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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 김미홍

 

넓다고 크다고 온전한 것은 아니며

봄이 왔다고 따뜻한 것만 아니니

가슴에 품은 많은 말들을

작은 비석에 품지 못한다

머리 위 하늘에 써보려 해도

다섯 손가락 어디 갔는지 뵈지 않고

반쪽이 흐린 눈으로 뿌리 내리려니

눈동자가 삐걱거린다

 

정신은 닳지도 않고 살아 숨쉬고

바람은 닿지도 않고 살아 떠돌고

봄이 온다는 편지는 받았는데

아직 등이 시리다

 

갇혀 있던 심장이 옷을 벗고

묶여있던 족쇄가 몸을 씻으니

순결하고 소리없는 새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조국으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울림으로

 

봄이 오면

늙은이 가문 얼굴

휘고 마른 등 위에도

푸른 싹이 돋아나듯

한 발 더 나아갈

조용한 침묵을 즐겨라

 

좁다고 작다고 모자란 것은 아니며

봄이 갔다고 차가운 것만 아니니

어긋난 심장을 꿰매고 붙여

흩어진 가슴을 모아

핏줄이 이어져 사랑을 하고

겨레가 힘을 내 소리를 쳐라

 

이 땅, 이 곳이

시들고 마르지 않는

너와 나의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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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가 핀다 / 정영희

 

1

경계를 서다 눈사태에 묻힌 꽃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아직도 봄이 멀리 있다는 수신호였다

천삼백 고지 어디인가 수류탄과 함께 터질 봄날을 기다리면서

차마 눈 감지 못한 채 살아 있을 화석을 생각하면

까닭 없이 몇 달 동안 퍼붓던 눈발이 한없이 서러웠다

바다 성게가 쳐 놓은 철조망을 따라 해를 보고 핀다는 복수초가

시린 얼굴을 내밀기에는 지금은 미끄러지는 땅

분명 저 속 깊은 곳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2

입영열차에 오르던 날은 벚꽃이 눈꽃처럼 무너지던 날이었다

빡빡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타올랐고

철로 변에 물든 개나리는 자꾸 눈물샘을 건드렸다

기차 바퀴가 단추를 채우자 창밖으로

뜻도 모를 침을 길게 뱉었다

건빵 한 봉지에 시큼한 김밥 쪼가리를 씹었고

뒤꽁무니를 빼며 버티는 염소가 반대편으로

주행하기도 하였다

돌아오겠노라는 간절한 약속을 할 사랑도 없는 것을

그저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어머니의 주름진 이마만 깊게 오버랩 되었다

 

3

군화 아래로 펼쳐진 산하(山河)는 지금도 눈이 퍼붓는 땅

휴전선의 밤은 일찍 문을 두드리곤 하였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집을 갖게 된 곳이 비무장지대 초소였다

낙하산을 펴든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눈밭에 랜딩기어를 풀어놓은 독수리는

먹빛 하늘을 담은 편지 귀퉁이를 뜯어놓고 사라졌다

독수리가 착륙했던 자리에는 몇 개의 폴더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는 노란 씨앗 몇 톨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마 하늘에도 푸른 텃밭이란 게 있어서

작년에 거둔 씨앗을 안부삼아 물고 온 게 틀림없었다

 

4

초소 마당에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매화꽃도 강을 거슬러 고지 턱밑까지 잽싸게 올라오고 있었다

펑펑,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철조망마다 노란 등(燈)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온 산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벌써 봄이 온 건 아니었으나

눈 속에 묻혀 있을 복수초 꽃 이파리에

한번쯤 기어이 길게 입맞춤하고 싶은 것은

친구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눈물 때문이었다

 

 

 

 

 

감똘개 꿰어 / 정해광

- 화개 야산 학도병 영전에 -

 

우물가 감나무 여린 순 돋아

감똘개 지천이더니

돌아보며 돌아보며 고샅 나선 후

누이도 시뜻한지 물만 길어

 

들창에 젖은 달빛

해소기침은 사립을 넘어

 

물 마른 가지에 까치밥

까치는 어디가고 바람 애꿎은

칙칙한 하늘

 

밤은 길어

 

주저리주저리 목에 걸고 깔깔대던

싱그러운 감꽃이

꿈인 듯

낡은 학생복 단추, 녹슨 탄띠로 에돌아

먼 길

그날 아침 속이라도 채웠는지

그리 먼 길 갈 줄 알았더라면

무어라도 더 챙겨주었을 것을

 

헛기침만 푸른 연기로 날리던

빛바랜 사진에

바람소리 들려주며

 

오래 된 거울 닦아

찬찬히 보고

또 본다

 

인자라도 하얀 감똘개 꿰어

허전한 가슴에 심어 줄라요

 

 

 

 

 

망향 / 문 희

 

동리 밖 한 가득 아카시아 향내가 피어오를 즈음

내 어미의 마음이 꿈을 꿀 때

두둥실 넘어가는 구름 사이

아비의 봇짐지게는 장터를 돌아 돌아 누비고

오라비의 누런 황소는 얌전히 산언덕을 타며

그렇게 시골 들녘은 조용히도 흘러가더이다.

 

덤불 같은 세월 지나

어미는 그 때 그 시절을 사모하여

이제 가고 없는 지아비의 바랜 사진을 쳐다보고

전쟁통에 놓쳐버린 아들 생각에 베겟닛을 적십니다.

 

댕기머리 어여뻤던

그 시절 속 아이 하나가

이제는 오십 평생을 살아

더 살아도 괜찮고

더 못 살아도 괜찮을 나이가 되어

팔순 어머니의 한을 듣습니다.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다시는 나누지 말아야 할 아픔을

목 놓아 내어 두며

어미는 북녘 땅을 향해 설움을 토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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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 오면 / 신동훈

 

유월이 오면

국화꽃 한 아름 새하얀 아내는

 

유성가는 길

계룡대 엄마 아빠 비석 앞에서

 

세월에 씻기고 닳아

학보다 여윈 얼굴로 가슴앓이를 한다

 

바라보는 나도

중병을 앓는다

 

 

 

 

 

 

할아버지가 보낸 엽서 / 김상규

 

발이 무거워진다.

내가 지나친 산은 매양 앓은 소리를 내고, 발꿈치를 몰고 가는

돌부리마저 끝엔 돌비알이 되어 거푸집에 갇힌 메아리를 낸다.

가슴에 산모롱이를 둘러매고 가는 길엔 해빙기(解氷期) 같은

산맥이 나와 몇 안 남은 상수리나무를 훑어 읽고, 학도병(學徒

兵)은 경대에 닻별처럼 앉아 기다릴 새색시를 생각하며 밤안개

에 잇몸을 닦는다.

 

너는 소리가 소리를 지우며

탄알에 박히는

맨 가슴을 보았느냐.

 

밤에 흐르는 별은 사람의 눈꺼풀을 무겁게 한다. 학도병의 무

거운 눈꺼풀 위에서 상씨름 하던 안개가 걷히는데, 나는 전후

의 푸른 손목에 말없이 태극기를 감싸주었다.

 

짝 못 찾은 상수리 꽃가루가 태극기에 내려앉아 허공을 딛는다.

 

너는 무거운 발아래 밟히는 것이

나라 땅의 낯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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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안연하

 

1. 무제

 

전쟁이 끝 난 뒤 황량한 땅 위엔

풀한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다가

붉게 젖은 땅 위에 싹 하나가 돋더니

자식 잃은 어미 눈물 떨어지고

형제 잃은 누이 눈물 떨어지고

아비 잃은 갓난쟁이 멋모를 울음에

눈물로 자라나

십수년이 지나서

창창한 나무가 되었다

 

이름 없는 언덕에 십자가로 남겨져

찾아주는 이 없이

홀로 남았어도

고향 땅엔 아직도 내 어머니, 내 누이

나 빼 닮은 아들내미, 딸내미

오손 도손 살겠지

 

빗물처럼 쏟아지던 총소리 잠잠해진

양지바른 땅에 누워

이제 생각하건데

아무 소리도 없는 이 적막함이

평화가 아닐랑가

 

총소리에 묻혔던

늙은 어머니 다듬이질 소리

누이 노랫가락 소리

코쟁이 아우 훌쩍거리는소리

갓난쟁이 아들내미 아장거리는 발자국 소리

들릴 듯 말 듯

조용한데 귀기울이는디

 

나는 이제도 저제도 고향은 못돌아간다 하니

이승도 아닌 저승도 아닌 여기 묻혀

남은 평생 지키고 서 있을 것이지만

내 숨쉬고 여기 창창한 잎사귀로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피흘리는 이 없이

아무도 총도 들지 말고

아무도 칼도 들지 말고

이 같은 고요 속에서 살기만 바라오

 

또 누가 지나는 길에

나를 보면은 알은체는 못해도

우리 고향집에 들러 소식만 전해주소

얼굴도 못보고 나온 아들래미

내 얼굴 까먹지 말라고

애비는 잘 여기 있응께

이 동구 밖 언덕빼기에 서서

내려다 보고 있을 텐게

 

또 내 얼굴 까먹을 까

잠도 안자고 나 기다리는 울 어매

이제 편안한 잠 주무시구로

안방에는 못가도

이 풀 밭에 엎드려 문안인사 올릴텐게

그 모습 보시면 이제 편히 주무소

 

2. 무제

 

반도의 땅 위에 한恨이 강줄기로 흘러내린다

누구를 기다리다 흘린 눈물인지

어느 전쟁터에서 흘러온 핏물인지

엉겁이 지나도 멈출 줄을 모른다

 

허리춤이 잘린 땅 위로

강물은 흘러내리는데

새는 날아도 나는 못가니

죽어 새가 되어

높이 날아

이 땅 굽어 보아

천년 만년을 지킬 것이오

내 누운 언덕에

이름자도 지워지고

찾아오는 이 없어도

이 몸이 나고 자란 땅에

다시는 피 흘리는 이 없게

푸른 싹으로 자라 꽃 피우고

새울게 할 것이오

 

내 무덤 위에 흰 국화는 놓지 말고

누구는 벚이 아름 답다하고

누구는 장미가 아름 답다하고

또 어떤이는 모란이며 매화가 아름 답다하여도

나는 오직 까만 무궁화 씨앗 심어

환한 무궁화 꽃 피우게 할 것이오

그 잎에 진드기 벌레 달라 붙어도

멍들지 않고

비 바람, 뜨거운 태양 내리 쬐어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더 무궁히 자라나

삼천리 강산에 꽃 피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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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황경희

 

뜨거운 총알이 심장을

뚫고 지나갈 때

태극기처럼 나부끼던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스무 살 푸른 숨이 잦아들고

전우의 눈물을 본 것이

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내가 묻힌 골짜기에도

봄이 오고 꽃이 피었습니다.

삭아 내리는 갈비뼈가

흙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를

부르는 당신의 목소리만 우렁우렁

무덤 속을 울렸습니다.

 

어머니 가슴에 눈물샘이 마르고

내 뼈는 잘 삭았습니다.

당신이 지뢰밭을 해매는 동안 저는

고향길 문 밖에서 당신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서로 다른 곳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던 이곳에도

봄이 오고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어머니, 자식의 제사상을 차리게

만든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전쟁도, 휴전선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백두대간 위령제 / 김찬수

 

그 야간 산행에는 달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새벽부터 무거운 해를 등에 지고 걸어온

백두대간 위령제 팀은 헉헉 숨을 몰아쉴 때마다

붉은 찔레꽃잎을 입안에서 어혈(瘀血)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먼저 지나면서 *‘영혼돌’로 돌탑을 쌓고

촛불과 향을 밝히고 위령제를 지낸 터라

앞 발 늦은 산길이라고 투덜대며 맥이 빠지기도 했다.

가다가 지뢰를 밟아 하산을 서두르는 팀도 있었지만

묵묵히 회귀하는 연어 떼들처럼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게

평생소원이라는 이산가족의 후예들은

초록의 지느러미 흔들며 먼저 숲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산새 한 마리도 내장 터진 피가 흥건한 산길,

어디쯤에는 탁탁 말총 새와 소총 새의 울음소리가 연발탄처럼 터지고 있었다.

압핀처럼 아프게 밟히는 도깨비 풀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허리 끊어진 다리를 지나,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는 점점 신음소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더러 길을 잃고 더 이상 더듬어 들어갈 수 없는 가시철책을

헤치며 해진 등산화 끈을 다시 조아 매고

타박타박 낙타처럼 파도치는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감전 하듯이 찌르르 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마음은 산보다 더 깊이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잔물결 치는 동해에서 달이 부표처럼 출렁이고,

바람은 우리의 지친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더러 환청처럼 녹슨 휴전선의 가시철책이 뚝뚝 끊으며

그날의 진격처럼 월드컵으로 하나로 뭉친

대한민국 만세 소리에 단숨에 밀고 올라가서

백두산 봉우리에 태극기 펄럭이는 소리

하얀 달빛이 바다처럼 깃발 속에 출렁이고 있었다.

 

 

 

 

 

유월 하늘은 왜 무거워 보이는지 / 이창수

 

하늘이야

오월이든 유월이든 같은

한반도의 하늘이 아니겠는가.

한반도의 하늘이야

어느 때든 푸르지 않은 적이 있겠는가.

 

진리란

보이는 하늘보다야

보이지 않는

피와 땀의 흔적을 가진 하늘에 더 많이 묻혀있는 것

사시사철 뜨거운 핏빛 자유를 위한 아픈 흔적들이

유월의 하늘에만 있을까만

유월의 하늘은 왜 무거워 보이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유월 하늘이 유월의 하늘로 보이는 것은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 유독 많았기 때문일 거야

바람 같은 사람들이

이슬 같이 사라진 사람들이

이름 모를 조약돌 같은 사람들이

 

핏빛 심장 같은 저 유월의 하늘에

내 어머니 같은 이 땅과

아버지와 같은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유월의 하늘빛으로 보였으리라.

 

유월 하늘이, 유월의 하늘이 될 수 있는 것은

넋 붉은 영혼이 두 눈 부릅뜨고 있기 때문일 거야

언제든 조국이 부르면

초개같이 불사르며

불나방 같은 삶을 보여 주었던 임들이

자유의 뜨거운 피를 뿌리며

유월을 하늘을 지켜 왔기 때문일 거야.

 

아 유월의 하늘이

저렇게 장엄하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지금도

이 땅 어디든 가득 살아있는

유월의 넋이 부릅뜬 두 눈으로

뜨거운 하늘을 채색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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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모의 봄 / 신종범

 

딸 둘을 놔두고

전쟁 통에 군대 갔다 행방불명 된 당숙은

군대 간 전날이 제삿날이다

지금이 언제인데 아직도 젊은 흑백 사진을 모셔놓고

꽃 같던 그때 모습을 떠올리는 당숙모

옷깃 경건히 여미고

곡주 한 잔 따라놓고

저 선산 허묘에 핀 할미꽃 모습이었다.

전사 통보도 없이

제사 지내는 의미를 난 알 수 없지만

가슴에 못 박혀 흐르는 슬픈 강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음력 삼월 초아흐레 날이면

제사상에 번지는 소리 없는 총성

 

제사를 마치고 촛불에 태워 보내는 소지가

붉은 핏빛 모습으로 진저리치다 사라진다.

 

 

 

 

 

물 / 이미자

 

DMZ.

햇살이 시간을 조율하고 나설 때 그는

오십여 년 만에 발굴되었다.

그가 전사자라는 것을 입증하듯

수류탄 실탄 철모 붙어버린 세월 수북히 떠먹다

발견된 숟가락

여러 개의 유품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는 총총히 무단횡단 하던 탄환을 어쩌지 못해

젊은 생을 접었으리라 이제 두개골과 일부의

뼈만 남은 그

과속으로 날아든 총탄은 그가 마셨을 수통의 컵

무수히 난사했지만

뚜껑은 아직 안녕 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

수통을 든다 뚜껑을 열어

흔든다 주인이 깨어나기를 오십년, 순하게

기다린 38°의 물

 

찰 랑 댄 다 … 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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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한 아버지의 군복 / 조명숙

 

돌아가신 아버지, 늘 말씀하셨다.

사람의 행동은 입고 있는 옷이 만든다고

한평생 군복만 입고 살아온 아버지는

세상 옷, 입자마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전국 해안의 초소를 돌던 아버지의 군복

방안 구석 짭쪼롬한 바다냄새 풍기며 걸려있었다.

식구들 어느 누구도 선뜻 입지도 버리지도 못하였다.

점점 먼지가 쌓여가도, 아버지가 벗어두고 간 영혼 같아서

버리기도 태우기도 어려웠던 아버지의 낡은 군복,

몸을 비운 헐렁한 아버지의 군복은

캄캄한 밤이면 이따금 스님의 승복처럼

신부의 사제복처럼 성스러운 빛을 내뿜곤 했었다.

얼마나 많은 유혹을 이겨온 옷인지.

얼마나 많은 땀을 받아낸 옷인지,

얼마나 많은 총알을 받아낸 옷인지,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낡은 군복에 관심이 없었지만,

늘 함구가 장끼이던 선임하사 아버지처럼

방안 구석 있는 듯 없는 듯 십자가처럼

못 하나에 걸려 있었던 아버지의 군복

어느 날 단단한 못 하나 남겨 놓고

승천(昇天)하고 없는 아버지의 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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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지팡이 / 허 용

 

길을 안내하는 늙은 지팡이

노인을 끌고 간다.

 

고희(古稀)를 넘긴 노부부

풍 맞은 할머니를 붙잡고 늙은 지팡이

천천히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연신 체머리를 흔드는 할머니

걸음마를 배운다.

비틀린 입에서 질질 침이 흐른다.

왼팔은 안쪽으로 굽었다.

 

가슴에 무공 훈장이 달린 쪼그랑 할아버지

팔을 붙들고

천천히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지팡이에 기대

할머니 서툰 걸음을 뗀다.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지팡이 하나

할머니를 붙들고 간다.

 

 

 

 

 

메밀꽃 / 조영도

- 恨 花 -

 

어머니는 여름날 메밀꽃을 보시면

恨花라며 눈물을 훔치신다.

이를 악물며 흐느끼시는 눈물사이로

흐르는 옛이야기는 한없이 구슬지다.

 

무차별적 폭격이 하늘을 찢어 놓던 밤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된 5남매는 생존을 위해 내달렸다.

무심코 손을 놓아 버린 네살박이 막내는 메밀꽃 밭에 쳐박혔다.

몸을 추스르며 뒤따라 올 거라 믿었지만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유별나게 눈이 고왔던 女兒는

恨花와 함께 그 자리에 영원히 누웠다.

하얗게 영글은 메밀꽃만 55여 년의

흐름에도 태연스럽다.

 

 

 

 

 

꽃이다 영혼이다 / 박선영

 

산등성이에는 가지 뻗은 나무라고는

한 대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거진 억새풀과

쌀알만큼 식한

자주빛 꽃이 만발한

싸리나무만 한참일 뿐입니다

서서 걸으면 상신이 숨겨지지 않지요.

전사들의 의복에서는 아직도 물기가 흐르고

전투에 따르는 위험성을 가슴에 묻고

관측소를 점령합니다.

풀잎 새로 내다보니 앞이 확 튀어보입니다.

푸른 강줄기가 보이고

파도처럼 꿈틀거린 무수한 구릉들이 보이고

바둑판같은 푸른 논밭들이 보입니다.

멀리 도시로 들어간 흰 행길이

허리띠처럼 보이는 좌우로

버섯 같은 농가들이

여기저기 늘려있는 것도 보입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조선의 딸은

당신들의 핏물로 지키어낸

흙의 넉넉함 위에 서서

그 찬란한 이름 하나하나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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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룩이는 봄비 / 송지수

 

어제부터 내린 봄비는

휴전선을 넘어서 온다.

탁탁탁! 강낭콩 붉은 콩알처럼

튀는 진달래 꽃비는

3․8선의 경계를 지우며

화약내를 푹푹 풍기며

녹슨 철모를 뒤집어쓰고

비무장 지대를 포복해 넘어온다

개나리․진달래․찔레꽃․연상홍 만발한

통일 전망대에서 두 정상이 만나듯이

세상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며 내리는 봄비.

 

콸콸콸! 임진강 상류에서 손을 맞잡고

도도하게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다.

의용군에 끌려가서 부역하던

우리 누이와 탄피 줍던 추억도

타다다닥 연발탄 터지는 소리를 내면

절룩 잘룩 지뢰밭을 밟으며 건너온다.

1․4 후퇴 때 피난 보따리 끌어안고

귀를 막고, 눈을 감고 할머니와

소백산 철쭉 군락지에서 가만히 엎드려

숨죽이며 듣던 기관총 소리처럼

타다다닥 꽃망울 터트리며 흥건하게

가슴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봄비.

하얀 붕대를 발목에 아지랑이처럼 감고

절룩거리며 南下하고 있다.

 

 

 

 

 

아버지의 군화 / 조명수

 

평생 직업군인으로 살아오신

돌아가신 아버지의 군화,

이제는 우리 집 가훈처럼

높은 시렁 위에 태극훈장처럼 모셔져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거울 속 같이

해가 뜨고 달이 지던, 아버지의 힘들고 고된

병영 생활이 환히 보인다.

 

뒤축이 닳고 징처럼 잔돌이 박힌

아버지의 낡은 군화, 아직도 닦으면

어떤 금메달보다 광이 난다.

어린시절 오랜만에 휴가 받아 돌아오시면

왜 나는 그렇게 군화가 군함같이 멋져 보이던지

아버지 몰래 동구 밖까지 끌고나가서

놀다가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저벅저벅 씩씩한 아버지의 발소리에

제일 먼저 우리 집 강아지가 꼬리 치며

반기던 아버지의 군화,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열개의 발가락이 모두 무좀으로 썩어가도,

한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라고

평생 군복을 벗지 않고 직업군인으로 살아오신 아버지,

가끔씩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워

오래된 먼지를 털고 광을 내면

아직도 짭쪼롬한 갯내음처럼

발 고린내 나는 군화에서

어느 외진 해안 초소의

시원한 파도소리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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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짐과 나비 / 이원도

 

다리를 저는 진철이의 책가방을

나비의 날개처럼 양어깨에 걸머지고

홰나무 골목길 앙감질하며 뛰어오던

 

골 안 언덕배기 참꽃가지 꺾어

진철이의 책가방에

두말없이 꽂아주던

복록이가 나뭇짐을 지고 온다.

 

날선 지게 멜빵이 초등학교 3년을 중퇴시켰지만

복록이는 한번도 멜빵을 탓하지 않았다.

모래바람을 헤치는 낙타의 굽은 등처럼

서럽게 번지는 지게바디가

가난의 등뼈를 갉아먹지만

머슴살이 복록이의 새경은 축내지 못했다.

 

복록이 나뭇짐에는 나비가 따라다녔다.

무게를 들어주려고 나뭇짐 근방을

풍선처럼 붕붕 떠다니는 나비

나도 나비가 갖고 싶다고

복록이를 졸랐더니

나뭇짐에 딸려온 참꽃가지를

내 책가방에 두말없이 꽂아주면서

 

―나비는 꽃을 따라 다닌단다.

 

집에 와 책가방을 펴면 복록이의 나비는

복록이를 따라가고

시든 꽃잎만 누에고치 허물처럼 말라 붙어있을 뿐

 

복록이는 나비 한 마리도 제 맘대로 내어주지 못하는 유약한 거짓말쟁이였다.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 후 꽃을 찾아 떠난 나비처럼 우리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투이호아 본부PX에서 우연히 만났던 날 물 젖은 나비의 날개처럼 퉁퉁 불은 향수를 밤새 마셨고, PNE 현지기술자 모집광고를 달러처럼 펼쳐들고

우리 지원하자.

천대받으면 어떠랴 돈벌어서 고향 가자.

귀국박스에 전자제품 가득 채워 떵떵거리며 귀국하자.

암송아지 한 마리 사서 배내기도 치며

사래 긴 上南들 땅마지기 일구어놓고

보습 날에 걸린 노을을 멀미가 나도록 마시자.

그러나 복록이는 유행가 가사처럼?가난해도 고향이 좋다?면서

다시 머슴살이를 해도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해야 한다면서

물소처럼 나의 건의를 윽박질러버리던

귀국특명 받은 고참병장 김복록

 

그로부터 우리 둘은 폐품창고에서 낙타의 전생이 인화된 캐멀담배를 꼬나물고

귀국박스를 채울 탄피, 전쟁의 원심력을 살의로 날려 보내고 시치미 뚝 떼고 평화롭게 누워있는 탄피, 손바닥 물집이 생기도록 저주의 망치질을 두드리며

나비가 득실거리는 갈비봉으로 가자.

그래, 참꽃 화들짝 핀 골안으로 가자.

그랬던 복록이는

 

내게 두 번째 거짓말을 했다.

대민 봉사 나간 고학력 신병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첨병부대 지원했던 복록이의 羽化登仙(우화등선)

 

―나비는 꽃을 따라다닌단다.

 

雨季(우계)의 정글엔 전령을 기다리는

눈물 그렁그렁한 종려나무 잎사귀들이

축 처진 날개를 붙이고 흐느낄 뿐

나비는 날지 않았다.

 

꽃이 없는데 나비가 올까봐서,

유월의 초가마을

박꽃 하얗게 기상나팔을 불어대면

진철이와 나는 고속도로의 검은 눈물을 닦으며

생애 37번째 동작동에 간다

 

(동작동 월남참전용사묘역 육군하사 金福祿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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