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우리 할매 / 이주연

 

할매는 올해도 어김없이

내 손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철쭉이 만발한 도라산전망대

고쟁이 속 쌈짓돈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3장의 눈물의 지폐를

나는 달그락 소리내며 6개의 위안동전으로 대답한다.

 

할매는 동그란 두 개의 창에

삼촌의 이름을 부르며 오십여년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할매는 꼭 살아 돌아오겠다던 삼촌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삼촌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철쭉화단을 머리에 얹은채

눈물범벅으로 삼촌과의 마지막 이별을 하고 있다.

 

할매는 올해도 어김없이

철쭉이 만발한 도라산전망대에서

삼촌과 빼닮았다하는 내 얼굴 어루만지며

오십여년의 짧은 시간여행을 마무리한다.

할매는 6개의 동전에

오십여년의 기다림을!

오십여년의 ..을!

오십여년의 모정을 담아내고 있다.

 

 

 

 

지리산 위령제 / 장세진

-철쭉꽃

 

세석에서 천왕봉까지

낮게 포복해서 넘어가는 빨치산 같은 철쭉들

콩알처럼 돌돌 뭉쳐진 화약 꽃망울을

무수히 쟁여 놓았다가

지지직 꽃망울 속의 뇌관을 향하여

사월의 햇살들이 기관총을 당기듯이 타들어간다.

 

팔이 잘린 상이군인 같은 고로쇠나무들이

다리 잘린 미군포로 같은 갈참나무들이

타다다닥 연발탄 터지는 소리를 내고

다채색의 폭발음이 잇달아

그날처럼 지리산 계곡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코를 막고

가만히 엎드린다 엎드려 그날처럼

지천에서 쾅쾅 터지는 수류탄 터지는 소리에

푸른 바람이 되어

동굴 깊이 숨은 봄들이 빨치산처럼

손을 번쩍 들고 걸어 나오길 기다리는 것처럼

꽝꽝 터지는 철쭉들의 짙은 꽃내음이

화약냄새처럼 가득한 지리산 위령제에서,

나 한때 빨치산 나의 아버지의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총알 같은 아픔을 깨물고

여기저기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아침부터 내리는 봄비들은 발목이 달아난 채로

저 들판 어디 발목지뢰처럼 묻혀 잠든

씨앗이라도 밟았는지,

스멀스멀 아지랑이 피는 계곡마다

기어오르는 다래 넝쿨들도 탁탁

천왕의 고지를 탈환하지 못한

혼들을 위로하는지

탁탁탁 축포를 무한정으로 쏘아댄다.

 

 

 

 

 

한탄강의 실안개 / 이재석

 

푸른 물결이

힘줄로 불끈 솟은

평강군 백암산(......)

실개천을 모아 모아서

새벽의 그리움에 등 떠밀려

살얼음 낀 잠을 털어 내고

굽이굽이 실개천 어깨동무하면

황톳물 속에

단단하게 박힌

옹알이 풀어 헤치며

온몸을 내던져

물길을 감싸주는 136 킬로

 

분단의 허리를

깨우며

상처난 협곡에서

푸른 바람이 되어

부딪히고 깨어난 동족이

깊숙이 묻어둔

긴 아픔을 어루만지는

江..

까맣게 타버린

가슴앓이로

깎아지른 사상(....)에

한 서린 울부짖음이

온몸을 휘어 감으며

발목 묶인 채로

멈춰야했던 서러운 땅

 

하얗게 누워있는

이름 없이 산화한 혼이

분단 문을 밀고 있는데

남북의 강심(江..)이 몸을 섞으며

설움을 떨쳐내고

파도가 밀려와 하나가 되는

강이 얼싸 안으며

실안개가 먼저 피어나

아픔을 묻어 버린다

 

 

 

728x90

외할아버지의 목발 / 정해미

 

외갓집에 창고에 목발 하나 있다.

 

칭칭 감은 헝겊에 때가 묻고

목발의 끝부분이 축축할 정도로

땀이 베인 외할아버지의 목발 하나,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아무도 쓸 일이 없는

나무지게와 함께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지

발뒤꿈치처럼 닳아진 목발의 끝과

비틀거리는 외할아버지의 몸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겨드랑이에 끼고

다닌 손잡이가 반들반들 한 목발 하나,

어둑어둑한 창고 안에서

더 녹이 슬어가는 것들과 함께

먼지 앉아가도 식지않고

아직도 외할아버지의

채취가 풍기는 목발 하나,

온 동네 대소사며 고샅길 너머

동사무소에까지도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던 할아버지의

건강한 목소리도 들려오는 목발 하나,

할아버지의 젊은 날의 뛰는 혈관처럼

아직도 그렇게 아킬레스가 꿈틀거리는

외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오동나무로 만든 반질반질한

손때 묻은 목발 하나

고향 집 헛간을 지키며 있다.

 

 

 

 

 

푸른 잎 / 배재형

 

마당 한 편 나뭇가지처럼

아버지 허리 굽었다.

겨우내 선잠 자던 햇살이

푸른 잎 앞자락 끌어내리며

봉긋한 허리에 앉아 안마하면

따뜻한 봄 손길 따뜻하신지

6.25전쟁의 참전용사셨던 아버지

일생동안 처마 끝 깊은 제비집처럼

좁고 누추한 마당을 빌려

한 그루 나무에 푸른 잎 기르셨다.

분단의 긴 어둠 속에 서 계셨던 아버지

 

푸른잎 딱딱한 눈 속 하얀 화석이 될 즈음

퇴근길에 소문도 없이 잎들을 문상하고서는

전쟁 때 돌아가신 어머니 차가운 사진에

따뜻한 입김을 불고 계셨다.

비라도 연신 내리는 날엔

오래된 추억이라도 묻어

가지 끝 간신히 살아있는 푸른 잎사귀

작은 상처 틈에다가 발라주셨다.

 

창 열어 슬쩍 들이마신 온기

가슴에 온전히 돌아

봄 나무 앞에서 허리 굽을 때

잎들마다 가는 혈관 따뜻한 피가

낮은 뿌리 제자리까지 돌아가는 중

허리 편 지아비 통일의 꿈은 돠살아나지 않을까.

 

아버지 전쟁 같은 허리 두드려 드리면

봄 나무 가장 아끼시는

푸른 잎 속에 남기신 어머니의 유언을

더 단단한 흙 밟으며 듣고 계셨다.

 

 

728x90

 

 

아버지의 군번 외우기 / 조명숙

 

돌아가신 아버지 이제 군번 새겨진

양은 목걸이만 남아 책상 속에 남아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받게 되는

군번은 이름보다 군인에게는

소중하다고 항상 걸고 다니면서

백마고지 탈환 한 그 벅찬 승리감에

늘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다가신 내 아버지,

한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라고

돌아가실 때도 군복을 수의처럼

입고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국민학교 시절 현충일 때였을 것이다.

 

군번을 목에서 꺼내 보이시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얼굴이시던지

손때가 묻은 만큼 더 빛나보이던

그 아버지의 길고도 긴 군번을

나는 단 한번도 외울 수가 없었다.

 

군인은 군대를 떠나면서 군번 하나로 남게 된다고

군번 때문에 또 군대를 떠나도 군인이 된다고

치매에 걸려도 군번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상 외우시던 아버지의 군번,

어저면 아버지에게 주민번호 보다

군번은 이 세상 어려운 일들이

다 통하는 비밀번호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어느 고요한 숲 속에서 새와 청솔모를 기르고

눈과 바람과 비와 함께 잠든 비목 앞에도

군인의 이름 대신 군번을 먼저 확인하시던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진 군 번호, 하나 외우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금방 환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728x90

 

수취인 거절의 편지 / 정행심

 

지하철이 덜컹, 흔들리며 문이 열리면

신발을 손바닥에 신은 그 남자는 오늘도

엉덩이로 기어 다니면서 사람들

무릎마다 맞춤법도 다 틀리고

철자도 다 틀린 편지와 볼펜 한 자루 내민다.

 

(저는 백마 부대 병장 이철수..입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서...)

 

허리춤에서 키가 정지한 난장이만한 사내,

고엽제도 앓았을까, 얼굴이 울긋불긋

열꽃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 남자가 쓴 깨알 같은

밤새워 쓴 사연은 사람들이 다 읽기도 전

지하철 문은 열리고 닫히고 사람들은 빠져나간다.

 

그 남자가 엉덩이로 한 발씩 한 발씩 다가와

그것들을 다 수거하기도 전에

지하철은 종점에 닿는다.

 

그 남자는 아직도 총알이 빗발치는

사방 벽이 낡고 천장이 환해서

구름이 다 보이는 십자성 쳐다보며

아무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수취인 거절의 편지를 매일 쓴다.

우편배달부가 전할 수 없는

번지 없는 지하철․버스 안까지......

 

 

 

 

아버지의 6.25 / 서상숙

 

민족의 꿈 저버리고

남북을 가로 누운 38선!

그 비극의 38선은

아버지를 불렀다.

 

신혼의 꿈 뒤로 두고

새로운 보금자리

6사단 19연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다.

 

1950년 6월 27일,

강원도 홍천 말고개!

밀려오는 적!

짓누르는 눈꺼풀!

기관총 분대장 서 중사는

아련한 총소리를 들었다.

 

등에 업혀 들것에 담겨

종착지 부산 해운대 태양각!

실려 오는 전우들을 보면서

전선의 참담한 소식은

신음소리 조차 막았다.

 

인천 상륙 작전!

아군의 북진!

드디어 들려오는 승전보!

가슴에 통증 잊고서 두 손 들어 외친 만세!

가자! 북진이다!

 

아버지는 일어섰다!

아물지도 않은 총상을 감춘 채

병상 3개월의 휴가를 접고

전장으로 향했다.

 

다시 찾은 옛 부대 전우들!

단숨에 점령한 함경도 초산!

그러나!

눈앞에 승리 두고 눈물의 1.4후퇴!

생사의 고통 남기고

6.25는 쓸쓸히 막을 내렸다.

 

세월은 무상하다, 팔순의 아버지!

변변찮은 훈장하나 없지만,

가슴에 총탄자국 자랑하시며

큰아들 당신 뒤 잇게 하셨다.

 

총성이 멎은 지 반 백년!

휴전선엔 비둘기 넘나들어도

노병의 눈앞엔 화약연기 뽀얗고

귓가에 포화소리 들린다!

 

6월이 오면

아버지의 눈가엔 이슬이 맺힌다.

 

 

 

 

 

무궁화를 가슴에 담고 / 이재석

 

이슬을 머금고

허리띠 매면

나무껍질 같은

손등 위로 서리 내리는

밭두렁 끝자락

희끗한 귀밑머리

묻어 온 세월을

풀어헤치며

피고 지는 꽃

 

이름만으로

모두를

덮고도 남을

가슴으로

산화한 용사 무덤 위를

지키던 꽃

 

철조망에

목을 조이면

조국을 지키며

어머니를 외치던

학도병의 눈빛이

순결한

평화를 위해

잠들라고 하며

찢긴 살점이

깃발처럼 빛나던

황토 숲에 젖은

땅 비집고

가지 끝을 세워

동해의 푸른 물로

씻어 올린 정신

 

향기를 날리면서

금수강산에

꽃을 피워

바람으로 일어서며

花冠을

머리에 이고

다가서는

용사의 精氣

 

흙바람 속에

헤치며

담금질하는

시린 뿌리로

등불 되어

뻗쳐오르는

높은 지조

순백의 영혼 순백의 영혼.

 

 

728x90

 

유엔묘지의 아침 / 전외숙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 779번지

유월의 아침

유엔 기념공원에 왔습니다

 

어떤 침묵이 이 보다 환할까요

 

이름 모를 들꽃과

내 나라꽃 무궁화

온갖 색깔의 장미꽃들이 어우러져

님들의 무덤가에 피었습니다

 

50여 년 전

칠흑 같은 대한민국의 밤하늘

꿈도 희망도 스러져 가는

이 나라에 님들은 오셨습니다

 

호주․캐나다․프랑스․네덜란드․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영국․미국․벨지움․콜롬비아․에디오피아․그리스․룩셈부르크․필리핀․태국․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인도․이태리

 

소중한 그대들의 조국

이름 하나 하나를

가슴속으로 불러 봅니다

 

머언 이국땅에서

자유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님들이시여

 

가슴 시린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 벅찬 슬픔을

오늘 새삼스럽게 떠 올리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유와 평화의 깃발아래

수호한 이 땅

님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이름으로 영원히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국군묘지에서 / 송미자

 

하사 김영철

병장 송인하

장교 장세기

일병 공재동

..........................

나란히 이마를 맞대고 누워있는 국군묘지

나라 잃고 싸우다가 잠든 영혼들에게

聖品式 하듯이 聖 김영철 聖 송인하 聖 장세기 聖 공재동...

이렇게 이름을 불어주면 안되나,

사실 목숨을 다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순교자나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전우들이나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면 내 한 몸 위해서도

나를 모두 바쳐서 살지 못했다.

경각을 앞 다투는 다급한 생명 앞에서

심장을 떼어주듯이 콩팥을 떼어주듯이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처럼

팥 하나, 다리 하나, 눈 하나를

나라를 위해 바치고 온갖 세상의

박해받고 고통받는 상이군인들에게도

聖者 이영수

聖者 김은철

聖者 소철수

聖者 이경철

聖者 손장식

이렇게 가는 곳마다 내미는

주민 등록증에 새겨주면 안되나.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르러 보는 성스러운 군인이 될 수 있도록.

 

 

728x90

 

추석 / 이성제

- 한탄강 哀史

 

 

아버지는 음복술에 취해

漢灘江이 아니라 恨歎江이라고

한참을 흐느껴 우시다가

강변 자갈밭에 모로 쓰러져 잠드시고

까닭 없이 죄스러운 나는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 1950년 초봄, 심야. 인민군의 눈을 피해 조심조심 배를 저어 남쪽으로 향하던 북녘 사람들, 그 속에 끼인 아홉 살 소년과 갓 돌을 지난 그의 동생.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갓난아기, 고막을 찢을 듯한 따발총 소리.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으니 아기를 얼른 강물에 빠뜨리라는 이웃들의 다급한 성화, 엉겁결에 동생을 물에 집어넣는 형. 강을 무사히 건너와 보니 아기는 물고기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嬰兒의 목숨을 앗아간 곳

아홉 살 소년이 살인을 저지른 곳

강물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데

풍경의 넋을 싣고 저리도 태연히 흘러가는데

대낮부터 엉망으로 취한 아버지는 연신

漢灘江이 아니라 恨歎江이라고 잠꼬대를 하신다.

 

 

 

728x90

 

 

다부동에서 쓰는 편지 / 이강룡

 

1. 전적비

 

불타는 가을산을 지켜 선

한 채의 전차(戰車) 위에

하늘을 돌리는 헬리콥터처럼 맴도는 잠자리 떼

아픈 몸 추스르지 못하는 시간들을 일으킵니다

 

청동의 또는 까만 대리석의

꽃보다 아름다운 대안(對岸)의 얼굴들이

우리네 무딘 심장에 모닥불을 지핍니다

 

바람 없는 가을

도열한 깃발 앞에 서면

도도한 자유의, 역사의 강물 소리 듣습니다

하늘 밖, 바다 밖에서도 귀 대어 듣던

그 여름 꽃빛 노을보다 곱게 타던 목숨의

 

2. 산을 오르며

 

바위 하나도 무심히 앉은 것 아닙니다

구르고 깨어지며 몸으로 써둔 비명(碑銘)

피 묻은 한 장 역사를 증언하는 빗돌입니다

 

그저 지천으로 피는 들국이 아닙니다

봉축도 묘석(墓石)도 깊이 감춘 이 언덕에

가녀린 심지를 올려 달아놓은 등(燈)입니다

 

저기 저 풀섶 아래 녹슬어 누운 철모 하나

사상도 이념도 이제 삭아질 세월인데

상기도 마른 억샛잎

서걱서걱 칼을 갑니다

 

그래 이 낯설은 경상도 산동네까지

이름도 성도 없이 그대 어찌 왔더란가

지금은 끝없는 뉘우침에 흐느끼고나 있는가

 

3. 피의 능선에서

 

한 밤새 아홉 번을 뺏고 또 빼앗기며

한사코 무릎으로 기어올랐을 이 능선은

차마 발들이지 못할 우리들의 성소(聖所)일지니

 

나도 병사(兵士)가 되어

낮은 포복(匍匐)으로 엎드리면

푸나무 이파리에 묻은 살 내음, 피 내음

돌아누우면 한가한 가을 구름에 얼비치는 그대 웃음

 

보독솔 양지에 앉아 이름 외쳐 부르면

귓가를 간지리는 결 없는 살바람이

「조국은 영원하리라---」 물무늬 저어 옵니다

 

푸드득 산꿩 소리 녹여 피운 향(香) 그늘에

오려 송편 신도주(新稻酒)를 살과 피라 이름하면

올려본 구만리 거리 글썽이는 옥빛 바다

 

산을 내리며 타는 단풍

가슴에도 물이 들면

탄우(彈雨) 멎은 자리마다 꽃잎은 또 벙그는데

빈산을 휘모는 바람 저 뿌리를 잘라야지

 

4. 산을 내려오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사(決死)의 이 전지(戰地)에도

근심 없는 포장도로 홀로 적막(寂寞)의 산을 넘습니다

피아간(彼我間) 소총수들의 이름 묻힌 고개를

 

귀중한 것을 잃은 듯 뒤를 문득 돌아봅니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선홍빛으로 불타는

학(鶴)이 놀던 유학산(遊鶴山)의 팔부능선 그쯤에서

이제 막 청학(靑鶴) 빛 구름 몇 점

비상(飛翔) 준비를 합니다

 

얼어붙은 반세기의 그 숱한 고지(高地)를 넘어

우리가 가늠하는 태양의 시간

빛을 실은 새벽마차의 기침 소리는

오고 있을까 지금 어디메쯤 오고 있는 것일까

 

문득 저만치 나가 앉은 따비밭에

서로의 어깨 기대어 둘러선 수숫단의

산동네의 적요(寂寥)를 찰방찰방 다둑이는

한 줄기 맑은 눈물 같은 의미의 실개천의

아름다운 저 자유의 몸짓은 피를 먹어야 사는가

청옥 빛 하늘을 닮은 풀벌레 시린 목청에

물어보고 또 물어보며 산을 내려옵니다.

 

 

 

 

 

명량(鳴粱)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를 맞이함 / 정재학

 

Ⅰ. 대적(待敵)

 

신(臣) 순신은 성은(聖恩)을 입어

이곳 전라 우수영에서 원수를 기다립니다.

순천에서 보성을 지나 어란포로 오는 동안

12척의 배를 얻어

당당히 조선 수군의 위용을 갖추었으니

의로운 백성들은 하나같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떤 이는 창을 들고

어떤 이는 톱을 들고

어떤 이는 소금 굽고

어떤 이는 강강수월래 부르면서 망을 봅니다.

 

신(臣) 순신은 행복하나이다.

이 백성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하여도

그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만년을 살 것이니

순신은 죽어서 영원히 살까 하옵니다.

 

Ⅱ. 결의(決意)

 

구월 이렛날

어란포에 들어온

적 전위부대 13척을

무찌르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오는 중

진도 벽파진을 바라보았나이다.

 

옛적 북방 유목민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였을 때

황룡사는 불타오르고

왕조는 무릎을 꿇어

의(義)는 끊어지고

정기(精氣)는 꺾여

이 땅 이 하늘이 어찌 온전하였으리까.

중손(仲孫)은 당당한 檀國의 자손으로서

창의(倡義)의 기를 높이 올리며

이곳 벽파진에 와

고려 정통의 맥을 이어갔으니

그 때의 함성소리

명량바다에 깊이 배어

오늘밤

신명(神明)은 불을 밝혀

뱃길을 엽니다.

 

신(臣)의 불충(不忠)한 죄를 물어주소서.

섬 오랑캐가 들어온 지 어언 5년

칼 맞은 혼령들은 구천을 떠돌고

밤이면 세복지(洗腹池)를 찾아 배를 씻는 여인들.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찾고

아비 잃은 아이는 아비를 부르며

꿈길을 가는데,

신(臣)이 죽어서 산천이 산다면

저기 벽파진의 한 점 등불이 되어

물결 속에 사라지겠나이다.

 

Ⅲ. 전야(前夜)

 

신(臣)은 삼가 엎드려 오늘의 일을

고(告)하나이다.

원수사의 패전 이후 흩어진

병선과 군졸을 모으며

적을 기다린 지 2개월 여

그 적이 이곳에 이른다 하옵니다.

적이 심히 흉포하여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신이 받은 여러 은혜를 기록하여 올리오니

하해 같은 성은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위무(慰撫) 하소서.

 

이곳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뉘라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리까.

적은 백여 척의 전함을 몰고 온다 하옵니다.

12척의 병선을 이끄는 소신(小臣)을 따라

그들과 맞서 싸우려는 자 누구겠습니까.

장년들은 활을 메고

노인은 노를 저어

소년은 북을 치고

부녀자는 망을 보니

이같이 아리따운 일을

보고들은 적이 없나이다.

 

바다 남쪽에 사는 백성들은

적을 맞이함에 두려움이 없고

충성된 마음에 따를 자 없으니

농사를 지어 군량미에 대고

소금을 구워 팔아 군비를 장만하니

비록 공을 생각하여 관작을 내린다 한들

그것을 탐하여 싸우는 이 없어

혹여 주검이 있어 울어줄 이 없으면 울어주고

향화(香火) 올릴 이 없음에 한 곳에 묻어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산 자들은 산 자들대로

죽은 자의 몫까지

서로를 돌보며 살되

이 바다 이 하늘

만세를 잇도록 오늘을 지키어

남기고 가오니 산하에 붉은 노을지거든

신(臣)이 보인 마지막 모습이라 일러주소서.

 

북쪽은

벌써 서리가 내린다 하니

우리 님군의 조석 안부를 누구에게 맡기리까.

창망하여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정유년 구월 열닷샛날

삼가 순신 배(拜)

 

Ⅳ. 승리(勝利)

 

오너라 구루시마여.

너였던가, 도도 다카토라여.

아리따운 내 백성의 피를 뿌리고

곱디 고운 내 형제의 목을 벤 자.

너희는 살아서 이 땅 이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

순신이 살아서

너희를 보고 있는 한

아무도 명량을 나가지 못하리니

천지여 신명이여.

보아 주소서

이 맹세의 끝을!

 

바다가 끓어오른다.

군사들아 백성들아 나아가자.

원수는 목전에 총을 디민다.

쏘아라 백성들아

오오 바다가 돌아온다.

쇠사슬을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백성들아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불러라 여인들아.

소년아, 너는

진군의 북

울리고

 

쏘아라!

쏘아라!

쏘아라!

 

구루시마여.

순신은 보았노라.

더러운 너희의 피가

이 거룩한 바다에 씻겨 가는 것을.

 

들었노라.

너희의 비명소리가

명량을 지나

바다를 건너

수장(首將) 히데요시의

부질없는 꿈을 깨뜨리는 것을!

 

구루시마여.

가서 일러라.

너희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나 역시 이 땅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조국의 해변가 어디일지라도

강강수월래 합창하는 아낙들이 모이고

소년은 다시 북채를 잡을 것이라고.......!

(完)

 

 

 

 

 

 

그 여자의 아버지 / 정봉구

 

그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가졌다.

6.25사변 때 백마고지에서 돌아가셨다는 그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이름만 국군묘지에 묻힌 아버지를 가진

그 여자는 아버지를 몰라도 아버지 때문에

보훈 장학금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 여자의 어머니는 뱃속에 든 그 여자 때문에

평생을 청상과부로 늙어가면서 그 여자를 키워 시집보냈다.

 

그 여자는 평생 사진 하나로 남편을 삼고 살아가는

어머니 때문에 시집을 가서도 바늘방석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자식을 키우면서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생이

어머니의 평생 짐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남편은 늙은 어머니를 결혼시켜 드리고 싶어했다.

 

그 여자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그 말을 전하게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어머니는,

‘아니, 당신, 무슨 말을 그리하세요.’

이렇게 젊은 당신이 늙지도 않고 이렇게 곱게 돌아오셨는데요.

 

할 말은 잃은 그 남편의 말을 들은 그 여자는

어머니가 이제 치매에 들었나, 생각하면서도

어린 날 그 여자가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애야, 아버지는 니가 이만큼 크면 꼭 돌아오신단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바로 늘 보아서 익숙했던

흑백 사진속의 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 여자는 그제야 엉엉 소리내어 남편 품에 안겨

아버지, 아버지, 부르며 울었다.

 

 

 

728x90

 

 

多富洞 가는 길 / 임종훈

 

고향인 왜관 읍에서

908번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다부동이 있다.

차를 타고 달리면

불과 십여 분의 거리이지만

그 곳에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십 년쯤의 시간이 필요하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금 이리도 푸르른 祖國이

한 때,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했던 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가야 한다.

 

이곳에 와서는

祖國이라는 말을 가볍게 말하지 말라.

가까이 보이는 遊鶴山의 진달래꽃이

그때 흘린, 젊은 兵士들의 피로

온통 핏빛을 띨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천천히 말하라

이름보다도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祖國이었음으로

비 오듯 쏟아지던 포탄을 뚫고

두려움 없이 前進을 거듭하다가

이 들판, 저 高地 어디쯤에서

이름도 없이 뜨거운 피 쏟으며

장렬하게 散花한 것이 아니었더냐.

 

와서 보면 알겠지만

그 처절했던 한 때를 기억하고 있는

이곳, 다부동의 땅과 하늘은

高貴한 피와 忠魂으로 하여

아직껏 붉다.

 

 

 

 

 

 

고로쇠나무 / 김찬순

 

지리산 깊숙한 빨치산들이 숨었다는 숲,

재선충에 병든 고로쇠나무들이

옹이가 총알이 박힌 것처럼 흉흉한 그루터기가 되어있다.

삭정이 몇 개 툭툭 팔처럼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아랫도리 다 드러난 그루터기들

돌무지에 눌려서 벌건 녹물을 흘리고 있다.

 

수통의 빨대를 무수히 꽂은 고로쇠나무,

얼마나 맑은 피를 흘리는 희생을 겪은 것인지

살갗이 벗겨진 상처들을 붕대로 감고 있다.

산불에 까맣게 그을린 것이

영락없이 토벌 나왔다가 팔도 다리도 잘린

군인처럼 목발을 짚고 서 있다.

 

봄 햇살은 활시위를 당기는 양 탱탱한데

그루터기들은 폭격기에 날아간 탱크 뚜껑같이 너부러져 있다.

 

가느다란 햇살들은 솔가피처럼 부서져 내리는데

지리산 골짜기, 상처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고로쇠나무?소나무?전나무들

줄줄이 계급장 뗀 퇴역 군인들처럼

비탈진 산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진달래 철쭉꽃이

혼불인 양 번지고 있다.

 

 

 

728x90

 

 

/ 김희철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인 소녀가

활시위처럼 수틀을 잡아당겨

한 뜸 한 뜸 백일홍을 수놓는다.


바늘이 명중한 자리마다

선연한 핏빛 꽃잎들이 번져 나온다.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는

소식이 없다.


수틀 가득 백일홍이 피어오르면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을까


끊어진 실들을 이은 자리가

수틀 아래에 멍울처럼 아물어 있다.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려면

옹이진 상처들을 묻어두어야 한다.


바늘 귀 만한 차이로

수틀 뒤에 묻힌 상처들이

환한 꽃망울을 밀어 올린다.


얇은 수틀 위에서

상처를 딛고

한 송이씩 피어나는 백일홍


한 여자의 삶이

지는가 하면 다시 피고

지는가 하면

진저리치듯 또 다시 피어난다



728x90

 

 


고(故) 윤영하 소령의 영전에 바치는 시/ 정재학

바다여,
오늘은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저 말 없는 해변에 피어나는 들꽃들과
뜻 모를 곡조 남기고 날아가는 바닷새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겨레의 일원(一員)으로,
겨레의 혼과 넋으로
적을 맞는 해양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파도 위에 뜨는
밝은 별 하나를 바라봅니다.
이 산맥과 강과 바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벗과 아우들은
아름다운 강토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열매 맺는 봄과 가을을 맞을 것입니다.

기르고 가꿈에 흐트러짐 없이
민족은 강물처럼 이어이어 억년(億年)을 갈 것이며,
자손은 대대로 저 바다 위에 역사를 새겨 나갈 것입니다.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나의 생명은
조국의 등불 아래 영생(永生)을 밝히는 한 방울 기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
뜨거운 피는 더 진한 피의 향기를 간직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는 불타는 생명의 모든 것.

역사는
앞서 가신 선열(先烈)의 가슴에서
피와 소원을 뽑아 이루는 탑(塔)일 것입니다.
이 탑 위에 언젠가 우리의 피 한 방울도 모일 것이며,
우리의 청춘은 추억을 묻고 웃으며 떠날 것입니다.
보다 더 가치로운 것.
보다 더 위대한 어머니를 위하여
오늘은 부디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저어기 백두 동맥 줄기줄기 푸른 강과 푸른 바다,
우리의 피는 장미처럼 들끓어 오르고,
모여모여 꽃밭을 이루고 있는 함선들.
호랑나비 날아오는
봄날 같은 평화를 위해
너와 나는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