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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남극 / 조동범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거미집 / 조동범


  바람이 불 때마다 거미집이 출렁였다. 거미집 사이로 이슬이 두런거리고, 안개 속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미집. 나는 과수원의 언저리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동구 밖에는 첫차가 잠시 솟아오르다 사라졌고 무른 사과 몇 알이 비탈을 굴러갔다. 느티나무 기대 있던 입간판이 자꾸만 내 쪽으로 쓰러졌다. 마을을 향해 난 길에는 하우스용 비닐이 노랗게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몇 대의 버스가 승객을 기다리다 지쳐 돌아갔을까. 친구는 오지 않았다. 무채색 지붕 위로 천천히 저녁이 왔다. 거미가 내게 말했다. 친구는오지 않을 거야. 거미집을 향해 나는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러나 돌멩이만큼만 입을 벌려 돌멩이의 힘을 가늠해보는,


  구멍난 가슴 속의 거미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 조동범


  투명한 냉동고의 서늘함 속에 꽃잎처럼 피어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는 천천히 꽃잎을 지우고 있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은 무료하게 손톱을 만진다.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에선 빠른 템포의 음악만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판매원은 자신의 손을 뺨으로 가져간다. 냉동고의 서늘함이 판매원의 뺨 위에서 얼음처럼 부서진다. 냉동고에 손을 넣을 때마다 판매원은 살의를 감지한다. 냉동고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판매원은 생각한다. 마감을 넘긴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밤이 깊어질수록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더 밝고 서늘해져.

  거리의 사람들은 빠르게 심야로 흘러간다. 판매원의 좁은 미간이 예리한 주름을 만든다. 냉동고의 모서리에서 은빛 조각이 서늘하게 빛난다.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롭게 심야를 맞고 있는 중이다.

  평화롭게 심야가 다가오고,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로운 살의로 가득 찬다. 평화로운 살의를 가로질러 판매원은 냉동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냉동고에서 죽음. 판매원의 마지막 온기는 수증기를 만들어 냉동고의 덮개를 가린다. 판매원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냉동고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푸른 낯빛을 하고 서늘하게 누워 있는 판매원은 고요히 보인다.

  꺼지지 않는 간판만이 심야를 밝혀주는,

  은빛 조각 서늘하게 빛나던 심야 아이스크림 판매점,

  위로 하현달이 하늘을 가르고 있다.

  깊고깊은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





버거킹을 먹는 여자 / 조동범


그녀는 버거킹 마니아.

화창한 봄날 눈부시게 화장을 하고 버거킹으로 간다.

택시가 만들어주는 버거킹과의 거리

이십 분 내내 그녀는 버거킹만을 생각한다.

친구도 없는 외출.

버거킹은 그녀의 애인이다.

빛나는 바닥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햄버거 왕국.

그녀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버거킹을 기다린다.

드디어 버거킹이 등장한다.

그녀는 버거킹의 이미지를 먹는다.

버거킹의 간판을 먹고

빛나는 바닥을 먹고

화려한 네온 기둥,

화장실의 변기까지 먹어 삼킨다.

정오의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이미지를 구워 햄버거를 만든다.

버거킹의 시종들은 세련되고 친절하며

버거킹을 집어드는 그녀의 손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둘둘치킨 / 조동범


명동 둘둘치킨 앞에서 애인을 기다린다.

튀김닭 냄새가 자신의 영역을 그리는 둘둘치킨,

앞으로 퇴근하는 사람들 지나간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유리 너머의 닭을 바라본다.

오지 않는 애인.

튀김옷을 둘둘 말아 입은 닭들의 천국 안에는

몇 개의 만남과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서로 넘나드는 일도 없이.

경계는 늘 견고하다.

오지 않는 애인.

둘둘치킨의 네온이 켜진다.

닭들이 분주히 기름으로 들어간다.

몸 안의 수분이 빠져나가기 전에

경쾌하게 튀겨지는 닭,

오지 않는 애인.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서 시계를 본다.

뜨겁게 펼쳐지는 닭들의 천국 둘둘.

그곳으로 한 무리의 양복이 들어간다.

둘둘치킨 안에서 간간이 즐거운 폭죽이 터진다.

나는 둘둘의 경계 밖에 있다.

몇 개의 만남의 사소한 시비,

닭들의 죽음으로부터

비껴 있다.

오지 않는 애인,

을 기다린다.

둘둘 돌아가는 닭들의 천국,

지루한 닭들의 장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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