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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장지葬地  6편 / 한정우

 

전력의 속도다

경적을 울리며 비상등이 켜진다

 

또 어느 비명을 거두려는가

 

바람은 예기치 않은 방음벽,

그 가파른 기세에 서둘러 선회한다

부딪혀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여린 생명들,

파르르 깃털이 흩어진다

널브러진 핏빛 비명 위로

허리 잘린 구름이 흘러내린다

 

지상과 파란 하늘 사이

저 투명한 경계의 벽에 숨겨진, 붉은 비수를

지상의 눈들은 보지 못했다

 

아니다

아니다

 

남풍 따뜻한 하늘등성이

숭숭숭 구멍을 낸 바람의 장지로

새들이 날아온다

고라니 떼, 길을 세워 세로로 달려온다

바람보다 가벼운 뼈를

바람 깊숙이 묻어 스스로를 풍장 한다

 

들리지 않는 호곡소리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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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여전히 빗장이 풀린 채

대문은 그곳에 오래도록 매달려 있다

대문 끝에 걸어놓은 풍경이 밤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별들 몰려와 가슴을 짚는다

 

저 문을 열고

아흔아홉 번의 봄이 오고

유성처럼 가을이 소리 없이 다녀갔다

새는 등 위에 청운을 얹고 건너와

마당가 대추나무에서 진록의 계절을 살다 가곤 했다

어느 새벽 다급한 손이 등을 후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검은 날개를 펼친 늙은 영혼이 새벽 찬바람을 앞세우고

대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밤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쏟아져 내리는 별을 다 받아 삼켰다

별을 삼킬 때마다 눈에서 왈칵왈칵 참꽃이 피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착란의 순간들을

상사의 뒤안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문 뒤에 서서 드나드는 별과 바람의 파수꾼

 

바람은 낡은 문 앞에서 방향을 꺾는다  

이제 저 높은 벽기둥으로부터

족자 속 대문을 내려놓을 때

 

문고리 걸리기 전

저 대문을 내 가슴께로 옮길 일이다

    

 

 

 

 

 

마분馬糞

 

한때, 경마장 근처 이웃이었던

선바위마을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불러대던, 그때처럼

 

이젠 뿔뿔이 흩어진 그 사람들이

스마트폰 창을 열고

부윰해진 화면과 흑백 이름들을 꾸역꾸역 불러들인다

코를 찌르는 마분이 과거처럼 미세하게 날린다

화면이 정지된다

목젖까지 달려와 독하게 엉겨 붙은 마분은

과천 벌을 달리던 검의 말들의 질주리라

과거를 달려 창의 경계를 넘는 말들은

끈적한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목젖을 더듬는다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창창하다

목젖을 지나 다시 창을 향해 내달린다

확대된 화면은 말발굽 소리를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분이 자욱하게 창을 덮는다

 

나는 정지 되었다

 

 

 

 

 

 

 

미술관은 내부 수리 중

 

한 여인이 뛴다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여인들이 미술관을 몰려나와

새 떼가 날아간 덕수궁 뒷길로 내달린다

머리 위에 하얀 새를 얹은 여인

어깨 위에 방울뱀을 휘감은 여인

후레지아 꽃다발로 가슴을 가린 여인

꽃다발을 잃어버린 한 여인은

무색의 나체인 채로, 육신을 풀어 순수의 공기로 스민다

인드라 구슬 그물에 걸려 서로를 비추는 영롱한 영혼

수만 개의, 수억 개의 산소방울로 투영된다

채색되지 않은 순백의 산소방울로 그윽한,

봄밤의 유혹에 여인들은 화사한 머리를 푼다

 

나는 먼지 날리는 미술관 전시실에서

벽면에 걸린 저 얼굴들을 본 적이 있다

짙은 재색의 벽면은 파닥거리는 날것의 영혼을 가두었고

흐릿한 조명으로 오랫동안 억압된 삭신은

한 덩이 고독한 물감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닳아져서 얇아져서 스스로를 허무는 재색 벽의 경계를

기쁘지도 나쁘지도 않은 눈으로 건넌다  

 

지금, 미술관은 내부 수리 중이다

 

 

 

 

 

푸른 간판

 

지금부터,

기다리기로 한다

도처에 이어진 푸른 간판을 건너

이곳에 미리 온 나는

휘파람새를 띄워 너를 마중 중이기로 한다

 

네가 짚고 올 푸른 간판을 확장하고

네가 넓혀갈 영토의 지형을

가장 넓은 넓이로 도해하며 확장 중이다

 

너를 열광했고, 그때마다

붉은 별이 하나씩 가슴에 박히고

별은 밤마다 상사의 붉은 입술로 폐부의 벽을

까맣게 물어뜯곤 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너를 기다리기로 한다

기다림의 길이는 상사의 깊이라고

나는 오독하고, 그 오독이 오만일지라도

나는 기다림의 깊이를 믿는 중이다  

 

이디야 푸른 간판은

날마다 확장되어가는 기다림이었다

 

 

 

 

 

 

아이들이 바다로 쏟아져 나왔다

알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던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공을 굴리며 달려왔다

하늘로 공을 차올린 아이들은

떨어져 구르는 해를 따라 바다의 중심으로 쫓아갔다

 

우 소낙비 같은 아이들은

우 여름 해 같은 아이들은

실눈을 들어 목청껏 까륵까륵 웃었다

풍선 같은 웃음을 웃는 아이들은

 

아이들이 사라졌다

 

웃음 풍선이 홀쭉해지며 빠르게 꼬리를 감췄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호명에 의해

이름이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갇히는 줄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가두기 위한,

머리에 사각의 뿔을 달고 사각의 틀에

얼굴을 구겨 넣고 잘라냈다  

하늘에 네모진 태양이 떴다

 

아이들이 사라진 곳으로

네모난 태양이 지고 어두워지며

바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두드러기

 

지하로 가는 칠흑 같은 계단에서 나는,

첨벙거리는 빗소리 들었다

빗소리 하염없는 계단 아래

온 집안, 붉은 두드러기 창궐하는 눅눅한 냄새들

밤마다 야귀도 극성이었다

 

국가 부도의 날 그날,

세공꾼이었던 아이 아버지는 반짝이는 금방 한켠에서

첫 생일 아들을 위한 돌 반지를 다듬고 있었다

아이 엄마를 위한 물방울 목걸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때, 국가 부도를 알리는 텔레비전 속 앵커의 말을

나는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이 막 걸음마를 시작할 때였다

 

영문도 모르는 채 찬란한 금방을 내어주고

아이들 그림책과 장난감이 짤랑대던 방을 비워주고

우리는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대해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이들 몸에도 붉은 두드러기가 자랐다 붉게붉게 번져갔다

 

천장 밑에 난 쪽창으로 간간이 볕이 들어왔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땅 위의 것들을 기억해 냈다

미처 들고 나오지 못한 노란 그림책과 돌 반지, 물방울 목걸이

 

처음으로 폭포 같은 눈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전등이 켜지고

국가 부도도 끝이 났다  

 

 

 

 

 

 

당선소감

 

오랫동안 젖은 숲에서 잠자던 작은 몸을 비틉니다

거칠게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깹니다

바람이 넘어간 숲 너머를 생각합니다

그곳은 멀고 높아 볼 수도 닿을 수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므로 상상의 놀이터 하나 짓습니다

놀이터의 공간은 날마다 조금씩 확장되어 갑니다

나는 치열하게 상상놀이를 시작합니다

 

눈여겨 살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처음 시문을 열어 이끌어주신 옛 은사님,

내 안의 견고한 틀을 부수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내면의 깊은 곳까지 거칠게 흔드는 바람이 되어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어 주신 시우님들 사랑합니다

함께 기다려주신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름다운 나의 일터 가족들,

그대들이 틈틈이 내어준 조각 시간이 있기에

오늘도 푸른 간판이 걸린 카페에서 시를 읊습니다

스치는 모든 인연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 사 평

 

시 읽기의 궁극은 읽는 이가 행복하게 사라지며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고백과 사유를 일으키면서 동시에 몰입과 정지의 순간을 선사하는 작품들 앞에서 선자 개인의 취향은 가능한 억제되었고 저마다의 심미안이 겹쳐지는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호출되었다.

2회 남구만신인문학상은 총 712편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 추천을 받은 15명의 작품을 대상으로 본심을 진행하였다예년에 비해 전반적인 수준의 고양을 공유하면서도 개성적인 음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드물다는 인상기를 나누면서 방미영(부산), 신현련(문경), 한정우(용인)가 최종 대상작으로 압축되었다.

이 신인들은 우선 언어 실험실의 폐쇄성과 자의식 과잉 그리고 지나친 경험 추수로부터 미학적 균형을 만들어낼 줄 아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먼저신현련은 구체적 삶에 착근한 언어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힘이 돋보였다. “눈구멍에 고인 허기를광대뼈라 했다 같은 구절은 예사롭지 않다다만, ‘얼굴꼽추라든지 몸굴 같은 시어가 보다 자연스럽게 쓰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다음으로 방미영의 안정적인 구조와 재래의 서정시 문법을 충실히 승계한 작품들이 믿음을 주었다쉽게 놓지 못한 물살과 새의 점선같은 작품은 명약관화하게 굳어진 제도 언어와 사물들에게 미결정 상태의 두근거림을 회복시켜 주는 경이가 있다동봉한 작품들의 우열이 보다 고른 수준을 유지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정우의 시는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라는 인식을 뒷받침하는 지표다이 시인은 로 규정된 미학 체계를 수렴하면서도 시적인 것을 향해 폭발한다여기에 시적 사유의 깊이와 명료한 이미지세련되고 활달한 어법이 돋보였다또한 응모작 중엔 드물게 세계의 부조리와 날카롭게 맞서면서도 내성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있고바람의 장지(葬地) 마분(馬糞)에서 보듯 묵직한 문명사적 제재들을 다룰 때조차 시적 부력을 잃지 않는 힘에 기대와 신뢰를 갖게 한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취향을 지녔으나 큰 이견 없이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한정우 시인의 독자적 음역에 대한 긍정이 가장 컸기 떄문이다예상한 변화만을 허락하는 시가 아니라 위험하지만 자유로운 곳으로 우리를 밀어가는 시인으로 대성하길 빈다. 

 

- 심사위원: 김윤배, 이경철, 손택수(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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