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외 4편 / 오정국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 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
무한에서 무한으로 연결된 밤의 터널
무궁한 밤의 아이로 나는 태어났어요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모두 다섯 개
불타는 산막의 거적때기 너머에
백발의 무사가 앉아 있어요
칼날 스친 얼굴에 불빛 어룽지면
나도 모르게 광대뼈를 쓰다듬죠
내가 만진 죽음 헤아릴 수 없고
나는 전생과 후생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죽음의 불사신이
저의 괴로움을 나에게 덧씌워
기담과 괴담, 로맨스가 끝이 없네요
죽은 자의 말소리와 그림자에 둘러싸여
밤의 피륙을 얽어 짜는데
어떤 유령은
요양병원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는 소식
침상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그 숨을 받아먹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단팥죽 몇 숟가락 얻어먹는다지요
결국 테두리만 남게 되는 이야기지만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수레바퀴가 멈춰지질 않네요
먼눈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 외지(外地)1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보면
번갯불의 거울 조각과
뽕나무 등결의 검붉은 나이테,
표지가 뜯겨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구나
먼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가는 담장의 꽃들
철 따라 익어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
** 미국 흑인 영가<Broken Promises>
붉은 사막 로케이션
어디서 시작됐는지 종잡을 수 없다
붉은 사막 로케이션
단어들의 윤곽이 선명하다
평면의 그림에서 입체적 형상이 일어서듯
선인장처럼 타오르는 빛의 하늘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거기서 눈먼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철가면을 흔들며 울부짖는 곳
그 어디쯤 모래무덤에
전생의 발자국을 맡겨둔 것 같다
검은 가죽바지 오토바이가
일몰의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의 야영지는 끝없다
양고기 굽는 모닥불의 그림자들
빛으로 어둠으로 얼룩진
얼굴들, 구릉 너머 모래밭에 잠겨있는데
발을 들이밀 자리가 없다
텔레비전 화면의 긴급뉴스 자막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모로코 남쪽 붉은 사막 로케이션
이 문장이 거쳐 온 경로를 밝힐 수 없다
얼굴에 분칠하고 고개 드는 꽃들에게
- 외지(外地)2
지나치는 것들마다 실성한 입이었다 미안하다 들꽃들아, 용서해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들을 껴안아 눈물 흘리게 하였다 간밤의 비바람을 어찌 견딘 것이냐 백지처럼 말갛게 고개 드는 꽃들아, 둑길도 저렇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얼굴에 분칠하고 하늘대는 꽃들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치 말아다오 내 얼굴을 뭉개 다오 나의 고통이 너희의 입술을 핥고 깨물고 짓이겨놓았다
시전문지 현대시학은 제7회 '전봉건문학상'에 오정국 시인의 시집 '재의 얼굴을 지나가다'를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전봉건문학상'은 현대시학을 창립한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제정한 문학상으로, 한 해 동안 발간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한다.
이번 수상자인 오정국 시인은 1956년 경북 영양 출생으로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저서로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등의 시집이 있다. 서라벌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아울러 올해 현대시학신인상에 유정, 박서영 시인을 당선자로 선정했다.
서강대 문학을 전공한 유정 시인은 시 '코프만 씨 아아아! 1' 외 4편, 부산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박서영 시인은 시 '우울할 땐 코인빨래방으로 가요' 외 4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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