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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해산 / 박은희


  집에 돌아와 혼자

  불을 켠다

  세계는 일찌감치 어두웠다

 

  해질 무렵 하늘을

  풀어놓는 해를 보았다

  땅이 아프도록 흥건해지고 있었다

  젊은 어머니 나를 낳던 시간,

  하늘은 붉게 사라지고 있었다

 

  피에 잠기는 온몸이 아프다

  어두운 구석 오랜 동안

  나는 아이를 낳은 듯하다





죽지 않는 방 / 박은희


  늙어가는 나무들은

  무덤을 남긴다

  수액을 따라 오르던 땅이

  숨을 거두고 노랗게

  맺힌 해가 무너진다

 

  집을 나간 너는 돌아와

  얼굴을 들여다본다

  싸움질이 잦은 동네에서

  네 어깨는 늙어가고 있다

 

  네가 떠나오던 그대로

  낡은 방은 침묵을 흘린다

  늙어가는 복병으로 가득한 방에

  맺힌 해가 살충제 냄새를 풍긴다

 

  죽지 못한 복병의 어깨를

  떼어 하나하나

  길에 버린다 너는

  늙어가고, 방은 죽지 않는다

 

  방은

  네가 집을 떠나리라는 것을 안다





해가 지고 있다 / 박은희

  

시간의 눈썹에 매달린 마지막 창살

  을 돌아나온 의자들은 어두운 얼굴로

  잠이 든다

 

  오후 여섯시가 보이는 창가에서

  책은 입을 다물고

  하늘이 한 올 한 올 풀린다

  숨을 수 없는 바다

  너머 노란 사막이 보인다 창문 없는 바다가

  하나하나 밀려들고 있다

 

  수평선이 서서히 찢어진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 박은희


  늙은 나무가 서서히 오그라진다

  맨 윗서랍에선 아버지의 검은 바다가 쏟아져나온다

  목이 긴 외국인 선교사가 잠 속에 익사한 물고기를 건져올린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미워한다 아들에게 구멍 없는 어항을 선물한다

  파란 물고기는 어항을 버리고

  무중력의 하늘을 날아올라 죽은 목사가 된다

  바람의 틈새로 깨진 과거가 좌그르 흩어진다

  아버지를 폐교 처분한 아버지의 아버지는

  잡풀 무성한 사막을 낳는다

  물결치는 사막에서 집들이 죽어간다 날개를 달고

  딸은 죽은 박쥐 시체를 죽은 목사 곁에 묻는다

  시체를 쌌던 헝겊만 남기고 새벽이 슬픔처럼 사라진다

  어린 딸은 폭풍주의보가 내린 바다를 걸으며

  검은 등대를 토한다

  찢어진 무릎으로 희디흰 나무가 오그라진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딸에게 손을 흔든다





지평선 위의 집 / 박은희


  지금은 어두운 이름들이 지평선에 가 닿을 시간

  모래 지평선에 바람이 불어

  식탁 없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어머니는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바깥으로 나간다

  깨진 그릇 조각이 귓속에 박혀 있다

 

  나는 마루 틈새에 눈을 대고

  눈 못 뜬 새끼 고양이를 염탐한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를 핥다 말고

  밀정의 눈을 노려본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왜 소리를 지른 것일까

 

  추운 11월의 아침에는 처마마다

  새들이 떨어져 있다

  식탁을 마련하지 못한 새들이 지평선을

  꿈꾸면 이름 없는 사물이 된다

 

  나는 흔들리는 지평선에 집을 지었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지금도

  문 밖에 있다 내가 가둔 어둠이

  내내 이름 없이 맴을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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