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에서 쓰는 편지 / 이강룡
1. 전적비
불타는 가을산을 지켜 선
한 채의 전차(戰車) 위에
하늘을 돌리는 헬리콥터처럼 맴도는 잠자리 떼
아픈 몸 추스르지 못하는 시간들을 일으킵니다
청동의 또는 까만 대리석의
꽃보다 아름다운 대안(對岸)의 얼굴들이
우리네 무딘 심장에 모닥불을 지핍니다
바람 없는 가을
도열한 깃발 앞에 서면
도도한 자유의, 역사의 강물 소리 듣습니다
하늘 밖, 바다 밖에서도 귀 대어 듣던
그 여름 꽃빛 노을보다 곱게 타던 목숨의
2. 산을 오르며
바위 하나도 무심히 앉은 것 아닙니다
구르고 깨어지며 몸으로 써둔 비명(碑銘)
피 묻은 한 장 역사를 증언하는 빗돌입니다
그저 지천으로 피는 들국이 아닙니다
봉축도 묘석(墓石)도 깊이 감춘 이 언덕에
가녀린 심지를 올려 달아놓은 등(燈)입니다
저기 저 풀섶 아래 녹슬어 누운 철모 하나
사상도 이념도 이제 삭아질 세월인데
상기도 마른 억샛잎
서걱서걱 칼을 갑니다
그래 이 낯설은 경상도 산동네까지
이름도 성도 없이 그대 어찌 왔더란가
지금은 끝없는 뉘우침에 흐느끼고나 있는가
3. 피의 능선에서
한 밤새 아홉 번을 뺏고 또 빼앗기며
한사코 무릎으로 기어올랐을 이 능선은
차마 발들이지 못할 우리들의 성소(聖所)일지니
나도 병사(兵士)가 되어
낮은 포복(匍匐)으로 엎드리면
푸나무 이파리에 묻은 살 내음, 피 내음
돌아누우면 한가한 가을 구름에 얼비치는 그대 웃음
보독솔 양지에 앉아 이름 외쳐 부르면
귓가를 간지리는 결 없는 살바람이
「조국은 영원하리라---」 물무늬 저어 옵니다
푸드득 산꿩 소리 녹여 피운 향(香) 그늘에
오려 송편 신도주(新稻酒)를 살과 피라 이름하면
올려본 구만리 거리 글썽이는 옥빛 바다
산을 내리며 타는 단풍
가슴에도 물이 들면
탄우(彈雨) 멎은 자리마다 꽃잎은 또 벙그는데
빈산을 휘모는 바람 저 뿌리를 잘라야지
4. 산을 내려오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사(決死)의 이 전지(戰地)에도
근심 없는 포장도로 홀로 적막(寂寞)의 산을 넘습니다
피아간(彼我間) 소총수들의 이름 묻힌 고개를
귀중한 것을 잃은 듯 뒤를 문득 돌아봅니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선홍빛으로 불타는
학(鶴)이 놀던 유학산(遊鶴山)의 팔부능선 그쯤에서
이제 막 청학(靑鶴) 빛 구름 몇 점
비상(飛翔) 준비를 합니다
얼어붙은 반세기의 그 숱한 고지(高地)를 넘어
우리가 가늠하는 태양의 시간
빛을 실은 새벽마차의 기침 소리는
오고 있을까 지금 어디메쯤 오고 있는 것일까
문득 저만치 나가 앉은 따비밭에
서로의 어깨 기대어 둘러선 수숫단의
산동네의 적요(寂寥)를 찰방찰방 다둑이는
한 줄기 맑은 눈물 같은 의미의 실개천의
아름다운 저 자유의 몸짓은 피를 먹어야 사는가
청옥 빛 하늘을 닮은 풀벌레 시린 목청에
물어보고 또 물어보며 산을 내려옵니다.
명량(鳴粱)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를 맞이함 / 정재학
Ⅰ. 대적(待敵)
신(臣) 순신은 성은(聖恩)을 입어
이곳 전라 우수영에서 원수를 기다립니다.
순천에서 보성을 지나 어란포로 오는 동안
12척의 배를 얻어
당당히 조선 수군의 위용을 갖추었으니
의로운 백성들은 하나같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떤 이는 창을 들고
어떤 이는 톱을 들고
어떤 이는 소금 굽고
어떤 이는 강강수월래 부르면서 망을 봅니다.
신(臣) 순신은 행복하나이다.
이 백성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하여도
그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만년을 살 것이니
순신은 죽어서 영원히 살까 하옵니다.
Ⅱ. 결의(決意)
구월 이렛날
어란포에 들어온
적 전위부대 13척을
무찌르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오는 중
진도 벽파진을 바라보았나이다.
옛적 북방 유목민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였을 때
황룡사는 불타오르고
왕조는 무릎을 꿇어
의(義)는 끊어지고
정기(精氣)는 꺾여
이 땅 이 하늘이 어찌 온전하였으리까.
중손(仲孫)은 당당한 檀國의 자손으로서
창의(倡義)의 기를 높이 올리며
이곳 벽파진에 와
고려 정통의 맥을 이어갔으니
그 때의 함성소리
명량바다에 깊이 배어
오늘밤
신명(神明)은 불을 밝혀
뱃길을 엽니다.
신(臣)의 불충(不忠)한 죄를 물어주소서.
섬 오랑캐가 들어온 지 어언 5년
칼 맞은 혼령들은 구천을 떠돌고
밤이면 세복지(洗腹池)를 찾아 배를 씻는 여인들.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찾고
아비 잃은 아이는 아비를 부르며
꿈길을 가는데,
신(臣)이 죽어서 산천이 산다면
저기 벽파진의 한 점 등불이 되어
물결 속에 사라지겠나이다.
Ⅲ. 전야(前夜)
신(臣)은 삼가 엎드려 오늘의 일을
고(告)하나이다.
원수사의 패전 이후 흩어진
병선과 군졸을 모으며
적을 기다린 지 2개월 여
그 적이 이곳에 이른다 하옵니다.
적이 심히 흉포하여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신이 받은 여러 은혜를 기록하여 올리오니
하해 같은 성은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위무(慰撫) 하소서.
이곳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뉘라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리까.
적은 백여 척의 전함을 몰고 온다 하옵니다.
12척의 병선을 이끄는 소신(小臣)을 따라
그들과 맞서 싸우려는 자 누구겠습니까.
장년들은 활을 메고
노인은 노를 저어
소년은 북을 치고
부녀자는 망을 보니
이같이 아리따운 일을
보고들은 적이 없나이다.
바다 남쪽에 사는 백성들은
적을 맞이함에 두려움이 없고
충성된 마음에 따를 자 없으니
농사를 지어 군량미에 대고
소금을 구워 팔아 군비를 장만하니
비록 공을 생각하여 관작을 내린다 한들
그것을 탐하여 싸우는 이 없어
혹여 주검이 있어 울어줄 이 없으면 울어주고
향화(香火) 올릴 이 없음에 한 곳에 묻어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산 자들은 산 자들대로
죽은 자의 몫까지
서로를 돌보며 살되
이 바다 이 하늘
만세를 잇도록 오늘을 지키어
남기고 가오니 산하에 붉은 노을지거든
신(臣)이 보인 마지막 모습이라 일러주소서.
북쪽은
벌써 서리가 내린다 하니
우리 님군의 조석 안부를 누구에게 맡기리까.
창망하여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정유년 구월 열닷샛날
삼가 순신 배(拜)
Ⅳ. 승리(勝利)
오너라 구루시마여.
너였던가, 도도 다카토라여.
아리따운 내 백성의 피를 뿌리고
곱디 고운 내 형제의 목을 벤 자.
너희는 살아서 이 땅 이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
순신이 살아서
너희를 보고 있는 한
아무도 명량을 나가지 못하리니
천지여 신명이여.
보아 주소서
이 맹세의 끝을!
바다가 끓어오른다.
군사들아 백성들아 나아가자.
원수는 목전에 총을 디민다.
쏘아라 백성들아
오오 바다가 돌아온다.
쇠사슬을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백성들아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불러라 여인들아.
소년아, 너는
진군의 북
울리고
쏘아라!
쏘아라!
쏘아라!
구루시마여.
순신은 보았노라.
더러운 너희의 피가
이 거룩한 바다에 씻겨 가는 것을.
들었노라.
너희의 비명소리가
명량을 지나
바다를 건너
수장(首將) 히데요시의
부질없는 꿈을 깨뜨리는 것을!
구루시마여.
가서 일러라.
너희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나 역시 이 땅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조국의 해변가 어디일지라도
강강수월래 합창하는 아낙들이 모이고
소년은 다시 북채를 잡을 것이라고.......!
(完)
그 여자의 아버지 / 정봉구
그 여자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가졌다.
6.25사변 때 백마고지에서 돌아가셨다는 그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해서 이름만 국군묘지에 묻힌 아버지를 가진
그 여자는 아버지를 몰라도 아버지 때문에
보훈 장학금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 여자의 어머니는 뱃속에 든 그 여자 때문에
평생을 청상과부로 늙어가면서 그 여자를 키워 시집보냈다.
그 여자는 평생 사진 하나로 남편을 삼고 살아가는
어머니 때문에 시집을 가서도 바늘방석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자식을 키우면서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생이
어머니의 평생 짐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남편은 늙은 어머니를 결혼시켜 드리고 싶어했다.
그 여자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그 말을 전하게 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어머니는,
‘아니, 당신, 무슨 말을 그리하세요.’
이렇게 젊은 당신이 늙지도 않고 이렇게 곱게 돌아오셨는데요.
할 말은 잃은 그 남편의 말을 들은 그 여자는
어머니가 이제 치매에 들었나, 생각하면서도
어린 날 그 여자가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들려주던
어머니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애야, 아버지는 니가 이만큼 크면 꼭 돌아오신단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바로 늘 보아서 익숙했던
흑백 사진속의 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 여자는 그제야 엉엉 소리내어 남편 품에 안겨
아버지, 아버지, 부르며 울었다.
'국내 문학상 > 보훈문예공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4년 보훈문예 일반부 우수상 (0) | 2013.04.20 |
---|---|
2004년 보훈문예 일반부 최우수상 (0) | 2013.04.20 |
2003년 보훈문예 일반부 우수상 (0) | 2013.04.20 |
2003년 보훈문예 일반부 최우수상 (0) | 2012.10.18 |
2010년 보훈문예 추모헌시부문 수상작 (0) | 2011.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