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 김충규
나의 집으로 낙타가 들어왔다 쉴 곳을 찾았다는 듯이 길게 숨을 토했다 맑은 눈에선 고행의 흔적을 엿볼 수 없지만 살점 없이 앙상한 다리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낙타와 함께 지내기엔 집이 너무 좁아 나는 낙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낙타가 등을 낮췄다 나더러 올라타라는 것인지 푸르르 몸을 털었다 털에 묻었던 모래알들이 낙태처럼 떨어져내렸다 나는 낙타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지키는 전사가 아니므로 더구나 순례든 고행이든 사막으로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낙타를 집 밖으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등에 올라타지 않자 낙타는 그만 풀썩 주저앉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낙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앞에 무덤 하나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숲엔 무수한 뼈가 있다 / 김충규
머리칼 서로 엉켜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나무들 하체가 희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곰팡이가 나무들의 음부 속에서 제 일생을 꽃피우고 있다 숲속을 서성거리다 끝내 길 못 찾고 스러져간 자들의 뼈가 낙엽들 위에 뒹굴고 있다 썩지 않는 뼈들이 낮밤 없이 인광(燐光)처럼 반짝거린다 언제였던가 숲속에 들어갔다가 헤맨 적이 있었다 내 뼈를 하나씩 뽑아내어 던졌다 반짝이는 내 뼈를 딛고 숲을 나온 적이 있었다 몸 속의 뼈를 버리고서야 비로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은 낮밤 없이 무수한 뼈들 중에서 제 뼈를 찾으려는 자들로 시끄럽다 뼈 없는 내 몸이 잔바람에도 휘어질 때 나는 내 뼈를 찾으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또 길을 잃을까 두렵다 더이상 뽑아낼 뼈가 없다
이별 후의 장례식 / 김충규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겠다고 쓴 네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다. 편지를 읽기 전까지 나도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찢으며 봉분을 다졌다. 나를 지켜보고 선 살구나무가 풋살구를 톡톡 떨궜다. 풋살구를 한 입 깨물었다. 한때 너는 나의 나무에 열려 있던 붉은 살구였다, 지금은 서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먼 하늘가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제 몸을 잘게 찢었다. 우우우―, 미친 늑대처럼 빗줄기가 울부짖었다. 내 몸은 빗줄기에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내 속의 무덤은 빗소리에 흠뻑 젖었다. 한순간, 내 속이 자궁으로 변했다. 망할 것, 나는 너를 낳고 싶었다.
그곳에 가려는 자들 / 김충규
그곳에 이른 자 아직 없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자들이
그곳을 향해 집을 떠났다
가다가 지쳐
주저앉아 그대로 돌이 된 자도 있다
돌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는 순간
돌의 울음소리에 놀라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자도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혼자만의
지도를 몸 속에 지니고 있다 또한
나침반과 가득 채워져 있는 물병,
짊어진 배낭 속엔 한줌의 소금
그러나 안내자는 없다 그곳에 이른 자 없으므로
집을 떠나온 자들은 오직
홀로 걸어갈 뿐이다
군데군데서 만나는
돌이 된 자들의 울음소리에도 끄떡없이
무심히 걸어가는 자도 있지만
그곳이 과연 있긴 있는지 의심스러워
막 신던 신발을 벗어놓는 자도 있다
그 집의 창문 / 김충규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창문을 열려고
넝쿨 장미가 틈새로
숨 가쁜 향기를 쏟아 붓고 있다
다산병(多産病)에 걸린 오월의 대지가
제 속의 것들 남김없이 출산하고도
자궁 흥건하여
자궁을 햇볕에 말리고 있을 때
지독하게 독이 오른 목련나무는
침묵으로 몸 씻고 있는 중이다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 굳게 닫혀 있지만
가끔 피아노 소리 흘러나온다
피아노 소리에 의해
그 집 정원의 식물들은
기쁨과 슬픔에 길들여졌다 피아노 소리 뚝 멎으면
한낮인데도 무겁고 어두운 고요에 몸을 떤다
창문의 틈새로 향기를 쏟아 붓고 있는 넝쿨 장미,
잦은 빈혈로 바람 없이도 흔들리고
제 몸의 독을 어쩌지 못해 목련나무는
남들 꽃 피우기 전에 이미 꽃 다 뱉아버렸다
그 집의 하나뿐인 창문을 부숴야 한다,
그 집의 정원을 한 번이라도 밟아본 자들은 안다
그 집의 내부와 정원의 유일한 경계는
창문뿐임을
[심사평]
’98 하계 문예공모에 접수된 시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시를 시이게 하는 가장 큰 정체성의 하나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인데, 바로 이 대원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고지에 육필로 쓰던 시대에서 워드프로세서 시대로 옮아오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넘어가버리기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응모작의 ‘많은 말’들은 시를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써낸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죽음, 섹스, 사랑, 사이버 공간, 실업문제 등 소재들은 다양하지만, 그 소재들을 안으로 끌여들여 시의 언어와 문법으로 육화시키는 노력들이 부족해 보였다. 독백이 아니라 배설에 가까운 시들이 적지 않았다.
「집의 기억」 외 6편을 낸 신우현씨의 시들은 형상기억합금 같은 어떤 원형적 이미지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미지들이 부유하고 있는 방, 집, 물 속, 벽 속은 상당한 보편적 환기력을 갖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것들이 응집력의 결여 때문에, 탱탱한 긴장감 없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모든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몇 개의 산만한 문장들을 한마디로 요약해줄 수 있는 보다 정확한 이미지들을 건져올리는 것일 게다. 시란 무엇보다 경제인 것이다.
「덧칠 기법」 외 9편을 낸 채필녀씨의 시들은 좀 색다르다. 시에 대해 접근하는 그 태도가 특이하다. 말하자면, 시에 대한 태도랄까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색다름, 신선함이 시를 읽어나감에 따라 색다름이나 신선함이 아닌 진부함 쪽으로 자꾸 가까워지는 이유는 그 기법 때문일 것이다. 시작(詩作)에 대한 아이디어의 특색은 그 기법의 뒷받침을 받을 때만 성공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심한 불구의 시가 되는 것이다.
류경일씨의 「비」 「저녁밥을 먹으며」 「천마산 가는 길」 「슬픈 음지리」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기 경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두면서도 언어를 절제하고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스스로 고만고만한 소품에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미 확보한 견고한 틀을 뛰어넘는 시적인 활기를 이 사람의 시에서 만나고 싶다.
「건조주의보」 「접속」 등의 시를 응모한 송필애씨는 단정하고도 신선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그래서 “집 없는 우산들/주택은행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와 같은 범상치 않은 표현을 곳곳에서 획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상의 신발” “수줍은 구름처럼”과 같은 상투적인 표현들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시를 구기고 있다.
김경진씨는 「들리지 않는 소리」 「사람 가두기 4」 「좀처럼 나부끼지 않는……」 등의 시편을 통해 넌지시 속삭이는 듯한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시를 자아내고 있다.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살려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재질도 엿보인다. 앞으로 구체적인 세부묘사에 좀더 충실한다면 더 설득력 있는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속리」 외 4편을 투고한 한한슬씨는 비교적 정련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그러나 응모작 가운데 3편이 ‘여자’와 ‘밥상’을 소재로 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시세계가 너무 작아 보였고, “멀리 알 수 없는 새떼들이/일제히 신호처럼 날아올랐고”와 같은 몇몇 구절이 낯익었다.
이채운씨의 시들은 식물성 상상력이 주조를 이룬다. 「씨앗의 노래」에서는 “불룩한 땅의 힘줄을” 간지럽히는 씨앗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18편에 이르는 응모작 대부분이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시가 너무 길다는 흠이 엿보인다. 시어의 남용을 줄이고, 시형식과 내용의 조화에 신경을 쓴다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모두 34편의 시를 보내온 강해림씨는 문예공모 결심에서 자주 보았다. 「비무장지대」 같은 작품은 지난번에도 투고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너무 낯익어서 그런 것일까.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이라는 독후감이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의 습작기를 지배해온 ‘완성을 위한 설계도’를 한번 치워버리는 ‘충격요법’이 필요해 보인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김충규씨의 「낙타」 외 4편, 이영수씨의 「바코드, 자동판매기」 외 4편을 공동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 김충규씨의 시들은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에서 두드러졌고 전달하려는 바를 잘 버무려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발휘했다. 다만 시에 서사구조를 세워야 한다는 강박증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영수씨의 작품은 싱싱한 상상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들은 “장전되어 있는 기관단총”과 같은 긴장감을 갖고 있다. 문예공모 심사는 과거(언어 운용능력) 못지않게 앞으로의 가능성(새로운 상상력)을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영수씨의 작품을 선정했다.
―최승자, 이문재, 안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