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외 4편 / 이소현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
오아시스의 밤은 낡은 허물만 남겨 주었고
낮은 아지랑이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허물어졌다
갈대를 엮어 만들었다는 밀짚모자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갈대는 매정한 허공을 찔러댔지만
태양은 비 대신 땀을 선물해주었지
물 한 병은 십 달러
십 일의 하루를 견디는 가격이라서
혀 밑으로 달콤한 온기를 숨기곤 했어
쉽게 녹아내리던 단어들
지나온 발자국으로 써 내린 이야기
결국 한숨들은 짓궂은 모래바람에 지워질 것이다
사막여우는 열을 뱉어내는 법을 알지만
나에겐 옹골진 귀조차 없어
지나친 그림자로 귀를 틀어막고 사막을 건넜지
더 먼 곳에 닿으면 빛이 있을까
스물의 귀퉁이는 쉽게 허물어지고
어설픈 꿈들을 엉성하게 베어 먹으면
붉게 핏자국이 베인 발바닥은 이제
차가워진 허공을 떠돌지
자꾸만 지워지던 발자국 나는
스무 시간 십삼 만원 최저도 받을 수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므로
오아시스, 초록 야자수가 우거진 오아시스엔
이미 낡은 팻말이 서 있는데,
나의 오아시스는 꽤 늦게 찾아오는 법이지
맨발로 사막을 걷고 있는 하루
나는 이방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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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어느 날 일그러진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였다
매일 같은 문장을 읊으며 내일을 가늠하던 어느
외국인 노동자
그는 베트남 사람들처럼 조금은 희어지고 싶다며
쓰게 웃었다
나는 안녕,
인사하는 법을 잊었다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언제나 슬퍼
깨진 거울에 일그러진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연습을 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던 문장들
결국 나의 하루는 고작 몇 천 원짜리인데
티브이에선 재산의 95%를 기부했다던 어느
부자의 소식이 즐겁게 춤췄다
그에게 남은 5%는 오억
나는 오백원 통장잔고를 보며 웃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
일그러진 얼굴은 희게 나오지 않는다는 건
낡은 공장의 철문을 두드리던
거친 손길들로부터 배운 것
스물 몇을 겨우 지나간 날들에선 꽤 쓴맛이 났다
거울엔 내가 모르는 사람만이 바르게 서 있다
오늘의 일그러진 시간들을 내일이면
한 줌 한숨에 흩어질 테니 나는
조그맣게 안녕,
인사했다
오늘의 배웅인지 내일의 마중인지 모를
안녕
별천지
새벽이면 아빠는 별 찌꺼기를 안고 들어왔다
이른 아침마다 하루를 쓸어내던 아빠
그의 몸에선 퀴퀴한 그림자 냄새가 나곤했다
새벽은 하루를 억지로 삼켜대다 붉은
토악질을 하곤 했다
깊은 목울대를 차고 나오던 울음들
결국 모두는 등 뒤에 저를 숨기고 있다
달빛으로 쓸어내던 골목엔 유난히 태양이 늦게 도착했다
지나치게 높은 아파트 때문이라며 웃는 동안
아빠는 스러진 빗자루를 들었다
흔적들을 담아내던 시간 하늘엔
오늘의 별빛이 조금 피어올랐다
밤이면 떨어져 내릴 별들은 환했고 차가웠다
어깨에 쌓이는 건 누구의 고난
고난들은 방황하다 가난처럼 아빠의 어깨로 쏟아졌다
긴 속눈썹에 끼던 유난히 짙은 먹구름
장래희망의 질문에 대해 나는 기린을 읊었고
도장을 찍어주던 아빠는 빨갛게 번진 이름을 쓰다듬었다
방구석엔 별들이 쌓였다
새벽에 잠든 아이를 달래듯 나는 별을 안았다
누군가의 울음은 아주 조금
오늘의 일기가 되기도 했으니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 그림이 그리워져
허공에 한숨으로 그림을 그렸다
별로 도배한 집에는 아직
차가운 공기만 부유하는데 아빠와 나는
한숨으로 온기를 메웠다
별천지가 된 밤,
별천지가 된 방
아스팔트 런웨이
눅눅한 공기를 쥐고 길을 걸었다
차가운 이야기는 꽤 눅눅해지는 법
나는 또각이는 소리가 나던 걸음으로 물기를 털었다
오후의 열기가 짙어지던 날
사람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길을 걸었다
어두운 색 옷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먼지구덩이를 살아야 한다
자박거리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느려진다
꿈벅일수록 많은 숨을 내뱉던, 아스팔트
그 진득한 찌꺼기
잎사귀는 꽃 대신 담배를 피웠다
바퀴의 궤적이 그리던 시간
그들은 매일 촉박한 일상을 넘겼다
나만 넘기지 못하던,
오늘의 페이지는 이미 어제의 페이지가 되어 있던 시간
언제나 팽창하는 노래를 불렀다
터지기 직전의 콧노래
낮잠의 색처럼 자꾸만 바래가는 것 같은 날이면 우울해져
하늘도 노래지고는 했으니까
문득 별이 되고 싶었다
언제나 같던 검정의 길 위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은 사실 지나간 위로
이 길을 뒤꿈치로 잘근잘근 밟아댄 사람들
그들이 그림자 뒤에서 몰래 훔치던 눈물은
같은 그림에 대해 진부한 감상을 토해낸다
덥네,
발끝으로 올라오던 열기들
아스팔트를 걸었다 무의미한
런웨이를 모델처럼,
또각
카무플라주
나는 주기적으로 우울해지고는 했다 공장에서 잿빛 연기가 쏟아지듯 나의 하루는 회색조였다 모든 빛을 삼키던 어둠의 계열
그림자는 종종 짙어졌다 악어처럼 진흙 속에 몸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앞집 2층에 사는 오빠에게 배운 첫 키스처럼 눅눅한 하루 쓰레기 냄새가 나는 포옹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한없이 우울해져 다시 하루를 오물거렸다 어느 파충류처럼 쉽게 색을 바꾸고 싶어 보호색처럼 배경에 녹아들거나 그림자가 되어 아무런 발에나 차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상은 쓸모없이 밝았다
잎맥처럼 복잡한 삶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평지는 꽤나 깊고 길었다 건조한 걸음 사이에선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는 규칙 거짓으로 적은 자기소개서에 대해 증명하라는 어느 면접관에게 두 마디만 던졌다
날카로운 칼날에 얼굴이 비췄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사실 이건 세상에 내뱉고 싶던 문장 어느 뒤통수에서든 들이치던 시선은 커터칼 심처럼 날카로웠으니 나는 얼떨결에 쥐어든 합격증을 찢어버렸다 공장이길 포기한 우울공장에서
나의 색은 무슨 색이야 사실
나는 아무런 빛도 없는데
아무런 빛이 될 수 없는 것일지도
하늘은 쓸데없이 파래서 나는 문득 하염없이
우울해졌다
[수상소감]
갑자기 어지럼증이 느껴져 눈을 감았습니다. 지구의 자전소리가 듣고 싶어 귀를 틀어막고 상상을 유영했습니다. 너무 우울하고 관념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낭만적인 은유에 대해 고개를 저었습니다.
함부로 문장을 쓰던 어린 날. 제가 올곧은 단어들을 내뱉을 수 있게 도와주신 아버지와 제 시선을 감싸 안아주시고 모진 말 뒤에서 격려와 희망을 주시는 가슴으로 낳아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의 원천이 되어주는 50명의 요정들과 1명의 천사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8년도. 첫 번째 스물을 음미하며 새로운 시작들을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잘 걸어 나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만, 저와 부모님의 삶의 이력들을, 그 거창한 고난들을 진솔하게 뱉어내는 거친 시를 쓰겠습니다. 시인의 숙명은 삶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뜨거운 아스팔트 밭길을 맨발로 걸어 나아가겠습니다. 덧붙여 제가 끌어안고 싶던 사회로부터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모든 생명들이 조금 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저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거친 진실을 마주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마주한 모든 관계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제 시의 바탕이 되었다는 걸 전하고 싶습니다. 긴 터널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신 권주희 선생님께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우리의 현대시 역사는 100년을 건너오면서 많은 시도와 새로움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렀다. 상대시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화기의 신체시에서부터 굽이굽이 궤적을 남긴 시인들은, 그 이전에 없었던 지평을 새로이 열어온 분들이었다. 전쟁의 역사는 승자를 기억하지만 예술의 역사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와 작품을 기억한다. 이에 등단 이후 전문가의 대열에 합류한, 혹은 합류하려는 시인은 당대나 이전의 시풍에 안주하려는 게 아니라 신-지평을 구현해 내려는 의지의 소유자라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번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에 응모한 150여명의 작품 중, 7명의 응모자 작품을 본심에 올렸고, 그 중 최종 본심에서 논의되었던 세 분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소현의 「이방인」외 9편, 강희정의 「행성넘버 4797」외 9편, 황신의「내연(內緣)의 땅」외 9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첨예한 눈금과 논박을 요구한 작품은 「이방인」과 「내연의 땅」이었음을 밝힌다. 이토록 심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까닭은, 선배 시인이 다하지 못한 바를 다음 세대가 능히 북돋우고 이어나가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서렸기 때문이요, 우리 문단의 지층을 더욱 비옥하게 하려는 데에도 뜻이 있음이다.
이소현은 수상작 「이방인」에서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이라는 문장을 첫 줄에 놨다. 독해가 수월찮은 조합이다. 물도 아닌 “열기를” 마셨다거나, 더욱이 “맨발로” 마셨다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알레고리가 형성되고 독자가 상상의 문을 열 수 있는 틈, 즉 다양한 공간이 생겨난다. 은유와 환유를 동시에 접합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일절이기도 했는데, 그 외 작품에서도 웬만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다른 분들께도 다음 기회가 반드시 행운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원한다.
- 심사위원 정숙자(시인)
[심사평] 관념 중심과 사물 중심의 상상력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심사 의뢰를 갑작스럽게 받고 이메일로 온 일곱 분의 작품을 여러 번 깊이 있게 읽었다. 보내온 작품들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기명으로 번호만 매겨진 작품들을 크게 대변해 보면 관념 중심의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서 표현의 객관성이 결여된 면이 있지만, 그러한 관념적 사유가 오히려 낯설고 신선하게 읽힌 경우와 사물 중심의 상상력을 통해서 객관적 사유와 표현의 일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대별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함께 심사를 한 정숙자 시인은 전자의 시를 선호하고 필자는 후자의 시를 선호하는 바람에 정숙자 시인은 3번(이방인 외 9편)과 5번(그림자 외 9편)을, 필자는 2번(그날의 신발들 외 9편)과 4번(행성 넘버 4797외 9편)과 6번(내연의 땅 외 9편)을 최종심에 올리고 카톡과 전화로 의견을 조율했지만 공통된 의견에 근접한 시인이 한명도 없어서 예심위원의 의견까지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예기치 못한 산통을 겪고 태어난 시인이 「이방인」 외 9편을 투고한 이소현 시인이다. 이소현 시인과 마지막까지 겨룬 시인은 황신 시인의 「내연의 땅」 외 9편과 강희정 시인의 「행성넘버 4797」 외 9편이다.(투고자의 이름은 심사 후에 공개되었다.)
먼저 필자가 주목한 강희정 시인의 시들은 「행성 넘버 4797」, 「꽃총」, 「오늘과 동전은」, 「바콜로드에서 짐 풀기」처럼 다양한 소재를 균형 잡힌 상상력으로 이끌어가는 솜씨가 믿음직스러웠다. 반면에 몇몇 작품은 단조롭거나 패턴화된 구조를 띠고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에 「내연의 땅」, 「허공이 익는다는 것」, 「에덴의 방정식」, 「생각이 많은 날」 등 다양한 소재를 긴장감 있는 언어로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가는 힘을 보여준 황신 시인의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그의 시들은 단순하지 않은 상상력과 깊은 사유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투고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완결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시는 다른 심사자의 눈에는 새로움이 부족한 시로 읽혀져 제외되었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소현 시인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좋은 표현에 비해 객관화되지 않은 관념적 진술이 거슬렸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은 오히려 표현의 일관성을 거스르는 관념적 진술이야말로 새로운 실험성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보았다. 필자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먼저 「이방인」의 첫 연 “텁텁한 열기를 맨발로 마신 날/ 벗겨진 얇은 조직에 대해 초승달은 흰 웃음만 남겼지”로 시작되는 첫 구절부터 막연하고, 두 번째 시 「불가살이」는 1연에서 밥풀에서 태어나 쇠를 먹고 살아가는 ‘불가살이’의 모습이 2연에 오면 트럭을 모는 사람으로 갑자기 바뀌어서 표현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소현 시인을 시산맥 신인 시 문학상 수상자로 동의한 것은 이 시인의 앞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다. 긴 호흡의 시를 활달한 상상력으로 끌고 가는 장점을 살리고 앞에서 지적한 결점을 보완한다면 앞으로 우리 시단의 새로운 계절이 될 것이다.
- 심사위원 박남희(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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