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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정치 / 이영식

 


불, 질러놓고 보는 거야
가지마다 한 소쿠리씩 꽃불 달아주고
벌 나비 반응을 지켜보는 거지
그들의 탄성이 터질 때마다
나무에서 나무로 번지는 지지 세력들
꽃의 정부가 탄생되는 거라

꽃은 다른 수단의 정치*
반목과 대립이 없지
뿌리는 흙속에서 잎은 허공에서
물과 바람
상생의 손 움켜쥐고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네

봄날 내내 범람하는 꽃불을 봐
꿀벌은 꽃이 치는 거지
벌통으로 키우는 게 아니야
코앞에 설탕물을 풀어놓은들
그게 며칠이나 가겠어
검증되지 않은 수입 교배종으로
벌 나비의 복지를 시험하지 마
같은 꽃 같은 향기더라도
오는 봄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행복해 하는 거야

봄날은 간다
꽃의 정부가 다하더라도
후회는 없어
튼실한 열매가 뒤를 받혀 줄 테니까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중 ‘전쟁은 다른 수단의 정치“를 변용함.

 

 

 

꽃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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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올해는 『애지』 창간 20주년을 맞는 해라지요.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만이 당신의 존재증명이라 주창하며 『애지』를 이끌어 오신 주간님과 편집 종사자 모든 분들께 축하인사를 올립니다. 제17회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등단 20년을 코앞에 둔 제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연필을 깎다 보니, 나도 한 자루 연필이 아니었나 싶다. 動亂 통, 탄피처럼 흙바닥에 뚝 떨어진 연필 하나. 시간의 칼날로 매일 나를 깎고 다듬어서 꾹꾹 눌러썼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볼펜과 만년필 틈에서 기를 써 봐도 손톱만 부러진 채 다시 나락으로 굴러 구더기 떼만 들끓던 날들이여. 세상 밑그림만 그리다가 어느새 몽당해지고 너무 작아 쓸모없다 내팽개칠 때쯤 연필심처럼 묵묵한 기다림 속으로 시가 왔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울음이 노래가 되었다. 별도 별사탕도 되지 않는 시를 향한 외눈박이 사랑으로 눈멀어서야 흑심 가득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꽃도 좋고 가시도 좋았다. 기쁨보다는 슬픔을 경작하느라 솔개그늘만한 밭 한 뙈기 품어 본 적 없으니 세상 뜰 때는 몽당연필 같은 시집 몇 권 달랑 메고 참, 가볍게도 가겠다.

저는 불혹도 한참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시인의 마을에 셋방 한 칸 겨우 얻었습니다. 그러니 뭐 내보일 세간살이도 없었지요. 내 머리맡에 놓인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알 두 쪽은 달렸는데 남자가, 대쪽 같은 기개가 없습니다. 한 때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더운피 개천에 풀어 저잣거리에 이름값이라도 한 모양인데, 요즈음은 시 쓰기가 신변잡기 파리채 놀음이나 다름 아닙니다.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습니다, 活語라면 살 저며 등뼈 내놓고 초장이라도 튀어야할 거 아닌가요? 가끔 언어를 비틀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성찬을 베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개다리소반에 찬밥신세입니다. 시인의 모자를 쓰고 보니 어깨가 자꾸 움츠러듭니다.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림자조차 낮은 곳으로 눕습니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 비틀린 채 땅바닥에 헛바퀴를 돌고 있는 외뿔풍뎅이입니다. 세상의 저녁, 어느 한 불빛이 내 시를 읽고 있는지요. 우리가 상한 날개 껴입고 헛춤을 추는 것은 아직도 추락할 꿈이 남아있음입니다.

문장을 갖는다는 것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지요. 詩, 참 오랜 동안 내 곡진한 마음의 情人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할 때는 물고기처럼 잡아 탕을 끓이거나 우려먹고도 싶었고 속이 뻔해 보이는 그의 몸에 붙어 무언가 도모해 보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고백컨대, 시 앞에 혼자이지 못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느라 바람만 들었습니다. 이제, 항복합니다. 시 앞에 무릎 꿇습니다. 끊고, 닫고, 못 박아, 소금 한 줌 속에 녹아있는 열 말의 바닷물처럼 나를 가두겠습니다. 충분히 외롭겠습니다. 혼자인 그 외로움일랑 『애지』와 나누며 살겠습니다. 한 해 동안 발표된 별처럼 빛나는 작품들 속에서 제 시에 꽃을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마음과 곡진한 인사를 올립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애지창간 20년을 이어오며 시 잡지 만드느라 옛날 그 좋던 뚝심 다 내려놓은 반경환 주간님께도 위로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시문학을 통해 지금까지 맺어온 뜻깊은 인연 앞으로도 잘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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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우리 인간의 세상에서 말처럼 굳세고 목질이 좋고, 말처럼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지닌 것은 없다. 말은 상냥하고 심지가 곧고, 언제, 어느 때나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며,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부모형제, 단군, 하나님, 도덕, 종교, 사상, 이념, 가정, 군대, 학교, 경찰, 회사, 국회, 정부, 진리, 허위, 선악, 남녀 등―, 이 모든 것은 말의 꽃이자 열매라고 할 수가 있다. 말보다 키가 크고, 말보다 힘이 세고, 말보다 빠르고, 말보다 높이 나는 것은 이 세계에 없다.말은 명령하고, 말의 명령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말은 모든 것들의 영원을 원하고, 이 생명의 숲을 가꾼다.

 

2019년은 『애지』 창간 20주년이며, 어느덧 제17회 애지문학상을 시상하게 되었다. 2018년 겨울호부터 2019년 가을호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에 10편의 시를 후보작으로 선정했고, 그 결과 송찬호 시인의 「악어의 수프」와 이영식 시인의 「꽃의 정치」를 공동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박분필의 시인의 「자작나무 自敍傳」, 천양희 시인의 「어느 미혼모의 질문」, 이병률 시인의 「그 배를 타기는 했을까」, 고재종 시인의 「길에 대하여」, 김병호 시인의 「누가 괜찮아, 했을까」, 송승언 시인의 「나 아닌 모든」, 서효인의 「종각에서의 대치」, 김기택의 「발바닥」 등은 모두가 탁월한 시들이고, 대단히 안타깝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이영식 시인은 낭만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꽃의 정치」는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의 소산이라는 점에서는 낭만적이고, 「꽃의 정치」는 머나먼 저곳의 정치라는 점에서는 이상적이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꽃의 정치」를 실현시키고 싶어한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꽃은 다른 수단의 정치/ 반목과 대립이 없지/ 뿌리는 흙속에서 잎은 허공에서/ 물과 바람/ 상생의 손 움켜쥐고/ 나무마다 꽃놀이패를 돌리”는 꽃의 정치의 목표가 되고, 이 ‘꽃의 정치’는 이상세계와 이상세계의 행복을 보장해주게 된다. 정치란 ‘무보수 명예직’으로 꽃 피어나는 것이지 “코앞에 설탕물을 풀어놓은”것 같은 꼼수와 “검증되지 않은 수입 교배종으로/ 벌 나비의 복지를 시험하지 마”라는 시구에서처럼, 이웃 국가의 정책으로 꽃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진실이 없으면 피어나지 않는 꽃이며, 전국민의 행복이 보장된 ‘꽃놀이패’의 축제를 연출해내기 위해서는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와 전통은 「꽃의 정치」의 토대가 되고, 이 역사와 전통의 토대 위에서만이 반목과 대립이 없는 사랑의 정치가 실현될 수가 있다.

 

꽃의 정치와 꽃의 정부는 우리가 이영식 시인을 통해서 들은 가장 아름다운 말이며, 만인들의 행복의 향기가 천리, 만리 퍼져나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9년부터는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을 다시 부활하여 시상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최종심에 올라온 후보작들을 보고 그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비평가는 사상가이며, 그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한국문학비평의 후퇴는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제17회 애지문학상 공동수상자인 송찬호 시인과 이영식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부디 더욱더 좋은 시 많이 쓰시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글 반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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