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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황경희

 

뜨거운 총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갈 때

태극기처럼 나부끼던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스무 살 푸른 숨이 잦아들고

전우의 눈물을 본 것이

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내가 묻힌 골짜기에도

봄이 오고 꽃이 피었습니다.

삭아 내리는 갈비뼈가

흙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만 우렁우렁

무덤 속을 울렸습니다.

 

어머니 가슴에 눈물샘이 마르고

내 뼈는 잘 삭았습니다.

당신이 지뢰밭을 해매는 동안 저는

고향길 문 밖에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서로 다른 곳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던 이곳에도

봄이 오고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어머니, 자식의 제사상을 차리게

만든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전쟁도, 휴전선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백두대간 위령제 / 김찬수

 

그 야간 산행에는 달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새벽부터 무거운 해를 등에 지고 걸어온

백두대간 위령제 팀은 헉헉 숨을 몰아쉴 때마다

붉은 찔레꽃잎을 입안에서 어혈(瘀血)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먼저 지나면서 *‘영혼돌’로 돌탑을 쌓고

촛불과 향을 밝히고 위령제를 지낸 터라

앞 발 늦은 산길이라고 투덜대며 맥이 빠지기도 했다.

가다가 지뢰를 밟아 하산을 서두르는 팀도 있었지만

묵묵히 회귀하는 연어 떼들처럼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게

평생소원이라는 이산가족의 후예들은

초록의 지느러미 흔들며 먼저 숲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산새 한 마리도 내장 터진 피가 흥건한 산길,

어디쯤에는 탁탁 말총 새와 소총 새의 울음소리가 연발탄처럼 터지고 있었다.

압핀처럼 아프게 밟히는 도깨비 풀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허리 끊어진 다리를 지나,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는 점점 신음소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더러 길을 잃고 더 이상 더듬어 들어갈 수 없는 가시철책을

헤치며 해진 등산화 끈을 다시 조아 매고

타박타박 낙타처럼 파도치는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감전 하듯이 찌르르 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마음은 산보다 더 깊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잔물결 치는 동해에서 달이 부표처럼 출렁이고,

바람은 우리의 지친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더러 환청처럼 녹슨 휴전선의 가시철책이 뚝뚝 끊으며

그날의 진격처럼 월드컵으로 하나로 뭉친

대한민국 만세 소리에 단숨에 밀고 올라가서

백두산 봉우리에 태극기 펄럭이는 소리

하얀 달빛이 바다처럼 깃발 속에 출렁이고 있었다.

 

 

 

 

 

유월 하늘은 왜 무거워 보이는지 / 이창수

 

하늘이야

오월이든 유월이든 같은

한반도의 하늘이 아니겠는가.

한반도의 하늘이야

어느 때든 푸르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

 

진리란

보이는 하늘보다야

보이지 않는

피와 땀의 흔적을 가진 하늘에 더 많이 묻혀있는 것

사시사철 뜨거운 핏빛 자유를 위한 아픈 흔적들이

유월의 하늘에만 있을까만

유월의 하늘은 왜 무거워 보이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유월 하늘이 유월의 하늘로 보이는 것은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 유독 많았기 때문일 거야

바람 같은 사람들이

이슬 같이 사라진 사람들이

이름 모를 조약돌 같은 사람들이

 

핏빛 심장 같은 저 유월의 하늘에

내 어머니 같은 이 땅과

아버지와 같은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유월의 하늘빛으로 보였으리라.

 

유월 하늘이, 유월의 하늘이 될 수 있는 것은

넋 붉은 영혼이 두 눈 부릅뜨고 있기 때문일 거야

언제든 조국이 부르면

초개같이 불사르며

불나방 같은 삶을 보여 주었던 임들이

자유의 뜨거운 피를 뿌리며

유월을 하늘을 지켜 왔기 때문일 거야.

 

아 유월의 하늘이

저렇게 장엄하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지금도

이 땅 어디든 가득 살아있는

유월의 넋이 부릅뜬 두 눈으로

뜨거운 하늘을 채색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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