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침엽의 생존방식 / 박인숙
활엽을 꿈 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 하는 사이
보도 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 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 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 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 따끔 빛난다
[은상] 은행나무의 안부 / 김택희
우편배달부는 내가 사인을 하는 동안에도
흰 봉투에 새겨진 길을 살피느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건네 준
은행잎으로 만들었다는 푸른 알약들
안부를 묻는 지인의 손길처럼 싱싱하다
몸 속 오지의 좁은 길까지
큰 혈관으로 혹은 미세혈관으로
길을 터준다고 했다
요즈음 나는 가끔씩
자주 다니던 길 위에서 헤맬 때가 있었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했다
굽은 길 위에 서 있던 우편배달부도 돌아간 어둑 저녁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푸들푸들 바람 비벼 나누는 인사
잎 잎으로 뻗은 손 흔들고 있다
동서남북 흩어진 지구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져
이 저녁 나는
키 큰 한 그루의 여름 은행나무로 선다
[은상] 바람의 본적 / 류명순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 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 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동상] 봄날, 코스모스를 심다 / 최연숙
텅 빈 봄
안개 넘어 한 줄기
기다림의 빛을 끌어당기며
오늘 코스모스를 심는다
더디게 이파리들 키워
꿈이 되지 못한 커다란 생명들
위로처럼 왔다가고
지글거리는 한낮을 숨죽여
우주의 시계가 세시쯤 되면
가는 목 세워 바라볼 하늘에
둥글고 빛나는 그것과
눈 맞출 수 있어야한다
뚫린 가슴에
바람이 둥지를 틀 무렵이면
작은 저것 어쩌면 제 몸만큼
작은 내일로 피겠지
기다림으로 피겠지
[동상] 붉은 칸나가 필 때쯤 / 최현임
햇빛을 한 잔의 맥주처럼 잔뜩 들이 킨
붉은 칸나가 길섶을 휘휘 저으며 비틀거리고 있다.
누군가 뜯다 내버린 붉은 칸나 꽃잎이
상처에서 흘린 핏빛처럼 처연하다.
그는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빙글빙글 돌아 공중으로 분해 되었다.
자꾸 붉게 올라가는 꽃대만 망연히 바라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꽃의 주름만 만지작거렸다.
소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지상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 생에 단 한번뿐일까? 골똘히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붉은 칸나는 꽃 위에 꽃을 더 자꾸 피워 올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화들짝 감각이 불타올랐다.
잊은 지 오래된 정념의 깃발도 다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불혹의 나이에 난파된 배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려니 수긍하기로 했다.
내가 흔들리다 부서지기 전에 그는 날개를 달고 떠났고
나는 그를 더 이상 흔들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붉은 칸나가 피는 계절이 오면
오래된 이야기 가슴에서 비워내지 못해
한 잔 술에 거나해서 거리를 갈지자로 걷는다.
붉은 칸나를 만나면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
[동상] 커피는 희랍어로 말 걸어온다 / 서희자
몇 주, 가뭄 든 정서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감색 숄 걸친 나무 한 그루의 분위길 깔고 있다
저리 곱게 물들려면 얼마큼 내공을 쌓아야 할까
삶의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가지끝 바람이 차다
마술 주전자가 딸깍 딸깍 연기를 뿜어 올리자
안개 속의 여객선 한 척! 내게로 온다
블랙박스를 구호품인 양 챙기는 사이
맨하탄 시가지가 떠오르면서 티파니의 아침은
몇 모금의 환유처럼 달콤했다 역마살 낀 그 시절도
알고 보면 고뇌를 우려 낸 커피 색이다
어느새, 검게 물들기 시작한 지중해
내 고달픈 여정도 정박을 꿈꾸는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피라밋!
그 슬픈 신화를 넘기는 순간
뜨겁게 달군 일상이 금새 식어버렸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최복임 "물의 책 "
이제 막 깨어난 바람이 기지개를 켰다
공중에 흩어져 있던 어깨를 추스르자
섬 사이로 뻗어있던 다리가 돌돌 감겼다
물떼새가 물고 온 눈망울, 등대위에서
밤새 바다를 밝히느라 핏발이 서 있다
바람은 외눈을 끼워넣으며 음색을 고른다
처어얼썩 쏴아
처어얼썩 쏴아
구름이 잠시 쉬어가려는지 웅크린 짐승으로 변하고
태양도 두꺼운 외투를 벗으며 그를 본다
물의 한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
온통 푸른 여백이었던 그 책의 서문은
햇살로 뒤범벅된 문장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몸을 뒤틀다 공중에서 그네를 탔다
달려 온 포말들의 순서 없는 목차
수면 위 떠있는 동그란 입술들의 군무
보글보글, 작은 거품을 내놓으며
깊은 바다 속에서 떠돌던 이야기들을 적기 시작했다
새들의 날개로 버무린 공기에 취해
폭풍의 밤, 심해의 절벽으로 떨어졌던,
먼 바다로 나가 어부들의 노래가 되고
결국 바람의 한쪽 무늬가 되었다던 이야기.
물 위로 떠오른 해파리떼, 삽화가 되어
모든 귀를 열고 책속으로 파묻힌다
호기로운 바람의 목소리가 먼 해안까지
그 이야기들을 실어 날랐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윤승원 "목련을 도배하다"
갈라진 벽의 틈새
샛바람이 누수처럼 스며드는
셋방에 앉아 도배를 한다
덜컹거리며 창을 넘어오는 4월의 햇살로
초벌을 바르고 그 위에
닥종이 언더웨어를 입히고
더 이상 근심 들지 말라고 목련꽃 피어난 두터운 실크벽질 바른다
그 때마다 종이옷 당겨 슬그머니제 궁핍을 덮는 벽
공중으로 화르르 흰 슬픔들 피어나고
벽 너머로
어깨가 젖은 한 마리 짐승 우는 소리
겹겹의 벽지로 가난을 가려보지만 바르고 또 발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풀 묻은 눈자위 같은 여자가
갓난 것 들쳐 업고 언 골목을 뛰어간다
낡은 천정에서 떨어지던 빗방울 같은 절망과
붉은 딱지 붙은 방에 혼자 앉아 울던 두려움과
조금은 환해진 슬픔으로 덕지덕지
시간의 남루를 도배한다 목련 피는 계절에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장선희 "옥탑방 애벌레"
행거에 걸린 아침 햇살
트럭에 실려온 짐처럼 칭얼댄다
창문 앞에 더께 놓은 헤진 보따리
숨기지 못한 가파른 호흡이 여기저기
소금꽃 피워 물고 있다
벽에 핀 곰팡이가 눅눅해져야
옥탑방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오래 묵은 어둠이 부르튼 손가락처럼
휘휘 라면을 젓는다
창문 흔들며 안부 전하는 겨울바람
아득한 옥탑방 사람에게만 밤은
액정화면 같은 창문에 별문자를 찍어보낸다
칠 벗겨진 뿔테안경 벗으면
듬성듬성 흐릿한 아랫마을 불빛
밤에만 생기는 옥탑방 정원이다
라면 국물로 데워진 온기 속으로 몸 구부리는 사내
사다리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덮은
두 겹 세 겹의 홑이불 속에서
동그르 말리는 그의 몸
멀리 날아갈 날개를 만들었는지
자고 일어난 허공 한 쪽이 둥그스름 부풀어 있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하미숙 "아버지의 내시경"
아버지는 홀로 낙타 한 마리를 키웠다
낙타는 사막을 지날 때
제 스스로 발바닥의 온도를 높인다
내성이 생겼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병은 내성이 원인이었다.
살을 파먹은 균들이 지친 노구를 떠다니는 동안에도
견딤으로써 병들을 키워왔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내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속으로 수없이 많은 상처가 생기고 스스로 딱지가 되었을 것이다
유리 조각 하나가 허파에 걸렸다
큰 기침 한 번 소리 내지 못한 허파는 꽈리 열매처럼 쪼그라들었다
거친 음식으로 평생을 되새김질 했을 위와
아버지가 수없이 넘나들던 망죽골 어스름 저녁길 처럼 구불구불한 속
모두 견딤으로써 이제 건널 수 없는 강으로 아버지를 내몰았다
사막을 다 건넌 낙타는
제 스스로 발바닥의 온도를 낮춘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조정옥 "소나기"
후다닥 햇살이 도망가는 틈
흙냄새가 먼저 왔다
허기진 입은
퍼붓는 비를 담아 국수를 말아 먹는다
골목으로 숨어든 흙냄새를 따라
흑백 사진을 찍는다
국수를 둘둘 말아 먹는 아버지
낡은 평상에 앉아
메마른 심장을 펌프질한다
꾸역꾸역 흙탕물을 뱉어
곪은 상처를 털어낸다
한바탕 비는 하수도를 비우고
말간 물이 평상으로 튀어 올라
웃고 있다
아버지 마른 어깨가 들썩인다
아카시가 폈다
찰칵
무채색이 된 얼굴 하나
사진 속으로 숨는다
후다닥
비가 지나간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이지은 "산딸기"
바람이 지나간 야산자락
영혼을 헛디뎌 누워버린 가지
고난의 발아(發芽)에도 빨간 별들이 다투어 뜬다
하나씩 별을 딸 때 마다 옛일도 지워지고
제 몸을 위장할 줄은 아는지
가시를 세운다는 것은 진한 그리움이라 했든가
그리 시지도 달지도 않은 퇴색된 시간
어렴풋한 옛사랑을 기억해낸다
기억의 뒷맛도 가시 같아서
더러 상심의 끝을 찌르기도 하고 씁쓸하다
무엇인가 되짚어보니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서 방황하던
산 그림자의 냄새가 배어있다
별 나무 가지에
무수히 엉기어 있는 산딸기의 칡넝쿨순은
하늘을 향해 아픔을 토하고
살갗에 기록한 생채기로 더 단단해져
어느 쪽으로 향할지 공중의 길이를 재고 있다
별들의 가지엔 가시가 너무나 많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유경희 "자벌레"
힘 좋게 달라붙는 햇볕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 앉았더니
자벌레 한 마리
내 몸에 내려와 치수를 재고 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정확하게
한 자, 두 자, 석 자
오므렸다 폈다 반복하며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
가늠하던 거리를 잃어버리고
제 몸을 접고 접어 허방을 짚는 자벌레
얼마쯤 더 가야 접을 수 있을까
허방 위의 삶을 더듬는 자벌레
온 몸으로 지나온 길 가늠하며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박선영 "붉은 열매의 남자"
키 작은 남자가 성벽을 쌓고 있다
높은 성벽을 타고 담쟁이 넝쿨이 기어오르자
남자는 더 높이 벽을 쌓아 올렸다
꽃향기가 성벽에 부딪쳐 흩어지자
성벽 안은 남자의 땀 냄새로 가득 찼다
남자는 그 곳에서 습기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붉은 열매들을 찾아냈다
남자는 붉은 열매를 따서 모으기 시작했다
붉은 열매들이 화살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가자
남자는 붉은 화살을 힘껏 날렸다
붉은 열매가 시들자
화살 날리던 남자의 손은 사막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파도 냄새가 역겨운 아침이면 남자는 헛구역질을
뱉어내며 마른 모래에 빨갛게 부푼 혀를 널어 두었다
밤이면 사막의 성을 빠져나와 바닷가 풀숲으로 들어가
애절한 몸짓으로 물새의 울음을 배우기 시작했다
깊은 여름 끝,
남자는 담쟁이 넝쿨보다 길게 성벽을 타고 내려와
날개가 채 돋지 않은 물새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풀숲에 둥지를 틀었다
남자는 숲 안에서 동글동글한 바람 소리로
온 몸을 헹궈내며 크고 반듯한 날개가 돋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조진영 "오월, 새들을 위하여"
한낮의 허리를 올라타고
나, 오월의 산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방인에게 바람은 충고 합니다
산 밖에서 가져 온 금속성의 비늘들은 떨어내라고
커다란 신발은 잠시 벗어 두라고
고요의 시간
붉은 흙덩이들이 푸른 나무의 정액을 들이마시면
아직, 어린 풀들은 파르르 몸을 떨고
하늘은 눈물보다 맑은 비를 내립니다
나,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 주워
해가 보이는 곳에 발바닥만한 구멍을 만듭니다
새들을 위해,
새들의 기억을 위해
여기 작은 무덤 하나 마련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아직, 매달려 있는 금속성이 찡찡 우는소리를 하고
바람은 옷깃을 붙잡고 그것들을 데려가라 합니다
새들의 눈물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가작
김균옥 "이별후"
나비를 본 적이 있나요 사막을 이륙하는 바람이 뚫고 간 날개가 뒤틀려 중심이 흔들리던 만화경 속의 햇살처럼 찬란하던 등뼈를 나비의 얼굴이 창백한 발가락 같아요 눈빛이 사라진 당신 날개를 흔들고 싶지만 찢어진 동맥의 줄기가 뚜뚜 신호음만 보내요 정지선을 밟고선 나는 꿈속을 빠져 나온 강아지처럼 꼬리를 둘둘 말고 어둠과 맞서야 해요 온힘을 다해 떠받치던 팽팽한 현이 뚝 끊어져 지평이 무너지고 아아 울어야 할지 몰라 아틀라스의 어깨에 얹힌 하늘이 가벼워져요 직류처럼 흐르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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