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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푸른 단비가 되어 / 곽민관

 

비가 내리는 유월이 오면

그대들의 신음이 들립니다

비좁은 어깨로 책임을 짊어지고

사그락대는 풀소리에도

잠 한번 들지 못했던 그대들의

비명이 들립니다

 

때로는 비관하고

때로는 저주했을 그 운명

민들레 씨앗처럼 사라지고

하루살이처럼 고통스러웠을 그 운명

 

비가 내리는 유월이 오면

그대들의 신음이 들립니다

사그락대는 바람소리에도

잠 한번 들지 못했던 그대들의

눈물이 보입니다

 

하루하루 전우의 얼굴이 뒤바뀌고

매시간 포탄구덩이를 메우는 주검과

눈 깜빡이면 날아드는 포화 속에

그대들은 천 갈래 만 갈래 찢ㄱ나가

유월의 비가 되었습니다

 

그대들을 보낸 어머니는

뒷마당에 또독이는 빗방울에

황급히 문을 열어보고

모진 주름만 늘어가셨습니다

밤이면 뒤척이다

허전한 옆자리에 눈을 뜬

그대의 아내는

모진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긋 미소만 지었지요

 

그대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직도 가파른 산등성이에 매달려

지천으로 메아리치는 비명이 들립니다

헐벗은 민둥산의 구덩이 속에서

그대들의 설움이 들립니다

 

울지 마소서 호국영웅들이여

빗방울이 된 그대들은

메마른 강토를 적시고

푸른 생명을 피워냈습니다

초근목피에 헐벗은 가족을 감싸안고

그들을 배불렸습니다

포탄에 벗겨진민둥산을

부드러이 꽃 피우고

수많은 아들, 딸에게

꿈의 그릇을 물려주었습니다

 

부디, 울지 마소서 호국영웅들이여

그대들이 잠든 대지에서

그대들을 기억하는 우리들이

그대들에게 한없는 축복을 드리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토담에 기대어 / 김영신

 

봉인된 편지가 도착했다

나팔꽃 넝쿨이 서로 껴안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한다

문서 하나 열리고 하늘이 까맣게 무너진다

죽음도, 부상도 아닌 실종

유월의 전쟁에서 사라진 남편을 기달는 동안

여자는 담장에 기대어 나팔꽃이 되엇다

전선에서 돌아온 남자의 편지와

일기장이 꽃잎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여자는 아침마다

토담에 기어올라 태양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마법에 걸린 여자는

시대를 되돌리는 주문을 외우며

양은밥상의 다리 네 개를 폈다

접이식 다리에서 기울지 않는 평평함을

행복이라 생각했던 여자

평행을 벗어나 수직을 만나고 싶었다

여자는 나무보다 더 높이 귀를 열고

우체부의 자전거 굴리는 소리를 기다린다

 

양푼이 가득

풋나물과 밥이 서로 부대끼며

여자를 여자답게 살라 하지 않는다

그저 비빔밥처럼 섞여 감정도 열망도 없이

두리뭉실 청춘을 비비며 살라 한다

아리랑 고개에서 애간장 태우며

저고리 섶에 꼬깃고깃 시간을 숨겼다

하늘을 잃은 자와 하늘을 가진 자 틈새에서

설익은 밥알 씹듯 살아야 했던,

 

가난한 담장 아래 그해 여름의 비명

여름꽃이 되어 소복하게 피었다

전사자 명단에도 없는 안개 같은 실체를

기다리며 나팔꽃이 된 여자

몇 번의 공화국이 바뀌어도 깜깜한 무소식

세상 풍조에 눈 감은 여자

밤이면 남자의 편지를 외운다

비석 하나 세울 수 없는 답답한 육십여 년

행여 생명으로 남아 있길 바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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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비석 / 고영윤

 

아버지 반듯하게 누워계신다
생전 소원하던 그 곳에, 아버지
명조체로 또렷이 새겨져 누워계신다
묘지를 찾아갈 때마다 길을 잃는 나를
조용히 꾸중하는 넓게 도열한 비석들
언제나 아득하고 엄숙한 풍경 속
아버지 꼿꼿하게 서 계신다

 

생물 오른 진초록의 수풀들이
제 키를 우쭐대는 6월이 오면
여름의 초입보다 먼저 나를 방문하는
우뚝 반듯한 아버지의 비석
사나운 신록의 눈부심 속
나는 제일 먼저
아버지의 생생한 기억을 솎아낼 것이다
아버지의 풀물 든 젊음을 찾아내어
차가운 물수건으로 꼼꼼히 닦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반성해도 되돌아서면
잊어버리고야 마는 묘지 가는 길
엄격하게 각이 진 비석으로
육신을 버려서도 끝끝내
일렬횡대, 일렬종대
끝 간 데 없는 진군의 당당함
태양의 사열의 받는
무수한 아버지들의 생전
행군의 군화 발자국 소리 듣는다
지치지 않는 생솔가지 알싸한
젊음의 고결한 용맹을 엿 본다

 

영원히 닳지 않을 희생의 행진소리
서로를 달랬을 군가의 콧노래 소리
6월의 바람 속에 섞여 먼 하늘까지 다다를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거운 마음에 어렵게 뒤돌아 본
반듯이 서 계신 아버지의 비석
나를 배웅하신다.
여전히 엄숙한 군가소리에 맞춰
태양, 태양 속으로 전진하시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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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이야기 / 김정은


그대들의 이야기는 이제 먼 이야기

종이에 슬쩍 베인 손가락에
새 구두 맞지 않아 까진 발뒤꿈치에
다른 이의 상처는 얼른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교과서 어느 부분 몇 페이지로
학교시험 몇 문제 시험점수 얼마로
추모의 것이 아닌 그대들을 암기하는 우리에게

그대들의 이야기는 실은 가까운 이야기

광화문 광장 붉은 물결에 어우린 채
남녀 노소 노사 지역 뭐하나 재지 않은 채
그저 대한민국 한 목소리로 응원하는 우리에게

해외에 가면 “I’m from Korea.”라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라고
목소리 드높여 Korea라고 말하는 우리에게

그대들이 없었다면 못 썼을 이 한마디,
우.리.나.라.
너무도 당연히 쓰고 말할 수 있는 우리에게

숭고한 피와 숨이 얽혀 죽지 않는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

그대들의 이야기

 

 

 

 

 

걷다. 그리고 걷겠다. / 이승리

 

그대들이 생(生)과 바꿔주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서권(書卷)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책장에 우리의 고개는 한없이 아래를 향합니다.
눈물로 적셔진 그 곡절을 알기에 쉬이 넘겨버리지 않겠습니다.
꾸깃꾸깃 접히고 접혀 희미해진 “조국”이라는 글자 행여 지워질세라
덧새기고 덧새겨서 지워지지 않는 활자로 남기셨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펄렁펄렁 날뛰는 날붙이 위에서 살이 쪼개지는 고통으로 지켜낸 백의 적삼은 한지가 되고,
타버리고 흩어져 재가 된 혼(魂)의 넋두리는 붓의 춤사위를 따랐습니다.
흘렸던 핏빛 노심(勞心)은 위편(韋編)되어 단단히 매어졌고,
그렇게 우리네의 손에서 역사의 초석으로 태어났습니다.
행하셨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갈피표가 되어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잊지 말라 허나 잊지 않는 것만 하지는 말라 하셨던 당부를
행여 거친 소소리 바람에 놓쳐버릴까
아린 가슴에 옭매어 두었습니다.
놓지 말라 하셨던,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 그 깨달음을 알기에 멈춰있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채울 그곳에는 더 이상 영루(零淚)를 채우지 않겠습니다.
광명(光明)이라는 새싹이 움틀 수 있음은
문드러져 사라지는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 거름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그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립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워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리움보다 더 큰 간절함으로 존경하겠습니다.
보듬어 주시는 바람결을 느낄 수 있기에
숨 쉬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겠습니다.
쌓이는 한 걸음 한 걸음 헛되지 않도록
귀한 족적(足跡)으로 함께하겠습니다.

 

 

 

 

 

뜨거운 어느 날에 / 이초롱

 

신림동 쪽방,
자그마한 창문 틈으로
넘치는 햇살이 나뒹구는 오후면

지릿한 오줌냄새를 덮을 듯
천정에 피어난 곰팡이꽃을 덮을 듯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평온한 시간인지라
김영복 할아버지는 눈물이 난다했다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 덩어리처럼
벌어지는 마음의 상처를 다시금 깁는 시간,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는
포탄소리와 비명소리에
오줌지린 할아버지를 꼬옥 안아주지만

죄 없이 잘려나간 팔이 서러워
전우들의 식어가는 시체가 서러워
삭히고 삭혔던 고름같은 기억이
오늘같이 불쑥 찾아오는 날이면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죄스럽게 울먹이던 당신이었다

유월 이십오일,
보따리 이고 가는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뒤엉키는 포탄과 함께 시작된
피바다의 전쟁

서로를 밟아야하고
서로를 베어야하는 시간
달궈진 총뿌리에서 흩어지는
혈흔의 멍울은
내달리는 두려움마저도 잘라버리고

불은 콩 주워 먹으며
곯은 배를 다독여 봐도
헛헛한 마음속을 달랠 길 없어

서럽게
너무나도 서럽게 울던 기억들
죽어도 죽지 않는 지독한 기억들

울음에 지쳐 잠이 든
당신을 바라보다가
아물듯 아물지 않는 상처를 보듬어본다

괜찮다...
괜찮다...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뜨거운 어느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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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는 잠들지 않는다 / 조미희


현충원의 주말 아침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문을 연다.
이 땅의 가장 숭고한 숨결
이 땅의 가장 뜨거운 심장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려고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곳은 묘지가 아니다
이곳은 죽은 자의 휴식처가 아니다
이곳은 통곡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비애의 땅이 아니다.
이곳은 선홍색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이름 모를 병사가 잠들지 않았다.

어머니를 부르며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며
애통하게 죽어 간 그들의 주검은 이곳에 없다.
부러지고 터지고
총탄이 뚫고 간 몸은 없다.
어느 이름 모를 야산의 아카시아 꽃향기가
희미하게 흐려지는 정신을 모질게 붙잡던
그날의 어린 병사는 없다.
밤마다 정화수 떠놓고 삼백예순다섯 날
두 손 닳도록 기도드리던
그 아들은 없다.

 

여기는 조국을 위해
살을 내어주고
뼈를 내어주고
피를 내어준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들만 있다
거친 폭풍우 온몸으로 막아 준
용감한 조국의 아들들만 있다
어머니의 기적의 기도로 키워진 아들이
이 강산에 개나리를 피우고
진달래를 피우고
우리가 밟지 않은
골자기마다 온갖 꽃을 피우게 한
그 아들이 있다
이 강산에 제 몸의 혈액을 송두리째 수혈해
21세기의 꽃을 피우게 한
장하고 장한 아들이 있다.

 

어머니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이
이 땅에 행복의 씨앗을 뿌리며
김 병사 이 일병 박 중사의 이름을
부르며 따뜻한 현충원의 봄날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군인이 있다.

 

세계 속에 겨레의 꿈을
꽃 피워준 대한민국의 군인이여!
그대들 군인은
아직도 잠들지 않고
조국의 심장에
징소리처럼
북소리처럼
둥! 둥! 둥!
힘차게 울립니다
겨레의 혈액을 타고
유구히 흐릅니다
자랑스러운 대한의 군인이여!

 

 

 

 

 

아직도 뜨거운 노래 / 황인숙

 

여기,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꺼지지 않는
너무도 뜨거운
노래가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다비식처럼
장엄한 황혼이 일어서고
유월의 뜨거운 한철이
보릿고개 사이로 걸어올 무렵
한사코 풀잎을 흔들어대던
바람의 소원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님이여, 여기 뼈를 묻으셨나요
고향을 손질하던 손 뼈 마디에
방아쇠 걸고 분주히 나섰던
곧은 그 뼈를 여기 묻으셨나요

님이여, 여기 꿈을 심으셨나요
구름처럼 솟아오르던
그 꿈을
애국이라는 제단에 심으셨나요

고향 동구(洞口)를 작별할 때에
울컥 터지던 첫사랑 소녀의
울음을 뒤로하고
군가에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고
정열로 불타는 이글거리던 눈빛

아, 장렬하게
타관 땅 하늘 아래
죽음으로 맞이하던
사나이의 소망이
여기 잠들어 있나요

 

일찍이 선조들은
묘향산 제단에
향연 올리며
곰발바닥 같은 손 비벼
역사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말라고
단일(單一)하라 백의(白衣)하라
그 음성 귓가에 아직도 쟁쟁한데

 

언제나
나의 적(敵)은
내 안에 있어
님들을 맞아 줄
따뜻한 검은 흙 한줌
보태주지 못한
부끄러운 내가 적이었습니다

 

피비린내로 얻어낸
자유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
님의 꿈과 소원을 져버린 채
미온(微溫)했던 나의 무관심을
여기 제단에 사르겠습니다

 

아, 여기
종이에 옮기기엔
너무나 뜨거운 노래를
님들을 기리는
제단에 올립니다
님이여!
길이길이 영복(永福)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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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하는 말 / 이은주

 

작지만 肥沃한 分斷의 땅
이 땅은 歷史가 쓰이기 전부터
탐내는 사람들이 많다 하였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領土를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싸워야했고
무수히 희생해야 했다하였다.

 

아들..
내 아들도 그러하였다.
어미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
적의 총성에도 한 발자국 물러섬이 없었다하였다.

 

아들..
혹시 보고 있느냐.
네가 떠난 이 땅에도 꾸역꾸역 봄이 왔다.
어느새 벚꽃은 가느다란 입김에도 떨어질 정도로 흐드러져 있고,
앙상하기만 했던 나무에도 어느새 푸른 빛이 돌더구나.
하지만 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웃음이 만들어지지 않고
푸릇한 나무를 보고도 눈물이 난다.

 

누군가에게는 유난히 더디게 찾아 온
이 봄이 야속할지 모르겠으나
이 봄 햇살을 어미 혼자 받고 있자니
자꾸 고개가 밑으로 꺼지는구나.

 

먹을 게 하도 없어서 풀뿌리를 삶아 먹던 보릿고개도,
이 봄 보다 길지는 않았단다.
전쟁으로 반이나 무너져버린 네 外家에서
옷섶으로 파고든다는 봄바람을 피할 때에도,
이 봄 보다 서럽지는 않았단다.
몹쓸 傳染病을 이기지 못한 내 아버지 어머니를
진달래 가득한 산 속에 내 손으로 묻고 내려오던 해에도,
이 봄 보다 잔인하지는 않았단다.

 

양지 바른 곳에 어미의 것 보다 먼저 만들어진 네 무덤을 본다.
피를 토하며 불러도 대답 못 할 뚜렷한 네 이름 석 자를 본다.

 

네가 잠들어 있는 이 곳은
햇살이 잘 비춰 따뜻한, 네가 지킨 땅이란다.
네가 잠들어 있는 이 곳은
비가 내려 땅을 다져주는, 네가 지킨 땅이란다.
네가 잠들어 있는 이 곳은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네가 지킨 땅이란다.
네가 잠들어 있는 이 곳은
純白의 눈이 곱게 쌓이는, 네가 지킨 땅이란다.

 

이제는 아들을
볼 수 없다하였다.
상처 나지 않은 이 땅을 어미에게 전해주려
아들의 눈은 마지막까지 적들을 향해 있었다하였다.

 

아들이 끝까지 지켜준 이 땅 위에서
어미는 자랑스럽게 살고 싶다하였다.
아들이 지켜낸 이 땅과 더불어 늙고 싶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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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김희숙

 

바람을 뚫고 올라온 더운 기운은 누구의 혼입니까
하늘을 붉게 달군 총검의 시위에 두만강 붉은 물은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몸을 엮어 다리를 놓은 이는 지금 해 아래 없지만
북간도 어귀마다 비석은 뜨겁게 밖을 데웁니다. 조선이 무겁게 울고 있을 때
인형 옷을 입히던 앳된 손은
짐승처럼 묶이어져 이역만리 끌려가고
집은 무너져 내려 세상이 모두 한 길이 되었습니다.
벼랑 위로 올라가 뱀을 좇아 산을 죽였습니다 사과의 맛은 슬픕니다.
얼굴빛이 어두운 놈이 일장기에 서서 검은 점을 치며
흙 묻은 손에서 동전을 앗아갑니다. 바다를 건너온 이를 위해 길을 닦는
저 부지런한 농부는 자식을 모두 길에 뿌렸습니다.
누구의 울음일까요?
해가 물위에 섰는데 구름이 와서 앞을 가립니다.
별을 헤아리며 용정 흘러가는 물길에 울고 있는 이는
누구의 모습입니까?
해란에 서서 동주는 일송정을 쳐다봅니다. 남녘에서 날아온 물새가
하얗게 걸려 한강서 가져온 물을 눈물처럼 토해냅니다.
시선을 가리는 은 줄기 비가 나립니다. 빗물은 온 마을을 덮었을 때에야
제 몸을 거두었습니다. 젖지 않은 것이 없지만 구름을 젖히고 웃는
햇살은 어미의 얼굴 입니다.
핏물에 젖은 오랑캐를 넘어 온 이는
저마다 가슴에 꽃씨를 품고 왔습니다. 이름을 잃고서
푸른 역사가 톱날에 베어져 떨어지는 모습은 꽃씨를 품은 이에게는
간을 쪼이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
장백산맥에 올라서서 푸른 물줄기를 마십니다.
가슴에 뿌리를 내린 것이 나무의 가시
라도 찔려서 흘러가는 저 물에 섞어봅니다.
강물이 히드라의 머리처럼 힘차게 아래로 나갑니다.
꽃잎도 따라 갑니다.
연변의 떨리는 가슴은 새벽길을 뚫고 먼저 울리었습니다.
동주는 하염없이 떨어지는 별을 지켜 섭니다.

 

 

 

 

 


떨어진 장갑 한 짝 / 윤재훈

 

지리산 세냇골,

보아라, 아들아
저곳이 네가 후퇴하는 적들을 쫓아
내달리던 곳이란다

집에 남아있던 가족
떠날 때 배가 고프다고 보채던
너희들이 눈에 밟혀
누구보다도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싶었단다

저 정상까지 맨 먼저 치달아
태극기를 꽂고 싶었단다

화순읍을 한참 지난 어느 터널 앞
입동이 지나고 빈 가지들만
찬바람 속에서 떨고 있다

아들아, 보아라
저 곳이 이 아비가
언 손을 호호 불며 넘어가던 곳이란다

이 떨어진 장갑,
그날 능선을 넘어가면서 끼었던 것이란다
꽁꽁 얼어붙은 개머리판
비록 제대로 막아주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동상 걸리지 않았고,
이만큼 너희들을 키울 수 있게 해주었단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나는
너희들을 보게 해주었단다

오늘도 봄꽃 피었다
신작로 따라
구비 도는 진달래들이
태극의 모습을 닮았다

그날처럼 와와,
소리를 지르면 정상으로 오르던
전우들의 모습이
봄꽃으로 붉디붉게 피었다

 

 

 

 

 

다시 부르는 노래 / 김현규

 

그곳이 어디였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북쪽 하늘을 향해 볏단처럼 쓰러지던 친구여
죽어서도 반반하게 묻히지 못한 서러운 땅에
말없이 흘러가는 푸른 강물이 되어야지
빈 들을 스치며 일어서는 초목들을 향해
살갑게 손사래 치는 한 자락 이슬이 되어야지
얼큰하게 취해 뗏목을 타고 되돌아오는
힘없는 사람들의 목덜미 뒷등이 따스한 강 언덕에
외롭게 누워 슬픔이 되는 별이 되어야지
너의 죄라면 조국을 뜨겁게 사랑한 죄
아무도 너를 미워할 수 없고
아무도 너의 보랏빛 꿈을 꺾을 수는 없지만
기억속에서 사라져 간 얼굴들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가늘하게 부서지는 햇살이 되고
누군가는 가슴 아픔도 커가는 눈물이 되어
별들도 몸을 던지는 그리운 땅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풀뿌리로 돋아나야지
가래톳 멍울이 깊숙이 박힌 이 땅의 강물 위에
오늘은 누가 또 뜨겁게 몸을 던지는지,
풀 한포기 이름없는 네 쓸쓸한 무덤가에도
어서 돌아오라고 손짓하는 강의 울림이 커지고
저렇게 굽이굽이 홀로 깊어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 푸른 물결 허기지게 밀려오는 소리로
다시 뜨겁게 불러보는 어머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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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닦으며 / 서일순

 

지나간 길마다 자국이 남듯
아버지 가신 날 눈물로 판각된 칠월 스무하루,
피붙이들 꿇어앉아 향불을 사르는 데
강산을 훨훨 날아 당신 여기로 오십니다
저문 어머니 흰 머리 이 밤 따라 가지런하고
아버지 생전의 모습 목메게 그립습니다

유복자 숨소리를 움켜쥐고 홀연히 전장으로 떠나신 아버지
푸름이 짙던 그 해 칠월 스무하루
당신은 천둥 속을 달려 무형의 그림자로 오셨습니다
그림자를 쥐고 사는 일은 땅을 떠난 씨앗이 긴 겨울을 지나는
것이라, 당신이 떨군 씨앗들 아리고 적막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때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늘
곧은 줄기로 성장한 씨앗들은 밤이 이슥토록 큰 절을 올립니다

자욱한 향내를 따라 몸 속 깊이 오시는 아버지
오늘 따라 어머니 눈빛 깊고 그윽합니다
어느덧 육십 년, 유복자 아들과 그의 아들과 또 제 누이의
46 2010 보훈문예작품 당선작 모음
뼈대들에서 당신의 눈빛과 체온과 숨결이 살아오는 밤,
어머니 휑한 가슴으로 밤새 큰 별 하나 들어찰 모양입니다
아버지, 앞마당 적조한 감나무 아직도 당신을 기억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구름을 밟고 와 감잎을 들추며
당신이 다녀가시는 것을 저는 압니다
감꽃이 하얗게 벙글어질 때마다 당신을 기다리며 몸을 추스르던
저 묵은 가지들, 지난해에도 서리 맞은 홍시들 눈발이 날리도록
차마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맑은 종헌終獻에 첨작添酌을 올립니다
떨리는 촛불 사이로
아버지 흙가루 날리며 뛰어가던 군홧발 소리 들립니다
가문을 덥히는 당신 그림자가 산하를 흔들어 깨우는 밤,
먼 들녘에서 벼이삭들 물 긷는 소리 아슴아슴 들려옵니다
당신의 너른 그림자 빛나게 닦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당신들 잠드신 그 자리 / 송치숙

 

매시근한 봄철이 되기도 전,
이 땅위에도 대지의 여신은
슬그머니 돌아와 평온한 손길로
가칫해진 토양을 어르고 얼러
함초롬한 깃털 어루만지듯
소소리바람 속에서 꽃조차 피워냅니다.

아군과 적군으로 살다가 섞사귄 처지
톡하고 손가락이라도 튕기면 뿌리 뽑힐
가스러진 고주박 삶이지만,
여신이 당신들에게 청하는 서러운 갈치잠은
한결 고즈넉하고 결결한 겨레의 꽃입니다.

총구에 스러져 썩어진 조국의 젊은 낯
스리처럼 멍울 선 마음결에
알알함이 마음겹습니다.
그리하여,
여신은 산골짜기에서 피어나는 비안개로
당신들의 허수로운 등에 입힐 떼를 허락하였습니다.

당신들 잠든 대지 위,
겨레의 강이 흐르고 흘러
조국의 계절이 피고 지는 동안

불볕이 당신들 잠을 설치게 할 때에는
복성스런 밑턱구름을 불러
산모롱이를 휘둘러 퍼지게 하였고,
첫추위가 당신들 잠을 깨울 때에는
두터운 이불인 양 애살포시
눈꽃을 덮어 주었습니다.

마른장마에도 밑동이 굵다란
나무에 농익은 초록이 피듯
당신들 조국의 낯꽃도 환하게 피어날
그 날을 아껴 두셨습니다.

갓맑은 숫눈길을
겨레의 꽃으로 옷을 해 입은 나무처럼
당신들이 염원하고 지키던 겨레의
조국의 미래를 신은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밤새 내린
도둑비에 사위는 정갈해 질 것이므로
당신들 잠드신 그 자리에서
당신들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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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戰士의 노래 / 류우현

 

저기 낙동 샛강은 흐르고
쑥향기 바람에 날리는 황토 언덕에
나는 외로운 백골로 누워
그대를 향한 메마른 슬픔으로 외치노라

 

붉게 스러져간 청춘의 꿈들을 위해
목마른 산비둘기야 조곡을 불러다오
나는 황폐하게 한 번 죽어서

그 치열한 밤이라도 영광을 기렸나니

 

이젠 그 누가 외로운 동산에서
나를 위해 민들레 씨앗을 날려다오
내 주검이 흙이 되고 바람이 되어도 좋으니
다시 아름다운 조국을 찢지 말아다오

 

이지러진 상흔의 비참을 회상하며
너의 흰 손수건에 금수산천을 수놓아다오
만나서 흘릴 포옹의 눈물을
너의 손수건에 적실 수 있게 해 다오
 
유잔자(遺殘者)가 못 다한 행복을 위해
이제는 작은 샛강 가에서 트럼펫을 불어다오
갈대들의 춤이 환희로 어우러져
흩어진 강과 산이 부여잡을 수 있도록

 

건조한 지평의 노랫가락 같은 뼛조각일지라도
조각나지 않을 나의 꿈은 善하여
오직 어여쁜 한 처녀를 기다리듯
인고의 세월 불태워 심장 같은 하늘의 혼이 되었노라
 
화약 내음 추억에서 멀어지고
따스한 두 개의 손길이 고락을 나눌 그때까지
백두대간 휘돌아 얼싸안을 그날이 오기까지
영원토록 죽지 않을 사랑이 되어버렸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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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면 옷깃을 여미어 볼 일이다 / 이창수

 

유월이 오면 그대

풀잎을 스치거나

상처 난 나무뿌리를 더듬게 되면

고약같이 검게 엉켜진

피딱지를 만질 수 있으리

아니

아니

심장이 박동하는 붉은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

 

그러면 그대

저렇게 푸른 산하가

희생으로 남겨진 역사라는 것을

검붉은 피를 흘리며 사라져 간 유월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

 

한반도 어느 그늘진 골짜기에

외로운 원혼 한 둘 없을까만

때때로

유월의 하늘이 먹구름을 몰고 와서

비라도 뿌릴 때면

오래된

함성과 땀과 피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리

 

더러는

빗물로 씻겨진 흙더미 속에서

상처 난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으리

희생으로 남겨진 조국을 느낄 수 있으리

 

그대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에서

땀과 피의 흔적 같은

이름 없는 꽃이라도 만나게 되거나

외로운 산새의 울음소리라도 듣게 되면

옷깃이라도 여미어 볼 일이다

 

결코

세치 혓바닥으로 꾸며진 미사여구로만

산화한 유월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리,

 

 

 

 

 

묘소 앞에서 / 최원택

 

어버지,

아직도 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 아파트에 있으면서도

호수가 다른 물을

닫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시기에 짐짓

세워진 휴전선 앞에서,

우린 아직

육중한 그 무엇을

습관처럼 겨누고 서 있진 않습니까

조붓한 땅의 일부를

순국의 묘지로 내어주고도,

그 처참했던 실황을 눈물로 담아 몇 십년

이루 못 막을 강으로 흘려보내도,

아버지,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무덤 가,

자잘한 풀잎들처럼

고요히 웃자랄 희망들,

아, 그 말없는 함성의

파도들이, 산맥처럼

하나로 뒤덮여갈 세상을

회중에 품은 채,

힘없이 꺽이고 스러져간

아버지와 아버지, 또 그 아버지들께

이 세월의 눈물 한 잔 정중히 받아 올립니다

이제 선지처럼 굳은 피, 강물로 씻고

그 원망마저 흘려버리면

써레질한 논 위에 벼가 자라듯

이곳에도 곧 청명한 봄이 움터 올 것입니다

붉은 물결의 두만강, 압록강의 추억은

드넓은 마음으로 품으시어, 부디 드센 물결로

파도치는 통일의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아버지,

내후년에 다시 뵐 땐

양 손 가득 그 바다를

안고 오겠습니다

살아생전 눈부셨던

미소와 같이

 

 

 

 

전몰장병을 기리며 / 유영택

 

노랗게 흩뿌려진 산수유 꽃그늘 아래서

너나들이를 하던 동무들이

별을 닮은 별꽃처럼 갓맑은 웃음을 웃던 그 시절,

두견이 품은 연분홍, 진달래는 한을 피워내었을까

 

먼지잼으로 녹음이 피어난 즈음,

무슨 일이 터졌기에

터구사 좋던 씨동무들은

서름한 눈빛을 주고 받고,

푸접이 좋은 이웃은 스스러워졌을까

 

유월의 물쿤 날씨에

겨레의 쌈싸우러 떠나던

젊디 젊은 사나이들

우물같이 웅숭깊은

서늘한 그 낯빛

 

그날의 총탄은

고수레하듯 휘날리던 숱한 이파리와 같이

시울 고운 가지 코숭이의 칠석물 한 줄금 같이

그 젊은이들을 향해 쏟아졌을까

 

한낮의 작살비처럼 쏟아지는

그날의 포탄은

꽃 송아리처럼 머금었을 그들의 그리움을

어떠한 이유로 짓밟았을까

 

어둑발이 깔리는 쓰렁한 사위가

막새바람에 훌치듯 서걱댈 때에는,

쓰러진 장병의 낯을 가린 잎사귀는 무배처럼 춤을 추었을까

 

뉘누리 몰듯 돌개바람이 쓸고 간 전쟁은

사나운 손떠퀴를 만난 민족에게

졸가리에 설핏 앉은 가을날 노을빛 해처럼

애오라지 설움만 남기었을 뿐

 

하지만

도도록한 살갗을 잃었어도

배냇짓하는 아기의 표정을 짓곤

철겨운 바람을 맞으며

그 젊디젊은 사나이들은

매오로시 조국을 기루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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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앞에서 / 정재혁

 

저녁이 휴전처럼 찾아옵니다

허공은 말이 없습니다 조용히 어두워지며

제 몸의 흉터를 지우낼 뿐입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진군합니다

바람만이 그 뒤를 군가처럼 따라갑니다

온 마음으로 육중했던

그 발걸음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흰 꽃처럼 희미해지는 시간

바람은 차고

묘비 앞에서

몇몇은 눈물을 떨굽니다

 

한참을 앉아

비석 위에 한 획 한 획

당신의 진심을 새기는 동안

허공은 하나 둘 별을 달고

 

아무리 울어도 쏟아지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불덩이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나를 일어서게 합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당신의 이름을 외워봅니다

 

어두워질수록 별처럼 살아나는

당신의 이름,

조국의 이름

 

 

 

 

 

 

 

비목의 봄 / 이혜숙

 

폐허의 시간만큼 긴 목마름으로

메마른 바위틈 앙상한 가지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없는

혹독한 계절에

비목만이 홀로 애처롭다

 

두꺼운 얼음 조각이

'찌지직' 해빙소리와 함께

한맺힌 시간을 말아 

계곡 아래로 밀칠 때도

벌거숭이 민둥산이

'따다닥' 개화소리와 함께

고통의 타래를 풀어

빨간 꽃 봉우리를 터트릴 때도

비목음 스스로 욕심을 삼켰다

비바람에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나라 잃은 설움보다 덜하기에

단지 낯설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웃고 조금은 울면서

그렇게 세월의 흔적을 새겨왔다

 

계절에 억눌린 이끼사이로

화려한 계절이 등장하여

푸른 숲엔 금빛 햇살이 가득하다

가끔은 스치는 바람결에

산 아래 소식도 묻고 싶고

가끔은 지나치는 메아리에

옛 친구 안부도 묻고 싶고

가끔은 내 읾을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비목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설움을 말린 줄기와

욕심을 잘라낸 뿌리로

자신만의 생존방식을 고집하며

봄을 다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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