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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모필 胎毛筆 / 박분필

 

진한 먹물에 붓을 찍습니다 생명선이 살아있어

차람차람 붓끝이 차진 태붓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태안에서 그리고 태어나서 다시 백일을

더 자란 딸애의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울림이

고물고물 기어 나와 그의 심장에 닿습니다 그렇게

사군자를 쳤고 좋은 글귀 뽑아 열두 폭 병풍

준비해 두었는데

 

시집을 안 가겠다 물러서지 않는 딸

30여 년 걸어놓았던 실고리가 삭아 걸지조차 못하는

붓만 같습니다

 

한때 붉은 발가락이었고 말랑말랑한 마디였고

솜털이었던 저 닮은 손주라도 안고 온다면야 명주실로

짱짱한 고리를 만들어 붓걸이에 걸어둘 것인데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어내 버린

침묵 한 자루

 

근 삼 년 만에 그가 다시 붓을 잡습니다

 

젖배 곯은 아기가 젖을 빨 듯

물 타지 않은 진한 먹물을 빨아들이는 붓

그가 탱탱해진 붓을 어르고 달래는 일은 침묵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 내는 일

 

입 성근 잣나무 한 그루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아래

쌓기도 하고 흩기도 했던 한 생의 명암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의 호흡들이 골고루

펴 발라진 오두막 한 채

 

지난한 한 생을 떠받친 서까래가

그저 고요히 달빛을 뿜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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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달의 여인 / 김종태

 

  여인이 선 자리에 메타세쿼이아 푸른 그늘이 근심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 속에서 더욱 하얗게 물든 여인의 손등이 곱디곱다 봉숭아 붉은 손톱 아래로 낮달이 떠오르는 시간이다


  종아리 쪽이 헐렁한 스키니 진과 보랏빛 플랫슈즈를 신은 여인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 짧게 커트한 머리카락의 새치가 가을바람에 반짝이는 여인의 고향은 어디일까 왼쪽 어깨끈이 늘어난 빛바랜 노란색 배낭에 늦은 오후의 바람은 뜻 모를 이야기로 두런거린다


  햇빛이 놀다간 응달의 지도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아래 땅그림자의 가장자리가 밀려나갈 듯 밀려올 듯, 어쩌면 여인의 얼굴은 서 있는 그 자세로 황혼의 시간을 맞이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저녁 나무의 그림자가 다가와 입술의 핏기를 훔쳐갈는지도 모른다


  버스가 두어 번 상향등을 누르며 갓길을 밟아온다 나는 푸른색 번호의 버스를 타야 하고 여인은 검정색 번호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엔진 소리가 철새들 울음처럼 재잘거린다


  만나는 시간과 떠나는 시간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진 황혼의 문틈으로 두어 번 미소를 나눴을지도 모를 여인이여 어젯밤 꿈속의 꿈에서 코끝을 간질였던 향기의 주인공이여 아니 아니 후생의 모성이여


  이제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를 전생의 인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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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 이성렬

 

비탈진 성곽을 비낀 햇살의 잦아드는 눈빛과

낡은 시계탑 그림자의 기우는 손목을 달래며

포구의 노을은 대기와 물의 붉은 포옹을 주선한다.

연락선들은 정사를 나눈 후 오색의 비린 체액을

물속으로 밀어내며 서둘러 떠나간다.

어느 옛 저자 뒷골목에서 수려한 두 검객 연인이

밀애할 때마다 현란한 칼춤으로 흐드러지게

애무한 뒤 번개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주막 뒷문으로 엿본 주인장의 바지에 묻은

걸쭉한 정액만이 그 저녁의 진실로 남듯.

오래 들여다보면 물은 도도한 여자처럼

말을 건네지 않는다. 주름을 내보이지 않는 물의

견고한 나르시즘을 흔드는 건 바람의 빠른 걸음.

뛰어가듯 지나는 눈길의 사심 없음을 몇 점의

흰 물살이 알아채어 허리춤을 풀며 고백하면

한 줄 사연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숲의

나이테들을 지도에 표시한 후, 길섶에 풀린

등뼈 어디쯤의 매듭을 짚으며 밀회를 접는다.

또 어딘가에서 잠시 뜨겁게 껴안을 누군가를

마주치겠지, 유랑극단의 분장을 지우며.


   ———

   * 이명세 감독, 〈형사-Du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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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궤 / 황학주

 

집 앞에 뜬 섬들

틈을 비집고 기관차 없는 협궤가 지나간다

 

협궤 지나는 그 길이

어떤 섬을 잠재운 일이 있고

귀를 잡고 일으켜 세운 일이 있다

 

풍경風磬을 때려 이를 부러뜨리고

잠 못 드는 밤을 따라 흉곽을 지나간 적이 있다

 

갈매기 똥이 허옇게 덮인

그만 오므린 섬의 무릎 사이에

상스러워지려는 석양을 올려놓은 일도 있었을 테다

 

말의 수레를 모두 빠뜨린 수평선으로 협궤가 몸을 옮긴다

수평선은 오늘 모노레일

평생 받은 물소리를 꾸역꾸역 도로 흘려보내며

내 안에 간신히 당신이 멎는다

 

협궤뿐인 나

나뿐인 당신

한쪽이 파인 달이 섬들 속에서 씻겨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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