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염 / 이상윤
어머니 무릎에 강이 흘렀다
걸음을 옮기면 강물소리가 들렸다
그 강엔,
물렁뼈에 의지한 지구의 중력과
어머니가 걸어 온 세상의 길들이 산다
오래전 샛강이었을 때
어머니는 운동화를 깁다 새벽 강을 건넜고
빈 쌀독을 다독거리다 눈 덮인 겨울 강을 건넜다
늘어나는 나의 발 치수에 맞춰
강폭은 넓어지고 수심은 더 깊어졌다
어제도 차오르는 강 수위를 낮추려
약손한의원과 샛별약국으로 가는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고 난 어머니는
광목천으로 시린 강의 마디를 여몄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강물소리가 났다
어깨에 샛강이 흘렀다
강물이 등줄기를 타고 잠자리까지 차올랐다
아침저녁 강물소리를 들으려
귀는 강의 초입에 쫑긋 서 있었다
산다는 건 몸에 강을 하나씩 들이는 것이다
저녁 바람 뒤끝이 젖었다
내일도 강물소리가 무척 요란하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 파스를 붙였나 보다
마을에 어머니의 강물냄새가 난다
직립의 숲
도시는 직립하는 것들의 숲이다
바람도 때론 직벽 앞에선 직립을 강요받는다
만일 직립이 완고하다면
바람은 생각을 수평으로 비틀게 된다
아니, 비트는 게 아니라
직립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추락을 피해 직립을 선택한 인류가
층을 올리는 건 모순이다
혹시 직립의 궁극이 추락은 아닐까
계단이 필요했다는 가설이 힘을 얻는다
추락하기 위해선
기어올라야 한다는 게 그럴듯한 이유다
계단을 만들지 못한 인류가
간혹 샤워 부스에 올가미를 건다
직립의 자세로 매달려야 바닥에 닿지 않는다
새들은 그 사실을 알고
허공을 수평으로 눕히기 위해 날개를 만들고
아침이면 서둘러 나무를 떠난다
조간신문이 말한다
어제 밤 도시의 숲에서
누군가 마흔을 하루 남기고 직립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일종의 오보다
죽음도 직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어제 직립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직립을 바닥에 눕혔던 것이다
빈집
바람이 채질하던 덕석에 가을볕이 시끄럽다
가을 장맛비에 손을 탄 장독이
몸을 뒤집어 할머니의 손맛을 털고 있다
습관을 지운다는 건 자신을 뒤집어야 하는 거다
들깨 턴 밭에서 사부작대던 저녁이
댓돌 무릎까지 차오르자
단단한 바람이 수수깡 벽을 잡아 비끄러맨다
새 앞가슴으로 앉아 군불을 품던 아궁이는
설마른 할머니의 기억을 때고
굴뚝 그늘엔 산까치의 발자국이 부산스럽다
대추나무 손가락 마디가 굵다
늙음이란 순을 낸 마디에 굳은살이 서는 거다
문지방 시리게 들락거리는 문풍지를
마을 개가 꼬리가 길다고 늙은 아재처럼 나무란다
곡간 창엔 들쥐들이 달을 켜고
할머니가 내어 준 세간을 새벽까지 정리한다
겨울이 마을 들머리에 왔는지
낙수그릇에 잔별들이 이를 달달 떨며
큰 눈이 오던 날
뒷산으로 마실 간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운 수족관
마트는 동물원이야 동물들은 질소에 잠들어 있어 건드리면 빳빳하게 성을 내 세게 움켜쥐면 펑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도 있어
아이가 들어왔어 고래밥을 한 개 집어 드네 고래에게 밥을 줄 모양이야
고래밥이 정말 고래의 밥일까
아니라면, 동해에 서식하던 고래가 진화해 육지로 걸어 나온 걸 거야
동해노래방에서 고래를 사냥하던 기억이 나 그녀는 고래의 속눈썹을 가졌었지 고래 숨구멍 같은 입으로 긴 한 숨을 뱉어내곤 했어
어쩌면 고래밥은 수족관일 수도 있어 오징어, 거북이 심지어 한 쪽 어깨가 허물어진 별들도 살거든
수족관에 어떻게 그 많은 바다생물이 살까
수족관은 심해처럼 깊을지도 몰라 그게 어부가 커다란 그물을 들고 마트에 오지 않는 이유일 거야
수족관은 왜 내 마음처럼 깜깜한 걸까
햇살이 들면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물고기들의 마음이 쉽게 상하기 때문일 거야
어! 수족관 뒷면에 입장료가 붙어 있네 이건 분명 내 기다림의 시간일 거야
떨어진 수족관에서 어류들이 우루루 흘러나왔어 사각형 어보가 어류들의 이름과 서식지를 설명하네 그녀의 서식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
집으로 가는 어두운 골목길
젖은 별이 그리움에 부레처럼 부풀어 올랐어 나는 그녀가 없는 수족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수족관을 흔들어봤어 스윽스윽 그녀와 듣던 파도 소리가 들려
새의 독백
바람도 직사각형으로 불어들었어 새장 밖 하늘은 쇠창살이 그려진 푸른 도화지야 밤하늘을 울음소리로 건너는 새들의 대오(隊伍)도 빗물이 덧칠한 얼룩이지 난 점점 변해가고 있어 알람기능이 내장된, 단단한 절망의 돌기들로 덮여진 로봇 새로 쇠창살의 두께를 가늠하던 부리엔 밤낮 기어나가려는 생을 풀칠하던 사료들이 자라고 있어 의도를 간파한 눈초리를 모조의 지저귐으로 받아내지 깃털이 뽑힌 날개는 엉성한 손가락으로 진화해 가고 있어 새장 속에 난 늘 부재중이야 머릿속엔 하늘 길에 대한 지도가 두 발의 잔 지문처럼 그어져 있어 어둠이 세상 틀의 경계를 잠으로 돌려보내면 난 흘러나와 나미비아의 등이 굽은 사막을 건너는 낙타를 바라보고, 킬리만자로의 초원에서 잠이 든 표범의 허름한 어깨를 쓰다듬고, 시베리아의 저녁 굴뚝에서 사각으로 접혀진 내 영혼이 아직도 흐르는 오로라의 강을 바라보곤 해 오늘도 밤을 틈타 비행 연습을 해 혹시, 정말 혹시, 올지도 모를 그 어떤 날의 딱 한 번의 우연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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