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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구간 / 박승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 진짜 버리는 거다.

길은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끝날 때 비로소 끝난다.

그 살아 있는 한 구간만을 우리는 뛸 뿐이다.

저의 몸이 연필심처럼 다 닳을 때까지 어떤 흔적을 써보는 것인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부여받고 평생,

눈밭에서 제 냄새를 찾는 산 개처럼 킁킁거리다가

자기 차선과 남의 차선을 넘나들며 가는 것이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까지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오는 파도처럼

자기를 뒤집기 위해 자기 목을 조우지만,

눈밭에 새긴 수많은 필체 중 성한 문장은 없고

잘못 들어선 차선에서 핏덩어리로 뭉개지고 있는 몸.

쏟아 붓는 백매(白梅)는 얼굴에 닿자마자 피투성이 홍매(紅梅)로 얼어붙는다.

자신의 영정(影幀)을 피하듯 모두들 눈길 옆으로 붙지만

이 신랄한 현장이 현실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릴 때까지

보석(寶石)이 아니라 보속(補贖)의 언덕에 닿기까지

남의 차선과 자기 차선을 혼동하며 가는 것이다.

유족도 없이 혼자 장지까지 가보는 것이다.

 

 

 

[수상소감]

 

박영근 시인이 백석의 말마따나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버린 지 만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좋은 시인은 활자를 넘어서서 그의 죽음까지가 그의 마지막 시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영근과 김남주 시인은 우리 후학들에게 가장 시적인 죽음의 한 전범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역사적 역주행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리고 이것을 뒤집을 동력을 상실한 채 세월호그 자체의 역사를 견뎌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차라리 두 시인의 죽음이 부럽기조차 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까지도 박영근 시인이 살았다면 어떤 시적 몸짓을 보여주었을까? 생각만으로도 오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이런 점을 미리 예견한 듯 박영근 시인은 채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박영근 시인은 우리 현대시사에서 노동시 혹은 노동자 시인이라는 칭호를 평론가들로부터 맨 처음으로 승인받은 시인이지만 그의 노동시는 여타의 노동시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 미학세계를 선취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시적 지향점은 노동자 중심이라는 편협성을 벗어나 인간해방이라는 보다 더 보편적 가치로까지 확장되었으며 더 주목할 점은 기존의 노동시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상투적 형식미를 끊임없이 갱신하려고 했던 그 파괴성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상식화된 미학을 끊임없이 전복하려 했던 박영근 시인의 이런 전위성혹은 파괴성이야말로 박영근 시의 핵심이며 그가 가혹하리만치 외부와의 싸움 못지않게 내부진영과 불화하게 한 동인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내·외부에 걸친 하나의 불덩어리였으며 그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을 추슬러보면 그의 때 이른 죽음은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제2회 박영근작품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올바른 문학적 방향성에 대해서 늘 고심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 상이 그렇게 이상하지만도 않다는 생각입니다. 박영근 시인은 살아 있는 매 순간 현실 혹은 문학의 보수화와 끊임없이 충돌했고 마침내 죽음까지도 하나의 시로 완성해버린, 여전히 제 문학과 문학적 죽음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고독해지겠습니다. 그래야만 박영근 정신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nefing.com

 

 

 

[심사평] 심미성과 현실성의 양 날개로 균형 잡힌 작품

 

박영근작품상을 두 해째 진행한다. 우리는 박영근 시인이 시와 삶으로 보여주었던 뜨거움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시의 완성에 있어서나 현실의 싸움에 있어서나 항상 최선을 지향했다. 시의 완성이 현실의 완성이고 현실의 싸움이 시의 싸움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박영근작품상은 시나 현실 어느 한 편에 기울어져 있지 않은 작품에 주어져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문학사를 채워온 문인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문학상들이 점점 더 그 이름과 무관한 문학적 편향에 기울어지는 때에 문학상의 이름에 걸맞은 작품을 찾아내고 격려하는 일은 더욱 더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다. 박영근의 이름으로 상을 주는 일은 한 해의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의미 외에도 그 삶의 현실적 치열성을 평가하는 일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물론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좋은 현실을 예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추천위원들이 넘겨준 작품들을 열독한 후 심사위원들은 세 작품에 주목했다. 살아 있는 구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백한 번째의 밤이 그것이다. 모두 자신들의 시적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살아 있는 구간은 생명의 실존적 의미와 그것의 현실적 긴장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눈길을 걷는 사람들의 풍경을 삶의 고난과 연결시키면서 쏟아 붓는 백매(白梅)는 얼굴에 닿자마자 피투성이 홍매(紅梅)로 얼어붙는다고 시인이 쓸 때, 이 작품은 삶과 고통을 시적 상승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특별하다. 점점 역사적 퇴행의 길로 치닫는 세상에서 삶과 시를 온전히 일치시키고 있는 시인이 현실의 부조리와 삶의 고난을 위트와 재치로 극복하는 장면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독자들은 고난당하는 시인의 영혼과 가족 때문에 안타까움에 사로잡히면서도 세상을 굳건히 견디는 시인 때문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시인이 이럴 수 있는 것은 그의 강인한 현실의식 때문인데, 그 투사적 태도가 아들 앞에서 한없이 평범해지는 장면은 묘한 페이소스로 귀결된다.

 

백한 번째 밤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감각과 고통을 승화시키려는 동화적 상상력이 잘 결합된 작품이다. 시적 애매성이 동화적 투명성과 충돌하면서도 의미의 확산을 야기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신비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시가 그 신비를 잃지 않는 곳에서 미지의 세상이 환기되는 것이라면 바로 그 환기력이야말로 문학의 한 역할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살아 있는 구간을 박영근작품상의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심미적 완성과 현실적 대응력을 모든 시의 양 날개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은 그 양편을 잡은 채 균형감 있는 언어 능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작품이 어떤 눈에 띄는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 작품이라는 다소간 애매한 기준이 심사위원들의 견해를 통일시켰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시인이 곧 박영근의 이름으로 축복받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또한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정희성(시인), 나종영(시인), 정세훈(시인), 박수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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