을 견디는 열매와

 

다 다른 맛이 날 때까지

손가락을 빠는 내가 있다

 

 

 

 

희치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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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오전에는 운동, 저녁에는 산책이라고 믿으며

매일 근린공원에 갑니다.

 

햇빛을 감시하느라 짙어진 나무들,

웃는 상으로 짖어대는 개들,

무용보를 그리듯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들,

무언가를 애써 이해하려는 듯이 끄덕이다 가는 혼자들.

 

크고 좋은 구름이 따라붙는 사람은 오지 않는

공원의 하루,

하릴없이 어슬렁이는 것만으로 어느새

친해진 돌멩이와 익숙한 그늘이 생겼습니다.

더 튼튼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몇 시의 햇빛이 유익한지

시를 쓸 땐 어떤 근육을 써야하는지

잘 모릅니다.

눈과 귀를 열어두고 그저 기웃댈 뿐입니다.

 

부족함 많은 저를 1회 수상자로 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격려 잊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심사평]

 

작품의 외연적 내포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의 핵심용어가 낯설게 하기이다. 김은주시인의 [이응의 세계]는 제목에서 외연적으로 생소함을 제공하여 낯섦이 느껴진다. 이응 하면 얼른 떠오른 것이 자음의 이고 둥글다는 것과 작은 원이 연상된다. 그런데 좀처럼 어떤 세계의 대입이 어려울 것 같은 그 이응에 둥근 원인 지구를 끌어와 긍정적 시각으로 내연적으로 아주 사유가 깊은 내포적 가치를 지닌 성찰을 이끌어 내었다.

 

작품 [이응의 세계]는 개성, 성격, 취향이 다른 불안전한 사람들의 모가 난 뾰족함을 상황에 맞추는 구사력으로 둥글어 감을 이야기한다. 은근한 시적 논리이다

 

일본의 현역 시인인 이토오 케이이치는 시() 발상(發想) 차원(次元) 8단계 중 가장 높은 8번째가 나무를 매체(媒體)로 하여 나무의 너머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김은주시인의 [이응의 세계]는 사물 그 너머 이면을 감지한 능력이 돋보인다. 특수한 것을 보편적 감각으로 드러내 놓는 필력 역시 대단하다.

 

작품 [이응의 세계]와 가장 유사하게 견주었던 시는 박소란의 [너무 깊은 오해]였다. 애지회원들의 문자메시지의 투표 결과 김은주시인의 시가 더 많은 표를 얻어 작품상으로 선정되었다. 앞으로 계간지애지”“애지문학회카페에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애지문학회 회원 일동(,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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