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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 외 4편 / 손준호

 

뿌리가 비스듬히 깊네요

사랑니를 뽑고 당신 발치에 누워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반백을 동거하였으니

눅눅했던 시간의 흔적이 웅덩이처럼 파였어요

 

뿌리 뽑힌 곳엔 뿔이 나지요

땅이든 잇몸이든 퉁퉁 붓고 멍들 수 있어요

한술 뜨려면 두 시간은 솜 물고 있어야 해요

맘이 자꾸 쓰이고 혀가 저절로 가닿게 됩니다

 

난 자리는 그런 곳이죠

먼발치인가 싶어 돌아보면 없는,

지붕 위에 던져진 젖니는 누가 물고 갔을까요

콩닥콩닥, 가슴팍에 키우던 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슬픔은 어둠 속에서 뿌리째 번식합니다

발칫잠에서 등걸잠에서 새우잠으로

엄니로부터 엄니의 엄니로부터 유전하는 뿌리들

짐승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엄니라 부른대요

슬픔을 물고 늘어지려면 이빨 없인 안 되죠

 

햇살 갉아먹던 후박나무 이파리를 봤어요

어금니로 허공을 깨물던 세이지 꽃잎을 봤어요

그러나 한겨울이면 송두리째 몽니를 거두고

뿌리 발치에 스스로 거름이 되는 용기를 봐봐요

 

마스크 끼고 실밥 풀러 가야겠어요

겸손의 뿌리가 얼마나 얕은지 벌써 캔맥주가 생각나요

당신 발치 누워 줄거리 뻔한 일일연속극을 보면서

병든 나의 텍스트가 차츰 호전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하늘은 또 함박눈을 뿌린다는 일기예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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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칼을 쥔 바람의 이름

 

무엇을 떠올리든 자유다 부신 금발의 북유럽 여인이나 열도 소녀의 애살맞은 이름 같은, 떠오른 생각에 돌을 매달아도 자유다 들고양이가 세 발로 오후 세 시를 유유히 건너가고 있었다 외진 마음 몇 자락 슥슥슥 베고 가는,

 

여리박빙의 나날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휩싸인 계절의 막후는 뼈저리게 앙상하였다 나무가 털리고 가계엔 금이 가고 간유리가 박살나서, 나는 강으로 달려가 살얼음이 되었다 등뼈에 성에꽃 새겨 넣던 그믐이었나, 어디선가 쩍 손목을 긋는 얼음장 조각조각 찢어진 손바닥 돌멩이처럼 굳어가는 혀

 

어른과 어린, 같은 말을 꺼내서

착한 피라미와 버들치의 아가미에 던져주면서

풍선껌처럼 질겅질겅 슬픔을 오래 되씹는 습관

 

딱딱해진 과거를 깨물면 이유 없이 혀끝에서 피가 났지

월동이란 한철, 어딘가 심장을 대신 보관할 곳 없을까

 

누군가 번호판 없는 오토바이를 갈대 수풀에 버렸다

 

반지하 자취방 쪽창에 들이치던 소나기처럼

잊을 만하면 나를 두드리는 당신,

날아가는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에이다,

 

 

햇살 요양사

 

뭉그적뭉그적, 해종일 저러고 있다.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푸져 앉아 혼잣말을 무슨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다. 먼길 오느라 솔찬히 욕봤소, 합죽한 노파는 함부로 반말을 던지지는 않았다. 기력 잃은 대문은 입을 헤벌쭉하고 민무늬 불록담은 군데군데 관절이 나갔다. 빨래집게는 틀니로 헐겁게 바람을 물었고 툇마루를 수발 중인 섬돌은 등허리가 반질반질했다. 해진 소매 끝단에 겨운 졸음 매달고 빈 들녘 볏단같이 모짝모짝 말라가는 노구.

 

어디 좀 봐요, 햇반은 잘 데워 드시나요? 볕살 몇 장 꺼내 정수릴 쓰담쓰담하자 터앝머리 모과나무가 참새 떼 한 됫박 쏟아붓고 왁자해진 독거에 마당은 혈색이 확 도는데, 외려 먹구름처럼 그늘지는 안색. 문득 눈물길로 차올랐을 것이다. 손금을 툭 놓친 사람, 시큰시큰 쇳내 나는 이름. 종신보험같이 오래된 그림자만 몇 차례 뙤똥뙤똥 문지방을 들락거렸다. 늙은 나무라고 늙은 꽃을 피우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해요. 저녁이면 손끝에 경련이 일어요. 쇠줄 묶인 백구가 등 휘도록 텅텅 적막을 물어뜯고 있었다.

 

 

벚꽃뱅어

 

황사는 웃었고 마스크는 울었다 꽃가루가 입술을 틀어막자 쿨럭, 창(窓)은 비염을 앓았다 구름의 등뼈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직진해야 하는데 좌회전 차선에 들었다 칼날 뒤집으면 칼등에도 꽃은 핀다고 밀어서도 당겨서도 문은 열릴 수 있다고, 라디오 주파수에 쑥물빛 짱짱 꽂혔다 때아닌 우박이 네이버 속보에 쏟아졌고 둥글둥글 파문에 우산처럼 접혔다 펴지는 마음, 무르팍 당겨 앉은 바람이 슬쩍 악수를 청하면 수당 받으러 온 실직자처럼 쭈뼛 보리이삭 패는 사월,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하노, 그 덕에 미싱을 빨리 돌렸고 내력만큼 답답한 산소마스크 낀 누이는 마침내 식물이 되었다 녹색 심장을 가진 봄은 빚쟁이처럼 몇 번 더 찾아왔고 까무룩, 노모는 웃음이 무거워 자주 발등을 찧었다 절정의 계절에 강으로 돌아와 알 낳고 죽는 벚꽃뱅어처럼 세상이 다 웃는 봄 같아도 누구나 울음 한 바가지 늑골 깊이 쟁여두고 사는 것을, 목단 이불에 찬밥 쑤셔 넣던 기억의 아랫목에 보내지도 잡지도 못할, 누이여!

 

 

 

피싱*

 

1

낚싯줄 묶인 독수리 모형이 포도밭에 떠 있다. 바람이 얼레를 풀자 낚싯대 끝이 팽팽하게 휜다. 솟구치는 독수리. 펄럭이는 독수리. 파르르 공중의 낱장이 찢긴다.

 

―낚고 있습니까, 날고 있습니까?

 

바람이 빠지자 몸을 접는 풍선 인형처럼 연출이 끝난다.

 

2

수화기 속 검은 목소리 사람을 낚는다.

 

우체국입니다 검찰청입니다 말씨가 좀 어눌합니까 믿으세요 믿으라니까 당신의 자식이 납치되었습니다

 

미끼를 최첨단으로 갈아 끼우고 카톡을, 메시지를, 대화를 가로채겠습니다. 엄마가, 언니가, 애인이, 절친이 되겠습니다.

 

돈 을 부 치 세 요 제 발 돈 을 부 치 세 요

 

그놈 목소리가 독수리 타법을 쓰고 있다.

 

3

독수리 허수아비가 못 미더운지

농부가 그물망을 치려고 밭두렁에 말뚝을 박고 있다.

 

* 피싱(phishing) : 전자 금융 사기 

 

 

[수상소감]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시가 오고 있어요

 

나의 동선이 형편없어졌어요. 어제는 현관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걸요. 여기와 저기, 경계를 지워버린 눈이 녹고 있어요. 녹아내리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아픔. 시골버스가 길가에 멈춰 노파를 태워요. 승강장이 아니어도 버스가 설 것이란 짐작. 그런 마음으로 출발해요. 어느 모퉁이를 돌아 시가 오고 있다는 생각. 결국에는 내게 당도할 것이란 믿음. 그렇게,

 

별안간 당선 전화가 날아들었어요. 멈춰버린 듯 아닌 듯. 일순의 떨림. 콩켸팥켸 가슴팍에 붐비는 기억들. 벽지를 더듬고 간 웃풍이었나, 떠난 아버지의 마른기침이었나. 가난한 유년의 풍경이여. 설움 훔치던 어머니의 차가운 아궁이여. 함부로 내질렀던 청춘의 시퍼런 주먹이여. 생의 살점을 물어뜯던 병마여. 고마웠어요. 남천 생울타리 눈시울이 붉어요. 덜렁수캐같이 밖을 서성거렸던 나의 부재여. 남편이여, 아빠여, 둘러보면 없던 이름이여, 시간이여. 미안해요. 내 사람의 둘레가 조금 환해졌으면 해요.

 

장하빈 시인님. 별사탕 한 개로 詩作한 일이 이렇게 커졌어요. 오래 걸려 멀리 에둘러 왔네요. 불필요한 게 때론 필요했나 봐요. 덕분에 모서리가 많이 닳았어요. 다락헌(多樂軒) 마당귀 꽃무릇은 땅속에서 한겨울을 애태우고 있었겠지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걷도록 등을 미는 바람처럼, 나에게 시의 배후가 있다면 당신입니다. 현대시의 낯선 언어를 접하게 해주신 변희수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수요일마다 함께 시를 매만지며 꿈을 키웠던 다락헌시인학교 문우님들. 여기까지 절반의 걸음은 그대들 몫이에요. 부족한 시를 읽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산맥에게 지금부터가 시작, 이란 다짐으로 감사의 말을 대신할게요. 언제나 시의 발치에 있겠습니다. 오늘은 자작나무 서늘한 눈매를 보러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럼.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7편의 작품은 각각 다양한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게 특색이었다. 혹시 언어의 향연에만 치우쳐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는 달리 삶의 현장성과 언어의 축제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작품들을 심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4편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이경의 「손말」 외 9편의 작품들은 시어를 다루는 데 있어 능숙하고, 시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반대로 시적 의미에 집중하는 작품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약해져서 시적 긴장을 놓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한경훈의 「나쁜 달의 나라에서」 외 10편의 작품들은 과학적 언어와 지식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면을 보였다. 그러나 시에 사용된 언어와 지식들이 시적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시적 발효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때로는 시적 진술이 거칠게 나열되거나 산만한 경향으로 흐르는 점이 아쉬웠다.

 

김이응의 「그들만의 리그」 외 9편의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언어가 발랄하고 시적 상상력이 활달한 측면을 보였다. 특히 「아가씨 활짝 핀 꽃」은 소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는 과정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그 밖에 엄마의 눈물주머니를 고찰한 「물집의 성분」, 추파춥스 사탕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삐딱한 달리-운석-은하계”로 상상력을 확장해가는 「추파춥스」, 발랄한 언어를 통해 여인들의 꿈과 기다림과 삶의 현실을 유려하게 담은 「사라진 옥상의 언니들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갔을까」 등은 상당한 시적 수련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준호의 「발치」 외 9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높고 고를 뿐만 아니라 시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또한 시어 운용에 있어 자연스럽고 안전감을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발치」의 당신의 ‘발치’, 치아의 ‘발치’, ‘먼발치’, ‘뿌리 발치’라든가, 「에이다」의 ‘칼을 쥔 바람의 이름, 외국 여인의 이름, 날카로운 것의 이름’ 등 동음이의어를 통한 능숙한 시어의 부림 그리고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한 감정전이 능력 등이 우수했다. 그 외 「햇살 요양사」는 독거노인의 삶을 돌보는 요양사로서의 햇살을 따뜻한 서정으로 탁월하게 옮긴 수작이며,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상을 날카로우면서도 능숙하게 풍자하는 솜씨들이 돋보였다.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손준호의 작품들과 김이응의 작품들을 논의하였다. 활발한 토론 끝에, 각자가 가진 완성도와 가능성을 모두 인정하여, 두 분 모두를 신인으로 당선시키는 데 합의했다. 시가 놓인 자리는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 위다. 두 분 모두 한국시의 새로운 미답지를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축하의 말을 보탠다.

 

- 심사위원 본심 : 곽효환(시인) 한용국(시인) ⸳ 글 / 예심 : 조희진 지연(시산맥 등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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