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서* 외 4편 / 박민서
벽에 찍힌 손바닥은 붉은 비명이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천천히 시드는 비명, 동여맨 손목들, 실핏줄처럼 아주 느리게 담을 넘고 있다
지문 없이 찾아갈 수 없는, 먼 시대를 떠돌고 있는 언어, 손가락마다 불꽃을 달았다 벽을 밀어내고 있는 기원이 종유석처럼 자란다 말이란 다 자라지 않으면 더듬거리는 법이다
손을 맞대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벽은 얼마나 오랜 연대가 시큰거리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흘러가는 지문들이었을 뿐
동굴처럼 웅크리고 있는 부족
손목을 관통하고 있는 터널
명칭을 나누어 가진 관계가 있었다면 한 손목을 잡고 위로하는 다른 손목을 볼 때도 있지, 손톱이 자라지 않는 손바닥 벽화, 마주보지 않고서는 손을 맞출 수 없어 여전히 벽을 향해 있다 두 번 다시는 접지 않겠다는 맹세를 보았다
온갖 말들이 들락거리는 관절, 말은 모두 벙긋거리며 동굴을 지나친 것들이어서 악담과 정담이 함께 있다
며칠 악담으로 시큰거리는 내 손목이 아프다
* 스페인 북부 지역의 카스티요 산에 있는 동굴 속 채색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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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연필 한 자루엔
몇 개의 얼굴이 들어 있을까
남자가 더듬는 손끝에서
여자의 얼굴이 돋아나오고 있네
태초에 신의 말씀으로
천지와 동물과 사람을 지었다고 했으니
말씀은 검은색이네, 흑심(黑心)이네
신은 늙고
초라한 형상을 하고
마로니 그늘에 앉아서
제가 빚은 젊은 처녀를 힐끗거리고 있네
신의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필은 깎이게 되지만
지나온 것들은 평면이었네
자기 얼굴을 쓰다듬을 때는
난감하거나 피곤한 얼굴
손에는 표정이 묻어 있네
마른 빵을 맛없이 조금씩 뜯어 먹고는
- 지 어미와 꼭 닮았어
손이 기억하는 얼굴이 있었네
액자 속의 화분처럼
얼굴이 옮겨가는 것을 보았네
쓱쓱, 그가 도화지 귀퉁이에 리본을 긋네
여자가 뚜벅뚜벅
영안실로 걸어 들어가네
물소리
깊이 숨어 사는 물은 맑아요
끊어지지 않은 물소리는
장인의 솜씨
그곳이 물을 닦는 공장일 거라는
추측을 해보곤 합니다
물이 물을 닦는다는 소리
흘러가면서 앞과 뒤를 깨워줘요
물 주름을 벗겨내며
물을 닦는 바람을 바라봐요
태풍에 넘어진 나무의 잔영을
소소한 빗줄기의 흔적을
그늘에 구겨진 혼잣말을
누가 떠밀지 않아도
둘둘 말려가는 것을 봅니다
물이 물을 닦는 이유는 무엇인지
가끔 흙탕물 세제를 푸는 일도
구멍 난 나뭇잎 몇 장 띄우는 일도
물이 물을 닦는 일이에요
숨어 있는 물을 처음 만나는 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내 얼굴이 사실은
모두 처음 만나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 사이에 흐르면서 구겨지는
얼굴의 재촉,
되돌아가지 못한 소리들
얼굴은 가장 맑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했어요
손으로 휘이 저으면 생기는 물의 페이지
물이 내 얼굴을 닦고 있어요
낱말 퍼즐게임
우리 두 사람은 H열 좌석에 앉았다 그도 나도 한(韓)이나 홍(洪)이 아니다 좌석의 엉덩이 자국은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나의 첫 낱말풀이는 G열 왼쪽
첫 번째 칸에서 시작한다
저기 D열의 가운데 남자는 머리가 솟았으니 고(高), 뒤쪽 F열의 남자는 등받이를 발로 쳐대니 굽은 다리 장(張)이 분명하다 중간에 낀 E열의 여자는 팝콘을 한 주먹씩 입속에 넣으니 권(拳)인데, 주먹이 가득 찼다는 뜻일까 아니면 주먹을 부른다는 뜻일까 두 갈래로 땋은 머리 B열의 왼쪽과 투블록컷 머리 오른쪽과 입맞춤을 하니 호(好)가 맞다
눈동자를 굴리는 스크린은 우리 눈을 구슬처럼 가지고 논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은 적 없다
누군가의 머리와 나의 꼬리가 만난다 각각 생각이 다른 세로의 첫 글자와 가로의 첫 글자는 닮았지만 끝내 연결 안 되는 좌석이 있다
비어 있는 번호, 도무지 풀리지 않는 퍼즐 판, 빈 의자에 구름처럼 가볍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한 조각 퍼즐 속에 꽉 끼워져야 한다
가로와 세로를 따라가는 오후의 퍼즐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구는 이쪽입니다 뒤집힌 퍼즐 판의 낱말들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제의 미로
침엽의 미로에 서 있다
바람의 모양으로 무늬가 들어 있는 미로
아이는 헤매는 것으로 길을 부르고
울음으로 조형의 벽을 삼는다
키가 보이지 않는 정원, 길은 푸른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아이는 왜 작아지는 것으로 크지 않는 건지
젖이 아프다
젖을 물리는 순간 출구와 입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육된 정원은 모두 손등이나 손끝을 닮는다
뱀처럼 구부러져 있는 나무들
울음소리를 따라 점점 미로가 되어 간다
표정은 사라진 얼굴이 되고
대신 구겨진 미로들이 얼굴로 몰려든다
구부려 누운 잠은 계절을 보려고 하는 것
어느 틈에 자라는 전정으로 매듭과 키를 정한다
동맥(動脈)은 종착이 있는지
젖어버린 발바닥은 안 보이는 키를 자라게 하는 정원일 뿐
바닥으로 바쁠 뿐
울타리가 있는 정원은 갖지를 못했다
입구와 출구가 있어 계절은 몸을 바꿀 것이고
접혀지거나 지나가는 것을 지우거나
발소리 숨어버린 어제의 길만 남아 있다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이다
[수상소감] 새로 산 신발 뒤꿈치의 손가락 틈
잘생긴 막대기 하나로 한여름 들창을 받쳐놓았던 적이 있다
막대기는 갓 더위를 받치고 있었고 늘어진 포도나무를 받쳤고 오래전에는 새를 잡기 위해 바구니 옆구리를 받치고 있다가 익어가는 들판의 논을 받쳐놓기도 했다
한 번도 앞으로 돌아올 수 없는 벽의 뒷면엔 보여주기 싫은 크레이터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이에는 동네 아이 하나가 자치기로 동심을 받쳐놓았고, 빗방울이 빗 소리를 받쳐놓아 쉬었다 갔다 아버지 대신 굳은살 박인 어머니 손은 반평생 자식을 받치고 있어 한때 기울어진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받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시에게 말을 걸었다 몽환적인 곳에서 그 대상을 부를 때는 땅에 귀를 낮게 기울여도 표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산길을 혼자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대상이 너무 많아 빠른 속도로 쫓아가 손으로 잡아보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잡히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수없이 버렸던 시들, 압력밥솥에 마음을 꾹 눌러두고 배회할 때마다 미련 없이 시는 아침에 뜨거운 수증기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는 나와 은유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첫발을 내디뎠다 그물을 어깨에 메고 그 표상을 찾아다닐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찾고 있었다 그때 메시지 ‘잘하셨어요 등단에는 운명 같은 게 있나 봐요 좋은 시로 보여주세요 축하합니다’ 그때 실감이 났다 용기가 생겼다 책상에 등을 말고 앉아 있는 몸에 태엽 감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물구나무를 서도 나를 받쳐줄 막대기 하나 생겼다
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놓을 때마다 초심을 불러주곤 했던,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김석환 교수님이 많이 기뻐하실 것 같다 끝까지 믿고 함께해준 우리 가족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명지대학원 동기들, 스터디그룹 케빈과 빛별 친구들, 오랜 문우 써니 언니들, 토즈반 문우들, 시와 운명으로 만난 친구 양비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당선 소식을 전해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2019년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100여 명의 작품 예심은 2017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동우 시인과 박동민 시인, 2018년도 신인상을 수상한 이소현 시인이 맡았다. 각자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하였다. 그들은 정원선, 이우경, 최은진, 이은희, 이서원, 이영, 신나래, 이호근, 전목, 한영미, 박민서 등이었다. 그중 8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총 8분이 본선에 올라왔다. 다들 어느 만큼씩 매혹적인 詩篇들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또 조금씩 흐린 부분이 있어 한동안 원고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이럴 땐 가장 단순한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인이 본 새로운 것, 재미난 것, 아프고 간절한 것을 마치 그 장면 안에 있는 듯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가?
그러고 나니 어렵지 않게 박민서, 한영미 두 분의 손을 새 시단식구로 잡을 수 있었다.
박민서 시인은 동굴에 찍힌 손 벽화를 보고 손의 언어를 붉은 비명으로 형상화해놓은 「벽 앞에서」가 강렬하고 선명했으며 다른 시편들에서도 새롭고 다양한 시각과 어조를 변용, 구사하고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짐작케 했다. 그리고 한영미 시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과 사물들에게서도 가장 작지만 큰 무늬와 숨결을 짚어내는 힘을 지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굴레방다리」 등의 시편들은 그가 얼마나 곡진한 귀와 눈을 가졌는지 잘 보여준다. 두 분 다 시인으로서 크고 귀한 자질들을 가졌으니 정진하여 시단에 우뚝 서길 빌어본다.(안차애)
박민서는 섬세한 신경망으로 세계를 감각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감각화의 과정은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호 조응한다. 「벽 앞에서」는 박제된 ‘벽화’에 눈물과 웃음이 깃든 인간의 신화를 피부에 닿을 듯 직조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펼쳤다 좁히는 언어의 묘기가 박민서의 특징이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필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담은 「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한 인생의 숨은 이력을 스케치한다. “물이 물을 닦는다” “물의 주름” “물의 페이지”(「물소리」)와 같은 신선한 언어적 발상이 대상의 본질과 삼투함으로써 인간의 시간과 세월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사물의 본질을 섬세한 관찰과 통찰로 감각화하는 박민서의 노력과 애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한영미가 축조한 시세계의 근저에는 ‘Les Miserable’(레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다. 안전하고 견고한 세계 밖에 거주하는 자들의 숙명인 가난, 배제, 고통, 슬픔, 낙오의 정서를 그는 곳곳에 편재시켰다. 생계와 희망의 출구 없는 자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방석집과 웨딩숍의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그린 「굴레방다리」는 모두 위태롭고 불안한 세계 끝에 매달린 존재의 슬픈 현상을 구현한다. 기교와 수사로 메시지를 가리는 기술언어를 선택하지 않고 세계 인식과 철학을 드러내려는 정공법적 태도가 그의 시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치열한 의식과 긴장된 삶의 의지를 잃지 않기 바란다.(강경희)
이번 시산맥 신인상에 응모한 작품들은 대부분 내구성이 탄탄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체험에 근거한 은밀한 자기고백으로부터 사회의 첨예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까지 시적 소재도 다양했다.
특히, 자기고백의 언어들은 근래 보기 드문 시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데, 박민서 시인의 작품들은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의 의지와 그것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묘하게 배합된 수작이다. 그는 「벽 앞에서」의 첫 문장에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벽에 찍힌 손바닥들은 붉은 비명이다”라는 문장은, 붉은 손바닥의 색채감을 ‘비명’이라는 절박한 울음과 갈등으로 묘파한다. 그러므로 박민서 시인에게 시란, “아이가 없어 젖이 아픈 시간”(「어제의 미로」)의 대체할 수 없는 내밀함이다.
한편 한영미 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명징한 세계의 상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굴레방다리」 등의 언어들은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송곳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이중 격자다. 그는 이를 이렇게 압축하고 대칭한다: “하지만 아현동 굴레방다리란 발음 속에서 여전히 되살아나는/ 허기와 굴레”(「굴레방다리」). 그러나 적어도 시에서 형용되는 ‘고통’이란 자기극복의 전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삶을 형상하는 시들은 대부분 투박하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투박함이란 정제된 ‘투박함’이어야 한다. 이점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박성현)
- 심사위원 안차애 시인 강경희 평론가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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