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원창리 13호 / 허남훈
원창리 13호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반쯤 열린 대문과 빨랫줄의 팬티와 널브러진 신발들은 한통속이다
숨죽인 나는
결의에 찬 그 아침의 사내처럼
아니 결례 앞에 주저하는 순한 청년처럼
아니 사실은 밀정처럼
대문가를 서성인다
80년이 지나도록 이곳에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한 우리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중시계의 바늘은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뱃속의 쇠고기 국은 더 뜨거워졌을 것이다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제게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없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조계 화룡로 원창리 13호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를 품은 사내가, 두 아이의 아빠가, 스물다섯
의 청년이,
도시락과 수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 아침의 소풍을,
그 영원한 찰나를, 담대한 선택과 직시를
뒤쫓던 나는 놓치고 만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니 그들은 행적을 지우며 빠르게 걸었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항저우에서, 난징, 하얼빈, 그리고 광저우에서
상하이 하비로 312호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 터에 들어선 H&M 매장
그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로
중절모에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바삐 걸어간다
그날,
가지고 간 도시락이 아직 남아 있다
누가 아직
[우수상] 독도의 노래 / 윤빛나
독도의 노래 출렁이는 어머니의 수첩
다시 파랑의 책갈피를 넘길 때
사자의 화음, 광휘를 번득이던 황금빛 동해 언덕
혹등고래 떼 우글거리던 영원의 바다가
독도의 심장에 정박하여 우람하다.
민족의 발자국 첨벙첨벙 백의의 역사.
물떼 묻은 하얀 손이 강철같은 정의의 밧줄을 뿌려
접안을 시도하던 겨레의 가슴들
백두의 바다가 태산처럼 독도를 세우던 무궁화의 아침.
사자의 바다가 과묵한 반도(半島)를 깨우고
푸른 가산도를 베고 누운 태평양의 한낮
하얀 우주의 시계 위에 건곤감리(乾坤坎離)
진리의 나래가 닳고 닳아도
청홍백(靑紅白), 불멸의 지느러미를 휘두르던 독도.
청룡의 땅, 독도 바다, 기린초 사는 숲속으로
물결치는 박주가리 고운 팔월, 전설의 바다.
하얗게 타오르던 어머니의 땅으로
곰딸기 열매 붉은 칠월의 강토(疆土), 이사부 길에
파랗게 울려 퍼지는 조국의 노래 용감하다.
금강산 짊어지고 사는 단군의 고향
맑디맑은 태백의 파도가 치달려온 능선.
괭이갈매기 소리, 우산봉 부둥켜안은 여든아홉 선열의 바다가
조국의 해원(海園)으로 스며드는 깊디깊은 한국령(韓國領).
백두의 푸른 맥박, 청혈을 뿜어내던 기억의 물살들.
젊은 태극의 바다, 대한봉에 으르렁거린다.
삼천리길 달려온 아침의 태양
거룩한 땅의 이름으로 뿌리내린
아름다운 꽃밭에 들리는 독도의 노래
높디높은 겨레의 꿈 영그는 독도의 벼랑마다 맺힌 그 숨결.
오래된 조국의 새암이 달리고
신서란 향기 꽁꽁 감아 돌던 물마루
돌고래빛 한라의 바다가
사자의 섬에 퍼덕인다.
[우수상] 떡국 / 박다은
냉동실에서 삼 년 묵은
가래떡처럼 몸을 굽히고
할아버지는 삼 년을 더 살았다
매년 떡국을 퍼먹었던 놋그릇에
칠십오 년 인생을 지탱해온
총알 자국 투성인 몸뚱이가
절반도 안 되게 담겼다
1953년에 멈추어진 나침반 바늘처럼
가만히 앉아 북을 바라보던 뒷모습
소금 같기도 참깨 같기도 한
할아버지 부스럭부스럭
사탕 훔쳐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할아버지를
북쪽으로 향하는 꽃가마에 태워 보냈다
꽃문을 열고 나온 어린 소년이
멀리 두고 왔던 여동생의 손을 잡고
천국 방앗간으로 향하는 길
끝도 없이 뽑아져 나오는
하
얀
손
가
락
엄지와 새끼 새끼와 엄지가
약속하듯 얽혀 있다
하나로 이어진 탯줄 자르듯 똑,
한 뼘의 가래떡을 썰어
육수와 팔팔 끓여내는 새해의 아침
아기처럼 놋그릇에 눕혀진
할아버지 통통한 젖살을
아긍 깨물어 보았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우수상] 할머니의 대나무 숲 / 태성일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경찰로 근무하시다가
북한군에 의해 돌아가셨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잠시 세상에 들르셨다가 그렇게 다시
영원 속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삶이 힘이 들 때마다 자식들 몰래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내어 한참을 보시곤 하셨다
사진속의 할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이다.
다시 찍을 수 없는 사진
좀 웃어 주셨으면 좋으련만
항상 꺼내 보아도 엄숙한 표정이다
할아버지 사진은 오랜 시간 버티다가
가로로 3줄 금이 생겼다
사진에 생긴 줄이 할머니 이마 주름을 닮았다
그 줄을 보시며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사진도 세월 가는 것이 힘에 부치나 보다”
할머니는 사진을 쳐다보시며
억울한 일, 힘들었던 일 다 쏟아 놓으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숙한 표정의 할아버지는
금세 환히 웃으시며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당신은 웃는 게 더 예뻐"
"둘째가 당신한테 잘못 했네요. 그래도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
내 보기에는 둘째가 속정이 제일 깊다니까"
이렇게 할머니를 달래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세상 살아가며 들은 애먼 소리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가 더 쌓을 공간이 없어지면
할아버지 앞에서 다 쏟아 놓으셨다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가슴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힘들었던 일
너저분하게 풀어 놓아도
늘 말없이 들어주시고 인자한 웃음으로 답해주시는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장려상] 영웅의 유언 / 박상환
이 광장의 함성 속에
나의 피와 살점과
내장과 뼛조각들을
단 하나 남김없이 모두 바치노니
부디 후손들이여
이 희생을 헛되이 말라
우리에게 닥친 고된 시련이
온전히 우리만의 시련이기를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우리의 것이거늘
누가 마음대로 이 운명을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했는가
기억하라 후손들이여
우리가 이토록 목놓아 울부짖던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념과 우리의 희생을
총과 칼로 혀를 찢고
곤봉과 매질로 갈비뼈를 부숴도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소망대로 이끌기를 원하노니
그들의 썩은 야욕에
우리의 신념을 적시게 놔두지 말라
젖가슴을 빼앗긴 갓난아이처럼
무력하게 울고만 있지 말라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의 존엄함을 지키라
빼앗긴 그것을 염원하며 스러진
우리들의 목숨을 잊지 말라
언젠가 후손들이 공기처럼 누리게 될
조국의 안녕과 조국의 자유와
조국의 존엄함과 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나 지금 뼈부스러기까지 한점 남김없이
모두 그러모아 미련 없이 바치리니
그대들은 그 결과를 반드시 지키라
그대들은 그것을 소중히 지키라
조국이 힘을 잃어 어둠이 몰려 올 때에는
다 같이 손을 잡고 적과 맞서 싸우라
다시는 무력하게 나라를 잃지 말고
다시는 분열하여 핏빛 세상을 만들지 말라
이 조국에 쏟아지는 햇빛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빗물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영광 한점 한점이
온전히 조국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워 승리하라
[장려상] 연서 / 김서영
오늘 나는 누덕한 종이 사이 가장 하얀 것을 골라
내세에 있는 당신께 연서를 부칩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 곳은 정말 꿈같은 곳입니까.
내가 그대 고운 이름 세글자를 또박히 부를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 머리칼을 휘날리며 같이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러 갈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은 꽃으로 살기 싫다했지요.
꺾으면 꺾이는 꽃이 아닌 바람이 되기를 소망했지요.
그래서 당신은 바람이 되었습니까.
배우고 싶던 것
입고 먹고 싶던 것
이루고 싶어 했던 간절한 꿈
당신이 열망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를 항상 바라고 바랍니다.
나의 일생의 염원은 그대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고
나의 염원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대는 행복해지소서.
감히 누구도 그대의 행복을 제할 수 없는 따스한 그 곳에서 부디 평안하게 살아주소서.
그대가 밟고 있는 땅엔
나의 피가 흩뿌려졌었지요.
나의 젊음은 아직도 그 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기에 내가 존재 할 수 있음을
내가 존재하였기에 당신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겠지요.
그러니 다신 아름다운 내 고향을 빼앗기지 말아주소서.
세상이 멸하여도 그 땅의 주인은 당신임을 잃지 말아주소서.
이것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장려상] 눈보라 / 유택상
죽은 나무들이 숨죽이며 살아서 산 능선마다 울음소리를 낸다
죽어서 떠돌다가 눈보라에 묻혀 일어서지 못하는 형제들 휴전선 고지마다
고요도 숨죽일 만큼 수십 년 바람소리만 내고 있다
어디엔가 응어리진 뒤틀린 산길 끓어졌다 이어지는 생(生)
산자락 마디마디 매달린 녹슨 철모의 외로운 새의 눈물들
거기 색바랜 아버지의 군복이 구겨져 있다
강산이 피로 물들었다, 문지방을 넘던 포성소리 바람들이 수백 번 흔들어 삶을
폐허로 못을 박았다
주먹 쥔 지평선은 무방비로 서 있어도 나무들은 폭풍처럼 이글거리는 섬광처럼
삭풍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산,고지마다 비목이 서 있다, 비목 위에 앉아 있는 새들
몸에 흉터를 남기고 날지도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고뇌에 찬 마음들이
휴전선 이곳저곳에 깊이 누워 있는 얼룩진 군복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떠나보낸 얼굴들을 잊고 싶은 것이다
구름 낀 골짜기가 생사의 갈림길 이었을까?
어지럼증과 현기증을 호소하던 굽이치는 능선들, 재 넘어 숨죽인 고향
진통제를 꽂고도 어두운 들판을 달리던 삭풍
아내와 딸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 절망할 때
생사를 모르는 추운 길 위 숨결들
하늘은 철책도 경계도 없었다
외로워서 죽지 않으려고 얼굴을 땅에 묻고 물을 빨아 검은 젖을 먹던 새들
이젠 눈물이 말라버렸다 산과강이 찢어져 울음은 눈물없이 건조해졌다
지도는 환기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갈 수 없는 길이 막혀 있다
물줄기는 뭉개지면서 희미해졌다 산을 횡단하던 길은 숲의 어둠으로 둘러 쌓였다
새가 운다 징소리가 들린다
밤낮을 되풀이하면서 목청을 틔우며 아픔을 받아들이는 득음(得音)
입보다 귀가 더 밝은 온몸의 촉수
전선의 밤은 애타면서 바스러지게 새의 소리에 귀가 쫑긋 똬리를 틀고 있다
꽃잎의 낙화에도 얼룩진 아픔을 씻어내고 게워내려는 빗방울
상처와 울음이 서로 눕히는 소리 절명의 눈물이 간당간당 할 때
나는 푸른 나뭇잎에 온몸을 맡겨 날개를 달고 사라져가는
먼 하늘의 내력을 더듬고 싶은 것이다
[장려상] 국혼: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들 / 김다희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날아온 나비는
하얀 국화 꽃 위에서 단잠을 취하고
탑골공원의 수많은 민들레 씨앗은
단단하고 비옥한 땅위에 꽃을 피우네
철새는 원래 내 땅이 아닌 듯 날아가고
참새와 비둘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네
서대문 형무소에 피고 있는 진달래꽃이
마당을 가득 짖은 보랏빛으로 메우면
슬며시 다가가 가슴에 대어보고
눈에 대어보고
코에 대어본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운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남기기 위해서
눈에, 입에, 코에 가슴 깊숙이 새겨본다
[장려상] 단지동맹 / 이종완
단지동맹
팔십 년대가 흘려두고 간 오래된 풍경화
그 헐거워진 나사못의 녹슨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리에 서서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면
길은 나의 첫 걸음에서부터 시작되고
부정의 그림자 뒤에서 가만히 숨어 있을 수는 없다.
내게 보이는 것을 나는 본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나는 지킨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켜야할 것을 끝끝내 지켜야 한다.
지친 발걸음이 쌓이면 풀들은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그때 다잡던 그 마음
열두 개의 단지로 남은 의기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어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야한다.
감당해야 할 일 온 몸으로 감당해 가며
이름 있는 자들도 이름을 지우며 가는 길
작은 어둠을 밝히는 그때의 핏방울들
떠난 이들의 맑은 눈물로 방울방울 내리는데
상처가 지나가면 새살이 돋아 오르듯이
숨어있던 고통과 오랜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연록으로 돋아오를 조국의 산하를 그리는 이들이여
어눌한 눈길로 바라보는 포시에트 항구
러시아 아이들의 눈길에서 떨어져 내리는 작은 평화는
어느새 하얗게 젖어버린 물안개가
반짝이는 흔적을 지우려 할 때
우리들은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 그루 푸른 솔이 되어
익숙한 몸짓으로 새로운 하루를 길어 올린다.
'국내 문학상 > 보훈문예공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보훈문예공모전 당선작 (0) | 2020.08.21 |
---|---|
2017 보훈문예공모 당선작 (0) | 2018.07.23 |
2016 보훈문예공모 당선작 (0) | 2018.07.23 |
2015 보훈문예 공모전 당선작 (0) | 2018.07.20 |
[스크랩] [2014 보훈문예작품공모전 시부문 당선작] 이태학 외 (0) | 2014.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