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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닦으며 / 서일순

 

지나간 길마다 자국이 남듯
아버지 가신 날 눈물로 판각된 칠월 스무하루,
피붙이들 꿇어앉아 향불을 사르는 데
강산을 훨훨 날아 당신 여기로 오십니다
저문 어머니 흰 머리 이 밤 따라 가지런하고
아버지 생전의 모습 목메게 그립습니다

유복자 숨소리를 움켜쥐고 홀연히 전장으로 떠나신 아버지
푸름이 짙던 그 해 칠월 스무하루
당신은 천둥 속을 달려 무형의 그림자로 오셨습니다
그림자를 쥐고 사는 일은 땅을 떠난 씨앗이 긴 겨울을 지나는
것이라, 당신이 떨군 씨앗들 아리고 적막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때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는 오늘
곧은 줄기로 성장한 씨앗들은 밤이 이슥토록 큰 절을 올립니다

자욱한 향내를 따라 몸 속 깊이 오시는 아버지
오늘 따라 어머니 눈빛 깊고 그윽합니다
어느덧 육십 년, 유복자 아들과 그의 아들과 또 제 누이의
46 2010 보훈문예작품 당선작 모음
뼈대들에서 당신의 눈빛과 체온과 숨결이 살아오는 밤,
어머니 휑한 가슴으로 밤새 큰 별 하나 들어찰 모양입니다
아버지, 앞마당 적조한 감나무 아직도 당신을 기억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구름을 밟고 와 감잎을 들추며
당신이 다녀가시는 것을 저는 압니다
감꽃이 하얗게 벙글어질 때마다 당신을 기다리며 몸을 추스르던
저 묵은 가지들, 지난해에도 서리 맞은 홍시들 눈발이 날리도록
차마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맑은 종헌終獻에 첨작添酌을 올립니다
떨리는 촛불 사이로
아버지 흙가루 날리며 뛰어가던 군홧발 소리 들립니다
가문을 덥히는 당신 그림자가 산하를 흔들어 깨우는 밤,
먼 들녘에서 벼이삭들 물 긷는 소리 아슴아슴 들려옵니다
당신의 너른 그림자 빛나게 닦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당신들 잠드신 그 자리 / 송치숙

 

매시근한 봄철이 되기도 전,
이 땅위에도 대지의 여신은
슬그머니 돌아와 평온한 손길로
가칫해진 토양을 어르고 얼러
함초롬한 깃털 어루만지듯
소소리바람 속에서 꽃조차 피워냅니다.

아군과 적군으로 살다가 섞사귄 처지
톡하고 손가락이라도 튕기면 뿌리 뽑힐
가스러진 고주박 삶이지만,
여신이 당신들에게 청하는 서러운 갈치잠은
한결 고즈넉하고 결결한 겨레의 꽃입니다.

총구에 스러져 썩어진 조국의 젊은 낯
스리처럼 멍울 선 마음결에
알알함이 마음겹습니다.
그리하여,
여신은 산골짜기에서 피어나는 비안개로
당신들의 허수로운 등에 입힐 떼를 허락하였습니다.

당신들 잠든 대지 위,
겨레의 강이 흐르고 흘러
조국의 계절이 피고 지는 동안

불볕이 당신들 잠을 설치게 할 때에는
복성스런 밑턱구름을 불러
산모롱이를 휘둘러 퍼지게 하였고,
첫추위가 당신들 잠을 깨울 때에는
두터운 이불인 양 애살포시
눈꽃을 덮어 주었습니다.

마른장마에도 밑동이 굵다란
나무에 농익은 초록이 피듯
당신들 조국의 낯꽃도 환하게 피어날
그 날을 아껴 두셨습니다.

갓맑은 숫눈길을
겨레의 꽃으로 옷을 해 입은 나무처럼
당신들이 염원하고 지키던 겨레의
조국의 미래를 신은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밤새 내린
도둑비에 사위는 정갈해 질 것이므로
당신들 잠드신 그 자리에서
당신들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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