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초가 핀다 / 정영희
1
경계를 서다 눈사태에 묻힌 꽃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아직도 봄이 멀리 있다는 수신호였다
천삼백 고지 어디인가 수류탄과 함께 터질 봄날을 기다리면서
차마 눈 감지 못한 채 살아 있을 화석을 생각하면
까닭 없이 몇 달 동안 퍼붓던 눈발이 한없이 서러웠다
바다 성게가 쳐 놓은 철조망을 따라 해를 보고 핀다는 복수초가
시린 얼굴을 내밀기에는 지금은 미끄러지는 땅
분명 저 속 깊은 곳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2
입영열차에 오르던 날은 벚꽃이 눈꽃처럼 무너지던 날이었다
빡빡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타올랐고
철로 변에 물든 개나리는 자꾸 눈물샘을 건드렸다
기차 바퀴가 단추를 채우자 창밖으로
뜻도 모를 침을 길게 뱉었다
건빵 한 봉지에 시큼한 김밥 쪼가리를 씹었고
뒤꽁무니를 빼며 버티는 염소가 반대편으로
주행하기도 하였다
돌아오겠노라는 간절한 약속을 할 사랑도 없는 것을
그저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의 주름진 이마만 깊게 오버랩 되었다
3
군화 아래로 펼쳐진 산하(山河)는 지금도 눈이 퍼붓는 땅
휴전선의 밤은 일찍 문을 두드리곤 하였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집을 갖게 된 곳이 비무장지대 초소였다
낙하산을 펴든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눈밭에 랜딩기어를 풀어놓은 독수리는
먹빛 하늘을 담은 편지 귀퉁이를 뜯어놓고 사라졌다
독수리가 착륙했던 자리에는 몇 개의 폴더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는 노란 씨앗 몇 톨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마 하늘에도 푸른 텃밭이란 게 있어서
작년에 거둔 씨앗을 안부삼아 물고 온 게 틀림없었다
4
초소 마당에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매화꽃도 강을 거슬러 고지 턱밑까지 잽싸게 올라오고 있었다
펑펑,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철조망마다 노란 등(燈)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온 산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벌써 봄이 온 건 아니었으나
눈 속에 묻혀 있을 복수초 꽃 이파리에
한번쯤 기어이 길게 입맞춤하고 싶은 것은
친구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눈물 때문이었다
감똘개 꿰어 / 정해광
- 화개 야산 학도병 영전에 -
우물가 감나무 여린 순 돋아
감똘개 지천이더니
돌아보며 돌아보며 고샅 나선 후
누이도 시뜻한지 물만 길어
들창에 젖은 달빛
해소기침은 사립을 넘어
물 마른 가지에 까치밥
까치는 어디가고 바람 애꿎은
칙칙한 하늘
밤은 길어
주저리주저리 목에 걸고 깔깔대던
싱그러운 감꽃이
꿈인 듯
낡은 학생복 단추, 녹슨 탄띠로 에돌아
먼 길
그날 아침 속이라도 채웠는지
그리 먼 길 갈 줄 알았더라면
무어라도 더 챙겨주었을 것을
헛기침만 푸른 연기로 날리던
빛바랜 사진에
바람소리 들려주며
오래 된 거울 닦아
찬찬히 보고
또 본다
인자라도 하얀 감똘개 꿰어
허전한 가슴에 심어 줄라요
망향 / 문 희
동리 밖 한 가득 아카시아 향내가 피어오를 즈음
내 어미의 마음이 꿈을 꿀 때
두둥실 넘어가는 구름 사이
아비의 봇짐지게는 장터를 돌아 돌아 누비고
오라비의 누런 황소는 얌전히 산언덕을 타며
그렇게 시골 들녘은 조용히도 흘러가더이다.
덤불 같은 세월 지나
어미는 그 때 그 시절을 사모하여
이제 가고 없는 지아비의 바랜 사진을 쳐다보고
전쟁통에 놓쳐버린 아들 생각에 베겟닛을 적십니다.
댕기머리 어여뻤던
그 시절 속 아이 하나가
이제는 오십 평생을 살아
더 살아도 괜찮고
더 못 살아도 괜찮을 나이가 되어
팔순 어머니의 한을 듣습니다.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다시는 나누지 말아야 할 아픔을
목 놓아 내어 두며
어미는 북녘 땅을 향해 설움을 토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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