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에 익숙해져 갔다 / 조성웅
끝내
그는 한 뼘 남짓한 H 빔 위에 모로 누워버렸다
그의 등 뒤에는 10미터 허공이 펼쳐졌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자세가 그래도 용접을 하기엔 최선의 자세
그는 허공조차 안전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안다
몇 차례의 죽음을 넘어
오늘 하루분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까지
오로지
위험에 익숙해져 갔지만
그는 이 야만의 세계
삶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역능을 숙련했는 지도 모른다
난 한 뼘 남짓한 H 빔 위로 누운 그의 모습이
목숨을 살리는 방법 같고 삶의 안전을 위한 끈질긴 질문 같고
이판사판 한번 붙어보자는 고공농성 같았다
허공은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을 닮아 수평을 이루었다
[수상소감]
아들 문성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지난 겨울방학 때 집에 놀러 온 문성이 친구들 중에 몇 명이 졸업하면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 입사하겠단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회한이 통증처럼 일었다. 입덧을 시작하던 날, 아내는 현대자동차에서 해고 됐고, 문성이 돌잔치 하는 날, 난 현대중공업에서 해고 됐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그 고립된 바닥에서의 절규로 한 시기를 다 보내야 했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자랐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겠단다. 나와 아내가 목표로 했던 건 ‘비정규직 처우 개선’ 따위, ‘불법파견 정규직화’ 따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투쟁은 패배 했다. 이미 낡은 운동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 내가 참여했던 운동의 몰락은 아주 감각적인 통증으로 내 살에 박혀 있다.
여드름이 훑고 지나간 울퉁불퉁하고 쭈글쭈글한 내 얼굴의 거죽을 만지면 당분간 언어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오늘 이기지 못했지만 전망을 포기하지 않았음으로 변화는 가능하다고, 전망은 두꺼운 원전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이들의 감각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성이 등하교를 시켜주면서 짬짬이 대화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어렸을 적, 아들 문성이는 집회와 농성장이 자신의 놀이터였다. ‘비정규직 철폐’ 머리띠를 묶은 투쟁 소년, 조문성이었다. 나보다 훌쩍 커 버린 문성이가 어느 날, “아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고 내 삶을 비평해줬다. 그래 내가 잘하지 못했던 것, 아들 문성이 세대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 자신을 민주주의로 조직하고 평등의 새 지평을 열어가기를, 허공을 안전지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드러누워 기울어진 생의 불안정성조차 수평을 잡을 줄 아는, 위험 작업은 언제든지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로부터 시작해 “삶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역능을 숙련했으면 좋겠다. 세계를 운영할 수 있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비상했으면 좋겠다.
잠시 갈 곳 몰라 정처 없던 날, 박영근 시인 기념사업회에서 ‘박영근작품상’에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박영근작품상’이 허명이 되지 않도록 살겠다. 살아내는 게 찌질해질수록 자본주의 밖을 상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남은 생애, 내 시의 역할이 있다면 문성이 세대의 새로운 투쟁과 혁명을 지지하고 조력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낡지 않는 것이다. 박영근 선배도 이 싸움에 함께 해주시리라 믿는다.
[심사평] 고도로 응축되었으며 시적 압축성이 뛰어난 노동시
4455일! 13년이라는 국내 최장기 투쟁사업장 콜텍(콜트는 투쟁 중임), 노사는 최근 부당해고에 대한 협상을 갖고 명예복직 등에 최종 합의했다. 합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재 우리 사회의 암울한 노동 현실을 여실히 볼 수 있다. 당연히 사과해야 할 사측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박영근 시인은 60년대 산업화 이후 암울한 노동 현실을 가장 먼저 직시, 노동시의 다양한 길을 열고 닦아놓은 시인이다.
노동 현실의 암울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왔고 앞으로 더욱 심화되어 갈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문제 담론 전쟁에서 자본이 노동을 이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시는 노동의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 아울러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노래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확장과 질적인 제고, 유연성 등이 절실히 요구된다. 노동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 독자와의 친밀성과 서정성을 더욱 받아들여야 한다.
추천위원들로부터 받은 추천작들에 대한 논의에서 “지난 박영근작품상의 수상작들이 너무 예리하고 직설적 경향이 있었다. 슬픔이 내재되어 있는 젊은이의 언어도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좀 더 유연한 시 쪽으로 선정해나가는 것이 박영근의 시를 확대시키는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 등이 제시되는 등 논의와 고심 끝에 <위험에 익숙해져 갔다>를 수상작으로 합의, 결정했다.
수상작은 짧지만 고도로 응축되었으며 시적 압축성이 뛰어난 노동시다. 현장 노동시의 중요한 덕목인 체험과 경험을 최대한 살렸으며 노동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높다. 아울러 암울함이 짙어가는 노동 현실에 대한 공감대의 폭을 대폭 넓혔다.
- 심사위원 : 염무웅(평론가), 고형렬(시인), 정세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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