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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검프 / 문석암


  사랑이라 믿었던 순정한 것들이

  명치끝을 통과해

  영영,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명치 속 검붉은 멍을 쪼며

  자라던 가엾은 유리새들

  길바닥에 깨어지고

  나, 검은 짐승처럼

  이 생을 뛰어넘고 싶었다.

 

  넘어져 울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던

  어린 날처럼

  울음 뒤에 오는 평화를 홀로 일으켜 세우며

  나는 달린다.

  달리면 달릴수록 내 몸 안에 버려둔 발짝들이

  흘러넘쳐 나를 데리고 강으로 가고

  강가에는

  ‘프랑스제과’ ‘가람서적’ ‘정든다실’ 같은 산 그림자 흘러내려.

 

  나는 빠르게 은어떼 사이로 미끄러진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열병보다 빨리 달려 병을 떨어뜨린다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말씀 같은 것.

  어둠은 고양이의 발톱처럼

  캬릉!

  뒷목을 할퀴려고 하지만

  하!하!

  나는 강낭콩보다 푸르게 튀어오른다.

 

  달리면서 바라보는 것들 속엔 심장이 뛴다.

  새벽을 달리는 불자동차는 불타는 심장이

  흰 우유를 가득 싣고 달리는 자전거에는 밀초 같은 심장이

  감청빛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는 레몬 같은 심장이

  탁탁, 어둠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두드려라

  모든 것들이여

  전봇대를 두드려 전나무를 만들고

  가로등을 두드려 꽃을 만들고

  폐가를 두드려 카페를 만들고

  불행을 두드려 사랑을 만들어라.

 

  그리하여

  더이상 두드릴 것이 없을 때

  나를 두드려

  더 먼 곳으로 가게 해다오.

 

  다시 나를 일으키는 불행이 있는 곳

  그래서 더 멋진

  천치 같은 행복이 있는 곳.

 

  그제서야

  천 개의 다리를 벗어버리고

  깃털처럼 고요히 차오를 듯 차오를 듯

  가라앉게 해다오.





지옥도(地獄圖) / 문석암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졌어 강물은 핏빛 흐르지도 않았어 해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허옇게 사위어갔어 우우 천산남로(天山南路)로 몰려가는 혼령을 보았어 길들은 길을 잃고 쓰러지고 아무리 태엽을 감아도 시계 따윈 움직이지 않았어 허공중에 걸린 숟가락이 달의 속을 파고 있었어 뇌수를 긁어내듯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삶을 송두리째 도려내고 있었어 머리를 붙안고 거리를 헤매다녔어 인적은 없었어 가는 곳마다 쥐들이 우글거렸어 나와 눈이 마주쳐도 도망가지 않았어 쥐가 내 집을 갉아먹고 있었어 내가 집이 되어 소리쳐 울었어 그러자 더 많은 쥐들이 몰려왔어 나는 도망쳤어 한참을 왔다고 생각해 뒤돌아보자 나보다 큰 쥐가 달려들었어 나는 쥐의 목구멍으로 빨려들었어 아아 한도끝도없이 떨어졌어 캄캄한 어둠 속이었어 누군가 노래를 불렀어 끔찍한, 소름끼치는 소리였어 시체가 나무에 붙어 말라가고 있었어 바람이 시체를 휘감자 두 눈을 부릅뜬 시체가 내는 소리였어 고목이 울부짖는 것 같은 그건 레퀴엠이었어 나는 시체의 두 눈을 감겨주고 싶었어 가까이 다가서자 시체가 벌떡 일어섰어 그리고 제 등에 박힌 도끼를 들어 도망치는 내 등에 꽂았어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핏빛 강물에 등을 비추자 도끼는 보이지 않고 날개가 돋아나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이미 날고 있었어 세상이 불타고 있었어 아니 다 타고 스러져가고 있었어 내가 살던 곳이 어디쯤일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애 그러다 그만 무엇엔가 부딪혀 떨어졌어 그건 아주 커다란 브라운관이었어 그 속에 수많은 혼령들이 불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눈을 감고 싶었지만 ‘눈을 감지 마라’ 누군가 말했어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수많은 영혼들이 낙엽처럼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보고 있어야만 했어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울고 있어야만 했어





봄의 인사 / 문석암



  푸르게 빗질하는 세월 앞에…… 고개 숙여 인사하네…… 아파트…… 계단…… 팬지꽃…… 민들레에게도…… 안녕…… 골목…… 모퉁이…… 검은 꼬리…… 감추는 겨울아…… 안녕…… 할머니 등에 업혀 잠든 아이…… 아이의 젖은 속눈썹에게도…… 안녕안녕…… 이웃의 낯선 문패…… 뒤꿈치 들고 선 후박나무…… 봄을 감고 오는…… 삽상한 제비의 날개…… 그 날개가 그리는 봄 하늘의 애처로움…… 그 아래…… 마분지 같은…… 시장 사람들…… 바다로 가지 못하는 붕어빵들…… 파…… 한 단 놓고…… 이정표처럼 조는 할머니…… 말간 접시를 파는 중년 사내…… 그 접시를…… 운명의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아낙들…… 통유리에 갇혀 사는…… 기쁨약국 약사…… 머리를 짚고…… 두통약을 사는 사람들…… 제일은행 유리문에 비친…… 파란 불을 기다리는…… 사람들…… 아아…… 산호 같은 봄나무들…… 온 골목을 뛰노는…… 봇물 같은 아이들…… 소리…… 그 소리를 안고…… 둥글게 구부러지는…… 아지랑이…… 온몸이…… 흙빛으로…… 멍들며 지는 백목련…… 그…… 그늘진…… 한 귀에도…… 나 야윈 손을…… 꺼내 흔드네……





제기(祭器) / 문석암


  울 함메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 놋그릇을 닦습니다 지푸라기에 기왓가루 묻혀 녹을 닦습니다 경인(庚寅)년 팔월 스물다섯 날 돌아간 할베 제(祭)를 기리기 위해 산에 들에 푸성귀 뜯어놓고 장에 북어 두어 마리 사다 놓고 팔십 평생을 구비구비 놋그릇에 실어 닦습니다 바람 한 점 없던 그 여름 만파창해(萬波滄海)를 끌고 온 바람이 골 깊은 주름살 속으로 스르릉 지나가고 늘어놓는 그릇마다 황금햇빛이 부서지고 차례차례 정한 음식이 담겨졌더랬죠 그래도 그중에서도 내가 젤루 좋아했던 것은 냉이콩국

  서른을 통과하며 내 몸이 놋그릇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닦지 않으면 푸르게 녹이 끼는…… 하나님, 내 죄는 무엇으로 다 씻을 수 있을까요 내 죄에 내가 눌려 기도하는 순간 놀라워라 녹은 떨어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몸 그리하여 이 빈 그릇에 담아야 할 것은 오직 헌신 경건 감사 같은 사랑의 말들뿐 어린 날 울 함메 놋그릇 닦듯 나 매일매일 자라는 내 안의 녹을 닦습니다 놋그릇처럼 무거워지는 몸을……





등대를 위하여 / 문석암


  별똥별

 

  무수한 별들이

  바닷속으로 떨어지던 유년 시절

  우리집보다 더 큰 별을 굴리며

  내 꿈속으로 들어오던

  예쁜 고래 한 마리

  

  서오능

 

  왜 사람들은 무덤으로 가는가

 

  둥근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들고

  둥근 원반을 날리며

  둥근 테이블에 앉아

  둥근 말들을 날려보내며

  둥근 왕릉 같은 평화에 기댄 사람들

 

  솔숲에 앉아

  둥글게 몸을 만 내가

  둥근 무덤 속을 들여다보네

 

  어린왕자

 

  너의 말은 얼마나 단순하고 정직했니

  사막 위의 별처럼

  방울뱀의 독(毒)처럼

   

  예수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던 그

 

  침묵으로 그린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달고 바다로 간다

   

  금붕어 꽃 새

 

  저녁이면

  하릴없이

  동네 어귀에 앉아

  바라보던

  집

  금붕어 꽃 새 있습니다

  그 집 앞

  늘 푸른 기운이 넘나들고

  지느러미를 단 사람들이

  입에 꽃을 물고 흘러가더라


※ 노트 주 : 작품 「등대를 위하여」의 소제목 글꼴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문과 소제목의 구분을 위하여 굵게 처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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