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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앞에서 / 정재혁

 

저녁이 휴전처럼 찾아옵니다

허공은 말이 없습니다 조용히 어두워지며

제 몸의 흉터를 지우낼 뿐입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진군합니다

바람만이 그 뒤를 군가처럼 따라갑니다

온 마음으로 육중했던

그 발걸음 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흰 꽃처럼 희미해지는 시간

바람은 차고

묘비 앞에서

몇몇은 눈물을 떨굽니다

 

한참을 앉아

비석 위에 한 획 한 획

당신의 진심을 새기는 동안

허공은 하나 둘 별을 달고

 

아무리 울어도 쏟아지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

불덩이 같은 것

그런 것들이 나를 일어서게 합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나

당신의 이름을 외워봅니다

 

어두워질수록 별처럼 살아나는

당신의 이름,

조국의 이름

 

 

 

 

 

 

 

비목의 봄 / 이혜숙

 

폐허의 시간만큼 긴 목마름으로

메마른 바위틈 앙상한 가지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없는

혹독한 계절에

비목만이 홀로 애처롭다

 

두꺼운 얼음 조각이

'찌지직' 해빙소리와 함께

한맺힌 시간을 말아 

계곡 아래로 밀칠 때도

벌거숭이 민둥산이

'따다닥' 개화소리와 함께

고통의 타래를 풀어

빨간 꽃 봉우리를 터트릴 때도

비목음 스스로 욕심을 삼켰다

비바람에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나라 잃은 설움보다 덜하기에

단지 낯설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웃고 조금은 울면서

그렇게 세월의 흔적을 새겨왔다

 

계절에 억눌린 이끼사이로

화려한 계절이 등장하여

푸른 숲엔 금빛 햇살이 가득하다

가끔은 스치는 바람결에

산 아래 소식도 묻고 싶고

가끔은 지나치는 메아리에

옛 친구 안부도 묻고 싶고

가끔은 내 읾을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비목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설움을 말린 줄기와

욕심을 잘라낸 뿌리로

자신만의 생존방식을 고집하며

봄을 다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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